묵향 13권 3화 – 제2근위대의 출현
제2근위대의 출현
“헉헉헉~.”
혹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까해서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 오고 있었다. 다크는 이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멈춰 서서 숨 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숨이 가빠 온 것이 몇 년 만이었던가? 이 여자 애의 육체로 뒤바뀌었을 때, 한동안 나약한 육체로 인해 고통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힘을 되찾았을 때 이후로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두 번의 환골탈태를 거친 강력한 육체의 힘은 똑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 계집아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거기에다가 마나까지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순간 적으로는 수십 배 이상의 힘까지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마나를 쓸 수 없게 된 지금, 너무나 처량한 상태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헉헉, 젠장! 한동안 게으름을 부렸더니 그 덕을 톡톡히 보는군. 헉헉.”
다크는 아무리 뒤져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때는 아직까지 포위망이 느슨할 때 뚫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지 기 시작한다면 그 두께는 더욱 두꺼워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놈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 앞쪽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실내라서 바람이 불지 않았기에 바람 때문에 위치 선정에 신경 쓰는 성가신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차근차근 숨을 고르며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포위망이 완전해지면 놈들은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동안 기다리자 “삐이이익!”하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삑삑거리는 응답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저 앞쪽에 위치한 똥개들도 그 것에 답하듯 뭔가를 입에 물고 삐이익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내였기에 그들은 복도를 중심으로 천천히 앞으로 이동해 들어가면서 문을 만나면 두세 마리가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똥개들은 실 내의 수색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괜히 수색조가 나오기 전에 앞으로 나가게 되면 또 다른 문을 만나게 될 것이고, 또다시 병력을 분산해서 그 안에 투입해 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최대한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그들과 다크와의 거리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상대와의 거리가 약 10미터 정도로 좁아졌을 때, 그들은 또 다른 문을 만났고 세 마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리고 다크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일곱 마리. 처음에 서너 마리씩 보일 때 치고받는 편이 좋았을 텐데, 괜히 탈출할 곳을 찾는다고 싸우는 것을 회피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다크는 똥개들이 실내를 뒤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충 측정해 두었기에, 잠시 더 기다려서 수색조가 실내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돌진해 들어갔다. “삑삑삐이이익! 삑삑삐이이익!”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견인족이 동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다크는 상대의 지척까지 거리를 좁혔다. 남은 똥개들도 저마다 검을 뽑아 들고 상대 를 잡기 위한 준비 태세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크에게 매우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똥개들은 포로를 무조건 살아 있는 채로 잡아올 것을 명령받았지만, 다크는 똥개들을 살려 주건 죽이 건 보신탕을 끓여 먹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이었다.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다는 제약이 가해졌다고 하더라도, 일단 달릴 수 있고, 뛸 수 있고, 팔을 휘두를 수 있고, 또 손에 검을 쥘 수 있는 한 다크를 겨우 똥개 몇 마리가 사로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상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견인족들은 매우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두툼한 근육질을 가지고 있는 아주 강인한 족속이었다.
묘인족이나 호인족(虎人族) 등 고양이과(猫科) 수인족의 경우 덩치와 힘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고양이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매끄러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는 공 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견인족 같은 개과(科)는 그런 유연한 몸놀림보다는 강력한 힘과 초인적인 맷집으로 승부하는 족속들이었다. 정면으로 맞부딪쳤을 때는 어 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미꾸라지처럼 파고든 그녀를 잡는 데는 그러한 그들의 특성이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상대가 ‘죽여 주쇼하면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강한 팔 힘으로 검을 휘두 르면 소녀의 몸은 그대로 두 토막이 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망설임이 끝났을 때 요란한 개 잡는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컹!”
“캥!”
두 마리의 견인족이 다크의 검에 치명상을 입은 후에야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상대에 게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동료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상대는 미꾸라지 같은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동료들을 방패막이로 쓰 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놈을 생포하라는 명령이었다.
거기다가 세 마리는 실내를 수색하러 들어갔기에 동료들과의 합류가 아주 조금 늦었다. 수색조 세 마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두 마리는 확실히 저세상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고, 네 마리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완전한 제 실력을 낼 수 없었다. 거기에 셋이 더해져 봐야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었다. 또, 이곳 자체가 기나긴 복도를 통한 미로의 구조였기에 저쪽에 있는 아군들이 합류해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히힛! 아주 좋은 것을 발견했군. 그렇다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겠어.”
다크가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공격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부딪칠 때 똥개들이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싸우면 싸울수록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상대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혹 자신들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다크는 모든 똥개들을 처치한 후 싸우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금 암흑 속으로 달려갔다.
“아차! 늦었군.”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견인족들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녀를 붙잡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 는데, 도착하고 보니 이미 포위망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견인족 열 마리라면 웬만한 기사도 막을 수 있는데.. 그녀는 지금 마나가 봉인되어 기사급의 파워를 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중에 계급이 높은 듯한 기사가 우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추격도 중요했지만, 죽어 가는 견인족들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다. 견인족 한 마리 한 마리가 얼마짜리 인데…,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황궁 내에도 견인족은 통틀어 2백 마리도 안 된다. 그런 그들의 숫자가 줄어든 이유를 위에 보고해야만 할 것이고, 그 에 대한 문책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입맛이 쓴 생포 작전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놈은 빨리 보루로 호송해서 치료를 받게 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그놈을 추격한다.”
“옛.”
다크가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공격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부딪칠 때 똥개들이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싸우면 싸울수록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상대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혹 자신들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다크는 모든 똥개들을 처치한 후 싸우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금 암흑 속으로 달려갔다.
“아차! 늦었군.”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견인족들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녀를 붙잡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 는데, 도착하고 보니 이미 포위망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견인족 열 마리라면 웬만한 기사도 막을 수 있는데.. 그녀는 지금 마나가 봉인되어 기사급의 파워를 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중에 계급이 높은 듯한 기사가 우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추격도 중요했지만, 죽어 가는 견인족들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다. 견인족 한 마리 한 마리가 얼마짜리 인데…,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황궁 내에도 견인족은 통틀어 2백 마리도 안 된다. 그런 그들의 숫자가 줄어든 이유를 위에 보고해야만 할 것이고, 그 에 대한 문책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입맛이 쓴 생포 작전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놈은 빨리 보루로 호송해서 치료를 받게 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그놈을 추격한다.”
“옛!”
“병력을 좀 더 지원해 주십시오.”
“뭐라고?”
지오그네는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오기에 생포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올리려고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저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정말 저 기사 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상관의 눈초리가 아주 매서워지는 것을 포착한 기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견인족 30마리가 당했습니다.”
“뭐?”
“지하가 너무 넓어서 포위망을 구축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거기에다가 칼부림까지 해 대는 상대를 겨우 그 인원으로 생포해 오라는 것은 너무 무리하신 명령입니 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겨우 힘없는 계집애 하나 못 잡아온단 말이냐?”
상관의 질책에 기사는 묵묵부답으로 저항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아 보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 꼴을 보며 지오그네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었다. 이 렇게도 쓸 만한 놈이 없다니……. 그녀는 하마터면 자신이 내려가겠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자신이 내려가 봐야 바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탁 트인 공간도 아니고,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곳에 자신이 내려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견인족도 죽어 나가는 판에 공격 속도가 느린 마법사가 내려가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멀찍이서 막강한 마법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지하 궁전을 박살 내놨다는 것이 들통 나면, 그 녀를 잡고 못 잡고 간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전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경은 밑에 내려가서 일단 수색 작전을 잠시 중지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라고 전하게.”
“옛, 각하.”
“포로가 탈출했다고?”
“예, 전하. 긴급히 병력을 투입했사오나 견인족 30여 마리만 사상을 당했사옵니다.”
지오그네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지시를 내렸다. 예상외로 그녀의 목소리는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제2근위대를 비밀리에 투입해라. 그녀가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다고 해도, 생포하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닐 것이야.”
미네르바는 일부러 생포라는 단어에다가 힘을 줘서 말했다. 미네르바는 이미 일이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짐작했던 것이다. 견인족의 전투력은 매우 강력하다. 기 사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수련 기사 정도의 전투력은 지니고 있는 강인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생포하 라는 명령이 떨어진 이상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덤비지 않는 한 잡기 힘든 상대임을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제2근위대 전원에게 전해라. 포로의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마음껏 싸우라고 말이야. 대신 빨리 잡아서 끌고 오라고 해.”
“하지만 전하, 그렇게 지시했다가 큰 상처라도 입히면 어떻게 하옵니까?”
다급한 지오그네의 조언에 미네르바는 의미 있는 미소를 씩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때는 자네가 목숨을 걸고 살려 내야겠지. 안 그런가?”
“예, 전하.”
지오그네는 미네르바의 말에 얼굴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지만, 일단 상관의 물음에 대답은 했다. 너무나도 심한 상처라면 자신의 마법 실력으로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단 대답을 한 이유는 제2근위대에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휴식 중이었던 제2근위대에 비상소집령이 비밀리에 내려지고, 기사들이 하나 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비번이라서 술집에 처박혀 있던 인물들이나, 오 랜만에 애인이나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인물들도 있었고, 또 친구들과 취미 생활을 즐기던 인물들도 있었기에 모든 인원을 소집해 들이는 데는 시간이 조 금 걸렸다.
“무슨 일이야? 비밀 소집령이 내려지다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마법사들이 빠진 것을 보니 어디에 파견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기사들만 모아서 뭐 하자는 거지?”
나지막한 어조로 서로가 아는 정보를 교환하는 기사들. 제2근위대의 오너급 기사 20명과 정찰조 20명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기다리라는 지시뿐이었으니, 기다림 에 지쳐 저마다 쑤군댈 만도 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소집한 것이 아닌가?
모두들 갑자기 소집되어 와서 그런지 행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냥복을 입고 있는 기사부터 시작해서, 데이트 중이었는지 연미복으로 정장을 한 인물들, 그리고 일부는 입에서 술 냄새까지 팍팍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 기사가 도착한 후에 지오그네가 슬며시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잡담을 멈췄다. 지오그네는 득실대는 엘프들 덕분에 크루마 궁정 마법사들 중에서 서열이 그렇게 높지 못했지만, 총사령관이자 근위 기사단장인 미네르바의 심복이었기에 그녀를 통해 종종 지시가 내려졌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기에 모처럼 휴식을 즐기고 있던 경들을 불러내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오그네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브랜트 베리어스 후작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어조로 경칭을 사용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랜트는 드래곤 슬레이 어였던 타론이 전사한 후 제2근위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부하에게 집합 대상에 그를 빼라고 지시했었는데, 아마도 근위 기사들 중 누군가에게 주워듣 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제2근위대장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영광스런 드래곤 슬레이어에다가 궁정 마법사라 하더라도 계급에서 밀렸다. 그 때문에 그를 뺀 것이었는데, 상대는 이미 와 버 렸으니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가라고 갈 사람도 아니었고….
“긴급한 사안이란 게 뭔가?”
제2근위대장인 브랜트는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툭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오 그네의 얼굴이 조금 더 찌그러들었다. 기사들에게 일장 훈시를 내린 후 투입 명령을 내릴 작정이었는데,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 수감 중이던 포로가 탈출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하 궁전에 숨어 있는 그 포로를 생포해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지오그네는 ‘생포’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끼리 다시금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수감 중이던 포로라면 지하 감옥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지하 궁전까지 숨어들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지하 궁전의 각 통로에 설치된 보루는 제1, 2근위대가 교대로 지키고 있지 않던가? 포로가 그 보루를 뚫고 통과했다 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해라. 여기가 선술집인 줄 아느냐?”
브랜트는 뒤를 슬쩍 보면서 짜증스레 외쳤다. 그도 부하들처럼 오랜만의 휴식이 물거품이 된 상태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와서 설명을 들 어 보니 자신이 올 일도 아닌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겨우 탈출한 포로 하나 잡자고 제2근위대 전체를 소환하다니! 자신이 지휘하는 제2근위대의 실력을 뭐로 보는 것인가? 그 때문에 그는 더욱 기분이 안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트는 지오그네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작 전하의 명령서는 가지고 있겠지?”
브랜트는 그녀가 감히 명령서도 없이 제2근위대를 소환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명령서 제시를 요구했다. 제2근위대장인 자신이 미네르바가 아 닌 마법사 따위에게 지시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지오그네에게 명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상대의 속셈을 잘 아는 지오그네는 소태 씹은 얼굴로 서 류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각하.”
브랜트는 앉은 채로 서류를 받아 들고는 꼼꼼히 읽어 봤다. 읽어 보니 지오그네의 말과는 약간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지오그네의 고의인지 아니면 실수인 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꽤나 마음에 드는 차이점이었다. 브랜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부하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공작 전하께서는 포로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반쯤 죽여 놔.”
안 그래도 소중한 휴식을 박탈당한 부하들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옛!”
“그리고 그 망할 포로 녀석을 최대한 빨리 내 앞에 대령해라. 알겠나?”
“옛! 각하!”
“그놈을 생포해 오는 놈에게 금화 20골드의 포상금과 선술집에서 동료들에게 술을 살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겨우 20골드 받아서 이 술고래들에게 술을 사 준다면 결국 포상금은 얼마 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대장의 말을 듣고 환호했다. 그렇게 작은 포상금을 제시한 것을 보면 휴식 시간을 날려 버린 부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 술자리의 술값을 대장이 내면서도 그 영광을 잡은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우와와앗!”
근위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 다퉈 우르르르 눈에 살기를 띤 채 지하 궁전 쪽으로 달려갔다. 지오그네는 ‘생포’를 원했지만, 자신들의 대장은 “반쯤 죽여 놓 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 말을 들어야 옳겠는가? 당연히 자신들의 대장 말을 들어야 한다. 또, 안 그래도 열 받는 김에 그들은 화풀이할 사냥감이 하나 생겼다고 좋아서 달려간 것이다. 그것을 보며 지오그네의 얼굴색은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이제 포로 체포 작전에 대한 지휘권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믿기에 지하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견인족 한 마리씩을 거느리고 흩어졌다. 그들은 견인족의 전투력이 아닌 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사가 50여 명이나 투입되었기에 토끼 사냥은 맹렬한 가속도를 붙이며 전개되었다. 이렇듯 맹렬히 뒤지는 상황에서 아무리 지하 공간이 넓다고 하지만, 다크가 계속적으로 몸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튕겼다. 다크가 숨어 있다가 일격을 날렸지만, 상대 또한 노련한 기사답게 여유 있게 검으로 막았다. 이미 견인족이 냄새로 상대 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줬기에,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여기 숨어 있었군.”
다크는 기습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사는 이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포로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는 견인족이 동료를 불러 모으기 위해 불어 대는 호각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이거 순 꼬맹이 아냐?”
기사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계집애를 잡기 위해 제2근위대를 총출동시키다니……. 얼마나 윗사람들이 제2근위대를 만만하게 봤으면 이딴 일을 시키겠느 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인원을 투입한 것을 보면 이 꼬맹이가 뭔가 한가락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사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공격을 슬쩍 던졌다. 기사의 검이 아름다운 은빛 궤적을 남기며 소녀의 눈앞을 통과했다. 물론 처음부터 소녀의 눈이나 기타 딴 곳을 공격할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 라 기선 제압 및 상대의 대응 행동을 관찰하기 위한 허위 공격이었다.
그 기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검술 대결은 다크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상대의 속셈을 빤히 아는 이 음흉하신 다크 어르신은 상대의 검이 눈앞을 통과하기 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그것을 눈치 챈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폴짝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본 기사는 이 꼬맹이가 진짜로 검술에 있어서는 맹탕이라고 단정 지 어 버렸다. 자신의 검이 지나간 다음에야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기사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일격에 꼬맹이를 제압하겠다는 듯 큰 기술을 휘둘러 왔다. 그리고 노련한 다크의 숙련된 눈은 그 기술의 숨겨진 허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그러나 다크는 상대의 허점을 눈으로는 찾아냈지만, 자신의 육체가 그 허점을 재빨리 공격할 정도로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 러 허둥거리면서 엉뚱한 방향을 막는 척했다. 기사는 자신의 검이 흘러가는 방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딴 방향으로 느지막이 검을 움직이는 소녀를 완전히 얕 잡아보고는,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끝까지 검술을 밀어붙이려고 들었다.
목표는 지금 흘러가는 검의 방향과는 달리 상대의 오른쪽 어깨였다. 어깨에 검상을 입으면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취한 공격이었다. 기사의 검 이 아주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다크의 어깨를 관통하려는 그 순간 다크의 어깨가 아래로 푹 꺼지며, 동시에 여태껏 기사의 검로도 찾지 못하고 허둥대던 것처럼 보 였던 다크의 검은 어느새 조금 더 움직여 상대의 오른편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크윽!”
요란하게 호각을 불며 동료들을 모으고 있던 견인족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기사가 검상을 입고 비틀비틀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기사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돌진 해 들어왔다. 삽시간에 검을 뽑아 들며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견인족의 위용은 과연 대단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것은 불을 좇아 뛰어드는 불나방의 행동과 다를 것 없게 느껴졌다. 다크는 일부러 견인족이 휘두르는 검 끝에 자신의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생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견인족은 놀라서 황급히 검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순간 다크의 검이 견인족의 가슴을 관통해서 심장 깊숙이 꿰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헤헤헷!”
다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꺽꺽거리고 있는 견인족의 몸통을 힘껏 차서 뒤로 밀어 버리며 검을 뽑아냈다. 다크의 검이 뽑힌 곳에서는 분수 와도 같이 피가 솟구쳐 올랐다. 다크는 피 묻은 검을 들고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돌아섰다.
거기에는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다가 도리어 깊은 검상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기사가 경악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다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견인 족이 호각을 불기는 했지만, 또 다른 견인족이 이곳까지 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크는 그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지라, 이 기사 놈까지 해치운 후에 달아나기로 작정했다.
“잠깐!”
다크는 갑자기 들려온 또 하나의 목소리에 멈칫 해서는 뒤로 슬그머니 돌아봤다. 그녀의 등 뒤에는 또 다른 기사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 녀석 또한 견인족 한 마 리를 뒤에 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견인족들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들이 투입된 것이다. 다크는 괜히 여 기에서 지체했다고 후회하며 다시금 검을 앞으로 들이밀어 방어 자세를 잡았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워렌은 중얼거렸다. 워렌은 일부러 검을 슬슬 돌리면서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계집애를 얕잡아보고 덤비다가 상처를 입다니. 아직도 미숙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지. 나는 밀러 처럼 몸과 마음이 약하지 않거든.”
워렌은 빈정거리듯 부드럽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거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반항하면 반쯤 죽여 놓을 거야. 어떻게 할 거냐? 빨리 선택햇!”
다크는 바짝 긴장하며 검을 중단으로 올린 후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저런 뛰어난 놈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가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공격하는 틈을 노린다면 방금 전 밀러라는 놈이 당했듯이 가능성은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있었다.
미숙하다는 질책에 밀러는 도와주지 말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상관에게 조언을 안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부상자가 또 한 명 더 생길 것은 자명 한 노릇이 아닌가? 양심이 아무래도 간질간질했던 밀러는 퉁명스레 말했다.
“워렌 경, 저 계집을 조심하십시오. 보통 실력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워렌은 상대가 저항할 의사를 확실히 해 오자, 밀러의 조언에 퉁명스레 대꾸한 것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레 상대하기 시작했다. 밀러도 수준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듀에이트급이었다. 그런 그가 당한 것을 보면 뭔가 숨겨 놓은 한 수가 있는 듯했다.
워렌이 처음 날린 검의 방향도 밀러처럼 상대의 얼굴이었다. 원래 이렇게 반반한 계집애들의 경우 자신의 얼굴을 끔찍하게 아끼니까 선택한 목표였다. 워렌의 검 이 날아간 순간, 다크의 검은 살짝 위로 들려졌다. 저 옆에 있는 기사 놈이 조언을 해 줬으니 이번에는 연약한 척 속이기 힘들 것이 분명했기에 다크는 처음부터 대 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대로 검을 그었을 때 상대의 얼굴도 절단이 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목도 함께 날아간다는 것을 워렌은 즉각 눈치 챘다. 그렇다고 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맹 렬히 휘두르는 기세 때문에 멈추기도 쉽지 않으려니와 그동안에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워렌은 검을 계속 휘두르면서 손을 살짝 안으로 당겼다. 그에 따라 워렌의 검이 그리고 있던 궤도 또한 약간 수정되었다. 이번 목표는 상대가 쥐고 있는 검의 측면 이었다. 이때 다크는 살짝 손목을 움직여 검신을 옆으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챙’하는 소리가 울렸다. 워렌의 롱 소드는 의도와 달리 미들 소드를 박살 내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부딪치며 튕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크의 검이 옆으로 누운 채 앞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헉!”
워렌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잘못하면 배에 구멍이 뚫릴 뻔한 것이다.
“이런 망할 계집애가?”
콩알만 한 계집애에게 조롱을 당했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술에 취해서 조금 벌겋던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그리고 옆에는 방금 전에 그가 미숙하다고 욕까지 한 밀 러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경질 난 김에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그들의 격투를 지켜보던 견인족은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건물 밖으로 달려 나 간 후 호각(號角)을 불기 시작했다.
“삑삑삐이이익! 삑삑삐이이익!”
견인족이 호각을 얼마 불지도 않아 기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밀러를 안내하던 견인족이 이미 호각을 불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 다퉈 실내로 들어선 후 안의 광 경을 보고 놀랐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견인족이 큰 대(大)자로 뻗어 있었고, 밀러는 동료들을 보고는 고통을 참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걸어 나왔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샘솟듯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내의 중앙에서는 신호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워렌과 포로 간의 대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워렌은 상당한 검술 실력을 지닌 오너급 그래듀에이트였다. 그런 그가 한낱 계집애를 상대로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그의 얼굴 한쪽에는 살짝 칼에 긁 힌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고, 옷의 여기저기가 조금씩 잘려 있었다. 아무리 그가 술에 취해 있다고 하지만, 동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 경이었다.
“으아아아! 죽여 버릴 테닷!”
자신이 아무리 검을 휘둘러 대도 상대의 검은 정말 머리꼭지가 돌 정도로 얄밉게 움직이며 방어와 공격을 병행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으니 조금씩 살짝살짝 움직이면서 워렌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워렌 또한 대단한 실력자이니만큼, 상대 검 끝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고, 상대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휘둘러 대다 보니 상대는 거의 검을 안 움직이는데 비해, 워렌은 아예 혼자서 칼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상대의 검이 이때라는 듯 그 틈을 노리고 들어와서 작은 상처들을 안겨 줬 다.
여태껏 벌여 놓은 자신의 추태(?)가 수많은 동료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드디어 워렌은 이성을 잃었다. 이제 계집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어졌다. 자 신에게 이런 치욕을 선사한 계집을 토막토막 잘라 놓고 싶을 뿐이었다.
워렌의 롱 소드에 마나가 한껏 주입되자 제법 두터운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치듯 떨리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워렌이 무슨 짓을 하려고 드는지 눈치 챈 동료들은 기절할 듯이 놀라서 외쳤다. 포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생포해야 하는 것이다. 저런 기세라면 생포는 고사하고 온전한 시체도 건지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워렌! 안 돼!”
하지만 이미 분노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워렌에게 그딴 소리는 들려오지도 않았다. 이 좁은 실내에서 절정의 검술을 사용한다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검기 때 문에 건물이 내려앉을 수도 있었고, 사방에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로를 생포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검법이 끝났 을 때쯤 그의 눈앞에는 아마도 조각조각 잘려진 고깃덩이만이 존재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그에게 그런 하찮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크는 상대의 눈,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나서야 검은 따라서 움직이니까 검의 움직임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방금 전 까지는 상대방의 검이 움직이는 1미터라는 간격(間隔)까지 생각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상대가 검기나 검강을 쓰려고 작정한 이상, 간격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검술의 진로에 따라 사방으로 검기가 뿌려지는 가운데, 다크는 상대의 검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검의 예상 경로에서 살 짝 뒤로 몸을 빼던 것이, 이번에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야 했다. 왜냐하면 그쪽으로 검기의 덩어리가 지나가니까 말이다. 그런 후 다크는 여태껏 그렇게 해 왔듯 검술 의 고수만이 가지고 있는 예리한 안목으로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어 주저하지 않고 거기에 검을 쑤셔 넣었다.
이렇듯 적이 고급 검술을 쓰건 그렇지 않건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다크에게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신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워렌에게는 엄청난 차 이가 있었다. 그냥 휘두르는 상황이었다면 상대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최대한 마나를 끌어올려 고급 검법을 가동하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
랐다. 상대의 검이 쓱 들어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남은 것은 둘 중 하나의 선택뿐이었다. 일단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의 흐름을 강제적으로 멈추고 뒤로 빠 지든지, 아니면 그대로 곧이곧대로 검을 휘두르고는 한 칼 맞든지.
사방에 뿌려지는 검기 때문에 기겁을 한 동료들은 저마다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저 검기에 휩쓸리면 목숨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방심하지 않고 대비 를 하는 가운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사방의 벽이 먼지를 뿜어내며 검기가 뿌려진 기나긴 흔적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갑자기 워렌이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런 후 술기운과 분노 때문에 벌겋던 워렌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우웨에엑!”
갑자기 피를 토하는 워렌. 일단 급속도로 돌기 시작한 마나를 강제적으로 멈추면서 크게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왜 갑자기 워렌이 피를 토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부상을 당한 워렌을 구출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두 명의 기사가 달려 들어가 또다시 소녀를 상대하는 동안, 또 다른 기사 두 명이 워렌을 구출해서 끌고 나왔다. 안에서 워렌이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면서 여 태껏 문 앞에서 와글거리던 기사들과 견인족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 줬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호기 심을 불태우고 있던 샤트란 페르가 들어섰다.
“저… 저건?”
샤트란 페르는 경악했다.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포로는 꿈에 나올까 무섭던 바로 그녀였다. 이 시대 최강의 검객이자, 스펜을 죽인 원수! 처음 그녀라는 것을 알 자마자 샤트란은 재빨리 도망치려고 했다. 상대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동료들에게 가로막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 다. 1백여 명이나 되는 기사들과 견인족들이 문을 중심으로 우글대고 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샤트란은 남아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아 검을 뽑아 들며 적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누구도 그녀를 공격하는 사 람은 없었다.
“샤트란, 갑자기 왜 그래? 너도 몸이 근질근질하냐?”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까지 끼어들 틈이 없어.”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좁은 실내에서 포로와 기사 둘이서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은 원기왕성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소녀 는 헉헉거리며 이리저리 회피 동작을 하면서 살짝살짝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샤트란 페르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겨우 저 정도 기사 둘을 상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니 말이다. 이때 그녀는 다크의 손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 다. 샤트란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샤트란은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봐! 큰 기술을 쓰지 말고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
“뭐?”
“아무리 미들 소드라도 무겁잖아. 그 계집애의 힘을 빼란 말이야.”
샤트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의 검술이 예상보다 훨씬 정밀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에 놀라고 있었지만, 일단 상대는 장시간 싸울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벌써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지 않은가? 그들은 그때부터 큰 기술을 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방어에 힘을 쓰며 장기전(長期戰)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