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6권 9화 –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대족장 타르티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벗겨놓은 듯한 넓은 가죽을 탁자에 쭉 펴면서 뭐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아르티어스 가 통역을 해 주었다.

“네가 부탁한 지도다.”

묵향이 쓰윽 훑어보니 지도는 둥루젠의 영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안선만 그려져 있었다. 왼쪽 윗부분에 그려져 있는 비스듬하게 내려간 사선은 일정 지점에서 끊어져 있었고,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땅은 뱃길로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오른쪽 밑 부분에 역시 평행한 사선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산과 강 등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의 문양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고,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었다.

“무슨 지도가 이래요? 도대체 이것도 지도라고 그려 놓은 거예요? 도대체 어느 정도 알아볼 수는 있게 그려 놔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밑은 왜 이렇게 허옇 게 되어 있는 거죠?”

묵향의 말을 아르티어스가 타르티에게 전한 뒤, 잠시 후 다시 묵향에게 타이티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그곳은 ‘다이방’이라는 곳인데, 대족장의 말로는 자신들의 조상이 태어난 곳 일뿐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섬겨 왔던 부족이 산다는군. 그렇기에 신성한 땅이라 서 접근할 수 없었기에 공백 상태라는 거야.”

“흐음, 이놈들의 조상이라면 안 봐도 뻔하겠군요. 아마 이놈들과 비슷한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겠죠, 뭐!”

말을 하던 묵향은 슬쩍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성한 곳이라 하니 어쩌면 그곳에 아빠 같은 사기꾼이 또 있을지도 모르죠.”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바꿨다.

“험험. 그, 글쎄다. 그나저나 지도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글쎄요, 여기는 되게 자세하게 그려져 있네요. 산이나 강, 그리고 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들이 표시되어 있잖아요.”

묵향이 가리킨 곳을 살펴본 아르티어스는 대족종과 한참 대화를 하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타르티가 말해 준 내용을 묵향에게 천천히 들려줬다.

“여기는 ‘지팡그’라는 나라인데 자신들에게 식량과 노예를 제공하는 터전이래. 그리고 금이라든지 은, 가축, 철 등등 모든 것을 여기에서 획득한다는군.”

“획득한다고요? 그건 대체 무슨 뜻이죠?”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획득이 획득이지 뭐겠냐? 설마 너는 이놈들이 무역이라도 하는 줄 알았냐?”

“그럼 해적질을 해서 먹고 산다는 말입니까?”

“뭐, 그렇게 이해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닐 게다.”

묵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고향인 송나라의 경우 국방력을 튼튼히 했기에 해적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광 시절 본 고서에는 송나라 그 이전에 세워졌던 많은 제국들의 흥망에는 꼭 해적의 무리가 끼어 있었다. 중원의 국력이 강할 때는 감히 해적질을 할 엄두도 못 냈지만, 국력이 약할 때는 동쪽 해안 전체가 들끓는 해적들로 몸살을 앓았다고 쓰여 있었다.

해적들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왜족(矮族)이었다. 왜족의 특징은 특이한 머리모양과 작은 키라고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묵향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족장 타르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확실히 머리 모양이 특이하긴 특이했다. 누가 봐도 중원의 머리 모양과는 완전히 달랐다. 빡빡 밀어 버 린 앞머리에 비해 뒷머리는 길게 땋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키는 또 어떤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대족장의 경우는 그래도 키가 제법 큰 편에 속했지만, 지금까지 보 아 왔던 원주민들은 영양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그런지 키가 대체적으로 작은 편이었다.

“으흠, 바로 이놈들이 왜족이었군.”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궁금한 듯 아르티어스가 반문했다.

“왜?”

“예, 옛날 어디선가 책에서 읽은 그대로에요. 저 특징적인 머리모양, 작은 키. 그리고 해적질.. 그렇다면 이쪽이 중원의 동쪽 해안일 거예요.”

묵향은 지도에 그려진 해적질의 주 무대가 되는 해안선을 가리키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중원의 위치를 찾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것이 문제이지 않겠니? 지금까지 본 야만인들의 모양새로 봤을 때……..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말을 하는 도중에 끊어 버렸다. 괜히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닌데 비관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뇨,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요. 원래 왜족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놈들이거든요. 사실 제 고향인 중원을 제외하면 주변국들은 모두들 문화가 한 단계씩 떨어진다 니까요. 오죽하면 저희들이 주변국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부르겠어요. 하지만 중원은 중화(中華), 그러니까 문화의 중심이라구요.”

확신에 가득 찬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혹 그 말이 틀렸다 하더라도 반박할 마음도 없었다. 중원을 찾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알 기 전까지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오! 그러냐?”

“물론이죠.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면 왜족들이 해적질을 주업으로 하겠어요? 그리고 그 해적질의 주 무대는 대체적으로 중원의 동쪽 해안이었죠. 그놈의 왜족들 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 해안의 방비에 너무 큰 국력을 낭비해서 망한 나라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죠.”

“흐흠, 좋아. 그럼 내가 저놈한테 중원으로 가는 배편이 있는지 물어보마.”

아르티어스는 지도의 한편에 이상한 기호가 잔뜩 표시된 지점을 가리키며 대족장에게 그곳으로 가는 배편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족장은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 으로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힐끔 바라봤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곧이어 부드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아르티어스에게 대답했다. 아르티어스는 대족 장의 그런 표정을 못 봤기 때문인지 미소를 지으며 묵향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배편을 알아 봐 준다는구나. 내 생각에는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약간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묵향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대족장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그래요? 잘되었네요.”

타르티는 아르티어스가 있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해리바를 자신의 알현실로 급히 불러 들였다.

“찾으셨습니까? 대한(大汗)이시여.”

“오, 어서 오게. 큰일이 났네. 그놈들이 지팡그로 떠나겠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떠나 버리면 자네와 함께 계획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겠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차라리 병사들을 보내 감옥에 감금시켜 버릴까?”

타르티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해리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떠나겠다고 하면 떠나게 놔두는 겁니다. 사실 이제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해리바의 생각이 자신과 너무 다르자 타르티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말인가? 그들이 있어야 탱게르의 뜻을 내가 이었다고 과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탱게르가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효과를 얻지 않았습니까? 비록 한 달 후에 대축제가 열린다고 해도, 이곳에 탱 게르가 왕림했었다는 것을 증언할 자는 수없이 많으니 그들이 없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의 명령에 따라서 그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며 가만 히 지켜본 결과 씨쥬에서 온 상인들이 아닌가하는 강한 의심이 들던 참이었습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그 빨간 머리는 우리말을 아주 잘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자 가 혹시라도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 날이면 자칫 대한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차라리 그자가 하루라도 빨리 이곳 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해리바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지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예, 아마도 그들이 지팡그로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씨쥬 상인들이 맞는 모양입니다. 요즘 지팡그에서는 씨쥬 상인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 두 눈이 벌 게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타르티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리바에게 명령을 내렸다.

“흠, 나도 그들이 지팡그로 보내 달라고 하기에 미심쩍게 생각하던 중이었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내일 당장 배 10척 정도 준비해 줄 테니 자네가 직접 갔다 오게. 일주일 후에 출발할 선단의 일정을 앞당겨 줄 테니까 말이야.”

타르티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리바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놈들이 씨쥬 상인이라는 것을 부족민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여태껏 공들인 것이 모두 허사가 될 테니까 말이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항구는 수많은 병사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대족장의 명령으로 전날 밤 갑자기 노략질하러 가는 일정이 일부 변경되었던 탓에, 오늘 새 벽에 출항 명령을 받은 전선들이 항해 준비를 갖춘다고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연락을 받고 항구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병사들은 물이나 식량, 그리고 창이나 화살 등의 무기들을 배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 중 한 명이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짐을 내려놓으며 천신의 이름을 외쳐 대기 시작했다. 그 외침은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 나가 짐을 나르고 있던 병사들과 노역자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리며 탱게르를 외쳤다.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주위를 쭈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호오, 항해 준비가 한참이었군. 그건 그렇고 우린 어떤 배에 타면 되는 거지? 도대체 대족장이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 거야?”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성 쪽에서 대족장 일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흠, 저기 오는군.”

대족장 타르티는 아르티어스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후 양손을 높이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런 다음 그가 뭐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병사들은 기운차

게 일어서서 잠시 미뤄 두고 있었던 출항 준비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타르티는 한참 동안 아르티어스에게 정중한 어조로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호위병들을 손짓으로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을 이었다. 그것을 뒤에 서 지켜보고 있던 묵향이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저놈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는 자신이 직접 배를 인솔하여 배웅을 해 드려야 하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함께 가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는군. 대신에 저 뒤쪽에 서 있는 호위병들을 붙여 주 겠대. 저들이 자기 대신 충성스럽게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는 거야.”

그 말에 묵향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제야 어제저녁에 봤던 대족장의 곤혹스러워하는 눈빛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빠.”

“뭐가 말이냐. 저놈이 바쁘다는데 뭐가 말이 안 돼. 대신 호위병을 붙여 준다잖아.”

“신을 모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겠어요? 저기 있는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주술사를 봐요. 여기에 있는 주술사가 그쪽의 마법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능 력을 지니고 있을까요? 아니죠. 지금까지 봐 왔던 것을 보면 알잖아요. 아빠를 보고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엉터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돌파리 주술사가 대족장 앞에 설 만큼 신을 떠받드는 곳인데, 현신한 신이 어딘가로 행차하시겠다는데 대족장이라는 놈이 일이 있어서 빠진다고요?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 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듯 안색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사실 저쪽 차원에 있을 때는 드래곤으로서 그 어떤 나라에 간다하더라도 국 왕급이나 공작급 정도는 되어야 자신을 맞을 자격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물며 드래곤보다도 한 단계 높다고 치는 신인데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아르티어스의 인상을 옆에서 묵향이 척 보니 손 좀 봐 주려고 부르는 것이 확실했다. 대족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확 구겨지며 대족장을 향해 두 손을 쭉 뻗었다. 곧이어 대족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공으로 부웅 날아서 아르티어스에게 끌려갔다. 그런 다음 벌어진 것은 정말 사람 잡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참혹한 구타였다.

퍽퍽 퍽.

“으헉! 큭.”

대족장이 두들겨 맞는 광경을 보고 있던 주위의 병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하나 둘 땅바닥에 엎드려 신의 자비를 빌기 시작했다. 비록 맞는 사람이 자신들의 대족장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지엄하신 천신이 아니신가? 거기에다가 대족장이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을 부웅 날아가서 천신의 손에 잡히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 을 본 다음이라, 병사들은 대족장을 보호하기 위해 나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험악한 표정으로 대족장을 패는 천신의 모습에 병사들은 경외감과 더불어 공포심마저 느끼며 바닥에 엎드린 것이다.

“탱게르, 탱게르.”

퍽. 꽈직.

한참 동안 탱게르라는 외침에 박자를 맞춰 화가 풀릴 만큼 대족장을 두들겨 팬 아르티어스는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라이팅 마법을 이용하여 온몸에 빛 무리를 뿜어내자 대족장과 병사들은 그 장엄한 모습에 납작 엎드린 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에게 준엄한 어조로 뭐라 하더니 손 을 쭉 내뻗었다. 순간 그 손에서 새하얀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전격 마법인 것이다.

번쩍.

“꽤액!”

전격 마법을 맞은 대족장은 처절한 비명을 질러 댔다. 잠시 후, 전격 마법이 끝난 뒤에 드러난 대족장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온몸에 털이란 털은 모두 그을 렸는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대족장은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자 미친 듯이 아르티어스에게 절을 하며 탱게르라고 외쳤다. 직접 천신의 기적을 체 험한 마당에 상대를 사기꾼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윽고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미소를 건넸다.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구나. 저렇게 믿음이 없는 놈은 확실히 신의 위력을 보여 줘야 믿거든. 원래가 신을 믿는데 있어서 증거를 보 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데 말씀이야. 그나저나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확실히 아르티어스가 보여준 ‘증거’의 효과가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대족장은 이전과는 달리 항해 준비를 솔선해서 지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주민들이 바글거리며 출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많은 항아리나 짐들이 배로 운반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으로 허겁지겁 올라갔던 병사 둘이 자그마한 궤짝 하나를 짊어지고 내려왔다. 비록 궤짝의 크기는 작았지만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둘이나 붙어 서 옮기는 데도 그들은 굵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족장 타르티는 그 궤짝을 병사들에게 받아들었다. 궤짝을 든 팔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는 것으로 보아 궤짝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대족 장은 궤짝을 번쩍 들어 아르티어스 앞에다 살그머니 놓은 뒤,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티어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가서 궤짝을 열어 보니 금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 었다.

“확실히 네가 말한 대로 이놈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게 확실한 모양이군. 능력을 보여 주니 대접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대족장이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들어 올렸던 궤짝을 아르티어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서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거 40킬로그램은 족히 나가겠는데?”

대족장은 아르티어스가 그 무거운 궤짝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한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무게를 가늠하는 것을 보자 기겁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묵향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사실 그 정도는 그도 가볍게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들고 가실 거예요?”

“후후, 이 정도쯤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들고 다닐 수 있지. 그리고 중원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지 않겠냐?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 흐흐흐, 역시 품 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려면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에구, 돈이야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건 그렇고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요.”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대족장은 자신이 직접 배로 안내했다. 대족장의 배는 길이가 거의 40여 미터에 육박하는 제법 큰 배였지만, 막상 타고 보니 좌우의 폭이 5미터밖에 안 되었기에 아주 좁게 느껴졌다. 배 위쪽에는 널찍한 갑판을 깔아 놨고, 그 위에 50여 명의 병사들이 각자 노를 하나씩 잡고 좌우측에 쭉 앉아 있었 다. 그리고 20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굵직한 동아줄을 정돈하는 등 항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족장의 배는 아주 컸기에 70여 명이 탔지만, 다른 배들은 중간 정도 크기가 50~60명, 작은 것은 20~30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10여 척만이 항해 준비 를 했던 것인데, 갑자기 대족장의 명령으로 1백여 척에 가까운 배들이 출항 준비를 했으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무려 4천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항해 준 비를 갖추는 것치고는 거의 기록적일 정도로 빠른 시간에 작업을 끝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