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20화 – 적과의 동맹
적과의 동맹
회하 이북이 모두 금에게 넘어가자 무림맹은 이제 자신들이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직까지 마교는 조용했다. 만약 이번 전쟁에서 그들이 금의 손을 들어 줬었다면 회하의 저지선 따위는 하루아침에 돌파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 말은 마교가 아직까지는 금의 손을 들어 주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괜히 무림맹과 동맹을 맺는다는 둥 하는 계략을 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무 림맹의 수뇌부가 깨달았을 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개봉이 함락된 후니 말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맹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던 장로들은 통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무림이 황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했지만, 이민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크흐흑,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하다니…….”
오열하는 장로들을 향해 맹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모든 장로님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설혹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님들께서 물려주신 이 땅을 오랑캐 따위에게 내줄 수 는 없는 일 아니겠소.”
“물론입니다. 마교가 본맹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놈들도 한족이 아닙니까? 일단 여진족 놈들을 몰아낼 때까지는 연합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맹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득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마교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소?”
“옥화 봉공이 가장 적임자일 듯싶습니다. 처음에 마교 놈들이 동맹을 제의했을 때도 그분을 통해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그분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 을 겁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옥화 봉공에게 전서를 띄우도록 하시오.”
그때, 갑자기 백량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잠깐! 노부가 맹주께 한 가지 질문드릴 것이 있소이다!”
“무엇이오, 맹호검군 장로?”
“맹주께서는 마교와 금이 합작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고 계십니까?”
맹주는 갑자기 백량 장로가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맹주는 인내심을 갖고 대답해줬다.
“현재까지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백량 장로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노부가 전에 맹주께 주청드린 사안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제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금 황제의 목을 베어다가 바치겠소이다!”
만약 마교와 금이 합작한 것이 아니라면 금 황제의 주변을 호위할 뛰어난 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제야 백량 장로의 뜻을 이해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허락하겠소이다. 맹호검군 장로께서 성공하기를 빌겠소.”
백량 장로는 깊숙이 포권하며 대답했다. 그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소이다.”
매화검군 장로가 보무도 당당하게 회의장을 나간 후 맹주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일단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구려. 금 황제가 죽는다면 금의 세력은 순식간에 위축될 것이 분명하니, 구태여 마교와 합작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묵향과 옥화무제는 또다시 자리를 함께했다. 중원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경공의 대가들에게 있어서 서로 간의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그 들은 아예 호위조차 거느리지 않고 있었다.
묵향은 의자에 쓱 앉은 후 객잔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기다리고 있던 옥화무제에게 아는 척을 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군. 이봐, 점소이.”
“옛, 손님.”
“술 좀 가져와. 그리고 안줏거리 아무거나 하고 말이야.”
“옛!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역사적인 동맹이 시작되는 날인데, 축배를 들어야 할 것 아니겠어?”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조금 헛다리를 짚기는 했지만 말이다. 옥화무제는 시치미를 떼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동맹을 제의하러 온 것을 알았죠?”
“당연하지. 송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그 늙은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알았겠지. 멍청한 것들.”
“…..”
한참 동안 말없이 옥화무제가 생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 투박스런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틀렸어요. 그 늙은이들은 아직까지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모르고 있죠.”
“이런 제기랄! 그럼 뭣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야?”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화무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당신, 옛날에 만났을 때와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거 알아요?”
그때, 점소이가 술을 가져왔기에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술잔에 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본좌가 뭐가 달라졌다고…….”
“옛날에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말에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훗, 과찬이군.”
그 말에 옥화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칭찬은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나도 단순무식하게 생각했기에, 이쪽에서 판단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뿐이니까 말이죠.”
묵향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후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 제대로 봤네. 본좌가 원래 좀 무식하거든.”
뻔뻔스레 대꾸하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렇게 얼굴 가죽이 두꺼울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말을 꺼낸 자 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당신의 생각이 보이더군요. 그걸 보면 당신은 굉장히 많이 발전한 거라구요.”
묵향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이죽거렸다.
“호오~,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죠.”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한 뭉치의 문서였다.
“그게 뭔데?”
“당신이 금과 싸우려는 이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향의 손이 휙 움직이더니 문서를 낚아채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읽고 있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당신이 협상을 원했던 완옌 렌지에 대원수가 바로 그예요.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그의 능력상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묵향은 문서 뭉치를 품속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그렇게 위험한 놈이 아니었다면 노부가 그렇게 혈안이 되어 놈의 행방을 찾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의외로군. 설마 대원수 나으리가 되 어 계실 줄이야. 이거 크게 한 방 먹었구먼.”
묵향의 어감에는 묘한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가 20여 년간 직접 교육시킨 고수만 1만에 달해요. 물론 그것도 다 천마혈검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그 혼자서 그 많은 고수를 키운다는 것은 불가 능했을 테니 말이에요.”
뿌드드드득!
묵향은 이빨을 갈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는 옥화무제에게 말했는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공포스러운 뭔 가가 깔려 있었다.
“장인걸이 금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 본좌는 본교의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야.”
“물론이죠. 저는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뿌릴 정도로 몰염치하지는 않아요. 언제나 한 가지 정보는 한 명의 고객에게 그게 제 신조죠. 그런 의미에서 정보료를 청구하고 싶은데요.”
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한다는 듯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전표 다발을 꺼냈다.
“은자 1천 냥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물론이죠. 고맙게 쓰겠어요.”
그녀는 그 돈으로 군량을 사서 양양성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금 황제 아구다를 참살하겠다며 호언장담한 후 보무도 당당하게 무림맹을 떠났던 맹호검군 백량 장로가 돌아왔다. 그것도 혼자. 그가 거느리고 떠났던 1백 명의 고수는 단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었고, 백량 장로 혼자 돌아온 것이다.
무림맹의 수뇌부는 맹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인 백량 장로가 수하들을 모두 잃고 엉망진창이 되어 도망쳐온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씀이오?”
백량 장로는 비참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노부 평생에 이토록 참담한 적은 없었소이다. 노부도 수하들과 함께 죽고 싶었으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아 돌아왔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 차근차근 말씀해 보시구려.”
“개방에서 제공한 지도를 통해 연경궁 내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소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황제의 행방은 알 수 없었소. 그도 그럴 것이 그자가 거느린 첩 실이 한둘이겠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수색하며 내부를 살펴나갈 수밖에 없었소. 그러다가 그들을 만났소.”
백량 장로의 눈에 짙은 두려움이 깔리는 것을 보고 장로들은 말을 재촉했다.
“그들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바로 마교 놈들 말이오. 수는 약 40명 정도였는데, 그 개개인의 실력이 노부와 맞먹을 정도였소. 아니, 어쩌면 더욱 강한지도 모르겠소.”
그 말에 장로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말이 쉬워서 40명이지, 무림맹 장로급이 40명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한 명 한 명만 해도 엄청난 실력인데, 만 약 그들이 집단으로 움직인다면 화경의 고수라도 찜 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맹주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이 정말이오, 백량 장로?”
“노부가 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노부가 거느린 수하들은 도무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소. 그들 중에서 겨우 20명이 덤볐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수하들이 죽 어 나가더이다. 그래서 노부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크흐흐흑!”
백량 장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날 밤에 벌어진 참극을 다시금 회상하자니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한 모양이다. 잘 갖춰진 함정에 멋모르고 기어 들어가 아끼던 수하들만 몽땅 죽이고 돌아왔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맹주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토록 중대한 정보를 전해준 백량 장로께 감사드리는 바이오. 노부는 맹주의 권한으로 옥화 봉공을 소환할 것을 명하는 바이오. 무영문이 무림 제 일의 정보통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마교와 금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오. 그런데도 본맹에게 마교와 합작할 것을 권했다는 것은 명백한 배신행위. 대신 그녀의 실력을 감안하여 정중히 초청하시오. 그런 후 노부가 직접 손을 쓰겠소.”
“알겠습니다, 맹주님.”
며칠 후, 옥화무제는 맹주의 부름을 받고 무림맹으로 향했다. 마교와의 동맹 건으로 그녀와 몇 가지 의논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어서오시구려, 옥화 봉공.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그대를 불렀다오. 물론 전서를 통해서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서로 간에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직접 대화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소?”
“물론이지요.”
“자,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으시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와 차를 놔둔 후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갔다. 맹주는 찻잔 뚜껑으로 둥둥 떠 있는 찻잎을 옆으로 슬쩍 밀며 입을 열었다.
“자, 차나 드시면서 얘기합시다. 어렵게 용정차를 구했는데 향이 그만이라오.”
옥화무제도 다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예, 참으로 향이 좋군요.”
“마교와는 워낙 오랜 시간 반목해 왔었기에 갑자기 동맹을 맺는다고 하니 걱정이 앞서는구려. 혹시 그놈들이 금과 짜고 일부러 이쪽에 접근해 오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오.”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무림맹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맹주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더 중요한 일? 그게 뭔지 말해 줄 수는 없겠소?”
“그게,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정보이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중요한 일이오. 얼마 전 맹호검군 장로가 수하들을 이끌고 금 황제를 참살하기 위해 떠났었소.”
그것은 옥화무제도 몰랐던 일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맹호검군 장로와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본녀를 찾으신 겁니까?”
이제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옥화무제의 말은 이미 맹호검군 장로가 실패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맹주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 다.
“옥화 봉공께서는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던 듯하구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옥화무제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그 비밀하고 연관되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급기야 맹주의 입에서는 노기가 섞인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도 방금 전에 말했듯 이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오! 마교가 이미 금과 내통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는데, 어찌 옥화 봉공께서는 비밀 타령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오. 현재 본맹에서는 봉공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오?”
그것은 정말 의외였던 듯, 옥화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본녀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의뢰자에게 한 번 판매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규칙 때문에 본녀에 게 지어진 누명을 벗기는 힘들 듯하군요. 대신 한 가지 단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뭣이오?”
“개방에 완옌 렌지에 대원수를 조사해 보라고 이르십시오. 그의 정체를 파악하신다면 본녀에게 지어진 누명은 자연스레 벗겨질 것입니다.”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기에 맹주는 의아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완옌 렌지에 대원수? 그자는 또 누구요?”
“지금 요의 잔당을 토벌하고 있는 금의 맹장입니다. 금 황제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대단한 장수지요.”
“그가 어쨌기에…….”
한참 마교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대화가 금의 장수 얘기로 바뀌자 무림맹주는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림맹주를 보면서도 옥화무제 는 단 하나의 단서도 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조사하셔야 할 일이지요. 사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린다고 해서 제게 지어진 누명이 벗겨지겠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모든 게 다 허사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직접 조사하시고, 진실을 파악해 보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맹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연금당하셔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맹주의 어조에는 짙은 고뇌가 어려 있었으나 돌아오는 옥화무제의 답변은 의외로 밝았다.
“어쩔 수 없지요. 맹주께서 차에 산공분(散功粉)까지 푸셨으니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하신 것이 아니신가요?”
옥화무제가 정곡을 찌르자 맹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공분이라면 독은 아니지만 내공을 분산시켜 한동안 무공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내공을 익힌 고수 에게 있어서 더없이 치명적인 약물이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소?”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전혀 산공분에 중독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그 둘의 표정만을 비교해 본다면 산공 분에 중독된 사람은 옥화무제가 아니라 맹주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처음부터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이걸 마시는 것을 본녀가 거부한다면 맹주께서는 곧장 제게 손을 쓰실 게 뻔한데, 마시는 것이 현명한 처사겠죠. 안 그런가 요?”
맹주의 무공이 그녀보다 약간 높은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맹주를 뿌리치고 탈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영문은 어떻게 될 것 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다 알면서도 태연히 차를 마신 것이다.
“봉공의 지혜는 정말이지 놀랍구려. 좋소, 내 개방에 통보하여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소. 그런 후 봉공과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생사람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맹주의 어조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진실임이 밝혀져 결백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맹주와 옥화무제의 사이 는 그전처럼 돌아갈 리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본녀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맹주님.”
금제국의 맹장인 완옌 렌지에에 대한 조사를 부탁받은 공수개 장로는 그를 조사하다가 밝혀낸 몇 가지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맹주를 찾아갔다.
“호오~, 그러니까 그자가 여진족이 아니라 한족이란 말이오?”
맹주가 놀라워하자 공수개 장로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언제나 무영문에 가려 찬밥 신세였던 개방이 이렇듯 맹주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보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예, 맹주님. 저도 그 보고를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완옌이라는 성은 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가 얼마나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는 인물인지 짐작이 가겠군요, 공수개 장로.”
“물론입니다. 지금의 황제를 만든 게 그놈이라고 할 정도로 충성을 다한 모양입니다. 참, 그를 조사하던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뭔데 그러시오?”
“이번에 금이 침공한 것에 무영문이 연관되어 있더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예, 옥화 봉공님이 금 황제와 대원수 사이를 이간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작전 실패로 인해 금 황제가 그 사실을 알아냈다지 뭡니까? 개봉이 무너진 것도 다 금 황제가 분풀이를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공수개 장로는 옥화무제의 흠집을 파헤치기 위해 이 보고를 올린 모양이지만, 그 보고를 듣는 맹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쪽은 이제야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시 작했는데, 옥화무제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그에 대한 조사를 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간질을 시키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대원수에 대한 철 저한 조사가 선행되었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금제국이 자랑하는 맹장인 만큼 그 실력 또한 뛰어나지 않겠소?”
“그걸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소문과는 달리 맹장이 아니라 군사(軍師) 역할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요 근래의 일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렇다면 그의 진면목에 대한 정보가 나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소?”
“그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저 멀리 요를 토벌한다고 뛰어다니고 있다 보니 조사하는 데 상당히 힘듭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이상한 정보가 하나 있더군요.”
”…..”
“그러니까 그가 아구다와 친분을 맺은 것이 거의 20여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때 건장한 청년이었다고 해도 20년이 흘렀다면 나이가 최소한 마흔은 먹어야 정상 인데,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답니다. 그걸 보면 어쩌면 그는 무공을 연성한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주안술을 익힌 자라면 상당한 무공 실력을 쌓았다고 봐야 하겠지요. 어찌 되었건 수고하셨소. 오늘 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구려.” “예, 새로운 정보가 도착하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소이다. 무영문을 믿지 못하게 된 지금, 노부는 개방만을 믿고 있소이다. 열심히 해 주시구려.”
“예, 맹주님.”
공수개 장로를 돌려보낸 후, 맹주는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일단 적을 알아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었다. 무영문과 아무런 연관을 짓지 않 았으니, 개방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보의 왜곡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점점 그녀가 말한 대로 되어가는 것 같군. 한인에다가 무공을 익힌 자라. 만약 그놈이 마교가 보낸 놈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놈이 아구다를 만난 게 20년쯤 전이라면 그자가 마교 교주가 갓 되었을 때쯤일 텐데, 그때부터 여진족에다가 투자를 했다? 아니야. 그토록 멀리 보며 투자를 할 바에는 오히려 요에다가 하 는 게 맞았을 거야. 몇 년 후 요가 연운16주를 집어삼키는 괴력을 발휘했으니 말이야.”
맹주는 실내를 서성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가 연금되어 있는 곳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는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옥화무제는 맹주가 들어오자 방긋 미소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무림맹에서는 그녀에게 아침에 한 잔씩 산공분 이 들어 있는 차를 마시게 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금제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혹시나 그 모든 것이 오해로 밝혀졌을 때 뒷감당이 무서웠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지내시기는 어떠신가요? 혹여 불편한 데라도 있으시면…….”
“아뇨,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쉬어본 게 몇십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옥화무제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너희들이 본녀한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와 같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 말 을 해 놓으면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뒷감당이 힘들어 자신을 살인 멸구해 버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다오.”
“예, 말씀하십시오.”
“봉공께서는 그가 한족임을 알고 계셨소?”
“물론이죠.”
역시 옥화무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까지도…….
“그가 무림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겠구려.”
“예.”
“그자가 마교도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소?”
이 질문은 맹주가 만든 함정이었다. 만약 상대가 마교도가 틀림없다면 그의 실력은 최소한 극마급으로 압축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극마급의 인물이라면 거 의 없으니 조사하기도 편할 것이 분명했다. 맹주가 극마급을 생각한 이유는, 공수개 장로가 그는 전혀 무공을 익힌 자 같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교도가 자신의 마기를 완벽하게 숨기려면 최소한 극마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 그래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것을 조사하셨네요.”
“그렇다면.”
‘그가 누구일까? 20년쯤 전에 극마의 경지를 깨달은 고수라.’
맹주의 머릿속에는 한때 마교를 주름잡았던 4천왕의 명호들이 떠올랐다. 독수마왕(毒手魔王) 한석영(韓夕英), 흑마대왕(黑魔大王) 한중길(韓中吉), 벽안독군(碧 眼毒君) 능비계(凌非癸), 흑살마왕(黑殺魔王) 장인걸(張仁傑). 이들 중에서 현 교주인 묵향과 끝까지 권력 다툼을 벌였었던 인물은 흑살마왕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흑살마왕이 쫓겨난 것이 20년쯤 전이었지.’
“그가 흑살마왕 장인걸이었소?”
옥화무제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맹주님께서 제게 유도 신문을 하신 것이었군요. 예, 맞아요. 그가 장인걸이에요.”
“그렇다면 마교 교주가 연합하여 금을 쳐부수자고 한 것도 장인걸을 치기 위해서……?”
“예, 장인걸이 금을 뒤에 업고 있는 이상 마교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그를 없앨 수 없어요. 만약 장인걸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과거 공 포의 대명사였던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있거든요.”
그 말에 맹주는 경악했다.
“천마혈검대! 그, 그랬었구료. 맹호검군 장로가 치를 떠는 인물들이 바로 그놈들이었어.”
“이제 본녀에 대한 오해가 좀 풀리셨나요?”
“그렇다면, 진작 노부에게 말씀하셨다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셔도…….”
“아뇨, 저도 오랜만에 이걸 핑계로 푹 쉬었으니까요.”
옥화무제는 날렵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본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맹주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시면 위험하오. 내공이 돌아오려면 하루는 지나야 할 텐데…….”
“아뇨, 제수하들이 있으니 그럴 걱정은 없을 겁니다. 그동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를 향해 맹주가 말했다.
“잠깐.”
옥화무제는 춤이라도 추듯 우아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예? 달리 명하실 것이라도……?”
“마교 교주와 협정을 맺게 중간에서 도와주시겠소? 오해가 풀렸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오만.”
“알겠습니다, 맹주님. 조만간에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습니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의 뒷모습을 보며 맹주는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에는 산공분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저 모습은 산 공분을 섭취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키는 사람이 곁에서 보고 있는 상태에서 산공분이 들어 있는 차를 마셨음에도 중독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비장의 수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허이~참, 이 일로 그녀와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조사를 해 보고 손을 썼어야 했는데, 이 일을 어찌할꼬?”
그로부터 3주 후, 정사(正邪)를 대표하는 두 거두가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만큼 양측의 수행원은 정확히 1백 명으로 제한했으며, 그들이 만난 곳 역 시 감숙성의 난주(蘭州) 부근이었다. 난주는 과거 송의 북방 방어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던 전략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군대가 떠나 빈껍데기로 전락해 버린 도시였 다. 사실 송으로서는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판에 이 변방에까지 투입할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난주 인근에 있는 작은 평야에서 그들은 만났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놓인 고급스러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고수들이 저마다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허허허, 이런 일로 천마신교의 교주와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소이다.”
“그것은 본좌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부터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협정서의 초안을 놓고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다퉜었다. 양쪽이 글자 하나를 가지고도 갑론을박해서 결 국 양쪽 다 만족할 수 있는ᅳ하지만 양쪽 다 만족할 수 없는―그런 협정서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만들어 놓은 협정서는 2부가 제작되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양측 대표단이 싸울 만큼 다 싸운 상태였기에, 두 거두는 시시한 글 자 하나 가지고 쪼잔하게 싸울 필요 없이 우아하게 인장만 찍은 후 헤어지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는 협정서에 서명한 후, 서로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중원을 오랑캐 따위에게 넘겨 줘서야 되겠소? 잘해 봅시다.”
“하하핫, 물론이야. 감히 중원을 넘본 것을 후회하게 해 주지.”
악수를 하며 나누는 서로의 인사말은 따로 놀 수밖에 없었다. 중원을 걱정하는 무림맹주의 생각과 달리 묵향의 목표는 오로지 장인걸 하나였기 때문이다. 금은 그 를 없애는 데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피차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마교와 정파는 불과 물의 관계. 설마 그 누가 마교와 무림맹의 연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 는가.
양측의 거두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앞으로 두 세력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묵향19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