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8화 –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집착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집착
“쿠크마스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쥐새끼들 잡으라고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
토지에르, 아니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질문에 그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발록들 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아직까지 처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쓸모없는 자식!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여기가 마계라면…….”
크로네티오의 분노에 발록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이곳이 마계라면 그런 일을 처리 못한 쿠크마스는 당장 죽은 목숨인 것이다. 발록들 중의 하나가 대마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가면 어떻겠사옵니까? 당장 처리하고 돌아오겠사옵니다.”
크로네티오는 그 발록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닥쳐!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감히 참견을 해?”
“죄, 죄송하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거대한 덩치를 하고 있는 발록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즉시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다.
“에잇 젠장!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쿠크마스에게도 즉시 돌아오라고 일러라. 너희들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철통같이 이곳만을 방어하도록 해라.” “옛!”
빛과 같은 것이 번쩍 빛난 순간, 죽음의 기사의 몸통이 두 토막으로 쫙 갈라졌다. 기사의 몸은 두 토막이 나자마자 먼지로 화해서 흩어져 버렸다.
“헉헉헉! 젠장. 이걸로 스물둘!”
키에리는 자신을 수색하고 있던 괴상한 시체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가 이동한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있 었던 마나의 방출 때문에 그 지독한 몬스터가 곧 이리로 공간 이동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격투 현장에서 겨우 수십 미터도 안 되는 수풀 속에 납작 엎드릴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쿠아아아아.”
키에리가 엎드리는 그 순간 발록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그 거대한 덩치를 드러냈다. 이번에도 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발록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 다. 지금까지 며칠 간의 추격전을 벌이며, 겨우 호비트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웬만한 일류 기사를 능가한다는 죽음의 기사를 몽땅 다 잃었다. 이대로 놈을 놓친다면 어쩌면 대마왕에게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발록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쥐새끼 같은 놈, 나와랏!”
발록은 그 거대한 채찍을 사방으로 미친 듯 휘둘러 댔다. 그의 채찍질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푹푹 쓰러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채찍을 휘둘러 대던 발록은 이제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혔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발록은 떠나지 않고 그 근처 하늘을 계속 날아다니 며 얄미운 쥐새끼를 찾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발록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자 쓰러지는 나무 밑에 엎드려 있던 키에리가 간신히 기어 나오며 투덜거렸다.
“쿨럭쿨럭! 젠장, 늑골이 두세 대 나갔나?”
키에리는 쓰러진 나무들을 엄폐물로 이용하면서 재빨리 기어서 황폐해진 숲을 벗어나서 아름드리나무들로 빽빽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한참 동안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여태껏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던 괴상하게 생긴 병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한둘 정도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잠시 더 기다려 본 후 키에리는 나무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3분의 2쯤 올라갔을 때, 저 멀리 까마득한 하늘 위를 선회하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끈질긴 자식!”
키에리는 나무 위에서 내려온 후,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놈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국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최후의 도박을 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로체스터가 단 한 대만을 생산해서 키에리에게 선물했고, 키에리는 거기에 게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출력은 적기사와 동급인 2.3이었지만, 흑기사와 적기사 들을 생산하며 얻은 각종 지식들이 몸체 곳곳에 집합된 최고의 타이탄이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모습을 드러낸 게레리아에 채 탑승하기도 전에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만 했다.
게레리아의 어깨까지의 높이는 무려 6미터. 머리 위에 솟은 뿔까지 합한다면 6.3미터나 되는 크기였다. 그런 대형 타이탄이 공간을 가르고 숲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록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발록이 만약 날아서 그곳까지 왔다면 키에리는 든든한 우군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록은 키에리의 기대를 저버 리고 공간 이동해서 나타났다.
발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게레리아를 향해 거대한 채찍을 날렸다. 게레리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있을 때, 이미 키에리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중 이었다. 발록은 게레리아를 고철로 만들기보다는, 쥐새끼에게 더 볼일이 많았기에 그쪽으로 날아가며 무시무시한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그 덕분에 게레리아는 첫 출동에 주인도 태워 보지 못한 채 고철덩이가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붉은 구체가 날아가며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곳곳에 불이 붙었다. 엄청난 화염과 연기 때문에 상대의 모습을 놓쳐 버렸지만, 그래도 발 록은 끈질기게 그 일대를 초토화시켜 나갔다.
“헉헉헉…. 뭐 저런 게 다 있지? 타이탄도 아닌 게 무슨 덩치가 저렇게 커? 그리고 그 파괴적인 힘은 또 뭐야? 그리고 날아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간 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다니……. 그나저나 게레리아는 살아서 제대로 돌아갔는지 모르겠군.”
키에리는 나무 그늘에 몸을 꼭꼭 숨긴 후, 마나를 최대한 억제하여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땅바닥의 그늘 위에 바짝 엎드린 상태였지만,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 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적에게서 몸을 숨기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키에리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숲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거의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 살아생전에 저런 엄청난 몬스터는 처음 보는군. 그 거대한 채찍을 휘둘러 대는 힘도 힘이지만, 마법까지 쓰다니. 저런 놈이 몇 마리나 더 있는 거지? 아무리 코린트의 힘이 강대하다지만 수백 마리가 있다면 도저히 당해 낼 수 없겠군.”
키에리는 이제 다소 여유를 갖게 되자, 우선 지혈부터 했다. 방금 전 그 지옥과 같은 난리통을 신속히 빠져나오느라고 상처를 지혈할 시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키에리는 대충 지혈을 끝낸 후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그는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을 쓸 준비를 했다.
“지금 내 몸 상태로 갑자기 오라블레이드를 쓸 수 있을까?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끝장이야. 그렇다고 지금 끌어 모은다면 놈이 눈치 챌 거야. 어차피 모험이야. 더 이상 기회는 없어. 그래, 조금만 더 이쪽으로 가까이 와라. 뿌드드득!”
군데군데 불에 그슬린 상처가 쓰라려 왔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 하늘로 도약할 준비를 갖 췄다. 몸의 상태도 최악이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타이탄만 한 덩치의 상대가 날아다니는 데다 공간 이동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여태껏 키에리가 상대해 온 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을 보이 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키에리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기습 공격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통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젠장, 타이탄에 제대로 탈 수만 있었더라도 이 상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키에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발록은 그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겠다는 듯 마법 공격을 퍼부어 대다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으응? 저놈이 왜 저래?”
키에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발록이 뭔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나타났을 때와 같이 퍽하고 사라져 버렸다. 키에리는 상대가 무슨 유인 작 전을 벌이는가 싶어서 감히 움직이지는 못하고 계속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내려 사위가 어둑해진 후에야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그때 적은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포기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키에리는 상대의 기척을 도저히 찾을 수 없자,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투덜거렸다.
“으으윽!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군.”
키에리는 서둘러 옷을 찢어 화상으로 진물이 흘러나오는 상처를 싸맸다. 대충 치료가 끝나자 그는 서둘러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쉬도록 하자. 이곳은 아무래도 위험해.”
크로네티오는 지하로 내려온 후 투덜거리며 열심히 마법진을 그렸다. 이계와 연락을 해야만 하는 마법진이었기에 그 복잡 미묘함은 여타의 통신 마법진과는 차원 을 달리했다. 크로네티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흑마법사라면 이런 식으로까지 복잡한 마법진을 사용할 엄두도 못 내겠지 만, 그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곧이어 마법진 위로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가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도니티에여,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마계의 다섯 대마왕들 중의 하나인 도니티에는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낸 후 약간 의외라는 듯 토지에르를 잠시 바라봤다. 비쩍 말라비틀어진 리치가 자신과 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하면 흑마법사가 영생을 추구하기 위해서 변신하는 궁극의 형태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흑 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자는 또 다른 마왕과 계약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그전의 계약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담보로 잡았는데, 이번에는 무슨 조건을 걸고 계약을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한 도니티에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껄끄러운 목소리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불렀는가? 세상을 파멸시킬 힘을 원하는가? 하지만, 그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을 텐데.”
말을 멈춘 도니티에는 토지에르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윽고 김빠진 듯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젠장! 오랜만의 먹음직한 먹이인 줄 알았더니, 크로네티오 자네였군. 자네가 어수룩한 호비트 한 마리를 꼬드겨 저쪽 세계에서 재미보고 있다는 보고는 부하로부 터 들었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다.”
“뭐? 부탁이라고? 그렇게도 자존심이 강한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그렇게나 다급한 일인가? 자네는 절대로 부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지 않나.”
“물론이지. 하지만……..
크로네티오는 이를 뿌드득 갈며 증오에 찬 듯 외쳤다.
“예전에 내 즐거움을 방해했던 그 가증스러운 놈을 찾아냈어. 호비트 세계의 정복이고 새로운 마계의 건설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놈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도와줄 거지?”
“누군데 그러나? 겨우 호비트 따위가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놨을 리는 없을 테고.. 참, 예전의 즐거움이라고? 호비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는 없지 않나? 그 렇다면 설마?”
“맞아, 드래곤이야. 마법을 아주 잘 쓰는 황금색 도마뱀 새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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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 상대라…….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까지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군. 사실 그쪽 세상에 가면 드래곤 때문에 아주 힘들긴 하지. 마계의 힘을 그대로 가져간 다면 한 방에 통구이를 만들어 버릴 수 있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그쪽 세계는 태곳적부터 형성된 중간 지대가 아닌가? 신도, 마왕도, 정령도 다스릴 수 없는.. 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자가 드래곤이지. 그렇기에 오락을 제대로 즐기려면 드래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도니티에는 잠시 크로네티오를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잘 안다면서 자네는 드래곤을 건드렸어. 그 때문에 강제 소환당한 것이고 말이야.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뭘 그걸 가지고 열을 내고 그러나? 나는 자네가 부러워. 마계의 틀에 박힌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 도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 자극인가? 이제 더 이상 적이 없는 마계에서 벗어나, 추구할 만한 목 표와 적이 있는 새로운 세상이 자네에게 주어져 있다네.
쓸데없는 과거의 자그마한 원한을 가지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착실하게 새로운 마계 건설에나 신경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드래곤은 그곳을 완전히 정복해서 힘 을 충분히 갖춘 후에 간단히 제압할 수 있지 않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망할 자식이 얼마 전에 찾아와서는 나를 깔보는 듯 유들유들한 어조로 재미 많이 보라고 하더군. 그때는 그런 가보다하고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열불이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어떻게 드래곤 따위가 감히 나를 깔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능청스러운 낯짝을 찢어발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다 포기해도 좋아. 그 빌어먹을 자식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마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나?”
“그러니까 해묵은 감정이 더해진 자존심의 문제로군.”
잠시 궁리를 하던 도니티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자네도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도니티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었다.
“미쳤군.”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게나.”
“휴우~ 자네의 마음이 이미 확고하다면 내가 뭐라고 말려도 통할 단계는 아니겠지?”
“그 말대로일세. 나는 지금 힘을 원한다네. 드래곤 따위가 더 이상 나를 깔보지 못할 정도의 힘을 말이야. 그리고 그 자식의 머리통을 잘라서 내 의자를 장식할 거 야. 그렇게 해서 두고두고 나를 깔본 놈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을 거라구.”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대법을 실행한 후에 혹시라도 이계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이건 강제 소환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그 충격으로 본체마저도 소멸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잃는 것에 비해서 얻는 것은 너무나도 작다는 말일세.”
도니티에의 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크로네티오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은 없어. 나는 그놈의 목을 원해.”
“좋아, 어쩔 수 없지. 자네의 부탁인데, 도와주기로 하겠네. 어쩌면 시라에뉴라면 자네를 도와줄지도 몰라. 하지만 비슈누나 바크로니아는 힘들 텐데? 그들은 어떻 게 설득할 텐가?”
“우선 자네와 시라에뉴부터 끌어들인 다음에 천천히 궁리해 보면 되겠지.”
밤이 되자 다크 일행은 조촐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일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뭐? 벌써 가려고?”
“이제 더 이상 할 일도 없잖아. 후작 녀석이 처형되는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고, 융숭한 대접도 받았으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미카엘이 아버지하고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가자고 하는 건 너무하는 것 아냐? 그리고 미카엘에게 들으니까 사흘 후면 어머니 기일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성묘라도 할 만한 시간 여유를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팔시온의 말을 듣고 다크는 미카엘에게 즉시 질문을 던졌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여기에 남을 거야?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갈 거야. 어떻게 하고 싶어?”
다크의 노골적인 질문에 미카엘은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 글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20년쯤 전에 집을 나왔다는 것은 팔시온으로부터 들었어. 하지만 내가 들어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전에는 아주 원망스러웠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많이 늙으셨더군. 아버님이 마스터인 것은 알고 있지만, 왠지 몸이 예전보다 많이 안 좋아지신 것 같아서 눈물이 나더라.”
미카엘은 자신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근육질이었던 로체스터 공작의 몸이 예전보다 많이 말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몸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로체스터 공작의 검술이 그만큼 더 발전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팔시온은 미카엘이 분위기를 잡고 얘기하자, 유쾌했던 술자리에 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짜식! 너 변한 건 생각 안 하냐?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말이야. 너 처음에 만났을 때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아냐? 비쩍 말라서는 오크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 못해서 헤매고 있던 것을 구해준 게 엊그제 같은데, 어휴~ 지금은 그래듀에이트? 나를 따라다니면서 참 많이 컸지.”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부끄러운 과거를 왜 낱낱이 들춰내는 것인가? 그것도 여태껏 다크가 모르도록 아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는데 말 이다. 미카엘은 발끈해서 말했다.
“웃기지 마, 새꺄! 네가 나한테 뭐 해 준 게 있다고 그래. 네가 보수가 좋은 데다 실전 경험까지 쌓을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 된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로우니 산맥의 오크 토벌전에 참전했다가 하마터면 몽둥이에 맞아 죽을 뻔했지. 그뿐이야? 역시 기사의 힘은 근육에서 나온다고 해서 한 달 동안 성벽 보수 작업장에서 벽돌 나른 다고 허리가 휘도록 죽을 고생을 했더니, 세상에, 그 돈을 몰래 훔쳐내서 술값으로 탕진한 놈이 누구였지?”
“짜식! 쫀쫀하게, 그런 건 잊어버려. 그리고 남자의 로망은 근육이야.”
팔시온은 자신의 근육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말했다.
“이 우람한 근육질을 보면 여자들이 뿅뿅 가잖아? 그때의 아픔이 없었다면 그 몸매가 만들어지는 줄 알아? 다 나 같은 훌륭한 동료를 만난 덕인 줄 알아야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한심하다는 듯, 팔시온의 뒤통수를 갈기며 이죽거렸다.
“그딴 비곗덩어리는 오크 때려잡는 데나 필요하지, 정작 검술의 궁극을 익히는 데는 방해만 된다는 것을 몰라?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다크를 봐라.”
팔시온 일행의 눈이 다크에게로 모아질 때, 아르티어스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필요 없는 근육은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잖아. 최적화된 몸매라는 것은 저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대가리 속까지 비곗덩어리가 가득 찼으니 알 도리가 있나? 쯧쯧.”
“아야야야. 그런 말씀 마시라구요. 저런 새 다리같이 가는 게 근육입니까? 역시 근육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죠.”
팔시온은 옆에서 가만히 술을 홀짝거리고 있던 미디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남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저 오우거 같은 파워, 강하고 민첩한 검술도 근육이 아니면 어디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마나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 밑바탕은 근 육이죠. 어르신은 마법만 쓰시니까 그걸 모르시는 거라니까요. 하기야 검이라고는 한 번도 휘둘러 보지 않으신 분이 어찌 그걸 아시겠어요?”
미디아는 팔시온이 자신의 강점이자 최대의 약점을 지적하자,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그래, 나는 여자의 탈을 쓴 오우거다, 왜, 보태 준 거 있냐? 가만히 있는 남의 아픈 데를 왜 건드렷! 젠장!”
팔시온의 완강한 저항에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이 자식이? 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뭘 잘못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말에 슬슬 딴지를 건단 말이야. 젠장, 그때 교육이 좀 약했나?”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팔시온이 그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팔시온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헤헷! 좋을 대로 하십쇼. 그래,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시라 이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설설 기면서 기죽을 줄 아셨습니까? 싸나이 팔시온,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이겁니다. 흥!”
“그만 좀 해요, 아빠.”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짜증을 동반한 말 한마디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입을 닫았지만,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대변해 주고 있 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실 미카엘은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자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나 남을 거야.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그 말에 열심히 눈치를 살피던 가스톤이 미카엘에게 말했다. 재빨리 회전하는 마법사의 머리는 이 극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제공 해 줬던 것이다.
“혹시 여기 나도 같이 남으면 안 될까? 나 일 잘해. 그리고 열심히 할게. 치레아에서도 봤잖아. 짜증스러운 서류 작업이 바로 내 전공이잖아? 그리고 그것 말고도 머리 쓰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다구.”
미디아도 재빨리 끼어들었다.
“나도 남으면 안 될까? 나도 열심히 할게. 로체스터 공작께 잘 말씀드려 줘.”
동료들이 다 떠난다는 말에 그제야 기가 팍 죽어 버린 팔시온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 나느?”
그 말에 미카엘을 비롯한 가스톤과 미디아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너는 안 돼!”
미카엘은 밤하늘의 달을 보며 울적한 마음을 씻어 내고 있었다. 적당히 오른 취기에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밤. 달 하나는 중천에 걸려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새벽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벌써 지고 있었다. 20년이나 정들었던 친구들과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서로 악의 없이 싸우고, 웃 고, 도와가며 수많은 모험을 했었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남는다고 결정은 했지만, 크라레스와 코린트가 서로 적국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미카엘이었다.
“뭐, 괜찮겠지. 다크가 있으니까 말이야.”
애써 자위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카엘이 뒤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다크가 서 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는 그녀는 아련한 달빛 아래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카엘의 시선이 홀린 듯이 위에서 아래로 슬며시 이동하며 그녀를 훑어보다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서 멈췄다. 검을 바라보는 그 순간, 미카엘은 그녀가 누군지를 깨달으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으응,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는데, 그냥 떠나보내려니까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어서 말이야. 한 가지 선물을 줄까하는데 괜찮겠어?”
그 말에 미카엘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나야 공짜라면 뭐든지 좋지.”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앉아 봐.”
다크는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말했다. 미카엘은 다크가 수련을 한답시고 설칠 때 취했던 자세였음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 자세를 최대한 흉내 내어 앉았다. 다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건 과거 내가 살았던 곳에서 마나를 수련할 때 취하는 기본적인 자세야. 물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그런 자세를 꼭 취할 필요는 없어지겠지만, 지금은 그렇 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다크는 미카엘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잠깐만 참고 있어. 그리고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돼.”
순간적으로 미카엘은 의구심을 느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나가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카엘은 경악해서 다크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마음을 이해 했던지 다크는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그냥 차분하게 앉아 있어. 나를 믿지?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그리고 마나의 움직임을 느끼라구.”
순간적으로 소멸한 것처럼 느껴졌던 마나가 다시금 미카엘의 몸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마나의 근원은 다크였다. 다크는 미카엘의 잡스러운 마나를 완전 히 소멸시킨 후, 새로이 대기에서 마나를 끌어 모아 미카엘에게로 주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의 움직임을 느껴.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는 통로를 잘 기억해 둬.”
마나는 하나의 법칙에 따라서 미카엘의 몸속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 법칙은 저 무림에서도 잊혀진 태허무령심법의 마나를 돌리고 조절하는 운기조식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미카엘의 몸속에는 태허무령심법의 법칙에 따라 다크에 의해 소멸하기 전보다 더욱 정순하고 강력한 마나가 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충실 하게 단전에 쌓여 가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마나가 움직이던 통로를 잘 기억했겠지? 앞으로 하루에 두 번, 한 시간 정도씩 똑같은 방법으로 수련해. 그렇게 계속 수련하다 보면 검술을 익히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거야.”
미카엘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꽉 쥔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꽉 쥔 손에서, 그리고 몸속에서 넘치는 힘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비실거리는 늙은 말만을 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젊고 힘이 넘치는 말을 탄 것 같은 느낌이 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이감. 오늘 저녁 아르티어스가 술자리에서 근육을 두고 비곗덩어리라고 비꼬아 대던 것이 무슨 뜻인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아마도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힘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그래듀에이트였기에 더욱 확연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검술은 로체스터 공작이 가르쳐 줄 테니까, 나는 마나를 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거야.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이런 식의 기법은 별로 발달해 있지 않으니까. 검술을 배울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멍청하게 서 있는 미카엘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다크는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