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8화 – 등잔 밑이 어둡다
등잔 밑이 어둡다
“뭐야! 나보고 신관 나부랭이가 되라고?”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저씨의 미모는…….?
라나는 아무래도 아저씨라는 단어를 붙인 상태에서 ‘미모’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이 조금 어색했는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수정했다.
“아무래도 지금 얼굴로는 아무리 변장해도 곧장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무녀로 변장을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한참 궁리를 하던 다크, 힘이 제대로 돌아온 상태라면 구태여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는 가? 무녀들은 모두들 미인들이니만큼 무녀로 변장하는 게 가장 그럴듯할 것은 분명했다. 그것을 잘 알기에 다크는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이것을 입으세요. 오늘 낮에 구해 온 겁니다.”
라나는 자신의 짐 보따리를 뒤진 후 무녀복을 건네줬다. 하지만 그 무녀복은 라나의 옷과는 생긴 것도 조금 달랐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문양도 달랐다.
“이건 뭐지? 네가 입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 예. 이것은 대지의 여신 케레스를 모시는 무녀들이 입는 옷입니다. 아데나를 모시는 무녀들은 아주 드물기에 아무래도 위장을 하기에는 조금 안 좋다고 봐야 하겠죠.”
무녀들이 호신용으로 검을 차고 다니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다크는 서둘러 무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검을 찼다. 그런 다음 겉옷인 헐렁한 로브를 걸 쳤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자 다크는 흔히 볼 수 있는 무녀의 모습이 되었다.
그에 비해 라나는 무녀의 옷을 벗은 후 날렵한 수렵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몸에 꽉 끼는 가죽 바지와 가죽 재킷을 걸친 후 그 위에 약간 얇아 보이는 가죽으로 된 갑 옷의 상의를 걸쳤다. 그것을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다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봐, 나한테는 이따위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게 하고 너는 뭘 입고 있는 거야? 그거 빨리 벗어서 나한테 내놔.”
“그건 곤란합니다, 아저씨. 저는 아데나의 무녀이기에 케레스의 무녀복을 입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걸 입는 거죠.”
“네가 아까 말했잖아. 이 얼굴로는 뭐로 분장해도 힘들다고……. 그러면서 이 망할 무녀복을 권했잖아. 너도 나하고 똑같은 얼굴인데, 왜 나만 이 빌어먹을 옷을 입어야 하는 거야?”
“그건 아저씨한테만 통용되는 거였죠. 저는 엘프로 분장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다크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엘프? 그, 당나귀 귀를 가진 놈들 말이야?”
“예.”
라나는 조용히 신성 마법의 주문을 외워서 분장을 시작했다. 푸르게 빛을 뿜고 있는 그녀의 손이 쓱 훑고 지나가자 그녀의 귀는 아주 길고 끝이 뾰족해졌다.
“이건 신성 마법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저씨에게도 해 드리고 싶지만, 신앙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10분도 유지가 안 되거든요. 그렇다 고 제가 계속 주문을 외워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자, 가시죠.”
“케락스시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
“그것도 생각해 뒀습니다. 여행자 길드에 가 보면 코린트의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들과 뒤섞여서 이동한다면 손쉽게 케락스시를 벗 어날 수 있을 겁니다.”
다크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호오,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다크는 다시 한 번 찬찬히 라나를 바라봤다. 과연 10년이라는 세월은 무서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라나와 탈출을 하는 동안 여태껏 쌓 여 있던 서로 간의 두터운 벽이 약간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벽은 다크가 일방적으로 쌓아 둔 것이었지만.
대단한 미모에 완벽한 무녀의 복장,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무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무녀의 복장을 하기는 했지만, 미모가 받쳐 주지 않았다면 모두들 가짜 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중간 중간에 서 있는 검문소에서도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따위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녀와 함께 지나가는 엘프 여성은 엄청난 미모에다가 뾰족한 귀, 늘씬한 몸매하며… 누가 봐도 엘프가 아닌가? 알카사스에서는 엘프를 노예로 사용하기에 혹시나 도망친 엘프가 아닌가하여
신분 확인을 하겠지만, 여기는 코린트였다.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신관, 특히 아데나 신전의 무녀를 중점적으로 색출하여 ‘라나 슈바이텐베르크’라는 무녀를 잡아들이기 위해 수도권 일대의 검문검색이 강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일행도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 일행의 신분에 대한 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명령서에 따르 면 그녀는 주로 아데나 신전의 무녀로 분장하고 돌아다니지만 사실은 밀수, 사기, 강도, 강간, 납치, 인신매매 따위의 매우 추잡한 범죄를 저질러 대고 있는 ‘푸른 표 범’이라는 강도 패거리 두목의 정부(情婦)라고 되어 있었다. 대단한 미모에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과거에 진짜 무녀였던 적이 있었기에 상당한 수 준의 신성 마법까지 쓸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당부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정체가 발각되자 케락스시를 탈출하여 패거리와 합류하기 위해 도주 중인 상태이 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체포하라는 지시였다.
원래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총사령부에서 내려온 지시 자체가 이렇게 엉터리였으니, 그 밑에서 일하는 병사들도 엉터리로 움직일 수밖 에 없었다. 케락스에서 탈출하는 도둑의 정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상대의 생김새라든지 기타 모든 것은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케락스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검색은 철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반대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 조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망할 공문 덕분에 케락스 시외 로 나가려고 하던 각 종파의 무녀를 포함한 ‘금발의 미녀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또, 생사람 잡는 모양이군.”
아닌 게 아니라 검문소 쪽에 거의 20여 명의 병사들이 늘어서서 무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협조해 주십시오.”
병사들이 무기를 겨눈 채로 협조해 달라니……. 일단 이런 일을 당해 보면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당한 듯한 무녀의 떨떠름하고 묘한 표정, 불꽃 문양 이 그려진 무녀복치고는 비교적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는 무녀였다. 무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로브의 모자를 뒤로 젖혔다. 저 지휘관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 으니까 말이다. 괜히 병사들하고 드잡이질을 해 봐야 좋을 것이 없으므로 무녀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깊숙한 로브에 감춰져 있던 탐스런 금발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수도 생활에 거추장스러웠던지 짧게 자르기는 했지만 아무튼 ‘금발’이었다.
“역시, 금발이군요.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무녀는 당황해서 외쳤다.
“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금발인 것도 죄인가요? 무언가 착오가…….?”
“무녀님 말씀대로 죄가 없으시다면 결국은 무죄가 입증될 겁니다. 저희들은 무녀로 위장한 죄수들을 체포하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그 도망자는 금발에 무녀라 는 것밖에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자, 협조해 주시죠.”
“무녀로 위장했다면 신성 마법을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거로 하면 안 될까요?”
“범인 또한 예전에 무녀였기에 약간의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곳 검문소의 지휘관은 무녀에게 상당히 정중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전에 봤던 검문소의 지휘관은 매우 강압적으로 나갔다가 호된 전투를 치르지 않았던가? 무녀와 그 일행이 반항을 시작하자 사방에서 구원하기 위해 병사들이 달려들어 왔고, 결국은 여러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패싸움으로 발전했다. 결국 그들 의 반항은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출동해 온 기사가 도착한 후 종말을 맺었다. 두 명의 기사는 반항하는 그들을 거의 개 패듯이 팬 다음 꽁꽁 묶어서 질질 끌고 가 버렸었다.
다크의 의문점을 알아본 듯 라나가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였다.
“저 무녀는 아레스를 모시는 무녀입니다. 코린트가 가장 숭배하는 신이 아레스인 만큼 병사들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지요.”
“역시 모든 것에는 차별이 없을 수가 없군.”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의 처녀들 또한 무녀의 신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힘이 없는 그녀들은 아예 저항조차 변변하게 못해 보고 튼튼해 보이는 죄수 수감용 마차에 실려서는 어딘가로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금발이라는 죄 아닌 죄로 끌려가는 그 무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케락스 시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은 거의 없었기에 그들은 쉽사리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병사들은 시외로 나가는 ‘금발 소녀’를 체포하는 작 업만 해도 힘겨운 실정이었기에, 시내로 들어오는 사람한테까지는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라나는 케락스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여행자 길드로 갔다. 아마도 케락스 외부로 나가는 것에 대한 검문검색을 아무리 강화해도 걸리는 것이 없으면, 그다음부터 시내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케락스시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라나는 앞서가다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여행자 길드입니다. 케락스는 아주 큰 도시이기 때문에 여행자 길드가 네 개씩이나 있다고 하더군요. 저것은 그중 남쪽에 있는 거죠. 남쪽으로 여행하기 위한 동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빨리 들어가서 동행할 만한 어수룩한 놈이 있는지 알아 보자.”
“예, 함께 가시죠.”
여행자 길드의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은 2층 건물이었다. 건물 내부의 벽에는 수많은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라나는 그 종이들을 샅샅이 읽어 나갔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하여 다크도 그 옆에 서서 그 종이에 쓰인 글을 읽어 봤다.
「11월 23일 아르곤 뮤크시를 향해 출발. 크루마령 쟈코니아 평원을 통과하여 오실롯 왕국을 거쳐 아르곤으로 입국 예정. 크루마를 거치게 되므로 크루마에 입국 금지된 분은 사절. 자세한 것은 안내원에게 문의 요망.」
「11월 15일 엔테미어 공국 렉슨시를 향해 출발.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는 크라레스를 피해서 발렌시노 산맥을 통과하여 쥬리오 왕국, 탄벤스 공국, 토리아 왕국 순 으로 이동할 예정. 자세한 것은 안내원에게 문의 요망.」
그것은 모두 각종 여행의 동반자들을 모집하는 광고들이었다.
라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것들을 읽더니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요즘 들어 남쪽에 몬스터들이 창궐한다는 소문은 들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지 크라레스 쪽으로 가는 여행객은 없네요.”
“그래도 코린트 남부에 가는 사람은 있을 거 아냐?”
“원래 여행자 길드라는 것은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산적이나 몬스터 따위에게서 몸을 지키기 위해 뭉쳐서 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자면 서로가 약 간씩 손해를 보더라도 출발 시간을 정하고, 또 그 일정을 정합니다. 하지만 코린트 국내의 경우 도로가 아주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가 요소요소에 병력들이 주둔하 고 있기에 치안 상태가 매우 좋다고 봐야 하겠죠. 물론 변경 지방에는 몬스터나 도둑들이 사는 곳도 있지만, 각종 물자들이 수송되는 도로망에 대한 경비는 철저합 니다. 그런 만큼 코린트 국내 여행객들의 경우 길드를 통해 동행자를 모집할 이유가 없죠. 여러 명이 서로의 편의를 존중해 주며 출발 시간이나 여행 경로를 정하는 것은 매우 성가신 작업일 테니까요.”
“호오, 그렇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여기는 일단 포기하고 딴 곳으로 가시죠.”
“어디로?”
“용병 길드요. 만약 몬스터가 창궐한다면 용병 길드에는 일거리가 있을 테니까요.”
“혹시 거기 신청하면 용병 사단이나 뭐 그런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냐?”
“아니, 그때 만난 후로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뭘 배우셨어요?”
기가 차다는 듯 라나가 물어 오자, 다크는 난처한 듯 얼버무렸다. 사실 이런 ‘서민’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특수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자신도 새삼 느꼈던 것이 다.
“글쎄…….?”
“용병 사단은 정규군이나 마찬가지예요. 몬스터 사냥 같은 일회용으로 모집하는 집단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규모의 산적들이 날뛴다든지, 몬스터들 몇 마리가 어 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때, 각 지방의 영주들은 치안 확보를 위해 그들을 토벌하게 되죠. 하지만 그들의 규모가 자신들이 거느린 사병들로는 제압하기가 조금 힘들고, 그렇다고 중앙에 정규군 파병을 요청하기에는 작은 규모일 때 일시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해서 해결하죠.”
“호오, 무녀가 그런 일들을 상세하게도 알고 있군.”
“전에 수련하면서 용병들과도 지냈기 때문입니다.”
“좋아, 그럼 그쪽으로 빨리 가자.”
용병 길드에는 남쪽으로 가는 일행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떠돌이 용병들이라는 것이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성업 중 일수록 그들도 덩달아서 일거리가 풍족 하게 늘어나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이다.
“흐음, 남쪽에서 일거리를 찾으신다구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매우 깐깐해 보이는 40대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용병 길드의 접수를 받는 사람으로서 온몸이 깡마른 것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라나는 예의 신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예.”
“여러 가지 일거리가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거리를 찾으십니까?”
라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 당신 같은 엘프라면 귀족 부인이나 딸의 경호 같은 따분하면서도 보수가 짭짤한 것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사냥이나 산적 토벌 같은 힘만 들고 보수는 별로인 것까지 다양하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라나는 저쪽에 서 있는 다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동행이 있어서 말이죠.”
“흐음… 무녀라, 얼굴이 너무 앳된 것 같은데, 혹시 신전에서 도망친 수련생이 아닙니까?”
수상쩍은 듯 눈길을 보내는 그녀를 향해 라나는 딱 잘라서 대답했다.
“결코 아닙니다. 아직 정식 무녀는 아니지만, 세상 경험을 시키기 위해서 허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의 보호자죠. 그녀가 있던 신전의 제사장과 친 분이 있었기에, 그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서 데리고 다니는 중입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사연은 이해하겠지만, 치료 마법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무녀를 고용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는 보수가 적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괜찮습니다. 목적은 세상 경험이니까요.”
“그런 각오라면 좋습니다. 아무래도 저 애송이 무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셔야 할 테니까 어렵거나 힘든 것은 무리겠군요.” “어떤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흐음… 어떤 일거리라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될 수 있다면 무녀 지망생과 함께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이 말씀이죠?”
“예.”
한참 궁리하던 그녀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두터운 책자를 이리저리 뒤져 본 후 말했다.
“마침 괜찮은 일거리가 있습니다. 드루이드 후작님의 영애(令愛 : 딸)께서 케락스에 쇼핑하러 오셨는데, 그분을 드루이드 성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일입니다. 물 론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호위병들을 여럿 거느리고 오셨으니 호위는 문제될 것이 없을 겁니다.”
상대의 말에 라나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용병 길드에 호위를 요청하신 거죠?”
“예, 사실 그분은 이번 나들이를 위한 일회용 호위병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분을 충성스럽게 모실 개인 호위병을 원하십니다. 그분의 우아한 취향에 어울리는 세련 되고, 품위 있는 여성 용병을 추천해 달라고 하더군요. 드루이드가 제법 큰 성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케락스보다는 촌구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도에서 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경호원을 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당신의 경우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품위 있는 언어를 구사하니 아마도 그분의 마음에 드실 것 같군요. 우선 그분을 드루이드까지 수행하세요. 그분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앞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될 겁니다.”
원래 엘프라고 해서 모두 다 품위 있는 행동거지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섬세하고 가녀린 몸매와는 달리 엘프는 숲 속에서 사는 매우 호전적 인 종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숲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유명했다. 그런데도 숲을 떠나서 이렇듯 세상을 떠돈다면 대부분 뭔가 사연이 있는 엘프들인 경우가 많았 고, 그만큼 성격은 더욱 모가 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출발은 언제인가요?”
“4일 후입니다.”
4일씩이나 이곳 케락스에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수색 방향을 케락스 내부로 돌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좀 더 빨리 떠날 수 있는 일거리는 없 나요?”하는 식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용병들의 경우 일거리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일거리의 위험 부담은 어느 정도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 각했다. 결코 시간 따위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라나는 최대한 표정이 변화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 말고 딴 일자리는 없나요?”
“글쎄요…….”
한참 책자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딴 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소녀를 데리고 함께 할 만큼 만만한 일거리는 없습니다. 일단 제가 권하는 것부터 한번 해 보시고, 정 안 되겠으면 그때 다 시 상의하기로 하죠.”
라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는 ‘루비의 눈’이라는 고급 호텔에 묵고 계십니다. 거기에 가서 드루이드 후작님의 집사를 찾으세요. 아니,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군요. 저를 따라오 “시죠.”
“예.”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예, 전하.”
제임스는 풀이 죽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검문검색 및 수색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어쩌면 빠져나갔을 수도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
레티안은 곰곰이 궁리를 해 보더니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잔꾀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되옵니다.”
“어떻게?”
“황궁에서 탈출한 후 곧장 시외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케락스시로 다시 돌아간 것이 아닐까요? 그녀가 탈출한 후, 저는 제임스 각하께서 도착하시는 시간 동안 수도방위사령부 예하의 모든 부대들을 동원하여 수도에서부터 반경 50킬로미터에 걸쳐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형성했사옵니다. 아무리 병사들이 투입되는 데 시간 이 걸렸다고 해도 마법사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추격하는 기사들을 따돌리면서 이동할 수는 없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보며 레티안은 말을 이었다.
“제한된 인력으로 시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무조건 압송하다 보니 시내로 흘러 들어오는 인구들에 대한 감시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상태이
옵니다. 그 점을 역으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서 경계가 허술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
여태껏 자신이 헛수고만 하고 있었다는 레티안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임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점을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레티안은 서로 간의 의견을 절충해서 또 다른 안을 내놓았다.
“그럴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각하. 그러니 더 이상 검문검색의 범위를 늘리지 말고, 지금까지 확보한 지역에 대한 철저한 수색 작전을 벌여 나가자는 것이옵니다. 케락스시 또한 그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했기에 제임스는 수긍했다. 현재의 인력으로 더 이상 수색 범위를 늘린다는 것은 힘들었다. 물론 여기저기에다가 병력을 보내 달라는 전문을 보내 놨지만, 그들이 도착하는 데 최소한 이틀은 필요했다.
“경의 말이 타당하겠군.”
제임스가 레티안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을 향해 물었다.
“수색 방법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일단 지금까지 확보하고 있는 지역을 1백 개 정도로 세분화시킨 후 숨기에 좋은 곳부터 우선적으로 철저히 수색해 나가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차츰 포위망을 케락스시 쪽으로 압축해 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가 잡힐 때까지 절대로 포위망을 풀어서는 안 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그녀가 경의 말대로 케락스시에 숨어 있다면 어떻게 하지? 적국의 이목이 있는데, 초상화를 곁들인 수배 전단을 뿌릴 수도 없지 않나?”
“당연하옵니다.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 전단을 뿌려 봐야 크루마에게 그녀를 놓쳤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밖에 안 되옵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체포 작전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