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5화 –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인데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인데

이제 대충 발음 문제에 대한 합의가 끝났기에 하나코는 깊숙이 절을 하며 말했다.

“아루테에스 사마, 다쿠사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아르티어스와 묵향의 인상이 팍 찌그러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코는 절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나코는 절을 끝내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먼 여행을 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목욕 준비를 시킬까요?”

하나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목욕을 하겠냐고 묻는데 어떻게 할래?”

묵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이, 일주일 전에 했잖아요. 무슨 목욕을 그렇게 자주 해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하루에 한 번씩 꼭 목욕을 하거든. 아주 광적일 정도로 청결한 족속들이 살지.”

묵향은 놀랍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무슨 목욕을 그렇게 자주 해요?”

“여기 여름은 아주 습하면서도 후덥지근하거든. 그래서 그런 습관이 생긴 모양이야.”

“하지만 지금은 봄이잖아요. 그리고 이 정도면 깨끗한데 귀찮게 뭐 자주 목욕을 하고 그래요?”

중원에서나 크라레스에서도 어쩌다 생각나면 가끔 목욕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묵향으로서는 하루에 한 번씩 목욕을 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 티어스는 묵향을 보며 혓바닥을 끌끌 차더니 하나코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목욕은 됐으니까 그냥 물러가거라.”

아르티어스의 말에 하나코는 난처한 듯 계속 목욕을 권했다.

“저…. 하지만 오키타 사마께서 손님들께 목욕하실 것을 꼭 권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하나코에게 물었다.

“오키타? 오키타가 어떤 놈인데 감히 목욕을 하라 마라 헛소리를 하는 거냐?”

“저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오키타 사마께서 두 분의 몸에서 야릇한 냄새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릇한 냄새라고?”

아르티어스는 즉시 하나코에게서 읽어낸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곧이어 그의 머리 속에 작달막하게 생긴 무사 한 명이 하나코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명령 을 하는 것이 떠올랐다.

“너는 손님들에게 목욕할 것을 반드시 권하도록 해라. 영주님을 뵙는 자리에서 그따위 노린내를 풍겨 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옛!”

하나코를 바라보던 오키타는 미덥지 않은 듯 다시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옷도 가져다가 깨끗하게 세탁해라. 만약 영주님께서 그들의 옷이 더럽다든지, 혹은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씀을 단 한마디라도 하신다면 너는 절 대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옛, 명심하겠습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목욕을 해야겠구나.”

“왜요?”

“너하고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는 개코를 떼다 붙인 듯한 놈이 있어서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중원은 이제 바로 코앞인데, 여기서 시간을 조금 지체한다고 큰일이야 나겠어?”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아르티어스는 약간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영주에게 말했다.

“설마 화염의 술을 보고 그렇게까지 생각을 할 줄은 몰랐소. 사실 무역을 하다 보면 호신술도 필요하지 않겠소. 대국에서 내가 거래하던 고객 중에서 엄청난 세력 을 지닌 인물들도 있었는데, 화염의 술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배운 것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며 급히 되물었다.

“엄청난 세력이라고요?”

“그렇소. 중원에는 무예를 광적으로 숭상하는 무림이라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영주께서는 혹시 알고 계시오?”

아르티어스는 차원 이동을 하기 전에 아들에게서 대충 중원의 일을 들은 게 있기에, 그것에 약간 살을 덧붙여서 후지와라 영주에게 얘기한 것이다. 후지와라 영주 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조금은…, 그런 소문은 들은 것 같소.”

“바로 그 무림에 있는 문파들 중에서도 가장 큰 문파의 수장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 지닌 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두들 마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문파의 수 장을 말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마교가 무술인들이 모인 도장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르티어스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국에도 닌자를 키우는 도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지와라 영주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곳 야마토에서의 닌자들은 작은 촌락을 구성하여 그 기술을 전수했다.

그렇다 보니 닌자들은 아주 폐쇄적이었고, 또 그 수도 아주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의 말을 들어 보니, 대국에서는 아예 도장까지 차려놓고 닌자를 대량으로 육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량으로 육성한다 해도 그런 고급 기술을 상인에게 까지 가르쳐 줄까? 의심스러워지는 후지와라 영주였다.

“흠, 하지만 그들이 어찌 그렇게 굉장한 닌자술을 상인인 귀하에게 가르쳐 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려.”

아르티어스는 그까짓 1사이클 화염 마법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여기서도 둥루젠에서처럼 신을 사칭한 연출을 한번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러면 오랜만에 하는 유희가 너무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뭘 모르시는구려. 내가 알고 있는 마교라는 단체가 지닌 힘은 웬만한 나라는 일순간에 쓸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것이오. 그렇기에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하려 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요하지요. 그건 귀하도 독립된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시니까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후지와라 영주는 약간 미심쩍은 듯한 눈길로 아르티어스를 보았다. 물론 영토를 다스리는 데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동감을 하고도 남았다. 그 역시 현 재 그것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몇십 명의 무술 도장 같은 것이 어떻게 국가급의 무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아르티어스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한 후지와라 영주의 말에 손가락으로 묵향을 가리키며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좋소,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그럼 우리 아이한테 시험을 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지 않겠소? 비록 저렇게 연약해 보여도 마교 내에서는 꽤 알아주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오.”

후지와라 영주는 저 아래쪽에서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닭 한 마리 잡기 힘들 듯한데, 그 엄청난 무력 단체에서 인정받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동안 묵향을 바라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는 듯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야스다!”

그와 동시에 알현실 옆쪽의 문이 스르륵 열리며 웬 건장한 무사가 한 명 들어왔다. 그 무사가 나온 문 뒤편으로는 2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야스다는 후지와라 영주에게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래, 자네가 저 소녀의 실력을 한 번 알아 봐 주겠나?”

지금까지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야스다였기에, 주군이 뭘 원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즉시 대답했다.

“옛!”

아르티어스는 아래쪽에서 술만 마시고 있는 묵향에게 슬쩍 말했다.

“얘야, 저 녀석 손 좀 봐 줘라.”

“손 좀 봐 주라구요?”

묵향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듯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저 뚱땡이하고, 아르티어스가 둘이서만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도 그가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끼어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술만 열심히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묵 향이 너무 의욕적으로 일어서자, 아르티어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제발, 적당히 해라. 응? 반쯤 죽여 놓고 대화하자고는 할 수 없잖냐?”

“에이, 젠장. 좋다 말았네. 알았어요.”

야스다는 후지와라 영주의 허락을 받아, 알현실에서 무술 대련을 하기로 했다. 알현실의 아래쪽 방은 대련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었기에 구태여 술자리를 밖으로 옮 길 필요가 없었다. 그 둘의 비무는 거의 순식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빠른 시간에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빨리 끝나 버려 구경을 했던 후지와라 영주조차도 얼이 빠 진 상태였다. 야스다는 자신의 경호 무사들 중에서도 제법 괜찮은 실력의 무사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그가 맨손의 소녀에게 순식간에 묵사발이 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후지와라 영주는 잠시 멍한 상태로 두 사람의 비무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비무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야스다의 몸에서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소 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스다는 일단 예의상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무사들끼리 싸울 때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야스다는 약간 나직하면서도 장중한 어조로 말했 다.

“나는 영주님의 경호대원 야스다라고 하오. 그리고 무술은 사사키 겐지 선생으로부터 북진일도류를 전수받았소. 오늘 영주님의 명령으로 그대와 공식 대련을 하 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설혹 그대에게 패해 쓰러진다 한들, 단 한점 후회도 없을 것이오.”

상대가 뭔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묵향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아마도 여기서는 싸우기 전에 슬그머니 욕설을 퍼부으며 상대의 신경을 긁어 대 는 것이 통상적인 순서인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못해 줄 것은 없었다. 묵향은 상대와 같은 표정,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먼저 기회를 줄 테니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빨리 손을 써! 네놈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내가 오늘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하기야, 내가 진심으로 상대한 다면 내년 오늘이 바로 네놈 제삿날이 될 테니 그건 참아 주지. 젠장, 아빠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팔다리뼈 하나는 아작을 내 줄 텐데…….”

묵향이 은근슬쩍 상대를 도발하는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자신도 저것이 욕설을 퍼붓는 것인 줄 착각하고 ‘파이어 볼’로 상대편 무사를 반쯤 구워 놨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쪽에서는 싸우기 전에 자기소개를 하는 특이한 관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것을 처음 듣는 묵향이나 아르티어스는 ‘욕설’로 오해했던 것이고….

야스다는 상대가 자신의 소개를 마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상대의 소개가 끝난 듯하자,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런 다음 검을 뽑아 상대를 향해 중단자세로 겨눴다. 하지만 검 뒤편으로 보이는 소녀는 바로 코앞에 진검(眞劍)이 겨눠져 있는데도 너무나 여유만만 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야스다의 기분을 더럽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뜨거운 맛을 좀 봐야겠군.”

야스다는 일단 상대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겸, 또한 자신의 실력도 과시할 겸해서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약간의 힘이 더 보태지자 검은 야스다의 의지를 담아 은빛 곡선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리고 야스다가 검을 날리는 그 순간, 묵향도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야스 다의 검은 방 한쪽을 구르고 있었고, 그 검의 주인은 이미 큰 대자로 뻗어 버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손바닥을 치면서 놀랍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저, 정말 대단한 실력이오. 귀하가 자랑을 할 만도 하겠소이다.”

“뭐, 저 정도를 가지고…….”

야스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집어 거칠게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넙죽 엎드리며 후지와라 영주에게 비통한 어조로 말했 다.

“아무리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패해 주군의 체면에 먹칠을 했습니다. 제게 셋푸쿠를 허락해 주십시오.”

셋푸쿠라는 말에 영주는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네놈이 셋푸쿠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에잇, 멍청한 놈, 코지! 당장 이놈을 밖으로 끌어내도록 해라.”

후지와라 영주의 노성이 터지자 곧바로 옆방에서 한 명의 무사가 달려 들어와 야스다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야스다는 끌려 나가면서도 후지와라 영주 를 바라보며 비통한 음성으로 외쳤다.

“영주님, 제발 저에게 셋푸쿠를 허락해 주십시오. 영주님, 제발!”

여유로운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셋푸쿠라는 말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녀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는 셋푸쿠라는 것은 할복자살腹 自殺)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사로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셋푸쿠를 했을 경우 그가 지은 모든 잘못은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다.

아마도 저들은 묵향이 사내가 아닌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녀의 기억을 통해 읽은 이 나라의 여자에 대한 대접은 거의 인간 이하였다. 그런 여자에 게 패한 무사에게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아르티어스는 도대체 저 호비트가 어떤 방식으로 배를 가를 것인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만 아르티어스는 애써 호기심을 억제했다. 한동안 편안하게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내심 안타까 운 마음을 억누르며 후지와라 영주에게 말을 건넸다.

“말씀하는 도중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지만…, 뭔가 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 아이는 ‘여자’가 아니라 내 아들이라오.”

순간 후지와라 영주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저렇게 이국적인 아름다운 미인이 아르티어스의 아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 아들이오?”

“예, 아들이죠. 그리고 제 아들놈의 밑에 있는 수하들의 숫자만 수만 명은 족히 된다고 들었소. 조그마한 무술 수련장과 마교를 동급으로 취급하시면 곤란하지요.” 아르티어스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내심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 수만 명이란 말이오?”

수만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다면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영주급 정도의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순수하게 무술만 닦는 문파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올라갔

다면, 그 무술 실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영주는 새삼스레 아래쪽에 앉아서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미소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후지와라 영주는 알현실 밖을 향해 외쳤다.

“야스다에게 들라 하라.”

잠시 후, 야스다는 창백한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알현실로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후지와라 영주는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야스다를 쏘아보며 외쳤다.

“뭣 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저 소년에게 대련을 하는 영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알현실 밖에서 아르티어스와 후지와라 영주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들었던 야스다로서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셋푸쿠로서도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최 악의 치욕적인 패배가, 이방인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뒤바뀔 수 있단 말인가? 야스다는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계집에게 패했 다는 치욕감은 사라지고 오히려 고수와 겨뤄 봤다는 만족감이 묻어 나왔다.

“대련을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묵향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인사를 하며 하는 말이었기에 좋은 뜻으로 해석했다. 그렇기에 그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로 해 봐야 통하 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후지와라 영주는 서로 간에 사과와 답례가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본 후,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일부러 호탕하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으핫핫핫! 내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것 같소. 역시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소. 귀하 아들의 실력을 얕잡아본 점 사과드리오.”

“별말씀을……..”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후지와라 영주의 눈빛에는 순간 월척을 낚았다는 듯한 득의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었 던 후지와라 영주는 간자를 하나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후지와라 영주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내 사죄의 표시로 귀하의 아드님께 몸종을 하나 붙여 드리고 싶소. 몸종이 없으면 여행을 다니시기 불편하시지 않겠소. 그리고 이곳 야마토에서는 몸종을 거느리 지 않는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오.”

“흠, 몸종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알현실 밖을 향해 조금 큰 소리로 외쳤다. 옆방에 있는 부하들에게 들으라는 뜻이었다.

“가서 마사코를 데려 오너라.”

그러자 얇은 창호지 문 뒤편에서 “옛”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후 영주는 아르티어스에게 약간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가 집안에는 종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고, 특히나 계집종은 아주 쓸모가 많지요. 식사와 옷가지를 챙겨 줘야 할 테고, 식사를 할 때나 술을 마실 때도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할 수 있소. 그리고 밤에는 잠자리 시중까지 들게 할 수 있으니 아주 다목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내 오늘의 비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 에게 계집종을 한 명 선물하고 싶은 것이오.”

아르티어스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예의를 표했다.

“아들놈을 대신해 감사를 드리오.”

“별말씀을.. 꽤 총명한 아이니 쓸 만하실 거외다. 그리고 좀 쉬시면서 시간이 되면 무역을 하시면서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나 가끔 들려줬으면 좋겠소.”

한동안 이곳에 얹혀 살 구실도 생겼고, 그사이에 저 영주 놈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르티어스는 매우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하여간 주신다니 고맙게 받겠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