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4화 – 엘프 최강의 전사 카렐
엘프 최강의 전사 카렐
엄청난 드래곤의 존재감에 레어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던 키아드리아스는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키아드리아스는 곧 반갑지 않은 방문객을 볼 수 있었다. 순간 평온하던 키아드리아스의 얼굴이 소태를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곳에는 재수 없는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한 늙은이와 서 있는 것 이었다. 그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쌀쌀맞게 말했다.
“흥,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찾아온 거죠?”
“젠장, 겨우 날개 한 번 부쉈다고 너무 그러지 마.”
“뭐요, 겨우 날개 한 번? 정말 상종 못할 드래곤이군. 내가 당신의 날개를 부숴 볼까요? 그딴 소리가 나오는지…….”
적당히 달래서 넘어가려고 하던 아르티어스는 같잖게 보던 상대가 계속 강짜를 부리자, 성질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이게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너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냐?”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기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놈은 심심하면 애들을 괴롭히네. 너는 언제 철들래?”
그 장면을 키아드리아스는 황당한 듯 바라봤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있어서 저 개망나니 드래곤의 뒤통수를 태연히 갈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에이 씨, 아버지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이게 자꾸 까불잖아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너 정말 죽을래?”
인상을 확 구기며 아르티엔이 한쪽 손을 번쩍 들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비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키아드리아스는 ‘아버지’라는 말이 들리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말했다. “혹, 아르티엔 님 아니십니까?
“여, 정말 오랜만이군. 처음 봤을 때는 날개가 부러졌다고 징징 울고 짜고 하던 꼬질꼬질한 꼬맹이더니 그동안 많이 컸구먼.”
키아드리아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울고 짜고, 꼬질꼬질 꼬맹이? 빌어먹을! 꼭 표현을 해도 그딴 식으로 하다니!’
혹시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 은근히 주위를 살피는 키아드리아스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안녕히 지내셨는지요.”
“오냐오냐. 그래, 너도 잘 있었냐?”
“예.”
“그건 그렇고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르티엔은 자상한 눈길로 다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내 손자 녀석이 카렐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아르티엔의 말을 들은 키아드리아스는 왠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제 남편을…요? 무슨 일로 말입니까?”
이때 다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카렐과 전에 약속한 게 있거든. 그래서 약속을 지키러 왔어.”
다크의 말을 들은 키아드리아스는 내심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 그 애비나 아들이나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구만. 나이도 어린 게 계속 반말을 찍찍 내갈기고 있어.”
키아드리아스는 분을 삭이느라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제 남편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그쪽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다. 그럼 안내해.”
빙그레 웃으며 끝까지 반말을 해 키아드리아스의 복장을 뒤집는 다크였다.
다크 일행은 키아드리아스의 안내를 받아서 카렐의 집으로 갔다. 다크는 집 뒤쪽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카렐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 소리쳤다. “이봐, 카렐!”
카렐은 자신의 명상을 방해하는 인물이 누군가하여 눈을 살며시 떴다. 오랜만에 장시간 명상을 하기 위해 키아드리아스까지 레어로 돌려보냈는데 방해를 받자 약 간 짜증이 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부른 사람이 다크라는 것을 알자, 반가운 듯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여, 다크, 안녕.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리고 이쪽은…….”
“응, 할아버지셔.”
다크의 말을 보충하듯 키아드리아스는 카렐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골드 일족의 최고 연장자인 데다가, 아주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존재니까 조심하세요.>
“아, 그래.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렐 아미타유스라고 합니다.”
골드 일족의 최고 연장자라는 말에 카렐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이채롭다는 듯 살그머니 상대를 관찰했다. 아르티엔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 엘프의 이단아라는 카렐이로군. 만나서 반갑네.”
“예, 안으로 드시지요. 차라도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아침 다크와 카렐이 검술 시합을 벌이겠다며 나가자, 키아드리아스는 연인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그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들 화끈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서 따라 나섰다. 아르티엔은 누가 이기든 오랜만에 보는 싸움 구경에 관심이 있었고, 아르티어스는 꼴 보기 싫었던 건방진 키아 드리아스의 남편이 자신의 아들에게 박살 나는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카렐의 말에 다크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황금빛 찬란한 검신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후 고개를 끄덕여 상대에 대한 경의를 표한 후 천천히 기를 집중하기 시작 했다. 둘 다 대륙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인물들끼리의 싸움이었기에, 처음은 상대에 대한 탐색전으로 시작되었다. 서로의 검이 불타오르는 듯한 광채를 뿜 어내며 대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둘의 치열한 접전을 지켜보던 아르티엔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와우, 저게 뭐냐? 화려한 것 하면 마법인 줄 알았더니, 검술이라는 것도 연출 효과가 대단한데?” 아르티어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글쎄 말입니다. 쇠막대기 가지고 하는 체조도 상당히 볼 만하죠?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요.”
히히덕거리면서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두 고수는 점점 더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그 둘은 줄곧 싸우면서도 3미터 이상을 떨어지지 않았다. 지근거 리에서 어검술이 부딪치면서 간혹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 냈지만, 그들은 떨어지지 않고 자신이 익히고 있던 모든 몸놀림을 화려하게 펼쳤다.
점점 더 격전이 치열해지자 드래곤조차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그들의 몸놀림은 빨라졌다. 웬만한 기사들이 봤다고 해도 희미한 잔상밖에 보지 못할 정도로 그들 의 몸놀림은 쾌속했고, 그들의 검은 더욱더 빨라서 새하얀 궤적만을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꽈꽝.
한동안 치열하게 싸우던 그들은 갑자기 검을 부딪치며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귀청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그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갔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키아드리아스나 아르티어스가 약간 비틀거렸다.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콜록콜록. 젠장, 살살 좀 하지. 이게 도대체 뭐야?”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투덜거리는 아르티어스에게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아르티엔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술이라는 것을 나는 여태껏 몸 풀기 위한 체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법이군. 아주 날카로워. 다시 봤는걸.”
“참 내, 아버지가 그때 말리지만 않았다면, 저도 저 정도는 했을 거라구요. 역시 마법보다는 검이 훨씬 더 멋지잖습니까?”
“헛소리 마. 만약 네가 계속 익혔다고 해도 체조 수준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을걸? 너는 저 아이들처럼 검술에 마나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조건 근육 만 잔뜩 붙인 몸매를 선호했잖아. 그래서는 아무리 수련해 봐야 체조 수준이겠지. 그건 그렇고 정말 볼 만하군.”
다크와 카렐은 서로의 검을 세차게 부딪치며 약속이나 한 듯 거리를 넓게 벌렸다. 그런 다음 곧이어 시작된 이기어검술 간의 싸움. 서로의 검이 불타오르며 대기를 날아다녔다. 그들의 검은 마치 그 하나하나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라도 된 듯, 마음껏 허공을 누비며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또 충돌하기도 했다. 그것을 바 라보며 아르티엔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굉장하군. 저 하나하나에 엄청난 파괴력이 담겨 있잖아? 저런 식으로 사용한다면 거리의 제약이 거의 없어지겠군. 정말 대단한 기술이야. 그뿐만 아니라 보기에 도 멋이 있군.”
이윽고 어검술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자, 그 둘은 본격적으로 강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검이 이기어검술에 의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한편, 그들은 강기를 이용하여 상대의 빈틈을 노리기도 했고, 또 없는 빈틈이라도 만들기 위해 상대를 압박해 들어갔던 것이다.
서로 간의 강기 다발이 곳곳에서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발음이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강자들 간의 사력을 다한 대결은 엄청나게 빨랐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래곤들로서는 자연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진정한 아들의 실 력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아르티엔 또한 자신이 경시했던 호비트가 발전시켜 온 검술에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정말 저게 검술이란 말인가? 대단하군.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까 서로 간에 주고받는 공격들의 태반 이상이 가짜잖아. 지근거리에서 맞붙는다면 어떤 것
이 진짜인지 알기 힘들겠어. 아마 저런 식으로 상대방의 시야를 현혹시키는 거겠지. 직접 맞붙어 보면 아주 상대하기가 까다롭겠어.”
잠시 더 대결을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뭔가를 깨달은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저 빛줄기 하나하나가 6사이클급 마법과 거의 비슷한 위력인 것 같은데? 아니지, 마법의 특성상 넓게 퍼지는 것에 비해 저것은 거의 한 점에 모든 힘이 집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부분이 받는 충격은 8, 9사이클 이상이라고 봐야겠군. 웬만한 방어 마법은 그냥 뚫고 들어가겠어. 한낱 호비트나 엘 프 따위가 저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정말 직접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칼부림을 해 대던 그들은 이윽고 서로 간에 무언의 합의를 했는지 검을 멈추고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둘 다 오랜만에 전 력을 다했던 탓인지 숨을 헐떡이고는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내가 검술을 배운 후로 이렇게 후련하게 싸워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카렐의 말에 다크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온몸이 녹초가 된 듯했다. 모든 근육들이 탈진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 뻐근한 느낌조차도 황홀했다. 그녀는 카렐이 자 신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그친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였을 때의 자신이었다면 이틀 밤낮을 싸운다고 해도 견뎌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는 팔과 다리는 아무리 내공이 받쳐 준다고 해도 이것이 한계인 것이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다크에게 카렐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너의 자존심을 건드리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네 검술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주 대단한 실력이라는 것은 잘 알아.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카렐의 말에 약간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무공에 대한 호기심에 다크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뭐가?”
“너의 검은 순간순간 아주 적절하면서도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여 줬어. 굉장한 속도, 그러면서도 아주 다각적인 공격력,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극심한 변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나는 네 공격을 막아 낸다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어. 왜냐하면 그런 검술을 쓰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카렐의 검술은 이 세계의 모든 기사들이 그러하듯 변화보다는 한 점에 집중되는 파괴력을 중시하는 것이었기에 다크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나는 너를 압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지. 너의 검술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어. 엄청난 속도와 그 변화, 그러면서도 네 검격은 엄청난 힘을 싣고 있었지. 어쩌면 너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격투를 했다면 그 허점을 알아내기도 전에 내가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만큼 너 의 검술은 무서웠다고 할 수 있지.”
잠시 다크를 쳐다보던 카렐은 다크가 그런대로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자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이란 한 점을 향해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가야 할 텐데, 이상하게 그것이 뭔가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단 말이야. 나는 이 런 느낌을 형식에 얽매여 있는 자들에게서 느꼈거든. 바로 그 느낌을 자네에게서 받았단 말이지.”
“구속된다고? 글쎄…….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검술 하나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가? 사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거든.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검술이라고? 한번 설명해 봐. 너 정도 수준이라면 사실 검술이라는 틀에 얽매여서는 절대로 안 되지. 그리고 또 틀에 얽매여 있어서는 결코 네 수준에 올라설 수 가 없어.”
카렐의 말에 다크는 어이없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가능했어. 그래서 나는 여태껏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다크는 자신의 사부 유백이 창안한 방법을 카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검술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쪼개어 그것을 개별적으로 격 투에 응용하는 방법을 말이다. 사부는 이 방법을 통해 모든 검술을 잊을 수 있다’면 최강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카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군. 그렇다면 너는 진정한 의미에서 잊었다’고 할 수 없어. 최고의 경지란 그런 식으로 쪼개어 나가는 것이 아니야. 진짜로 잊어야만 해. 완벽하게 자신을 잊고, 검을 잊고, 정해진 투로(鬪路)를 잊었을 때, 그때가 돼야 검술은 새로운 경지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참 이상하 군. 형식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는 한, 의식과 한계 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이 충돌하면서 정신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너는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긴 거지? 나로 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다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글쎄, 나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 아, 참, 예전에 사부님께 검술을 배울 때, 어느 날 명상을 하다가 검술의 이치를 깨달은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무(無)를 통한 검술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 후 내 검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사부님을 능가했거든.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벽을 넘었다고 생각했지.” “허, 참,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세. 자네의 사부는 마스터였었나?”
““마스터? 아니.”
다크는 잠시 생각해 봤다. 유백은 조금 수준 높은 그래듀에이트 정도……. 그렇다면 마스터는 아니었다. 다크의 대답을 들은 카렐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 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사부에게 검술을 익혀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이거지?”
“응.”
“그것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원래가 어떤 검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나가다 보면, 그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생기지. 그것을 뚫었을 때, 비로소 그 검술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의 칭호를 얻을 수 있어. 그런 다음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한 자유를 향해 일보를 내디딘 사람을 그랜드
마스터라고 부르지. 내가 봤을 때, 넌 형식에 얽매어 있어.
네 검술이 빠르고, 아주 심한 변화를 보였기에 내가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너는 그 틀 속에서의 변화와 틀 속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네 검 술처럼 완벽한 검술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너는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는 거야. 나는 내가 익혔던 검술의 한계를 깨닫고 그 형식을 버렸어.
하지만 너는 검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것 같아. 왜냐하면 네 검술은 너보다 한 차원 높은 나까지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완벽했거든. 그게 바로 함정이라는 거지.”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말에 다크는 조금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어.”
“뭐가?”
“너의 몸은 이미 그랜드 마스터의 것이야. 나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어. 단전에 가득 차 있는 그 엄청난 마나… 도저히 마스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 함이지. 정신은 마스터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그랜드에 들어서 있다?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돼.
의식이 그 정도까지 성장하지 못했다면 한계 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과 충돌하면서 정신 이상이 되어야만 하는데, 너는 의식이 뒤떨어져 있는 채로 무의식이 스스 로 동작하여 육체를 재구성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어?”
카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다크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래전에, 적의 계략에 빠져서 기억의 끈을 한순간 놓친 적이 있었어. 그런 다음 다시 기억을 되찾았을 때, 뭔가 나도 모르지만 내 무공은 한 단계 더 진보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어. 나는 그게 마나를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북명신공’이라는 무공의 영향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생사경이 가까웠기에 일어 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지. ‘생사경’은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무술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강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거든.”
“놀랍군. 너는 그런 식으로 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을 교묘하게 피한 것이야. 너의 육체가 그랜드로 탈바꿈하고 있을 때, 네 의식은 저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거지. 정말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었겠지. 그 계략이 정신 이상이 됐어야 할 너를 구했다고 봐야 하겠군.”
“그, 그런가?”
다크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자신이 목표로 하던 생사경은커녕, 현경에조차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연구하고 있다는 그 검술을 기억 속에서 한시바삐 지워 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그것이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리고 자아까지도 완전하게 지울 수 있을 때, 완벽한 자유라는 것이 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때 다크는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전, 나이아드에게 잡혀서 정령계에 갔을 때… 내공을 거의 끌어올릴 수 없었던 그때, 자신도 모르게 발휘되었던 어떤 무공.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바로 그것이 현경의 무공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응용해서 발출할 수 있는 무상 검법도, 나이아드도 관심 밖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식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현경의 발치를 슬쩍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다크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 자신이 국광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그때 몽고 벌판에서 수많은 몽고 병사들을 상대로 혼자서 분투했 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자신은 황궁의 무공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벌 떼같이 달라붙던 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정도로 그는 수많은 적을 상대로 무아의 상태로 싸웠다. 황궁의 무학이 가지는 단순함, 그것을 수많은 상대를 향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 줬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된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적은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적이고 아군이고 초식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자신이 아는 모든 수법을 동원해서 공격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안정하게 흘러가던 기의 유통이 원활하게 풀리며 전개되었던 어검술.
다크는 카렐과 대화하던 상태 그대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이때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있던 아르티어스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이봐, 다 싸웠으면 들어와야 할 것 아냐. 네 마누라가 식사 준비까지 다 끝냈는데 말이야.”
한참 카렐을 향해 말하던 아르티어스는 멍하니 앉아 있는 다크의 눈앞에 자신의 손을 쓱쓱 휘둘러 보더니 카렐에게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무슨 짓을 한거지? 얘가 왜 이렇게 정신이 빠져 있느냐구.”
카렐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한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거 좋은 거야?”
“물론이죠. 최고의 검객으로 성장하려면 저런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되거든요. 언제 끝날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서 향기로운 차라도 한잔하시며 기다리시죠.” “그럴까?”
카렐을 따라서 들어가며 아르티어스는 궁시렁거렸다.
“젠장,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야. 음식 향기가 그럴듯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