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21화 – 아르티엔, 마왕과 대격돌

아르티엔, 마왕과 대격돌

거의 4백여 대의 타이탄이 크라레인시로 돌격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수없이 많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마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쪽의 공격을 이미 눈치 챘는지 크라레인시 쪽에서 마주 달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 앞서서 달려오는 마물들의 흉측한 모습만 보일 뿐, 그 뒤에 달려오는 마물들은 자욱한 먼지에 가려서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 이게 뭐야? 주력 부대가 알카사스에 가 있다고 하더니 언제 다 돌아온 거야?”

마물들의 엄청난 숫자에 놀란 다크가 어이없어하자 키에리도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글쎄, 아무래도 저쪽에서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후퇴했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크와 키에리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 이미 전투는 시작된 상태였다. 선두에 선 아르곤의 성기사단은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나타났는데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하늘을 나는 여러 종류의 마물들은 와이번을 타고 있는 성기사들과 공중에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타이탄과 마물들 간의 치열 한 격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돌격하라.”

다크의 청기사, 키에리의 게레리아, 카렐의 골든 나이트가 앞장서서 돌격하자 로체스터가 코란 근위 기사단을 지휘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알카사스 전선에서 돌아온 루빈스키 대공이 지휘하는 크라레스의 스바시에 근위 기사단이 바짝 뒤따랐다. 미네르바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제일 나중에서야 지발틴 기사 단에 돌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4백여 대의 타이탄들과 4백여 명의 용기사들이 거의 5천에 이르는 마물들과 대 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악.”

“쿠어, 쿠어억.”

곧 처절한 비명과 마물들의 울부짖음이 전쟁터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땅은 순식간에 그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피비린내는 역겨우리만큼 진하게 풍겨 나왔다. 사방 여기저기에는 처참하게 박살 난 마물들의 시체와 파괴된 타이탄이 나뒹굴고 있었고, 이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힌 기사들의 눈빛은 마물과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미쳐 있었다.

일단 격전이 벌어지고 나자, 아르곤의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50여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 이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고, 그다음부터 그들은 전투가 아닌 살기 위한 발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물들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은 튼튼한 것이었 다. 또한 어마어마한 힘으로 휘둘러지는 마물들의 각종 무기들은 타이탄의 장갑판까지도 관통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마물들의 중앙을 돌파해 나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세 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주축으로 하는 3국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아르곤의 기사단과 는 달리 마물들과의 혼전 중에도 철저하게 지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 명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마물들을 간단하게 처리하며 길을 개척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기사단 단위로 로체스터, 미네르바, 론카르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그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오랫동안 레어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호비트들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물들과 거의 동급으로 싸우다니 말이다.” 아르티엔의 감탄에 아르티어스는 히죽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예? 헤헤, 굉장하죠. 특히나 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다크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마물들이 앞을 가로막을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며 마물들의 후방에서 거대한 발록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갑자기 허공에 그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거 대한 채찍을 날렸다. 다크의 청기사는 채찍을 간단하게 방패로 튕겨 낸 후 무시무시한 강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시퍼런 광채가 하늘을 꿰뚫으며 통과하는 그 순 간, 이미 발록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다크는 상대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여태껏 세 명이 삼각형의 형태로 적당하게 길을 개척하 는 정도의 격투를 벌이다 갑자기 다크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키에리와 카렐은 당혹스러웠다. 키에리가 다급하게 다크를 따라 달려 나가려는 순간, 카렐이 제지했다. “잠깐! 뭔가 이상하오. 이렇게 분별없이 앞으로 튀어나갈 리가 없는데 말이오. 잠시만 상황을 지켜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엄청난 대 폭발을 보고야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청기사를 중심으로 가공할 만한 마나의 폭풍이 일어나더니 반구형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그녀를 공격하던 발록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엄청난 충격파에 휩 쓸려 모래처럼 부서져 날아갔다.

그 기술을 보고 모두들 경악했다. 특히나 그 기술에 자신의 부하들이 치명타를 입었던 로젠이나 까미유는 그때의 공포스럽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을 정도였 다. 하지만 저런 엄청난 기술을 사용하는 자가 적이라면 공포의 대상이 되겠지만, 아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마물들을 향해 달려들었 다.

“호오! 저런 기술도 있었나? 저 아이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지금 그런 얘기하실 때입니까? 아버지, 저 엄청난 마나의 회오리를 보라구요. 아무리 저 아이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저런 짓을 몇 번만 하면 거의 몸이 거덜난다구요. 그리고 저런 기술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마물은 겨우 1백 마리도 채 안 죽었잖아요? 안 되겠어요. 저 아이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걱정이 된다는 듯 굳은 안색으로 아르티어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려 하자 아르티엔이 가볍게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냐?”

“예.”

단호한 아들의 대답에 아르티엔은 따스한 눈길로 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놔둬라. 아무리 대마왕이라고는 하나 크로네티오의 힘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단다. 그가 호비트의 육체를 빌리고 있는 한, 과거와 같은 그런 엄청난 힘을 낼 수는 없다는 말이야.”

아르티엔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뭔가 알겠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렵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니 도와주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단다. 우리 드래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룩해 낸 그런 영웅의 신화를 말이 다. 더군다나 그 영웅이 우리의 사랑스런 다크라면 그 얼마나 기쁘겠냐? 너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다크를 위해 좋을 것 같구나.”

아르티엔은 다크의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죽어라 말썽만 부리던 자식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끄응, 알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은 언제나 옳으셨으니까요. 하지만 마왕이 아버지의 예상보다 월등하게 강하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도와줘도 괜찮겠죠?” “그럴 가능성은 없다니까 그러네.”

아버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사랑스러운 아들이 위대한 대마왕 슬레이어로 탄생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다크가 작은 상처 하나라도 입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그였다. 바로 이때 거의 1천여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알카사스를 향해 진격해 들어가던 마물들로서 그곳에 있던 불칸이 대마왕의 소환 명령을 받고 부하들을 이끌고 급히 돌아온 것이 었다.

불칸 휘하에 있는 발록들이 이동용 마법진을 여는 역할을 한 것인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발록이라 하더라도 한번에 1백 마리 이상의 마물을 공간 이동시 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알카사스에 배치된 마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놈들로 추려서 이곳으로 이끌고 온 것이었다.

새로운 마물들이 가세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뒤에서 더 이상 남편의 안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키아드리아스가 급하게 본체로 돌아갔다. 그녀 는 곧장 거대한 블루 드래곤으로 모습을 바꾼 후, 뒤쪽에서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 버렸다.

꽈꽈꽝.

푸른색 뇌전이 번쩍이며 대기를 관통하면서 엄청난 대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의 얼굴이 딱 딱하게 굳은 것은…….

“설마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르티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아르티엔은 한심하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힐끔 바라봤다.

“너는 저쪽 황궁에서 새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놈이 1천5백 년 전에 드래곤의 몸을 빼앗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강력하게 느껴지는 이 힘…. 주위를 압도하는 존재감…, 본신의 힘을 거의 태반이나 확보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가 있는 거지?”

아르티엔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마계의 지식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불가능이었다. 거의 신에 필적하는 그들이 이곳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소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낱 유희를 위해 소멸을 각오한다는 것은 아르티엔의 머리로는 도 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서, 설마… 어둠의 대마왕이라는 녀석의 힘이 그렇게 엄청나다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마왕이 있는 황궁을 노려보던 아르티엔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자신의 말썽꾸러기 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 설마 내가 어릴 적에도 이렇게 철이 없었을까?”

아르티엔은 아들을 향해 애정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눈길과는 달리 그는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놀리듯 말했다.

“으이그, 이 닭대가리. 어릴 때는 말썽이라는 말썽은 도맡아 피워 애비 속을 썩였지. 이제 좀 커서 철이 들었나 싶었더니 하찮은 호비트에게 빠져 이 모양이라니. 내 자식이지만 한심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구나.”

“우이씨, 왜 또 닭대가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찮은 호비트라니요. 다크는 엄연히 내 아들이라구요. 젠장,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만지며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걱정된다는 듯 다크를 좇아 연신 시선을 움직였다. 아르티엔은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다 마음을 굳힌 듯 천천히 일 어서며 말했다.

“내가 힘을 숨기고 있듯, 저놈도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나. 너는 빨리 저 아이를 데리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라. 그리고 혹시나 내가 죽 는다면 너는 이 사실을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에게 알려라. 아마 모든 드래곤들이 힘을 합친다면 대마왕을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에이씨, 농담 좀 그만 해요, 아버지.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충분히 이길 만큼 강한 분이 왜 자꾸 그러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렇

지 저도 제법 강하다구요.”

아르티엔은 투덜거리는 아들놈에게 빙긋 미소를 보냈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어려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는 아들이 훨씬 훌륭하게 자라 준 게 사실 이었으니까. 그는 자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빨리 이곳에서 피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말을 끝내자마자 아르티엔은 곧장 황궁 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도 드래곤으로의 현신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법의 극한을 본 그에게 있어서 겉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황궁같이 좁은 곳을 격전장으로 삼는다면 몸집이 작은 쪽이 훨씬 유리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몇몇 마물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황궁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는 아르티엔을 가로막았다.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의 앞을 막아 선 마물들은 거의 타이탄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표피. 날카로워 보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그것들은 아르 티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티엔의 앞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뭔가에 베이기라도 한 듯 반으로 쫙 갈라지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다. 황궁 위에 도착한 아르티엔은 잠시 허공에 정지하며 손을 앞으로 쓱 뻗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폭발적인 광채가 황궁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콰쾅!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뒤따랐다. 잠시 후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지하 깊숙이까지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아르티엔은 망설이 지 않고 그곳으로 날아 들어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마왕이 있는 곳까지의 통로가 개척되어 버린 것이다.

아르티엔의 손에서 뻗어 나간 광채 속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대마왕이 있는 곳까지의 통로를 개척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곧 바로 대마왕을 향해 덮쳤었다. 하지만 그 광채는 대마왕에게 다다르지 못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에라도 막힌 듯 일정 거리 위에서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주위의 공간이 비틀릴 정도의 엄청난 대폭발! 그 폭발로 인해 대마왕의 근처에는 거대한 공동(空洞)이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는 듯, 대마왕은 아직까지도 호화롭게 만들어놓은 거대한 왕좌(王座)에 앉아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대마왕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을 향해 일격을 날린 아르티엔. 하지만 그는 그 정도의 공격에 대마왕이 피해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 지만 대마왕의 주위 일정거리 안에 그 어떤 피해조차 없는 것을 보고 내심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한 위력의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방 어막을 뚫지도 못한 것이다.

아르티엔은 싸늘한 표정으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르티엔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대마왕은 그런 것쯤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그는 이미 눈앞의 이 골드 드래곤을 때려 잡기라도 한 듯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큭큭큭, 이제야 나타나다니……. 하지만 예전처럼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걸?”

“웃기고 있군. 네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어. 이제 아예 네놈을 소멸시켜 주마.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말이야.”

“좋을 대로 해. 나는 대신 네 녀석의 머리통을 잘라 내 침실을 꾸며 놓도록 하지, 크흐흐흣.”

대마왕의 손에서 검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자, 아르티엔 또한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마주 공격해 들어갔다. 그 둘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는 찬란하지도 않았 고,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내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이 부딪치는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대 폭발이 지하에서 벌어졌다.

황금색 궤적을 그리며 빛과 같은 속도로 아르티엔이 지하로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지축을 울리는 듯한 대 폭발이 벌어졌다. 유성 소환 마법이 일으키는 폭발이 엄 청나다고 하지만, 이건 그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것처럼 보였다. 폭발 한 번에 크라레인이라는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엄청나게 거대한 구덩이만 남았 으니까 말이다.

대 폭발의 충격파는 웬만한 마물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상대하던 타이탄들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그랜드 마스터 정도 되는 막강한 검객들이 타고 있는 타이탄들 은 강기로 재빨리 막아서인지 그래도 무사했지만, 제일 앞장서서 공격하던 아르곤의 타이탄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그리고 폭 발의 진원지인 황궁의 폐허 위에는 거대한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드래곤이 얼핏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 을 한 존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후퇴하라!”

키에리가 부르짖듯 외치자 가장 뒤쪽에 쳐져 있던 미네르바가 거느리고 있는 지발틴 기사단이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몇 명 남지 않은 각국의 기사단들이 뒤따랐다. 다크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직격당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충격파를 안겨 줄 만큼 엄청난 폭발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열 개가 넘는다고 해도 절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연속해서 엄청난 폭발이 크라레인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위는 새하얀 빛줄기와 검붉은 화염이 만들어 내는 엄청난 충격파에 완전 아수라장 이 되어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마물들과 타이탄은 충격파에 휩쓸리며 마치 모래가 스러지듯 사라져 버렸고,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마물들과 타이탄이 싸우던 전쟁터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공간마저 뒤틀릴 정도로 엄청난 공격을 주고받으며 신적인 존재들이 격돌하고 있었 다.

다크가 전속력으로 크라레인시에서 한참 도망쳐 나왔을 때, 그녀의 앞에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날아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그 드래곤이 아르티어스임을 알아본 다 크가 크게 외쳤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지가 마왕과 싸우고 계신 거다.>

“하, 할아버지가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제일 나중에 한 말이 걸리는구나. 뒷일은 키아드리아스에게 말해 뒀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너는 복수 따윈 절대 생각하지 말고 네가 살던 세 상으로 빨리 돌아가거라. 정말 너를 사랑했단다.>

“아빠! 그, 그게 무슨 말…….”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아르티어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가 재빨리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르티어스는 빛처럼 빠르게 검은 연 기가 치솟고 있는 폭발의 근원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대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마왕 정벌대는 충격파가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정신 없이 도망쳤다. 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폭발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도망쳐 나온 마물들과 또다시 대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처음 폭발의 충격파로 가장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마물들 쪽이었다. 하지만 불칸이나 발록 등을 주축으로 하는 마족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6천에 다다르 던 엄청난 수의 마물들도 몇백 정도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일단 위험 범위 밖으로 대피하자마자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크는 이동 마법을 사용하며 채찍이나 마법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발록 세 마리를 상대로 엄청난 격전을 벌였다. 그녀가 간신히 그들 중의 한 마리를 해치웠을 때, 그녀의 앞에는 신장이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검붉은 색의 거대한 불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칸은 나타나자마자 다크를 향해 양손에서 검붉은 화염 덩어리를 뿜어내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크는 침착하게 마나를 잔뜩 주입한 방패로 막았지만 전혀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화염 마법 따위에 방패가 뚫릴 위험은 없었지만 주위에서 맴돌며 틈을 노려 채찍을 휘두르는 발록 두 마리의 공격에 겨우 몸을 빼내는 데만 급 급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꽝.

한순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귀청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의 충격파가 밀려왔다. 위험을 직감한 다 크는 충격파에 견디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것이 밀려오는 방향을 향해 커다란 청기사의 방패를 들이밀며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강기의 막을 펼쳤다. 이번에 밀려온 충격파는 다크가 생명의 위험까지 느꼈을 정도로, 여태까지 밀려왔던 것들과는 그 파괴력에 있어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충격파가 휩쓸고 가 버린 전장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거대한 대지는 자욱한 먼지 구름이 뒤덮여 있었고,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충격파에 휩쓸려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간 상태에서 쓰러진 채, 반쯤 땅에 파묻혀 있던 청기사가 튕기듯 일어섰다. 방패는 왼팔과 함께 녹아 내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피해가 없는 상태였다.

청기사는 피해가 없는 오른팔을 놀려 거대한 검을 들어 올리며 불시의 공격에 대비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다크의 우려와는 달리 그 어떤 것도 청기사를 공격 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엄청난 위력의 불덩어리를 뿜어내며 청기사와 격전을 벌였던 마족들도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은 청기사와 달리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청기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어 준비를 갖춘 채, 쓰러져 있는 마족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동료들을 괴롭히고 있던 발록에게 다 가간 청기사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확실히 저세상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발록의 모습이 조금씩 투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을 통한 이동이라면 빛과 함께 번쩍 사라지거나 나타나야 할 텐데, 전신이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변하며 그 거대한 몸체가 서서히 먼지로 화해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청기사는 주위의 마족들을 살펴보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 엄청난 충격파 속에서도 형체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던 마족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발록처럼 서서히 먼지로 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기사의 머리를 들어 올린 채, 다크는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마족들이 사라지고 난 후, 그들이 방금 전까지 쓰러져 있었던 땅은 마족의 형체를 따라 깊게 파여 있었다. 그것을 보면 방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닌 것은 확 실했다. 다크는 청기사에서 뛰어내려 불칸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묵직한 불칸의 무게에 눌려 있던 흙은 불칸의 형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다크가 멍청하게 마족들이 사라지고 난 후 파여 버린 깊은 곳을 쳐다보고 있을 때, 카렐의 골든 나이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군데군데 녹아 내려 흉물스럽게 변한 골든 나이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더니 카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가 죽은 모양이군. 그가 소환한 모든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이겼다는 말이야?”

“할아버지? 그러면 방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폭발들이…, 아르티엔 님이 마왕하고 격전을 벌인 것이란 말인가?”

다크는 불현듯 생각난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 봤다. 하얗고 작은 손,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 있는 가슴. 크로네티오가 죽었다면 자신은 남자로 변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떻게 된 건가? 혹시 이 격렬했던 싸움의 승자는 크로네티오라는 말인가?

“아냐, 크로네티오가 이긴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내 몸이 아직도 그대로일 수는 없잖아.”

그 말에 카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간 것을 보면 크로네티오가 죽은 게 틀림없어. 물론 진짜로 그가 죽었다는 것은 아니고, 강제 소환일 가능성이 크지. 네 몸에서 저주가 풀리 지 않은 것은 크로네티오가 살아 있다는 말이야. 물론 이곳이 아닌 마계에 말이야.”

“마계라고?”

“그래, 마족들을 죽인다, 즉 소멸시킨다는 것은 아주 힘들어. 마계로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이 고작이지. 그들은 이쪽 세상으로 나오기 아주 힘들기에,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의가 있는 거야. 그는 어쩌면 다시는 이리로 못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젠장, 이렇게 하나의 기회가 사라져 버렸군. 그건 그렇고 싸워서 이겼으면 이리로 돌아와야 할 텐데, 왜 소식이 없는 거지?”

다크는 저 멀리 보이는 엄청나게 큰 구덩이를 보며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말이 구덩이지,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그것은 이제 흔적도 없어 진 크라레인시가 차지하고 있던 면적보다도 더 넓은 것 같았다.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격돌로 인한 결과였다.

그런 다크를 보며, 카렐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아르티어스를 기다리는 틈을 이용해서 다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아까 자네가 마수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간 다음 쓴 기술이 도대체 뭔가? 마수 1백여 마리를 한꺼번에 소멸시킬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기술 말일세.”

“아아, 그거? 아직 기술 이름을 정한 것은 아니야. 예전에 아주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던 선배와 한 번 겨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런 기술을 쓰더라구. 그 래서 나 나름대로 응용해서 한 번씩 써먹고 있는 거지.”

“정말 대단하더군. 그런데 전에 나하고 대결하면서 왜 그걸 쓰지 않았나? 아마, 단번에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너무 위험해서 아무한테나 쓸 수는 없거든. 너를 죽여야 되는 상황도 아닌데, 그런 강력한 기술을 쓸 이유가 없었지. 그건 그렇고, 너무 늦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나는 할아버지에게 가 볼 테니까, 너는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 좀 해 줘.”

“알았어.”

다크는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격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구덩이에 도착했을 때, 구덩이의 저 아래쪽에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 두 마리가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크는 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의 우려대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는 몸체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 이다. 드래곤은 성장기를 마친 후 노화기에 들어가 있는 동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이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드래곤본이라고 불리는 금속성 물 질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아르티엔처럼 거의 수명을 다해가는 드래곤의 경우 그 몸은 드래곤 본과 마나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렇게도 심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아르티엔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아르티어스가 정신없이 몸을 흔들자 아르티엔은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아요, 괜찮죠? 헤헤, 걱정했잖아요.>

말을 하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미 아버지가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헤, 괜찮다고 말 좀 해 봐요. 드래곤 역사상 최강이라는 아버지가 이따위 마왕 하나 때문에 누워 있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렇죠, 아버지? 헤헤, 괜히 나 놀 리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아버지, 제발 말 좀 해 봐요.>

아버지의 몸을 꽈악 안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몸과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르티엔은 힘겹게 눈을 떠 그의 아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헉헉, 우, 울지 말고……. 너, 너를 지, 진정으로 사랑해…….>

겨우 말을 이어 가던 아르티엔은 끝내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지금껏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이 한순간에 왈칵 가슴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짓궂은 음성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장난 그만 치고 눈 좀 떠 봐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는 말 잘 들을게요. 제발, 제발 눈 좀 떠 봐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르티어스의 음성은 어느덧 처절한 절규로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없이 아버지의 몸을 흔들며 울부짖던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몸에서 마나가 급속도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오오!>

엄청난 기세로 퍼져 나가는 아르티어스의 절규. 지상의 모든 것을 복종시킨다는 드래곤 로어가 울려 퍼지자 아르티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다크조차 눈을 찡그 렸다. 있는 힘껏 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오열하던 아르 티어스는 조용히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고 돌아오마.>

“아, 아빠.”

다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는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거대한 몸집째 공간 이동해 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아르티어스가 사라진 곳을 다크가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을 때, 카렐과 로체스터 공작이 달려왔다. 카렐은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렇지 못했다.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격돌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에 휩쓸리며 생긴 상처인 듯, 옷의 이곳저곳에서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위대한 승리였소. 대마왕을 처치하는 데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대의 도움 덕분이오. 아무튼 감사드리오.”

다크는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말했다.

“뭐, 내가 한 일도 아닌데……. 그런데 키에리는?”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중상을 입은 채, 지금 치료를 받고 있소.”

“중상이라고? 설마? 마지막에 닥친 충격파가 아무리 강력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가 중상을 당했다는 말인가?”

“그 혼자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강력한 충격파가 닥친다는 것을 눈치 챈 순간, 마물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소. 그 가 총력을 다해서 폭넓은 방어막을 펼친 덕분에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소. 대신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겠어. 역시, 키에리는 대단한 무인이야.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진짜 무인……. 그는 그렇고, 미네르바는?”

로체스터 공작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전쟁에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크루마로 돌아갔소. 크루마의 기사단은 가장 뒤쪽에 쳐져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피해도 가장 적었 소. 그런 만큼 그대가 돌아와서 피해를 확인하기 전에 내빼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다크는 로체스터 공작이 지은 그 씁쓸한 표정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크 또한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이 영 얍삽하기 그지없단 말씀이야…….’

“그게 그녀한테는 어울리지. 하지만 그런 얄미운 짓을 하는데도 미워할 수는 없군.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크루마를 위해 최선을 다한 거니까 말이야.”

이때 카렐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카렐은 조심스럽게 다크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카렐은 이 자리에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다크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이 없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자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나? 자네와 함께 계시는 줄 알았는데…….”

다크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하게 바뀌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르티엔과는 정이 상당히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사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에게 깊은 정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기에 그녀의 슬픔은 아주 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태까지 그가 받아온 교육 탓이었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하지만 아무리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상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아르티엔의 죽음과 아르티어 스의 슬픔은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어 놨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버지가 그분의 시신을 대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가셨지.”

그 말에 로체스터 공작과 카렐은 일순 할 말을 잊었다. 사실 이번 승리도 다 아르티엔의 덕분이었다. 격돌의 충격파만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구덩이가 파였을 정 도로, 대마왕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인간의 힘으로 없앤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실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대마왕을 인간이 없앤다는 것 자 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다크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뒀다. 너무 슬플 때는 오히려 위로의 말 자체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로체스터 공작은 하늘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처음 라나라는 수녀가 로체스터 공작에게 신탁을 가져왔을 때, 그녀는 영웅의 등장을 예고했다. 마왕을 없앨 수 있 는…….

그녀는 영웅을 찾고자 신탁을 따라서 케락스시로 왔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로체스터 공작은 그 영웅이 다크라고 확신했었다. 그만큼 다크가 지닌 힘이 독보 적이라고 할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족들과의 전쟁을 치루면서 정작 대마왕과 격돌하여 그를 없앤 것은 아르티엔이었다.

“맞아, 신탁이 가리켰던 영웅은 아르티엔이었어. 치레아 대공의 할아버지. 그를 이 마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한 것이 다크였고……. 아아~ 참으로 신의 뜻은 오묘하구나.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아시고, 그 모든 순서를 안배해 놓으신 것을 보면 말이야.’

수십 개의 유성이 직격한 듯 황폐해진 대지와 어마어마한 구덩이를 제외한다면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사투(死鬪)는 마치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전투가 끝 나고 나면 적의 시체들이 남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보니 뭔가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과 신관들, 그리고 예비로 데리고 왔던 기사들이 도착한 후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의 구출과 치 료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서 각 국가가 입은 전체적인 손실도 확실하게 집계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앞장서서 만용을 부린 결과로 아르곤의 성기사단의 피해는 최악의 상태였다. 교황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성기사가 전사했던 것이다. 일부 살아남은 자 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동료들이 마물들과의 접전에서 거의 학살당하다시피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도망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의 시체와 타이탄의 잔 해를 바라보며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동료들을 내버리고 뒤로 도망친 자들의 말로일 것이다.

코린트의 코란 근위 기사단의 경우는 아르곤과 정반대였다. 그들 또한 아르곤의 기사단처럼 가장 앞쪽에서 마물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예 상외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르곤 제국과 비교했을 때 피해가 적다는 말이었지, 실상은 최악의 피해를 당한 상태였다.

적기사1세 대가 대파(大破)당했고, 적기사II는 22대가 대파당했다. 그리고 심지어 키에리가 사용하던 게레리아(적기사III)마저도 대파당한 상태였다. 타이탄의 경 우 웬만한 피해는 자가 복구해 버리기에 대파를 당했다는 말은 곧 그 생명을 마쳤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고철이 된 타이탄이라도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면 다시 재생 산해 낼 수 있기에 타이탄이 몇 대가 대파당하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사들의 피해였다.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키에리를 비롯한 여덟 명이 중상을 당한 상태였다. 중상을 당했다고 해도 마법사나 신관을 통해서 치료를 하면 언젠가는 현역 에 복귀시킬 수 있었기에 그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웬만해서는 살려 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마법을 통한 치료술은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 은 자를 살려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총 37명의 특급 기사들 중에서 여덟 명이 전사했고, 행방불명도 열한 명이나 되는 형편이었다. 최후에 덮친 충격파는 타이탄마저도 갈가리 찢 어 놓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런 만큼 행방불명은 곧 전사를 뜻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이 제임스 후작에게서 피해 보고를 받으며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 루빈스키 대공 역시 그에 못지않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크라레 스의 근위 기사단도 코란 근위 기사단 못지않은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를 이렇듯 절망적으로 빠뜨린 것은 근위 기사의 생존자 수가 겨우 네 명, 근위 기사단 소속의 청기사 전기(全機) 대파(大破)라는 치명적 피해가 아니었 다. 다크와 자신의 청기사가 아직도 살아 있었고, 또 알카사스에 남겨 둔 기사단의 전력 또한 건재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그는 대마왕을 상대하면서 이 정도 피해는 각오하고 움직인 상태였기에 기사단원이 넷씩이나 생존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도가 저렇듯 완전히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수도의 지하 어딘가에 황제 폐하가 계실 가능성이 컸 다. 크라레스의 전 국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위대한 황제가…….

다크는 어마어마하게 푹 파여 버린 구덩이를 향해 절망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기운을 내 기사단은 다시 재건하면 될 거 아닌가?”

루빈스키는 힘 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기사단을 재건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는 이제 시신조차 건질 수 없게 되었는데 말이야. 흑흑흑… 폐하! 소신의 불충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크 흐흑흑흑!”

급기야 루빈스키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제야 황제가 저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다론의 보고가 떠오른 다크 또한 망연한 표정으로 구덩이를 바라봤다.

황제가 죽었다. 크라레스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코린트에 억압받는 국민들을 생각해서 언제나 간소한 음식만을 먹으며 마음 아파하던 인자했던 황제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토지에르와 그가 모두 죽음으로써 다크와 크라레스 제국을 연결해 주던 끈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크의 관심사 는 이제 황제의 죽음에서 딴 곳으로 돌려졌다.

“연결? 무슨 연결? 그렇지! 이리로 쳐들어온 것은 마법서를 획득하고 마왕을 죽임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려던 목적이 아니었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크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마법서도 가루가 되어 버렸잖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