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17화 – 이따만큼 큰 사케
이따만큼 큰 사케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자신들의 방에 도착했다. 드르륵 방문을 열자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묵향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아 르티어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갈래요.”
“뭐, 뭣? 갑자기 왜 그러냐? 아들아.”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다 아빠께 효도한다는 일념으로 하고 있는 거였다구요. 그런데 그런 빌어먹을 놈한테까지 계집애 같다는 둥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이 러고 다녀야 하겠어요? 아빠도 한번 생각을 해 보시라구요.”
“에…,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잠시 대꾸할 말을 찾다가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꾸할 말을 찾을 길도 없을뿐더러, 또 그놈의 싸움도 순전히 재미로 자기가 붙인 것이 아닌가. 이럴 때는 묵향의 신경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최 선의 방법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내 화장실에 좀 갔다 와야겠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아르티어스는 모든 것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으며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그 때문에 묵향은 하릴없이 아르티어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다른 데 정신을 돌 릴 만한 것도 없는 데다가 협상을 해야 할 상대자마저 화장실에 가 버렸으니 어쩔 것인가?
묵향은 멀뚱멀뚱 천장만 보고 있다가,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짜증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에다가 대고 외쳤다.
““마사코!”
“하이!”
곧이어 나긋나긋한 대답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드르륵 열리며 마사코가 살그머니 들어와서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난노 요우데스까?”
“젠장!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바로 그때, 묵향의 머리에 둥루젠처럼 여기서도 술을 사케라고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답답한 김에 술을 마시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고 부른 것이었기에 묵향은 지체 없이 말했다.
“마사코, 사케! 사케 가져와, 알았어? 사케 말이야.”
발음이 이상하여 주인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마사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되물었다.
“싸케? 모우 이찌도 하나싯데 쿠다사이.”
“이런 젠장할! 사케 말이다. 사케.”
그러면서 묵향은 손으로 술을 마시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 마사코는 묵향이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싸케라고 하자, 그제서야 묵향이 술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쇼쇼 오마찌 쿠다사이.”
마사코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한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 하기야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겠지.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화장실 간다면서 왜 이렇게 안 와?”
잠시 후 마사코는 살며시 문을 열더니 작은 상에다가 술과 약간의 안줏거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묵향은 술잔을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이 콩알만 한 잔으로 어떻게 마시라는 말이야? 술병도 작고, 술잔도 작군. 이걸로 술 마시다가는 속 터져서 죽겠다.”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내쉬던 묵향은 마사코에게 다시 말했다.
“헤이, 이봐. 이거보다 좀 더 큰 술잔 없어? 젠장, 좀 더 큰 술잔 말이다.”
한동안 의사소통을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한 묵향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지로 참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앓느니 죽지.”
묵향은 더 이상 마사코와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곧장 술병을 집어 들었다. 술병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묵향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손을 보호했다. 하지만 묵향이 그런 식으로 무공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마사코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작은 수건을 건넸다. 아마도 뜨거우니 이것을 감고 술병을 잡으라는 말인 것 같았다.
묵향은 그것을 본체만체한 상태에서 그 뜨거운 술을 입속에 그냥 털어 넣었다. 하지만 술병은 주둥이가 좁아서 그런지 정말 감질나게 흘러 나왔다. 묵향이 술을 마 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마사코의 눈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저렇게 마셨다가는 입 안에 화상을 입기 딱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잇! 젠장. 이거 감질나서 마시겠나!”
묵향은 오른손으로 술병을 잡은 채, 투덜거리더니 갑자기 왼손을 휙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마사코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화등잔만 해졌다. 저 아름다 운 소년이 수도(手刀)로 술병의 목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오랜 시간 수련을 쌓은 인물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마사코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몇몇 인물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정신 집중을 하 고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병목을 날리는 장면을 몇 번인가 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저 소년처럼 전혀 힘도 안 들이고 마치 장난치듯 잘라 버리는 것 같은 모습은 결 단코 본 적이 없었다.
“헉!”
마사코는 낮은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그녀는 잘려 나간 술병의 끝부분을 봤던 것이다. 그것은 명검(名劍)으로 자른 듯 매끈하게 잘려져 있었다. 마사코는 짐 짓 쓰레기라도 치우듯 그것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묵향은 마사코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술병의 목을 날려 버린 후, 곧장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
묵향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목이 날아간 술병을 옆에 내려놓고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어떻게 된 게 한입거리도 안 되냐? 이봐, 마사코!”
“하이.”
묵향은 뭔가를 껴안듯 두 팔을 앞으로 끌어안는 시늉을 하며 마사코에게 말했다.
“이따만큼 큰 사케!”
하지만 마사코는 묵향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물론 상대가 술을 원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몸짓이 뭘 뜻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묵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술이 가득 찬 큰 술통을 원했지만,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하니 이번에는 양이 아닌 숫자로 승부하기로 한 것이다. 마사코의 눈앞에 열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말했다.
“이봐, 사케 이만큼!”
마사코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주인이 뭘 원하는 것인지 이제 명확해졌지만, 아무래도 그 많은 술을 어떻게 혼자 마신단 말인가? 사실 엄청나게 퍼마시는 남자 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저 여려 보이는 묵향의 모습을 보며, 마사코는 설마 그만큼 많은 술을 마실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건 자 신의 주인이 하는 명령이었기에 마사코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해야 했다.
“하이, 와카리마시타.”
마사코가 밖으로 나간 후, 묵향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히힛, 진작에 이렇게 했으면 될 것을, 이런 쉬운 방법을 몰라서 여태껏 술 한 방울도 못 먹었다니 말이야.”
한 20분 정도 흘렀을까? 마사코는 낑낑거리며 커다란 술항아리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거친 문양에 싸구려처럼 모이긴 했지만, 어쨌건 항아리에는 술이 가득 들어 있었고, 마시기 좋게 적당히 데워져 있었다.
“오오오, 그래! 내가 원한 게 바로 이거였어. 바로 이거였다구.”
묵향이 항아리를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마사코는 자신이 제대로 주인의 뜻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향은 그때부터 기분 좋게 술을 마셔 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목을 잘라 버린 술병이 하나 있으니, 좀 더 큰 술잔을 달라는 둥 그딴 주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망할 놈, 아무리 내 모습이 이래도 그렇지. 그걸 대놓고, 계집처럼 생겨서 헷갈린다고 사람 속을 긁어 대다니. 에잇, 젠장! 영주에게 신세지고 있지만 않았으면 아 예 가죽을 벗겨 놓는 거였는데…….?”
안 그래도 오랜만에 마시는 술인 데다가 적당히 화까지 난 상태였기에 묵향의 술 마시는 속도는 놀라움을 넘어서서 마사코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 이때, 문이 약간 열리며 아르티어스의 눈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눈치를 보기 위해 살짝 문을 연 것이었지만, 안에서 묵향이 한창 술을 마시며 좋아 라 하고 있자 문을 활짝 열고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갈기며 말했다.
“술을 구했으면 나를 불렀어야 할 거 아냐? 네 녀석은 효심도 없냐? 혼자서만 마시고 있게.”
“호오, 화장실 가신 거 아니었어요? 무슨 화장실을 반 시진 동안이나 계시다니 꽤 덩어리가 컸나 보죠?”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 아르티어스는 애꿎은 마사코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이봐, 큰 잔 하나 가져와라. 크면 클수록 좋다.”
“하이.”
마사코가 대답과 함께 방밖으로 나가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물었다.
“그런데 술을 어디서 구했냐?”
“마사코 보고 사케 달라니까 그냥 가져다주던데요? 근데 해적 놈들도 술을 사케라고 부르고, 여기서도 사케라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양쪽 다 이런 독특한 술을 담 가 먹는 걸 보면 아주 흥미롭지 않아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무식할 수 있다니……. 그건 해적 놈들이 이곳에서 술을 노략질해 갔기 때문에 그런 거야.”
“아! 그래서 여기나 거기나 다 사케였군요.”
마사코가 새로운 주인들의 술시중에서 벗어난 것은 무려 네 항아나 되는 술을 나른 후였다. 마사코는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묵향이 잘라 버린 술병을 가지고 사메지마에게로 달려갔다.
사메지마는 마사코가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내민 것이 잘라진 술병인 것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게 뭐냐?”
“옛, 오늘 저의 주인님이 수도를 이용하여 가볍게 자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잘랐습니다.”
마사코의 설명을 듣고 사메지마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마사코의 손짓은 분명히 수도로서 이 술병을 잘랐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수도로 자 른 것이라니? 어떻게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술병을 이렇게도 매끄럽게 자를 수 있는지 사메지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쿠라는 소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훈련을 받은 병법자(兵法者 : 무예 수련자)인 것 같았습니다. 소녀가 알기로는 웬만한 수련 정도로는 그만한 나 이에 그 정도 수준의 무예를 익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사코의 설명에 사메지마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붉은 머리의 청년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그런 미소년이 저토록 가공할 만한 무예를 익힐 수 있단 말인 가?
“놀랍군. 내일 사사키 선생을 불러서 한번 확인을 해 봐야겠어. 도대체 어느 정도 수련을 쌓으면 이렇듯 술병을 손으로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지 말이야. 하여튼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무예가 고강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군. 수고했다, 마사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메지마 사마. 제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사메지마는 잘린 술병 조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마사코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 여태껏 오랫동안 시중을 들었는데 혹시 그들의 약점 같은 것은 발견한 것이 없나? 여자를 밝힌다든지, 혹은 돈을 좋아한다든지 말이야.”
“이방인들이 둘 다 술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한 방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들 중에 한 명이 저와 베게 를 함께하고 싶다고 해도 한 방을 쓰고 있는 이상 힘들 것입니다.”
사메지마는 쳐다보던 술병 조각에서 시선을 떼어 마사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흐음,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당장 그들이 각방을 쓸 수 있도록 조처해 주지.”
“옛, 그리고 돈 말씀이온데…….”
“돈? 돈이 왜?”
“아루테에스라는 그 붉은 머리의 이방인이 가지고 온 궤짝 말입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방에다가 던져놓고 돌아다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뭐 특별한 점이라도 발견했나?”
“옛, 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살짝 열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안에 금덩어리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사메지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급히 되물었다.
“금? 금이 말이냐?”
“예, 자세히는 알수 없으나 대략 보기에는 1천 냥(兩)은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니냐? 아루테에스 상은 아주 가볍다는 듯 한 손으로 가볍게 껴안고 다니던데, 어떻게 금이 자그마치 1천 냥이나 들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냐? 그 정도면 두 사람이 들고 다니기에도 벅찰 정도로 무거울 텐데…..”
“물론입니다, 사메지마 사마. 소녀가 한번 무게를 측정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간신히 들 수만 있었을 뿐 무게의 측정까지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랬을 테지, 금이 1천 냥이라면 그 외에 두꺼운 궤짝의 무게까지 합해서 최소한 열세 관(약 48킬로그램)은 족히 될 거야. 여자 혼자서 들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허~참, 그렇다면 그들의 말대로 상인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간자가 그렇게 많은 금을 들고 다닐 턱이 없으니 말이야.”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던 사메지마는 문득 자신의 앞에 마사코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을 깨닫자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가 보도록 해라. 그동안 수고 많았구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사메지마 사마.”
“특히 그 다쿠라는 소년 앞에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보니까 아주 잔인무도하기 그지없는 성격인 것 같던데, 잘못하면 큰일 나겠더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사메지마 사마.”
마사코가 떠나고 난 후 사메지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며 중얼거렸다.
“흠, 이상하군. 마사코에게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종합해 본다면 그들이 결코 간자일 리가 없어. 황금을 열세 관이나 가지고 다닌다? 그렇게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 고 다닌다면 상인일 가능성이 아주 크겠지? 그렇게 많은 금을 개인이 들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후쿠오카 쪽에서 보내온 정보로는 전혀 걸리는 것이 없으니 그들이 정식 계통으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은 듯한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