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7화 – 완옌 아구다
완옌 아구다
옥화무제가 맹주를 배알하고 무영문으로 돌아왔을 때, 서둘러서 그녀를 마중 나오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그는 옥화무제에게 깊숙이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문주님.”
옥화무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한 후, 내실로 걸어 들어가며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총관이 무슨 일인가요? 나한테까지 보고를 올려야 하는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예.”
그 말에 옥화무제는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은 그녀의 딸인 문주가 알아서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문주는 지금 어디 있나요?”
“예, 문주께서는 사천에 가셨습니다.”
“사천에?”
“예, 마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기에 급히 사천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옥화무제는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마는 것인가? 그렇다면 총관이 보고할 사항이라는 것도 바로 마교와 관계된 것인가요?”
총관은 서둘러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늘 아침 황궁에서 전서구(傳書鳩)가 도착했습니다.”
황궁에서 보내온 전서구라는 말이 옥화무제에게 얼마나 큰 동요를 줬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잠시 그녀의 걸음을 멈칫하게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서구를 이용하면 빠르다는 이점도 있지만, 도중에 발각될 우려도 높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전해야 할 만큼 긴급을 요하는 보고서라는 말이었 다.
“무슨 일인가요?”
“예, 일전에 문주께서 태상문주님께 상의드렸던 그 문제 때문입니다.”
“세금 문제 말인가요? 그 문제라면 이미 문주를 통해 지시를 내렸지 않나요? 술을 전매하는 것까지는 괜찮겠지만, 전매 품목을 더 이상 늘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고 했었는데 말이에요.”
송은 건국 이래 소금 전매를 정착시켰다. 그 때문에 밀염(密鹽)을 취급하는 자들도 많이 생겼지만, 막대한 세수 증대가 있었다. 그렇지만 요와 대치하고 있는 지금, 엄청난 군사비 지출로 인해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수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소금 전매에 착안해서 옥화무제가 생각해 낸 방법이 술을 전매하는 것이었다.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술을 전매함으로써 세수가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술은 소금처럼 생필품이 아니었다. 술값을 서너 배 올린다고 해서 백성들에게 타격이 갈 리 없었다. 거기에다가 판매용이 아닌 각 가정에서 담 가 먹는 술은 제약을 가하지 않았기에 크게 불만이 쌓일 리도 없었다.
“예, 물론입니다 태상문주님. 하지만 황실의 지출이 너무 극심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요의 황제에게 세폐(歲幣)로 지불하는 돈만도 은자 20만 냥 에 비단 30만 필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평화가 유지될 리 없다는 것을 태상문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쪽에 힘이 없으면 요는 언 제라도 맹약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린 후 대군을 몰아 침공해 올 것입니다.”
중원에서 일어선 국가가 힘이 약화되어 이민족에게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몰렸을 때, 그들은 그것을 공물이라 하지 않고 세폐라고 불렀다. 나 약한 민족이 강한 민족에게 물건을 갖다 바친다는 뜻을 지닌 공물보다는 새해에 한 번씩 약소국의 국왕에게 화친을 지속하자는 의미에서 하사하는 예물이라는 의 미를 지닌 세폐가 훨씬 대국(大國)의 체면을 세워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 때문에 요와의 국경선에 80만에 이르는 정예가 집결해 있잖아요.”
“예,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요에 건네주는 세폐와 군사비로 지출되는 금액만 재정의 8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의 재정이 건실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동관(童貫)의 보고에 따르면 채 재상의 주도하에 새로운 조세법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동관은 태상문주님이 지시 를 내려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그가 채 재상을 설득해서 새로운 조세법이 시행되지 않게 막을 수 있으니까요.”
동관이라면 현재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내시였다. 그리고 그 내시를 통해 그녀는 암암리에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황제가 등극하 는 데 그녀가 결정적인 도움을 줬었기에 가능해진 연줄이었다. 그리고 채경(蔡京)은 동관이 추천하여 재상(宰相)이 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동관의 말을 거역하기가 힘들었고, 동관은 옥화무제가 조종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간접적으로 재상인 채경을 이끌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 서 무영문의 태상문주인 그녀가 대 송제국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새로운 조세법이라고?”
“예, 태상문주님. 현재의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 각종 생필품들에 대해 더욱 폭넓게 과세를 하자는 것이지요. 현재 전매하고 있는 소금이나 술뿐 아니라 차 (茶), 백반 등 일용 필수품에 폭넓게 과세를 한다면 일거에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에 옥화무제는 어이가 없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 멍청이들은 그것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요를 격파할 때까지 만이라는 단서를 붙여 그렇게 세금을 거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안 그러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국경에 배 치된 어림군에게 군량조차 보낼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송은 파멸입니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던 옥화무제는 이윽고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대 송제국이 파멸할 수 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를 멸망시키는 것을 서둘러야 해요. 그토록 무거운 과세를 백성들에게 지운 다면, 잠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해요.”
“예, 태상문주님.”
방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 무사가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그녀는 살포시 의자에 앉으며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총관에게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몽고를 이용할 수는 없을까요? 몽고인들은 아주 용맹한 유목 부족이니 그들을 이용해서 요의 서북부를 공격하게 하고, 남쪽에서부터 어림군이 치고 올라간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옥영진 대장군이 몽고를 정벌한 이래, 아직까지 몽고를 통일할 만한 실력자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분열된 몽고의 힘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 에 진길영 원수가 요를 침공할 때 동원했던 여진족의 예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 부족을 끌어들인 결과 30만이나 되는 여진족을 끌어 모았었지만, 전력에 크게 보탬 이 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통일이라……. 아참! 여진족이 있잖아요. 얼마 전 총관이 올린 보고서 중에서 여진족의 동태에 관한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현재 여진족을 통일하고 있는 자 가 있다고 말이에요.”
“예, 태상문주님. 그가 바로 완옌 아구다라는 자입니다. 아주 용맹한 전사로서 고려의 북쪽 완옌부를 본거지로 삼아 세력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진길영 원 수가 대군을 이끌고 요를 정벌했을 때, 그와 함께 싸우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제법 세력이 커지자 아예 ‘금’이라는 칭호를 쓰며 황제로 등극했다고 합니다.”
“잘됐군요. 바로 그자예요. 아구다를 이용하는 거예요. 아구다를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신흥 제국이라면 강력한 힘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들을 이용해 보기로 “해요.”
“그렇다면 금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금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대 제국 요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요를 끝장낼 수 없다면, 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것과 같 은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요가 전력을 다해 본국을 공격해 온다면 지금의 재정 상태로는 몇 년 버티지도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금이 너무 강하지 않다는 것도 이점이 있어요. 일단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몰아내고, 그다음에는 금을 격파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죠. 그러려면 금이 너무 강해선 안 되는 것이죠. 알겠어요?”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태상문주님.”
“동관에게 전서구를 띄우세요. 채 재상에게 지시해서 비밀리에 금과 동맹을 맺으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몽고 쪽으로도 사람을 보내서 세력이 큰 부족들이 있으면 포섭하라고 하세요. 몽고, 금과 협공을 가한다면 요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예, 태상문주님.”
“물론 이 일은 비밀리에 행해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총관을 향해 옥화무제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혹시 비밀이 샐 우려도 있으니 이 모든 일은 구법당(舊法黨)에 맡기세요.”
“예? 하지만 비밀을 유지하려면 채 재상이 이끌고 있는 신법당(新法黨)의 사람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파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시다니 속하는 도대체 이해 하기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법당(舊法黨)을 이루는 것은 사마광(司馬光)을 계승한 화북 지방의 대지주, 대상인 출신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책도 매우 보수적 이었다. 하지만 왕안석(王安石)을 계승한 신법당은 남방 출신의 지위가 낮은 자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었기에 뒤에서 정치를 조종하고 있는 옥화무제의 입맛에는 신법당 쪽이 훨씬 더 잘 맞았다. 뭔가 정책의 변동이 크게 있어 야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은 법이니까 말이다.
“호호홋. 아무리 신법당, 구법당 해서 싸우고 있지만 그들도 같은 한인(漢人)이에요. 오랑캐에게 빼앗긴 연운 16주를 회복하자는데 당파를 따지겠어요? 아마 그들 도 전폭적으로 협조할 거예요. 만약 협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총관이 뒤처리를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이제야 대충 감이 잡힌다는 듯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예.”
“또, 그렇게 해 놔야 만약에 일이 뒤틀렸을 때 뒤처리가 쉬워져요. 상처 입은 요의 황제를 달래려면 누군가가 속죄물이 되어 줘야 할 테니까요. 물론 더불어서 반대 세력도 싹쓸이해 버리고 말이에요.”
총관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태상문주님. 명하신 대로 동관에게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진팔에게 조령이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지금까지 지나온 음식점들 중에서 제일 낫잖아요.”
그 말에 진팔은 서두르던 걸음을 멈추고 마지못해 대꾸했다.
“아니, 여기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음식 맛은 형편없어.”
지금까지 보아 온 진팔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배고픈 것보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조령의 장난기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령은 여기저기 보이는 모든 객잔과 객점들을 가리키며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형편없어요?”
“물론이지. 정말 돼지나 먹을까…, 사람이 맨정신으로 먹기는 힘들지.”
그녀는 멀리 보이는 다른 객잔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곳은요?”
“저기도 마찬가지야. 어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육포나 씹어 먹자고. 그게 제일이야.”
“지금까지 그런 말로 지나온 객잔이 한두 개인 줄 알아요? 저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구요.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해도 참고 먹을 수 있어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 지 않아요?”
“이 근처 객잔은 모두 다 그래. 예전에 내가 여기서 지내면서 다 가 봤으니까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자, 빨리 가자구.”
진팔은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따라갈 마음이 없는 듯 가만히 서서 말했다.
“예,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계속 이런 식으로 여행할 건가요?”
“왜? 지금까지 오면서 그런대로 구경할 거리는 있었잖아.”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여행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여행이 아니라 무림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구요. 무림 말이에요.”
조령의 말에 진팔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무림이라…, 지금까지 봐 온 모든 게 무림인데…….”
“진 형은 맨날 그 소리지만, 저는 좀 더 직접적인 걸 보고 싶다구요. 예를 들면, 유명한 문파를 구경한다든지…, 아니면 피 튀기는 비무 같은 거 말이에요.”
“쩝…, 꼭 그런 거를 봐야 하겠어?”
“예. 마침 이 근처에 문파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요.”
조령의 말에 진팔의 안색이 굳어졌다.
“남궁세가 말이군.”
“예, 바로 그 남궁세가 말이에요. 나는 거기를 구경하고 싶어요.”
“흐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남궁세가가 객점도 아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 그러니 빨리 가기나 하자구. 괜찮은 객잔을 찾아서 식사는 해 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반가워하는 기색도 있는 듯했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으면 한껏 비꼬 는 듯한 어조도 가미된 듯싶었다.
“호오, 이게 누구야! 진 형이 아니신가?”
진팔의 목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조령의 얼굴 또한.. 그곳에는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화려한 장검과 그가 입고 있는 값비싸 보이는 비단옷이 그의 신분을 약간이나마 속삭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10여 명의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 나같이 태양혈이 불끈 솟아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 중년인을 보자마자 진팔의 안색은 급격히 굳어졌다. 하지만 상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진팔은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남궁형을 뵙는군요.”
“오랜만일세.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안 보고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나? 진 형이 나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다니 이거 섭섭하구먼.”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상으로 봤을 때는 서로가 아주 절친한 사이인 듯싶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은 뭔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조령은 그것을 재빨리 감지 했다. 그녀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환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줬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듯 드러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암투의 와중에서 살아왔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각자 딴마음을 먹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그런 곳에서 말이다.
저 남궁형이라는 자와 만날 가능성이 있기에 그렇게 길을 서둘렀던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령은 갑자기 진팔에게 못 할 짓을 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 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령은 가능한 한 진팔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서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동행이 있었기에…….
진팔이 눈짓으로 동행들을 가리키자 상대는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진 형의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한 것 아니겠나? 자, 소개나 시켜 주게.”
진팔의 얼굴이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것을 보면 남궁형이라는 사내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진팔이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사내는 곧바로 조 령에게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 나는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남궁길이라고 하오. 진 형의 친구는 나의 친구와 같으니 편히 대해 주시기 바라오.”
조령도 마주 포권하며 인사를 갖췄다.
“조령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개도 주인을 봐가면서 때린다고, 무림에서 미심쩍은 상대와의 통성명은 매우 중요했다. 괜히 후환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대의 이름을 들은 후, 남궁길은 머리를 쥐어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조령이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혹시 서문세가에 적을 두고 계신 혁련검(赫聯劍) 조풍(趙風) 대협을 아십니까?”
무림에 수많은 조 씨들이 있기는 했지만, 남궁길이 건드려서는 안 될 조 씨는 조풍뿐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무림의 명숙이었고, 뛰어난 무공 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남궁세가를 등에 업고 있는 남궁길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장애 요인이 될 수 없었다.
문제는 남궁길이 그러하듯 조풍의 뒤에는 서문세가가 있었다. 서문세가는 현재 5대세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분노를 산다는 것은 아 무리 남궁세가를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하지만 조령은 이런 질문을 던진 상대의 속셈까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상대가 혹시 혁련검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일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기에 실례되지 않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혁련검 대협의 존성대명(尊性大名)을 들어 보았으나, 아직 인연이 없어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대답이 남궁길의 마음에 든 듯 반색을 하고 대답했다.
“호오, 그렇습니까?”
약간 이죽거리듯 대답한 후, 남궁길은 더 이상 조령에게 미련이 없다는 듯 진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듯 오랜만에 만났는데 길거리에서 인사나 하고 헤어질 수야 없지 않겠는가? 마침 본가가 멀지 않으니 며칠 묵으며 담소나 나누세. 오랜만에 벗을 만났는데 대취(大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궁길의 어투는 매우 은근하면서도 정겨웠지만 그것을 듣는 진팔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남궁형의 제의는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갈 길이 바빠서.
하지만 진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남궁길의 뒤편에 서 있는 무사들의 손이 장검의 손잡이가 있는 부분으로 슬그머니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을 재빨리 눈치 챈 진팔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남궁형이 부탁하시는데 뿌리치기가 어렵군요.”
남궁길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내 그럴 줄 알았다네. 내가 아끼던 좋은 술이 있으니 밤새 통쾌하게 마셔 보세나.”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곁에서 봤다면 친한 친구 집에 술 마시러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진팔 일행을 숙소에 안내해 준 다음 남궁길은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나직하게 명령했다.
“철저하게 감시해라.”
“옛!”
남궁길은 내당 쪽으로 들어서며 경비 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