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2화 – 사형의 복수
사형의 복수
묵향은 만통음제와 헤어진 후, 화산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사제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들어야 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산파로 들어가는 길가에 커다란 방이 붙어 있었다.
“본문의 영역에 침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쭉 읽어 내려가던 묵향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꼭 죽였다는 표현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말투로 봤을 때 처형했다는 냄새를 슬그머니 풍기고 있었다. 사 실 죽였다고 하면 관에서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나올 가능성이 다분하므로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경고문을 쓴 것이다.
묵향은 이빨을 갈면서 중얼거렸다.
으드드득!
“이 빌어먹을 녀석! 사부의 얼굴을 봐서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어디 두고 보자. 아예 모가지를 비틀어 주마.”
묵향은 염왕대를 찾아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화산 인근에 숨어 있으라고만 명령을 내려놨으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묵향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묵향은 그들 을 찾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가 마교의 고수들은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이 마공을 익힌 것에 대한 대가라면 대가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보통 무림맹의 고수들처 럼 일반인으로 슬그머니 위장하여 사람들 틈에 묻어서 이동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마교의 정예들은 집단을 이뤄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하여 밤에만 움 직여야 했다. 하지만 뛰어난 무공을 지닌 그들에게 그런 것은 큰 장애 요인이 될 수 없었다.
묵향은 염왕대 무사들이 뿜어내는 마기를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민한 감각을 갖춘 묵향에게 있어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예상과는 달리 묵향은 무려 5일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염왕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화산이라는 것이 진령산맥(秦嶺山脈)의 끝자락에 자리한 곳인 만큼 산 세가 험해 숨을 곳이 무진장 많았기 때문이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오는 자가 지옥혈귀(地獄血鬼) 천진악(天進惡)이란 것을 알아본 묵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천 장로가 여기는 웬일인가?”
그 말에 천진악은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교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는 수하들이나 저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속하가 인솔하고 왔습니다.”
“잘했군. 그건 그렇고 뒤를 밟히지는 않았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천진악은 솔직히 대답했다.
“도중에 무영문으로 추정되는 무리에게 추격을 당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 멀리 대파산맥 쪽으로 돌아왔기에 그들은 우리들이 화산 쪽으로 온 것을 도저히 눈 치 챌 수 없을 겁니다.”
“무영문? 확실한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놈들을 사로잡아 신문할 틈이 없었습니다.”
“뭐, 놈들을 따돌렸다면 다른 건 상관없겠지. 그런데 화산파에 대한 정보는 입수해 놓은 것이 있나?”
“물론입니다, 교주님. 설민 군사의 명령으로 화산파 일대에 비마대(秘魔隊)의 고수들이 쫙 깔려서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천진악의 보고에 묵향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알아서 수하들이 척척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호오, 그래? 홍진 대주의 힘이 컸겠군.”
“물론입니다. 저희들이 도착하자마자 비마대의 대원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정보를 전해 받았을 정도니까요.”
“좋아, 공격이 시작되면 현천검제는 본좌가 맡겠다. 자네는 부하들을 지휘하여 남은 화산 문도들을 도륙 내버리도록 해라.”
하지만 묵향의 지시에 천진악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현천검제는 갑자기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춘 것으로 보고가 올라와 있는데, 교주님께서는 그가 지금 화산에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천진악은 서류 몇 장을 묵향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직 그의 실종에 대해서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이것이 비마대에서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순간 묵향은 현천검제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놈들이…….”
묵향은 이빨을 으드득 갈면서 천진악에게 명령했다.
“비마대에 연락을 넣어 현천검제를 찾아라.”
“예? 은퇴해서 어디에 숨어 버렸는지도 모르는 그를 어떻게..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는 화경의 고수가 갑자기 은퇴할 리가 없지 않느냐. 뭔가 흑막이 있는 거겠지. 화산을 집중적으로 수색해라. 어쩌면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새로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면 그것도 파 뒤집어서 확인해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를 찾아내란 말이다! 알겠느냐?”
“존명!”
그로부터 3일 후, 묵향은 비마대의 첩자들이 현천검제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묵향이 10여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달려가자, 동굴 앞에는 흑녹색의 우중충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 셋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묵향을 알아본 듯 황급히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비마대 제14조장 왕석(汪奭), 교주님을 배알하옵니다!”
그러자 왕석과 함께 있던 인물들도 황급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묵향은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됐다, 일어서거라. 그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이곳이옵니다.”
왕석이 가리킨 곳은 동굴 안이었다. 묵향은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사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제의 모습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팔과 다리의 힘줄은 끊겼고, 제대로 치료도 안 된 상처는 곪아 터져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개새끼도 아니고 목에 는 굵은 쇠사슬이 매여 동굴 벽에 묶여 있었다.
묵향은 황급히 다가가서 사제의 상태를 살펴봤다. 단전이 파괴되며 상당한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 태였다.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지났다면 묵향은 아마도 사제의 시체와 만났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사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꼴을 만들었다는 말이냐! 진정한 무인은 죽일지언정 모욕은 주지 말라고 하였거늘…….”
묵향은 재빨리 손을 사제의 단전에 가져갔다. 그런 다음 주위에서 기를 빨아들여 사제의 단전에 쏟아 부었다. 엄청난 기의 회오리가 사제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치 며 단전을 복구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괴된 단전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묵향과 현천검제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묵향이 가진 힘을 모두 끌어올리자 주위에 있던 대자연의 기에 의해 허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두어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묵향의 이마에 조금씩 땀방울이 맺힐 때쯤 파괴된 현천검제의 단전이 천천히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화경에 달하는 거대한 공력 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형상으로 말이다.
어느 정도 단전에 대한 치료가 끝나자 묵향은 기를 이끌어 사제의 몸속을 휘돌게 만들었다. 기는 일정한 법칙을 그리며 사제의 몸속을 꾸준히 맴돌며, 내상을 회복 시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제는 정신이 드는지 신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제, 정신이 드느냐?”
“이, 이 목소리는…, 사형이십니까?”
“그래, 내가 왔다네.”
“사형을 뵙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사형의 목소리와 모습을 보고 나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듯하군요. 외람된 부탁이지만 제가 죽으면 사부님 곁에 묻 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 살려 놨는데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고 유언을 하다니. 하지만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 사제의 마음이 찡하게 와 닿았기에 묵 향의 눈에는 어느덧 살짝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묵향은 슬쩍 눈물을 닦아 버리고는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나중에 죽으면 거기에 묻어 주기로 하지. 그 외에 딴 부탁은 없느냐?”
“사형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건 뭐 하려고 그러십니까?”
현천검제는 묵향이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는 것을 보고 물은 것이다. 묵향은 피식 웃으며 슬쩍 손을 써서 사제의 턱뼈를 탈골시키며 말했다.
“마취제도 없고, 입을 틀어막을 것도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것일세. 혹시나 잘못해서 혀를 깨물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다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은 자네도 알지? 재주껏 참아 보게나.”
턱뼈를 탈골시켜 버리면 당연히 혀를 깨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묵향이 뭔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한 것은 현천검제만의 착각이었을 까?
“아니, 점혈만 하면 끝나는 일을 턱을 뽑다니…, 지금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턱뼈가 뽑혀 버린 현천검제의 입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의 입에서는 괴상한 소리만이 안타깝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 으… 으… 읍…….”
“크흐흐흣, 색깔이 시커먼 것을 보니 확실히 손을 써야겠군.”
희번뜩거리는 묵향의 눈을 바라보는 현천검제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맞아. 저 인간은 그런 놈이었지. 내가 한순간이라도 저 인간을 사형이라고 믿었다니…….’
묵향의 비수가 썩어 들어가는 사제의 살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우으으으윽!”
턱이 빠진 탓인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기나긴 비명 소리가 참회동 안을 가득 메웠다.
시커멓게 썩은 핏물이 한동안 쏟아져 나오더니 이윽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묵향은 그 위에 금창약을 발라준 후, 현천검제를 살펴봤다. 지독한 고통 때문인지 치료를 받던 현천검제의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벌써 기절해 버렸나? 조금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약골이었군.”
현천검제는 깨어나자마자 묵향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치료가 끝난 후 묵향이 그의 턱뼈를 바로 맞춰 줬기에 말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무식한 치료법이 있다니……. 그리고 혈도만 짚으면 끝날 일을 가지고 다짜고짜 턱을 뽑다니,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묵향은 순간 흠칫하더니 곧이어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군. 그런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노부가 손을 쓰기 전에 빨리빨리 말해 줬으면 서로가 좋았지 않았겠나. 자네도 고통을 받 지 않았을 테고, 내 귀도 고생을 좀 적게 했을 테고 말일세. 사서 고생을 하다니 자네도 참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군.”
턱뼈를 뽑은 후 그 의도를 말해 줬었기에, 현천검제로서는 그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더욱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저딴 소리를 변명이랍시고 늘어놓고 있다니…….’
한 번 상대를 오해하기 시작하니, 상대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그 오랜 세월 쌓아 놓은 도력(道力)조차 하나도 도움이 안 될 정도였 으니,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이해할 만했다.
“오리발 내밀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할까 봐서 재빨리 턱을 뽑으신 거 아닙니까?”
그의 지적에 묵향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는가, 사제. 설마 노부가 사제를 괴롭히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 노부는 그렇게 심성이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네.”
묵향의 가증스러움에 현천검제는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런 젠장,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주제에. 그건 그렇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어찌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거 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현천검제는 기절할 뻔했다. 단전이 파괴되었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사형이 천고의 영약이라도 먹인 것인 가정파라고 자부하던 사형들은 그토록 악랄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떻게 마교에 있는 사형은 이토록 정도 많고 멋이 있는지…….
한 번 사람을 잘 보게 되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다 좋게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방금 전에 당한 모든 일이 자신의 오해였다고 판단 했다. 하지만 사실은 오해가 아니었다. 묵향은 자신을 이토록 귀찮게 만든 사제를 혼내 주고 싶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일단 대충 응급조치는 취했으니 운기요상이라도 좀 하게. 내가 강제로 하기는 했지만 자잘한 곳까지 손을 쓰기는 귀찮은 일이거든.”
현천검제는 쇠사슬을 철그럭거리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묵향이 뒤에서 말했다.
“내가 기를 인도할 테니 잘 기억하게. 기왕에 내공을 다시 쌓을 건데 가장 좋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묵향의 말뜻을 금세 이해한 현천검제가 물었다.
“사형께서 전수하실 심법의 이름은 뭡니까?”
“태허무령심법이라는 것일세. 잊혀진 현문의 심법이지. 뛰어난 효능이 있지만 이것을 대성하는 데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익히는 자가 없다 보니 어느 사 이엔가 절전된 것이라네.”
현천검제는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기왕 사문을 버린 마당에 어떤 심법을 익히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 사문의 심법을 이용하여 내공을 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의 한 시진 동안 운기조식을 하던 현천검제가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몸을 구속하던 쇠사슬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끝났느냐?”
“예.”
“수하에게 말해 놨으니 객잔에 가서 푹 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좀 섭취하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사형.”
현천검제는 잠시 묵향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사형,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것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복수를 원치 않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흥!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네 녀석의 복수를 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감히 본좌의 명을 거부하는 놈은 어떤 꼴을 당하게 되 는지 보여 주려고 찾아왔을 뿐이지. 하지만 일단 와 보니 그렇게 간 큰 짓을 하는 놈이 네가 아님을 알고 너를 찾은 거다. 알겠냐?”
말이라도 좀 좋게 하면 어디가 탈이 나는가? 현천검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그런데 화산파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본좌의 말을 거부하는 놈들은 당연히 멸문시켜 버려야지. 내가 그놈들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 않느냐. 화산을 멸문시키는 것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 이니 절대로 착각하지 말도록 해라.”
이미 묵향 사형을 굳게 믿고 있는 현천검제는 상대의 퉁명스런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따뜻하기 그지없는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시려고, 내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로군. 나로 인해 화산파를 공격했다면 내가 너무나도 가슴 아파 할 거라는 것을 잘 아실 테니 말이야. 사형의 그 따뜻한 마음,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속마음이 그렇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도 한때 화산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화산파를 멸문시킨다면 지금 화산에 남아 있는 자신의 제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자신의 사정을 말하기 위해 묵향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형, 화산의 전 문도를 쓸어버리는 것은 아무리 사형이시라도 좀 힘드실 텐데요. 웬만큼 하시고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큭, 그럴 줄 알고 염왕대를 대기시켜 놨으니 걱정 말거라. 자, 그럼 오늘은 푹 쉬거라.”
그와 동시에 묵향은 방금 전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현천검제가 그렇게 원했던 행위, 즉 혈도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현천검제를 잠들게 만들었다. 괜히 그 가 사문에 대한 의리를 지킨답시고 이것저것 떠들면 일이 귀찮을 테니 말이다. 손 다리가 불구라고 해도 그는 현재 화경의 무위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런 그를 수하 몇 명이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혈도를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이런 행동 때문에 현천검제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못하고 말았다. 하다못해 자신의 제자들만이라도 살려 달라는.
“객잔에 데려가거라.”
“옛!”
“본좌는 화산을 쓸어버린 후 그곳으로 갈 것이야.”
“알겠습니다, 교주님!”
“수하들의 배치는 끝났는가?”
묵향의 물음에 천진악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명만 하십시오.”
“그럼 지금 시작하기로 하지.”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진악은 수하에게 지시했다.
“신호를 올려라.”
그 명령에 따라 수하 한 명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충분한 내력이 실린 장소성은 화산파 주위를 휘감고 돌며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화산파를 중심으로 다 섯 군데에 나누어 대기하고 있던 염왕대가 돌격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모두 다 죽여 버려랏!”
묵향은 돌격하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해지기 전에 끝나겠군.”
화산파에서는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침입입니다.”
“마교 놈들이 침입했다!”
여기저기에서 도포 자락을 날리는 화산파의 제자들과 흑녹색의 옷을 걸친 마교 고수들 간의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는 화산파 쪽이 월등하게 많았지만, 마 교도들은 염왕대의 고수들. 그것도 처음부터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다 보니 마교 쪽으로 전세가 급속도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화산의 고수들도 적의 침입에 맞서 칠성검진(七星劍陣)이나 옥청검진(玉淸劍陣) 등 각자의 수준에 맞는 검진을 구축하여 저항하기 시 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끝날 것처럼 보였던 전투는 조금씩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천진악이 나섰다. 그는 여기저기 전장을 누비며 검진에서 주축이 되는 한두 명만을 없애 버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검진은 자연스럽게 무너 져 버렸고, 순간적으로 검진이 와해된 틈을 노려 공격해 오는 마교도들에 의해 하나하나 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사방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신경도 쓰지 않고 화산파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 칠성검진 을 치고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봐, 너희들은 딴 데 가 봐.”
“존명!”
그와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칠성검진을 공략하고 있던 마교도 수십 명이 공격을 멈추고 다른 곳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칠성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자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듯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바로 장로들 중에서 가장 맏이인 백화 장로였다.
“귀하는 누구시오? 노부는 화산의 백화라고 하오.”
그때 옆에서 다른 장로가 외쳤다.
“대사형, 저자가 바로 장문인실에 침입했던 마교 교주입니다!”
그 말에 백화 장로는 다시 한번 묵향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때와 상황도 다르고, 또 옷차림도 달라서 교주를 못 알아봤음을 용서하시구려. 그런데 대체 왜 본문을 침입한 것이오이까?”
그 말의 대답은 묵향이 아니라 공천 장로가 대신했다.
“대사형, 그것도 모르시오이까? 저자는 지금 그놈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겠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복수? 누구의 복수를 말하는 것이냐? 오호라, 현천 사제를 말하는 모양이군.”
묵향이 사제라고 하자 장로들은 모두 흠칫했다. 사제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교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그가 어떻게 교주의 사제라는 말씀이오?”
“아아, 정식 사제라는 말은 아니야. 내 사부들 중의 한 명이 그놈에게 심심풀이로 검술을 조금 가르쳐 준 모양인데, 그 때문에 편의상 사제라고 부르는 거야.” 백화 장로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며 따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제의 복수를 위해 본문을 공격했다는 말씀이오?”
“아니, 그것은 그 멍청한 녀석이 자초한 것. 녀석은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어. 그런데 사문에 대한 얄팍한 충성심이 그놈을 그 모양으로 만든 것이지. 그건 놈의 선택이었다. 어찌 감히 네놈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고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왜 화산파를 공격한 것이오?”
“물론, 본좌와의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지. 그렇게 되면 화산을 완전히 쓸어버릴 것을 네놈들은 몰랐단 말이냐?”
그 말에 장로들은 현천검제가 마지막으로 청했던 부탁을 거절한 것을 떠올렸다. 현천검제는 그것을 거절하면 마교가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었을까?
“그, 그럴 수가……. 겨우 사파의 작은 문파와의 다툼 때문에 대 화산파를 건드린단 말이오? 무림맹에서 당신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소?”
“호오, 감히 무림맹 따위로 노부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 무림맹 따위가 무서웠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이 멍청이들아.”
현경의 고수가 행하는 기습 공격은 너무나도 무서운 것이었다. 화산의 장로들은 상대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입씨름을 하 고 있던 상황이었고, 또 마교의 교주쯤 되는 인물이 이토록 치졸하게 기습을 가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기습에 대한 대비는 갖춰지지도 않 은 상태였다.
묵향의 목표는 단 한 사람. 칠성검진을 이끌고 있던 핵이라 할 수 있는 백화 장로였다.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연결되는 묵향의 공격은 빛과 같이 빨라서 감히 눈으 로 쫓아가기도 힘들 지경이었지만, 백화 장로는 최선을 다해서 회피하며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에게 기선을 뺏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실책이 었다. 주위에 있던 사제들이 대사형을 돕기 위해 뛰어들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결전은 끝난 후였다.
“으아아악!”
푸른빛이 번쩍이는 순간 백화 장로의 두 다리가 뭉텅 잘려 나간 것이다. 피가 뿜어져 흘러내리자 백화 장로는 재빨리 점혈하여 출혈을 막았다.
“대사형, 괜찮으시오?”
“노부는 괜찮으니 사제들은 저자의 공격을 조심하게. 언제 또다시 기습을 가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일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검을 잡고 전의를 불사르는 백화 장로를 보며, 사제들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교주라고 해도 자신들 모두를 상대하려면 결코 쉽지는 않을 거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말이다.
하지만 한번 빼앗긴 기선은 결코 되찾아올 수가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공격을 가해 오는 묵향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사이에 이 동은 하지 못하고 검만을 휘두를 수 있는 백화 장로가 끼여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존재가 그들의 통합적인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또다시 피 보라가 피어나며 한 사람이 쓰러졌다. 공천 장로의 다리까지 깨끗하게 잘려나가자 그들은 이제야 백화 장로의 다리를 자른 것이 완전히 고의적인 행위 였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렇게 잔인무도할 수가.”
“네놈은 어떻게 이런 흉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빈틈을 노려 공격한 것도 아니고, 다리만을 자르다니! 네놈이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묵향의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얼굴 가죽이 두꺼운지 모르겠군. 자칭 도사라고 하는 네놈들도 그렇게 했잖아. 안 그래?”
묵향의 지적에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들도 현천검제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저놈을 쳐라.”
하지만 이미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두 명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도주한다면? 자신들보다 경공술이 월등히 빠른 상대를 앞에 두고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하는 것 외에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으아아악!”
묵향에게 저항하던 화산의 장로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 명씩, 한 명씩 다리가 떨어져 나간 불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 었지만, 희망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한 사람의 다리까지 잘라 버린 후, 순간적으로 묵향의 손에서 일곱 줄기의 시퍼런 강기의 덩어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기묘한 곡선으로 휘어지며 이 동하더니 일곱 장로의 단전을 한순간에 꿰뚫었다.
“크아아악!”
내가의 공력을 익힌 상승고수라면 단 한 올의 기만 있어도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단전이 파괴되어 기가 흩어진다면,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자살할 수 없게 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 깨달은 순간, 그들은 사형제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목적을 막는 것. 그것 외에는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 이 아니었다. 묵향의 손에서 일곱 줄기의 지풍이 쏘아져 나와 검을 쥐고 있는 각자의 손을 격중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크악!”
각자가 쥐고 있던 애검들은 주인의 뜻을 배반하고 맑은 쇳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크흐흐흣,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어리석은 것들. 이제 네놈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또다시 묵혼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들의 팔은 몸에서 떨어져 나가 땅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제, 제발 죽여 주시오. 그대도 무인이라면 노부들에게 이런 치욕까지 안기지는 말아 주시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을 묵향이 아니었다. 묵향은 그들의 혈도를 점하여 지혈까지 시켜 준 다음 싸늘하게 말했다.
“물론 무인에게 치욕을 가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네놈들은 도사도, 무인도 아니야. 현천 사제에게 행한 일을 생각해 봐라. 네놈들이 과연 무인으로서 행할 일을 했 는지 말이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단전이 파괴된 화산의 노고수들은 자신들이 현천검제를 제거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들은 탄식과 신음 소리만을 울릴 수 있을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에게 죽음이 찾아오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뿐.
묵향의 작은 복수가 끝났을 때, 화산에서 들려오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이미 멎어 있었다.
천진악은 비참하게 울부짖으며 버둥거리고 있는 화산 장로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교주께 결과를 아뢰었다.
“교주님, 승전을 경하드리옵니다.”
“모두들 수고했다. 너희들은 이 길로 본교로 돌아가도록 해라.”
“옛, 그런데 저들은.
자신이 그들의 목을 잘라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줘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은 그렇게 죽을 가치조차 없는 놈들이다! 그대로 놔두도록 해라!”
“옛! 그런데 화산의 무공비급이나 재물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모두 다 끌어내어 본교의 창고에 넣어 두도록 해라.”
“옛!”
“그리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
“예?”
보통 쑥대밭을 만든 후 불을 지르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천진악이었다.
“불을 지르면 그것을 보고 어떤 놈이든 올라올 것이 아니냐. 본좌는 화산이 멸문되었다는 것이 빨리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니 저 밑에다가 ‘본문에 일이 있 어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 놓거라. 그러면 너희들이 총타로 돌아가는 데 편리할뿐더러 저 버러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하는 데 충분한 시간 을 얻게 되겠지.”
천진악 장로는 교주의 잔인함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묵향은 백화 장로가 사용하던 검을 집어 들어 천진악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화산을 멸문시킨 기념품은 챙겨야겠지? 이건 그대가 가지도록!”
그 검은 바로 화산 장문인을 뜻하는 신물인 보검이었다. 천진악 장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자신에게도 좋은 검이 있긴 하지만, 이런 훌륭한 기념품을 자신에게 양보하는 교주의 배려에 그는 크게 감동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이건 사제한테 주면 좋아하겠군.”
묵향은 또 다른 검을 주워 들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바로 공천 장로가 떨어뜨려놓은 것으로, 현천검제의 애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묵향의 사부인 유백의 애검 명 옥검이기도 했다.
검을 주워 든 묵향은 천진악을 향해 말했다.
“그럼 본좌는 이만 가 보겠다. 더 이상 시킬 일은 없으니 정리가 끝나면 수하들과 함께 본교에 귀환하도록 해라.”
“옛!”
묵향이 돌아가고 난 후, 염왕대는 전사자들과 중경상자들을 수습하는 한편 화산파 곳곳을 뒤져 보검 같은 귀중한 물품들을 모두 다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