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화 – 철 좀 들어라, 아르티어스!

철 좀 들어라, 아르티어스!

크루마의 외딴 시골에 있는 한 작은 술집에는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했다. 겨울철 농한기도 아니어서 아직 술꾼들이 모여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렇듯 소란스러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초라한 술집에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일행이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이! 여기 술 가져와.”

팔시온이 술을 더 가져오라 주문하자, 미카엘도 자신의 잔을 단숨에 쭈욱 비운 후 ‘쾅’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으며 호쾌하게 외쳤다.

“야! 감질나게 잔으로 가져오지 말고 아예 술통째로 들고 와!”

미카엘이 큰 소리로 술을 통째로 가져오라고 시키자 다크는 잠시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미카엘은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던 것 이다. 팔시온 일행은 비록 구출되기는 했지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워낙 호되게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그 악몽 같은 기억들을 술로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 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충분히 그들의 심정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취하지도 않는데 좀 더 센 걸로 마시는 건 어때?”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팔시온이 좋아라 찬성하자, 다크는 점원을 향해 외쳤다.

“이런 맹물 같은 맥주 말고, 좀 더 화끈한 것 없어?”

다크의 말을 들은 점원은 어이가 없는지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콩알만 한 계집애가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끼어 초저녁부터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더 화끈한 술을 달라고 하다니. 게다가 반말을 찍찍 내갈기는 버르장머리 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다크를 쳐다보던 점원은 한쪽 구석 에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는 아르티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 꼬맹이가 잘도 마신다. 내가 아무리 이 짓을 해야 먹고산다고 해도 저런 애들한테까지 술을 팔아야 하나?”

점원은 문득 계집애들의 부모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만일 저 계집애들이 자기 딸들이었다면 아마 보는 즉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놨을 테니까 말이다. ‘어디 머 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들이 초저녁부터 술타령을 해? 벌써부터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망치며 살아야겠느냐!’라며 준엄하게 훈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점원이 었다.

하지만, 점원은 더 이상 잡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소녀의 옆에 앉아 있는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긁으며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야! 술 가져오란 말 안 들려?”

“예? 아, 예 손님.”

이때 아르티어스가 개운한 표정으로 쓱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 쭈욱 들이켠 뒤 통쾌하게 외쳤다.

“자, 모두들 고생 많았을 텐데, 한잔 쭉 마시고 훌훌 털어 버려. 오늘 내가 한턱 크게 쓰지.”

식당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뭔가 찜찜한 듯했었는데, 그가 이렇듯 활기차게 바뀐 것을 보고 미카엘은 팔시온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 다.

“변비가 있으신 모양이군. 화장실 다녀온 후에 표정이 완전히 바뀌신 걸 보면 말이야.”

평상시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할 미카엘이 아니었다. 악몽과도 같았던 크루마 감옥에서의 처절한 고문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긴장감이 풀린 상태에서 급하게 마신 술 탓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팔시온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크를 제외한 딴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르티어스는 결코 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르티어스가 깐깐한 성격에 유난히 깔끔을 떠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변비 어쩌구저쩌구하자 평상시 그의 근엄한 행동과 화장실에 앉아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겹치면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하하하하핫!”

한동안 배꼽이 빠지라고 웃어 대던 팔시온은 이윽고 정신을 차렸는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음! 꽤 덩어리가 컸던 모양이지?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걸 보면 말이야?”

미카엘과 팔시온이 키득거리며 이야기하자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술에 취한 그들의 목소리는 주변에 있 는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 상당히 컸다. 또한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하더라도 신의 영역에 도달해 있는 드래곤의 귀는 그들의 대화를 낱낱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예민했 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 녀석과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있는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 먹을 그러쥐며 다크에게 환한 웃음을 억지로 보냈다.

‘저놈의 시키들이 간뎅이가 부었나? 아주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군. 하루 날 잡아서 확실히 손 좀 봐 줘야지.’

팔시온의 말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르티어스를 훔쳐보고 있던 미디아는 그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환하게 웃자, 먹고 있던 돼지 뼈다귀를 팔시온에게 휙 던지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자식들은 꼭 뭐 먹고 있을 때 지저분한 소릴 하고 있어. 그리고 변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알아?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은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냐. 그런데 히히덕거리며 웃다니, 아주 나쁜 놈들이야. 그렇죠, 아르티어스 어르신?”

마치 ‘나 잘했죠’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미디아를 보고 아르티어스의 눈가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참자고 이를 악물었지만 도 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쾅!

이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술집의 문짝이 부서져 날아갔다. 모두들 무슨 일인가하여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잡티 하나 없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사내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그 사내는 미청년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생겼지만, 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사내는 단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자신을 막아서는 점원의 멱살을 잡아 가볍게 술집 한쪽 구석에 집어 던진 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았는지 순간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는 다크 일행이 앉아 있는 술자리로 험악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집 한 귀퉁이를 가루로 만들어? 그렇게도 죽고 싶냐?”

다크 일행은 감히 아르티어스에게 저딴 소리를 지껄인 사내를 보며 어이없어했다. 에인션트에 근접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죽고 싶냐고 협박을 하다니……. 저 사내 는 아르티어스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도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팔시온 일행은 자신들이 방금 지옥의 문턱까지 들어갔다 나온 것도 모르고 히죽히죽 웃으며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듯 좋아했다. 그들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아르티어스가 저 사내를 어떻게 박살 낼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일행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그의 어투로 보아 결코 마음이 상했다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여어! 너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있었냐?”

그 황금빛 머리카락의 젊은이는 아르티어스가 유들유들하게 대꾸하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소리쳤다.

“말 돌리지 마! 왜 내 집 한쪽을 작살냈냐구?”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는 하지만 내가 뭘 어쨌다고 이 난리야. 성질 돋우지 말고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자.”

아르티어스는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한 일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래서 계속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시침을 뚝 떼기로 했다. 하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금발의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까지 더듬어가며 말했다.

“이, 이 자식이, 이제는 발뺌까지? 파괴된 흔적만 봐도 누가 그랬는지 뻔하잖아. 진짜 너 죽을래?”

금발의 사내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주먹을 움켜지고 악을 쓰자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발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 드 래곤의 브레스는 특유의 정령력을 가지고 있다. 골드 드래곤스의 브레스는 ‘바람’의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파괴된 폐허를 보면 강대한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한 흔 적이 남는다. 그리고 현존하는 골드 드래곤들 중에서 브로마네스보다 강한 드래곤은 많지만, 그의 영토에 아무 말 없이 브레스를 뿜을 만큼 몰염치하면서도 간뎅이 가 부은 드래곤은 아르티어스 외에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하지만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표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아, 그래그래, 내가 그랬어. 네가 전에 그 밑쪽이 너무 시끄럽다고 투덜거렸잖아. 마침 나도 볼일이 있어서 그곳에 간 김에, 너 대신 그놈들 보고 앞으로 조용히 살라고 적당히 타일러 준 거야. 짜식이, 내가 수고해 줬으면 고마워하기는커녕 보자마자 성질을 내고 있어. 잔말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술이나 마시자.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거든. 히히히.”

“뭐야? 그딴 변명으로 얼렁뚱땅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적당히 타일렀다는 것이 완전 페허냐? 그리고 허락 없이 남의 영토에 침입했다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 야 한다는 율법은 알고 있겠지?”

큰 소리로 악을 쓰듯 말하던 금발 사내의 목소리가 점차 차갑게 바뀌자 주위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아르티어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까짓 도시 하나 날려 보낸 걸 가지고 이렇게 난리를 치다니, 저 자식이 약을 먹었나? 평소 금발 사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러다 다크가 눈치라도 채는 날이면 자 신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아르티어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아, 빨갱이. 너하고 나 사이에 무슨 얼어죽을 율법…….”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과 달리 아들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저런 식으로 눈빛이 회까닥 돈 아들놈은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사고를 치고는 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 는 다급하게 다크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벌써 그녀는 브로마네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버린 상태였다.

“이건 또 뭐야? 너 죽고…….”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브로마네스는 드래곤으로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왠지 모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브로마 네스는 즉시 뒤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광채가 브로마네스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의 목 언저리 부분으로 통과했다. 무섭도록 빠른 쾌검이었다.

“허억, 이, 이게 뭐야.”

다크는 그렇지 않아도 뭔가 화끈하게 화풀이를 할 만한 대상을 찾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난 뒤에 느껴지는 낯설기만 한 께름칙한 감정에 도무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자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뭔가에 몰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크루마로 온 것이 다. 빚을 갚는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기에 크루마의 수도에서 화끈한 한판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던 미네르바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 았다. ‘죽이려면 죽여라’하는 식으로 반항도 하지 않는 그녀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언짢아진 다크는 술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제물이 될 놈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아르티어스와 주고받는 말을 들어 보니 상대는 드래곤임에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아르티어스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니 금발 사내는 상당히 강한 놈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잊고 속 시원하게 한판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덤벼든 것이다. 다크는 이렇 게 해서라도 지금의 혼란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금발 사내 브로마네스로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상대의 검은 그 속도도 엄청났지만, 자신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마법 방어막을 간단하 게 찢어 버릴 정도로 그 위력 또한 엄청났기 때문이다.

“흥!”

다크는 콧방귀를 뀌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브로마네스는 물밀듯 흘러드는 다크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를 정도로 해괴한 움직임을 보이는 상대의 쾌검을 감만으로 피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이 날아가는 것이다.

계속 상대의 목만을 공격하던 다크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뒤에서 아르티어스가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았던 것이다.

“놔요. 저런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놈은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해요!”

순간적으로 기선을 제압당하고 정신없이 몰렸던 브로마네스는 다크의 공격이 한순간 멈추자 그때서야 마법을 사용할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의 양손 이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브로마네스도 검을 차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난생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준 강력한 검객을 상대로 검으로 드잡이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마법으로 승부하려는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준비가 갖춰지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브로마네스가 다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감히 내 목을 자르겠다고 까불다니. 우선 네년의 건방진 혓바닥부터 뽑아 버린 후 네 소원대로 모가지를 잘라 주마.”

아르티어스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그 둘의 중간에 급히 끼어들며 외쳤다.

“모두들 진정해. 브로마네스, 자네는 농담도 자리를 봐 가면서 해야지. 그리고 너도 이 아비의 얼굴을 봐서 좀 참거라.” 브로마네스는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흥! 자리를 봐가면서라니? 내가 호비트 계집 따위가 무서워서 할 말을 못할 줄 알았나?”

아르티어스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연신 뒤쪽을 향해 눈짓을 해 대며 말했다.

“이 아이가 아니라 저 뒤에 말이야.”

“뒤?”

브로마네스의 시선이 아르티어스의 눈짓을 따라 뒤쪽에 앉아 있는 인물들 쪽으로 향했다. 슬그머니 탁자 밑쪽으로 보이지 않게 검을 그러쥐고는 여차하면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앉아 있는 호비트 세 마리……. 그리고 형편없이 약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나약한 호비트 마법사 한 마리. 그러다가 브로마네스의 시선은 특이 한 기운이 느껴지는 호비트 소녀에게서 멈췄다. 아주 미약하지만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는 존재. 하지만 브로마네스가 지닌 그 엄청난 능력으로도 소녀가 가진 능 력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멀뚱히 소녀를 쳐다보다 브로마네스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저 소녀가 누구냐고 묻는 듯 아르티어스를 쳐다봤다.

<아버지야.>

순간, 자신만만하던 브로마네스의 얼굴이 갑자기 경악감으로 물들며 입이 떡 벌어졌다. 그때였다. 얌전히 앉아 포도주를 연신 홀짝이던 소녀가 한마디 한 것은. “오랜만이로구나. 이리 와서 한잔하지 않겠느냐?”

브로마네스는 감히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똥 씹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다가와서 자리에 앉았다. 브레스를 날린 놈이 아르티어스라는 것을 알자 마침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 싶어 달려온 건데 아르티엔이 있을 줄이야. 하여튼 저놈하고 어울려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왜 여기까지 찾아 왔을까, 통곡하고 싶어지는 브로마네스였다.

“어, 어르신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엔의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드는지 속마음과는 달리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만큼 아르티엔이란 이름이 주는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야, 저 말썽꾸러기만 조용히 있다면 안녕하지.”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의 괜한 트집에 발끈해서 맞받았다.

“누가 그렇게 말썽을 부렸다고 그래요?”

“훗, 그럼 내가 이 자리에서 네 녀석들 어렸을 때 한 해괴한 짓거리들을 나열해 볼까? 검술이랍시고 조금 배우자마자 둘이서 어울려 다니며 호비트를 쥐 잡듯이 잡 지 않나, 건방지다고 헤즐링들을 쥐어패 가지고 허구한 날 이웃 드래곤들에게 사과하러 다닌 것을 생각하면… 으이구, 속 터져!”

직격탄을 맞은 아르티어스의 입은 조개마냥 꽉 다물어져 버렸다. 저 노친네한테서 이 이상 이야기가 더 흘러나오면 자신의 모든 과거가 아들은 물론이고, 저쪽에 앉아 있는 호비트들에게까지 알려질 것이 아닌가? 그리고 두고두고 자신의 얘기를 하며 술안주로 씹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전 대륙에까지 소문이 퍼질 수도 있 는 노릇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에이, 어릴 때는 그러면서 크는 거잖아요, 뭐.”

“너는 닥치고 있어!”

아르티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포도주를 신경질적으로 벌컥 들이켰다. 하여간 이놈들만 만나면 지병인 두통이 도지는 듯했다. 사실 그 두통도 따지고 보면 이놈들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브로마네스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래, 요즘도 이 녀석하고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구나. 이제 네 녀석도 슬슬 철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에인션트가 다 되어 가는 놈들이 나잇값도 못하고, 쯧쯧.”

아르티엔에게 말대답을 하면 자신만 손해라고 속으로 되뇌며 브로마네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괜히 말대꾸 한번 잘못하면 몇 시간이 고 잔소리를 들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쭈? 이제는 아예 대답도 하기 싫다 이거냐?”

브로마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변명했다.

“그건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요즘 바쁘다구요. 오늘은 저 녀석이 근처에 온 것 같아서 얼굴이나 볼 겸 나왔을 뿐입니다.”

“그으래?”

아르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하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바쁘다고? 또 무슨 못된 궁리를 하고 있기에 바쁜 거냐? 네놈들 말썽 피운 것을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지겨워. 에잉! 쯧쯧.”

브로마네스는 두 손까지 내저으며 변명을 늘어놨다.

“절대로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개과천선했다구요. 과거를 훌훌 털어 버리는 의미에서 이사까지 했다니까요.”

“이사라고? 아! 그렇군. 네 녀석의 집은 코린트 쪽에 있었지 않았냐?”

“예, 그랬지요. 어르신도 이사를 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사하면 어디 할 일이 한두 가지입니까? 솜씨 있는 드워프도 잡아와야 하고, 집단장하는 것 감독도 해야 하고. 그래서 할 일이 많았단 말입니다. 아참, 이런이런,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친구 녀석이 왔기에 그냥 잠시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었는데……. 헤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거든요.”

헤픈 웃음을 흘리며 브로마네스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놔둘 아르티엔이 아니었다.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를 두고 겨우 얼굴 한 번 보인 다음 집단장한다고 도망치겠다 이거냐?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하기도 힘든데 말이 야. 그렇다고 네 녀석이 꼬박꼬박 인사를 올 놈은 절대로 아니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요. 집단장이 끝나고 나면 찾아뵙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인사를 드릴 작정이었다구요.”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물었다.

“저 녀석이 언제 이사했지?”

‘사실대로 말하면 죽을 줄 알아하는 브로마네스의 위협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아르티어스는 사실대로 말했다. 브로마네스가 언제 이사했는지는 수소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고, 거짓말했다가 들통 나면 자기만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 6년쯤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르티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이놈들한테 한두 번 당해 봤는가?

“6년이라고? 그렇다면 집단장이 끝나고도 남았을 텐데? 아니면 진짜로 게을러빠진 드워프들을 잡아왔던지……. 하지만 네놈은 드워프들이 태업을 하도록 그냥 놔둘 녀석도 아니잖느냐? 감히 누굴 속이려고 들어.”

브로마네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게 말입니다. 1차 공사는 끝났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허전하더라 이거죠.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다시금 2차 공사를 하고 있기에…, 에헤헤헤.” 브로마네스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타개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라는 족속 자체가 워낙 두뇌 회전이 빠르지 않은가? 그는 곧이어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참, 어르신께 드린다고 준비해 둔 것이 있는데요. 집단장이 끝난 후 찾아뵙고 드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브로마네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레어에 놔뒀던 포도주 한 상자를 술집으로 공간 이동시켰다. 희뿌연 빛이 번쩍하자 브로마네스의 손바닥 위에는 고 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그것을 아르티엔의 앞에다가 놓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속마음까지 호기로울 수 없었던 그의 미소는 약간 어색해 보였다.

“제가 어르신을 얼마나 흠모하는지 잘 아시고 계시잖습니까?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르티어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어르신을 뵈면 꼭 제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죠. 저희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깊은 도량과 사랑으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르신의 아들도 아닌 저에게 잘되라고 그렇게 훈계를 아끼시지 않으셨죠. 그때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르신의 말씀대로 제대로 한번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노력 중입니다. 오죽하면 새 집까지 구했겠습니까.”

브로마네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참 아부를 해 댄 후에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르티엔에게 가장 잘 통하는 무기는 무력 따위가 아닌 아부 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아부만이 살 길이었고,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 녀석아,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효도해라.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말이야.”

아르티엔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네가 이제야 철이 좀 든 모양이구나. 그런데 아르티어스는 언제 철이 들는지…, 쯧쯧.”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 몰래 브로마네스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너 죽을래? 왜 나를 걸고넘어져?>

브로마네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간절한 어조로 주절거렸다.

“저도 아르티어스를 보면 언제나 걱정입니다. 저 녀석을 볼 때마다 충고를 하지만 어디 제 말을 들어야 말이죠. 그렇다고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참, 이건 어르 신을 생각하며 다음에 뵈면 꼭 선물하겠다고 준비해 둔 겁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고풍스러운 문양이 아로새겨진 포도주 상자를 슬쩍 아르티엔 앞으로 밀어놓으며 브로마네스는 서둘러서 말을 이었다.

“저는 너무 바빠서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브로마네스는 행여 아르티엔이 자신을 잡을까 봐 재빨리 공간 이동해 버렸다.

포도주를 엄청 좋아하는 아르티엔은 일단 포도주 상자부터 재빨리 열어젖혔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브로마네스를 다시 잡아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기에 그가 허둥지둥 도망친 것에는 별로 신경도 안 썼다. 아르티엔은 아홉 병의 포도주들 중에서 한 병을 꺼내 들며 놀라서 말했다.

“아니, 이거 로얄 크루나 아냐? 이 귀한 술을 한 상자씩이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흘겨보며 한탄조로 주절거렸다.

“이놈아, 브로마네스를 좀 본받아라. 어릴 때는 말썽만 부리는가 싶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의젓해지지 않았냐? 으이구, 내 팔자야.”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아르티엔을 바라봤지만, 감히 대꾸는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는 로얄 크루나 한 상자를 보는 그 순간,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눈 치 챌 수 있었다. 아마도 6년쯤 전에 브로마네스가 이사했을 때, 레어를 방문하게 된 아르티어스와 나눠 먹으라고 미네르바가 브로마네스에게 건네줬을 것이다. 아 르티어스가 포도주를 좋아한다는 것을 미네르바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아르티어스가 브로마네스의 레어를 방문하는 조건으로 받은 것이 포도주 한 상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놈은 그 술이 아주 좋은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기 혼자 처먹으려고 꽁꽁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런 후 그놈은 차마 한 모금 마시 는 것도 아까워서 소중히 보관하다가 이번에 다급한 김에 아르티엔에게 넘긴 것이다. 하긴 나도 그놈의 술이 아무리 좋아도 안 먹고 말지. 아버지한테 한 2박 3일 정 도 잔소리 듣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나을 테니…….

아르티어스는 한 잔 마셔 보지도 못하고 소중히 모셔 뒀던 로얄 크루나를 포기한 브로마네스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자기를 걸고넘어진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르티어스는 심술 가득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혹시 그거 가짜 아닐까요? 내가 저놈을 잘 아는데요, 이렇게 좋은 술을 상자째로 줄 놈은 절대로 아니거든요.”

아르티엔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혹시 술에 뭔가 탔을지도 몰라요. 그놈 수법을 제가 잘 알거든요. 자기가 못 먹는 것에는 꼭 뭔 짓을 하거든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못된 심보를 가진 놈이 죠.”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으르렁거렸다.

“짜식이, 착한 브로마네스를 헐뜯고 있어.”

“틀림없다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버님을 대신해서 시음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열변을 토하며 은근슬쩍 포도주병으로 손을 뻗는 아르티어스. 그런 그를 아르티엔은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속 보인다, 이 녀석아. 한잔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딴청은…….”

왠지 아르티엔의 어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에서 만난 아들은 과거와 달리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아들의 진정한 마법 실력이 자신의 기대 이 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아르티엔은 아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들어 준 손자인지 손녀인지 헷갈리는 호비트 또한 싫지 않았다. 그 직선적인 성격이 아무리 봐도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제 말이 맞다니까요. 어이! 포도주잔 두 개 가져와!”

아르티어스가 은근슬쩍 자신도 한입 걸치기 위해 점원에게 외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팔시온이 은근슬쩍 다크에게 말했다.

“로얄 크루나? 우리도 같이 마셔 볼까? 아주 좋은 술인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 있던 얼큰하게 취한 미카엘이 점원에게 외쳤다.

“이봐! 여기 인원만큼 잔 더 가져와!”

비교적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인 미디아는 이 둘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얄 크루나가 어떤 술인가? 크루마의 황실을 위해 제조된 최고 급의 포도주.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대륙 최고의 술이 아닌가? 그렇기에 로얄 크루나라는 이름이 던져 주는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디아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슬쩍 다크를 팔고 넘어졌다. 아무리 무서운 아르티어스라고 해도 다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이봐 다크, 우리도 함께 마시는 게 어때?”

미디아의 말에 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지 뭐. 이봐, 빨리 잔 가져와.”

아르티어스는 팔시온 등을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다크가 찬성하고 나오자 눈초리를 내렸다. 저놈들이 아무리 버릇없이 나온다고 해도 아들을 방패막이로 쓴 이상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가슴속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놈들을 반드시 손봐 놓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다크와 팔시온 일행은 모두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두 드래곤은 차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 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뭐가 불만인지 팔시온 일행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저 쉐이들이! 나는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아까워서 입술만 적시고 있는데, 아예 쏟아 부어라, 부어! 술을 음미할 줄도 모르는 저런 무식한 것들에게 이런 고급술은 돼지 목에 진주야, 진주.’

얼큰하게 술에 취한 다크는 한 잔 쭉 들이켠 후 로얄 크루나를 다시 한 잔 따라서 아르티어스에게 권했다.

“아빠는 왜 안 드세요? 자, 한 잔 쭉 들이켜세요.”

“에구구구, 내 아들이지만 왜 이렇게 술 먹는 모습도 이쁜지. 술도 정말 화통하게 잘 마신다니까, 히히. 하지만 저 무식한 것들은 미친 듯이 퍼먹는 거지, 저게 마시 는 거야?”

술잔을 받아 쭈욱 들이켠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예뻐 못 견디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얘야, 왜 할아버지에게는 권하지 않는 거냐? 지금껏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할아버지한테는 말도 안 하고 술도 안 권하는데 왜 그러느냐? 좀 어색한 것 같 아서 보기에 안 좋구나.”

“아뇨.”

다크는 혀 꼬부라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게…, 도저히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말이죠. 아빠도 생각해 봐요. 저게 할아버지의 모습이냐구요.”

아르티엔의 현재 모습은 이제 겨우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드래곤처럼 취향에 따라 겉모습을 자주 바꾸는 종족이라면 으레 그렇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다크로서는 이런 일은 처음 당 해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약간 당황스러운 김에 그냥 무시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러니까 내 겉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구나.”

“아뇨, 그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뭐랄까…, 전혀 할아버지 같다는 느낌이 안 든다는 거죠. 할아버지라면 할아버지다워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르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떻게 생겨야 할아버지라는 거냐? 네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형을 한번 말해 봐라.”

“으음, 글쎄요. 일단 위엄이 있어야죠.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연장자의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 줄 것 같은 푸근한 느낌,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노련미가 있으면 더욱 좋죠. 주름도 조금 있으면 좋구요. 그리고 세월에 퇴색해 가는 오랜 상처의 흔적도 하나쯤 있으면 좋죠. 적당히 긴 수염, 그리고…….? 술에 취해 정신없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다크의 눈빛이 점차 꿈꾸는 듯 몽롱하게 변해 갔다. 그가 중얼거리는 할아버지의 이상형은 바로 사부 유백의 모습이었다. 그가 살아온 기나긴 인생에서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줬고, 또 모든 것을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승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던,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워낙 젊은 용모를 하고 있었기에 이상적인 할아버지의 상이 될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르티엔으로서는 다크가 말하는 할아버지의 인상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연장자의 느낌? 푸근함? 노련미와 적 당히 긴 수염 등등……. 이건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가?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아르티엔에게는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슬며시 주 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유백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주절대고 있는 다크의 머리 위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오호라, 바로 저 모습을 가져다가 저렇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로군.’

역시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아르티엔은 슬며시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내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꿔 주지. 어쨌든 유희를 즐기기로 한 이상 그 정도의 서비스는 해 줘야 하겠지.”

말을 마친 아르티엔의 모습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뭔가 빛이 확 뿜어 나온 후 그 빛이 사라지고 나니까 바뀌었더라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키 작은 소녀의 몸집이 점점 자라나고, 팽팽하던 피부가 약간 쭈글쭈글해지며 주름도 몇 겹 생겼다. 그리고 곧이어 수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커다랗던 소녀의 눈망 울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면서 평범한 크기로 돌아갔고, 오똑하던 코는 약간 낮아지면서 옆으로 슬쩍 퍼져 버렸다. 그리고 새하얗던 피부는 문어처럼 급격히 변색하 기 시작하더니 황갈색으로 바뀌었다. 변신에는 1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을 때 매우 신기한 듯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던 다크의 표 정이 변신이 완료되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윽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곧이어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 사부.”

물론 다크도 상대가 유백이 아니라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실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까지 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 던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또 임종을 도와 드리지도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가. 다크는 술까지 취한 상태였기에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아르티엔의 도움으로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부터 그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을 한꺼번에 되돌아보며 느꼈던 혼란, 후회 등등. 그 가 평범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것이 더욱 심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던 그에게 유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유백은 그가 최초로 인간의 정을 느꼈고,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눈앞에 있는 유백이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다크로서는 가짜라도 좋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그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 사부.

다크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아르티엔은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르티엔으로서는 유희로서의 할아버지 역을 했을 뿐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부가,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흑흑.”

급기야 다크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르티엔의 품에 안기어 오열하자,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가 곧이어 잔뜩 독 오른 독사마 냥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들놈이 언제 자신에게 저런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할수록 열 받는 일이었다. 어떻게 겉모습 하나 바꾼 것을 가지 고 저렇게까지 대접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아르티어스가 심통 궂은 어조로 아르티엔에게 항의하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놈들이 그의 분통을 더욱 터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휘익! 너무 감동적이야.”

팔시온과 미카엘이 술김에 휘파람까지 불어 대며 난리를 치는 가운데, 미디아도 두 손을 가슴에 대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겉모습이 우락부락한 무사라고 해도 그 녀 역시 여자인 것이다.

“왠지 가슴이 찡한 것 같아.”

한참을 오열하던 다크의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르티엔이 축 늘어져 있는 다크를 안고 일어섰다.

“너무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아서 내가 마법으로 재웠다. 얘는 내가 데려다가 눕힐 테니까 너희들은 좀 더 마시다가 오거라.”

아르티엔은 다크를 안고 나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남아 있던 로얄 크루나를 품속에 집어넣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르티엔이 다크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 을 지켜보며 아르티어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저 영감탱이의 노회한 술수에 아들을 뺏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아주 진하게 들었던 것이다. 이때 옆에서 팔시온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주절거렸다.

“어, 어~르신, 꺼억! 술이 없는뎁쇼.”

“뭣이! 이 새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