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2화 – 격동하는 천하

격동하는 천하

정사를 대표하는 거두들이 사이좋게 협정서를 교환한 역사적인 날, 묵향은 바로 그날 흑풍대를 파견한 후 다음에 시행할 작전을 수립한다고 바빴다. 그렇다면, 철 천지원수지간인 양쪽이 협정서를 맺도록 도와준 옥화무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양쪽에서 사례로 받은 선물들을 앞에 수북이 쌓아 두고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 고 있었을까? 사실 그러고 있어야 함이 정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끓어오르는 울화를 삭이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옥화무제는 이가 갈리는 듯한 암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요?”

옥화무제의 질책에 총관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남경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식을 올렸다고.”

옥화무제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만큼 지금 총관의 보고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 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강의 변으로 황제와 상황제 그리고 대소신료들은 모두 다 금에 잡혀가 버렸어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황실 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무조건 즉위식만 올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걸 본문이 주도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요?”

“하, 하지만 정강의 변 이래 워낙 많은 일들이 갑작스레 벌어졌고…, 그리고 태상문주님께서도 자리를 비우셨던 터라…….”

콰직!

옥화무제가 움켜쥐고 있던 의자의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울화를 참지 못한 옥화무제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너무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쩔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는 이를 으드득 갈며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리 본녀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걸 주도할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꽝!

그녀의 분노 어린 주먹에 탁자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순간 보고를 올리던 총관은 찔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옥화무제는 그런 총관을 한동안 못마땅한 듯 노려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하의 모자람을 이제 와서 탓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휴우~, 본문의 규모는 더욱 커졌지만, 너무나도 인재가 없군요, 인재가…….”

자신의 딸인 문주라도 그녀가 없는 동안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영문이 환관 동관을 배후에서 움직여 천 하를 농락할 수 있었던 것도 옥화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화무제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옥화무제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걸출한 인재가 무영문에 한 명 더 없다는 사실이.

황제, 상황제와 함께 고위 관료 3천 명이 금에 끌려가 버린 지금 송은 먼저 황제를 즉위시킨 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영문은 정보 단체인 만큼 끌 려가지 않은 모든 황족들의 위치도 알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황제로 즉위시킬 힘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무영문이 비상할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 이다.

그런 옥화무제의 분노 어린 눈길을 받으며, 총관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 양 고개를 들지 못했다. 총관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옥화무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 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총관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딸인 문주의 잘못이요, 또 손녀인 부문주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문주와 부문주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고 있는 그 나이만 헛먹은 장로들의 잘못이기도 했다.

노력은 했지만, 아직 울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는지 옥화무제의 목소리는 거칠게 흔들렸다.

“그래, 누가 신황제를 옹립하는 데 주축이 된 것인가요?”

“진회(秦檜)라는 자입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철저히 조사해 보세요.”

“이미 조사해 보라고 일렀습니다. 현재까지 올라온 자료를 봤을 때, 지방의 하급 관료로서 그렇게 특별한 데는 없는 인물인 듯합니다.”

총관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이제는 허탈한 심정까지 드는 옥화무제였다. 아예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지방의 하급 관료 따위가 황제를 옹립하다니.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 그런 인물이 황제를 옹립하도록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니…….”

총관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접촉을 한번 해 보세요. 이렇게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예,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태상문주님.”

“아참, 그리고 혹시 신황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황족이나 세력이 있는지 조사해 보도록 하세요. 만약 진회라는 자가 우리와 손을 잡기를 거부한다면 그쪽으로도 생각해 봐야 할 테니까요.”

“옛.”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관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재빨리 문 쪽으로 갔다. 밖에 서 있던 문사 차림의 중년인 하나가 총관이 나오자마자 귀 에다가 뭔가 소곤소곤 소식을 전한 다음 총총히 물러갔다. 총관은 재빨리 되돌아와 태상문주에게 방금 들어온 정보를 전했다. 마교와 관련된 특급 정보였던 것이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마교의 흑풍대가 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교에 흑풍대라는 단체가 있음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20여 년 전 마교의 내분 때만 활약했을 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무영문의 경우, 마교에 대해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건 묵향의 공포스러운 능력을 일찍이 간파한 옥화무제의 명에 의해, 마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보를 긁 어모았기 때문이다.

“흑풍대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이미 옥화무제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교의 실질적인 목표는 금이 아니라 장인걸이었다. 장인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교가 개입 했다는 것을 눈치 챈다면 모종의 대비를 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미리 차단하려면 장인걸의 촉각에 걸리지 않을 만큼 마교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강력한 단체를 파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은 마교 내에서 흑풍대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흑풍대의 간부들은 모두 다 찬황흑풍단의 무장 출신이었다. 금군을 상대로 한 대규모 접전에도 경험이 풍부할 것이 분명했다.

“예, 난주 인근의 관도를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인 것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옥화무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흑풍대는 통상적인 마교의 단체들과 달리 엄청난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데다가 기마대이기에 아주 눈에 잘 띄는 무력 단체였다. 그런 그들이 십만대산 주위가 아 닌 난주 인근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마교와 무림맹이 협정서를 조인하기 훨씬 이전에 흑풍대가 움직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 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난주 인근이라고 했나요?”

“옛, 태상문주님.”

“흠, 그렇다면 그 정도 병력이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규모의 비밀 분타가 그 근처에 있다는 말이군요. 몇 개 조를 투입해서 비밀 분타의 위치를 파악해 두도록 하세요.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옛.”

묵향이 이토록 빨리 움직이기 시작할 줄이야. 물론, 장인걸에게 하루라도 빨리 복수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묵향이 장인걸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을 때, 바로 그때가 금이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다. 장인걸 없이 금이 버틸재간은 없을 테니 말이다.

금의 멸망.

“뿌드드득!”

금에 대한 일만 생각하자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그녀의 이빨이 갈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금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던가. 그녀 또한 묵향 못지않게 금에 대해 원한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흑풍대가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주도록 하세요.”

“옛.”

“그리고 난주 쪽에서 중무장을 한 기마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장인걸이 괴이하게 생각할 거예요. 이쪽에서도 수많은 첩자를 운용하고 있듯, 저쪽의 첩 자들도 사방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들의 첩보망을 철저히 교란하도록 하세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묵향에게 먼지 나게 쥐어 터지진 후, 초류빈은 또다시 심기일전하여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는 그 꿈에 볼까 두려운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그 말에 혹해서 이곳까지 따라왔는지. 내가 미쳤지, 젠장!”

초류빈은 식사를 마친 후, 식사와 함께 보내진 독한 화주 세 병을 마시며 푸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을 다시 만난 이후부터 느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주량이 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솔잎을 헤아렸다는 것은 순 거짓말인 것 같고, 뭔가 엄청난 무공을 비밀리에 수련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아무리 주량이 늘었다지만 안 좋은 기분에 독한 화주를 계속 마시자 취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하지만 내공을 일으켜 억지로 취기를 억누르지는 않았다. 취한 기분

에 속에 있는 불만을 이렇게라도 토해 내지 않으면 울화가 쌓이고 쌓여 주화입마라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술병을 들어올려 벌컥벌컥 들이켠 후, 초류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울분에 찬 어조로 외쳤다.

“화경에 들었다면 그래도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강자잖아, 젠장. 그런데 화경에 들면 뭘 해!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는 통하지도 않는데. 그나마 성격이 라도 좋으면 스승처럼 모시며 존경심이라도 갖지.”

혼자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또다시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기가 오르자 슬슬 속에 쌓여 있던 불만이 거친 욕설과 함께 튀 어나오기 시작했다.

“크아, 그나저나 예전에 사부가 말씀하시기를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성을 제대로 닦아야 한다더니 말짱 다 개소리였어. 그렇지가 않다면 저 극악무도 한 놈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명이 안 되잖아.”

초류빈은 묵향을 만나기 전까지 무공을 사사받았던 예전의 사부, 즉 초씨세가의 전대 가주의 말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사부는 어느 정도의 무공까지는 숙달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겠지만, 그 한계를 뚫고 깨달음을 얻어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자연의 이해와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면서 명 상을 통해 자연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곧 초류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딴 성찰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묵향에게 맞지 않겠다는 일념, 그것 하나만으로 악착같이 무공 을 익혀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우~,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내 창창한 인생도 이렇게 비루하게 썩다가 종치게 되는구나. 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빌어먹을 새끼!”

얼큰하게 취한 초류빈이 묵향을 떠올리며 이를 갈 때였다.

“뭐시라?”

갑자기 등 뒤에서 치미는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괴이한 울림을 간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바로 뒤에 누군가 있었다. 초류빈은 순간 취기가 확 달아나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있어서 자신의 지척까지 기척을 숨기고 접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도(刀)를 움켜쥐며 재빠르게 뒤로 돌아서며 외쳤다.

“누구?!”

퍽!

초류빈은 순간 머리를 뒤흔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호되게 가격당했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돌아섬과 동시에 머리를 공격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픔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화경에 다다른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 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초류빈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억지로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만큼 그 목소리가 전해 주는 공포감은 소름 끼칠 만큼 끔찍했던 것이다.

“네놈이 본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애써 무공도 가르쳐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더니 하는 소리 봐라! 오냐, 안 그래도 장인걸 그놈 때문에 짜증이 났었는데 마침 너 잘 걸렸다. 이 배은망덕한 놈, 어디 죽어 봐라.”

순간 초류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그토록 무공을 익혔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묵향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상대에 대해 아예 반항할 엄두조 차 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라는 자각보다는 상대가 안겨 주는 공포감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묵향이라도 화경에 오른 초류빈의 감각을 속이고 이토록 가깝게 접근해 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초류빈이 정상적일 때의 얘기다. 지금처럼 술 에 취해 있을 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묵향을 따라 마교에 들어온 후, 초류빈이 매일 당한 것은 지독한 구타였다. 일단 몸이 느껴야 대성한다는 괴상한 지론 아래 묵향은 초류빈에게 비무 아닌 비무를 강요했다. 그 덕분에 초류빈의 무공이 급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는 묵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지금까지 그 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더욱 높은 경지의 무공을 연성하려고 노력해 온 것도, 다 이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초류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묵향에게 변명하려고 했다. 안 그러면 맞을 테니까 말이다.

“저, 제가 잠시 술에 취해서 미쳤나……”

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분노에 찬 묵향의 발길질에 무자비하게 짓밟혀야만 했다.

퍽! 퍽!

“으아아악! 제발 한 번만.

초류빈은 아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최대한 몸을 움츠려 맞는 부위를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묵향의 무 자비한 구타에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지만 설마 그것이 묵향의 분노를 더욱 돋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호오, 호신강기(護身剛氣)? 몇 대 쥐어 패고 용서해 주려 했더니 감히 호신강기를 일으켜 저항을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초류빈은 자신이 왜 그토록 기를 쓰고 무공을 익혔는지 새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켰나?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초류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빨리 묵향의 분노가 끝나기만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사실 묵향이 자신을 죽이자고 패는 것도 아니었고, 그도 구타라면 당할 만큼 당한 강골이 아닌가. 묵향이 처음에 초류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때 우선 몸으로 먼

저 느끼는 것이 진전이 빠르다며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기 때문에, 맞는 것이라면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다.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통증을 최소화하는 기법에 있어서 는 아마 무림 내에서 초류빈을 따를 자가 없을지도 몰랐다.

초류빈은 적당히 비명도 질러가며 묵향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이쯤 했으면 화가 풀릴 때도 됐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묵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는 생각이 들자 초류빈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했다.

“잘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해 그만……..”

“호오, 아까는 극악무도한 성격이라며?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평상시에 생각하는 내 모습이 그런 모양인데 말이야.”

초류빈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제가 감히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본교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신 지존께 제가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씀이 십니까? 아마 잘못 들으신 거겠죠.”

넉살 좋은 그 말에 묵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어엇? 이 녀석이 무공은 안 늘고 아부만 늘었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말은 진실이라니까요.”

어차피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묵향은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초류빈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나 좀 따라와라.”

“예? 어, 어디 가십니까?”

“이번에 일이 생겨 몽고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자니 심심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명색이 부교주라는 놈이 허구한 날 처박혀서 밥만 축내고 있지 말고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묵향의 말에 초류빈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쉽게 말해 몽고까지 가며 심심하면 쥐어 팰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마교 내에서 묵향의 등쌀에 견딜 수 있 는 자라고 해 봐야 자신과 천리독행 정도였다. 하지만 천리독행은 몸이 완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만한 건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초류빈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묵향의 심기를 건드려 매를 버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이죠, 교주님. 하명만 하십시오.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싫어도 초류빈은 눈물을 머금고 묵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젠장, 화경에 오르면 편할 줄 알았는데, 어째 좀 더 귀찮아지는 것 같단 말씀이야.’

넓은 정원에는 제철을 만난 듯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 아니던가.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연못 위로는 잠자리들이 쌍으 로 날아다니며 알을 낳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 경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연못 앞에 선 사내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연못에는 수많은 잉어들이 푸른 물살을 헤치며 우아하게 떠돌고 있었지만 그 모습 또한 수심 어린 그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가주,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여기 서 계신 것이오?”

하지만 가주가 가만히 서 있자 중년 여인은 가주에게 다가가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 어찌 그리 수심에 찬 표정이시오?”

가주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대꾸했다.

“아, 어머님께서 나오셨습니까?”

가주의 어머니 매화검(梅花劍) 이옥연(李玉然)은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남궁세가를 떠받치고 있는 네 명의 장로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남궁세가를 이끌어가는 가주였기에 그녀는 아들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게요?”

“워낙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금 때문인 게요?”

“예.”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옥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림맹주가 마교와 연합을 결심할 정도니, 그들의 세력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더구려. 하지만 지금껏 무림은 황실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지 않소? 괜한 싸움에 끼 어들어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어머니. 하지만…, 5대세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세가에서도 문주께서 직접 가신들을 이끌고 참전하시겠다고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각 세가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였다. 사실 5대세가라고 불린다고 해서 얻는 것은 명성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림세가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것이 사실이었고, 그들의 행보에 모든 세가들의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가들과 달리 서문세가만은 그중에서 특별한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세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유일하게 화경의 고 수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서문세가는 5대세가의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는 종리세가와 사돈지간을 맺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면 당연히 종리세가도 함께 움직일 것이다. 또 종리세 가가 움직인다면 종리세가의 가주 패도(覇刀) 종리영우(鍾里英優)와 의형제를 맺은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覇劍天嶺) 제갈기(諸葛琦)도 움직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수라도제의 뜻에 따라서 5대세가 중 셋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서문세가의 움직임이 모든 세가들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으응? 수라도제 어른께서?”

이옥연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노회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수라도제가 움직임으로 인해 그에 동참할 세력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확인시켜 주듯 가주의 말이 이어졌다.

“예, 패도 어르신께서도 동참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조만간에 제갈세가나 다른 세가들에서도 동참할 거라는 통지가 올 것이 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가 만 몸을 사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가주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해서 금을 중원에서 몰아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오랑캐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 사람들은 모두 황실로부터 큰 포상을 받지 않겠 습니까?”

“그렇게까지 멀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실패했을 때라는 가정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주의 생각은 어떠신 게요?”

“소자는 한 팔을 보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서문세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훨씬 피해가 적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에 찬성한다는 듯 매화검 이옥연은 고개를 살짝 끄떡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시오?”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창궁18수를 포함해서 1천 정도를 거느리고 나갈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옥연의 아미가 꿈틀했다.

“가주가 직접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시오? 본가의 과거를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가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본가가 어떻게 될지를 말이오.”

이옥연의 근심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남편, 즉 전대 가주를 잃은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가 혈기방장하기는 했으나 근심에 젖어 있는 어머니의 눈을 보면서 차마 다시금 자신이 직접 나가겠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 있 는 가주를 향해, 이옥연은 슬픈 눈빛으로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주는 한숨을 내쉬며 연못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천풍검(天風劍) 곡추(曲抽)에게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그제서야 이옥연은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시었소. 그러시는 것이 좋겠지요.”

남궁세가가 양양성으로 고수들을 파견하기로 의견을 모았듯이, 무림 전역의 다른 문파들도 양양성으로 문파의 정예들을 출발시켰다. 그것이 현재 무림의 대세였 고, 또 무림맹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물론,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파 계열의 문파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천마 신교가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망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서를 조인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극비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파 의 핵이라는 무림맹도 마교와 손잡았다는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교 또한 장인걸의 이목을 의식하여 그것을 비밀로 숨겼기 때문이다.

협정서가 조인된 지 며칠이 지난 후, 테무진에게 지원할 방대한 양의 물자가 준비되자 묵향은 초류빈과 함께 몽고로 출발했다. 식량 및 무기 등을 실은 마차가 끝 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가 테무진에게 지원할 물자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자성만마대가 호위했다. 그리고 그 일행의 가장 앞에서 수송대를 지휘하는 이팔삼(李捌三)은 뒤쪽에서 희희낙락하며 따라오고 있는 상 관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겨우 자성만마대의 제12대장 따위가 교주와 부교주를 호위하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기회에 교주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에 무영신마 장영길 장로는 함께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이번 호위는 자성만마대의 겨우 1개 대 5백 명만 출동하게 되 었다. 자성만마대의 전력이 고스란히 총단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알 수가 없는데 대주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처지가 달랐다. 모두들 힘든 여정이 될 것이 뻔한 이 일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책임 떠넘기기를 거듭하다가 결국 선택된 인물이 바로 자성만마대 제12대장 이팔삼이었다.

자성만마대라면 마교의 무력단체들 중에서 흑풍대를 포함해서 가장 하급에 놓이는 두 단체들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들 중에서 5백 명을 거느린 대장이라고 해도 무림에서 말하는 신검합일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지고한 두 양반을 모시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교주와 함께 가고 있는 초류빈 부교주의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떨떠름한 면상으로 봤을 때, 그가 결코 기분 좋아 서 따라나서는 것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나선 묵향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아갈 듯한 상태였다. 사실, 그와 같은 승부사에게 있어서 교내에 틀어박혀 수하들과 각종 전략과 전술 그리고 모략을 세우는 것은 영취향에 맞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충 둘러대고 교 밖으로 나서니 이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행하기 정말 좋은 날이로군.”

하지만 묵향의 말과 달리 하늘은 잔뜩 구름이 끼어 있어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뚱한 표정으로 초류빈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묵향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어조에 무시 못 할 여운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이 좋은 날씨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한데. 너, 혹시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냐?”

묵향의 기색이 영 심상치 않아 보이자 초류빈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한번 개겨 봤다가 무려 두 시진을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오로 지아부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제가 감히 교주님께 불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변의 풍경이 워낙 뛰어나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입니다. 교주님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해가 나오지도 않았으니 덥지 않아서 좋고, 바람도 부니 선선해서 좋고, 비도 내리지 않으니 그야말 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이때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류빈은 급히 덧붙였다.

“허,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정취까지 더해 주는군요.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술 한잔하면 얼마나 끝내 주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놈도 나하고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역시 교내에 처박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앞으로 일이 없더라도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 군.’

아마 초류빈이 묵향의 속마음을 알았으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호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묵향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초류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할 텐가?”

묵향의 제안에 초류빈은 넙죽 술병을 받아 들었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에라이, 아무리 구타가 무섭다지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아부를 못하겠군.”

묵향이 건네주는 술병을 받아 초류빈은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한 모금 들이킨 초류빈의 표정이 묘했다. 술이 입에 쩍쩍 달라붙었던 것이다.

‘오호, 이거 정말 좋은 술이군. 나는 싸구려 백주나 마시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놈은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젠장,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단 말씀이야.’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팔삼은 기겁을 하고 달려왔다.

“교, 교주님.”

다급히 달려온 이팔삼 대장의 말에 묵향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옛, 근처에 꽤 유명한 주루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행렬을 잠시 이곳에서 머물게 한 후, 주루까지 호위해 드리면 될 것이라는 이팔삼 대장의 생각이었다. 하늘같은 교주님께서 이렇게 노상에서 술을 드신 것을 만약 교의 윗사람들이 알게 되면 교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크나큰 문책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히 자성만마대의 대주인 장영길 장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장영길 장로의 경우 한때 장인걸의 수하였다가 교주님의 은혜 를 받아 합류한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묵향과 행동을 같이했던 일부 장로들과 비교한다면 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 해 교주께 과잉 충성하려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교주의 반응은 이팔삼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닐세. 갈 길이 급한데 그럴 필요 없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이팔삼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곧장 수하에게 명령했다.

“이봐, 빨리 가서 교주님께서 드실 만한 고급 안주 몇 가지를 챙겨 오도록 해라.”

“옛.”

하지만 수하가 명령을 받고 달려가려는 순간, 묵향이 말했다.

“어허! 그럴 필요 없대도 그러는군. 본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면서 묵향은 품속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걸 쭉 찢어서 초류빈에게 한 토막을 건네준 후 말을 이었다.

“본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그래도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육포를 질겅거리며 씹고 있던 초류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괜히 부담가지지 말고 자네 일이나 보게. 교주님께서는 먼 길을 가며 갖은 고생을 하게 될 자네들을 배려하여 하시는 말씀이니 부하들이나 잘 챙겨 주게 나.”

이팔삼은 왠지 모를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와 같은 하급 고수가 교주님이나 부교주님 같은 지고한 존재들을 가까이서 볼 일은 거의 없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분들을 이렇듯 가까이서 뫼시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동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너무나도 소탈하지 않은가. 마교 내에서 서열 1백 위권만 되더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움직이려 한다. 심 지어는 수하들을 마소쯤으로 생각하는지 여덟 명의 고수를 시켜 가마를 메도록 하고는 타고 다니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분들은 마교의 하급 고수들처럼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먼 길을 가게 되는 수하들을 배려하는 저 깊고 깊은 마음……. 저런 분들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 바친다 한들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묵향과 초류빈을 향해 마음속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이팔삼 대장이었다.

화려한 명판과는 달리 대원루(大原樓)는 조그마한 객잔이었다. 객잔 주인인 방 노인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보며 혀를 찼다.

“에잇, 젠장.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오늘 손님 받기는 글렀구먼.”

웬만큼 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굵은 빗줄기를 뚫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법이다. 이제 해가 지려는 참이었기에 사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 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이만 끝인 모양이다. 문 닫을 준비하거라.”

“예, 나으리.”

점소이는 방 노인의 지시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한참 점소이가 지저분한 곳을 쓸고 닦고 있는데, 마을로 1백여 대에 달하는 마차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 를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의 수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방 노인은 재빨리 점소이에게 외쳤다.

“손님 받을 준비하거라. 주방 화로에 장작 좀 더 집어넣으라고 이르고, 빨리!”

얼핏 본 것만 해도 마차와 함께 마을로 들어온 무사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이 마을에 몇 개 있지도 않은 객점이나 객잔들은 모두 다 다음 날 아침까지 그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마을에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커다란 객잔이 없으니 말이다.

잠시 후, 온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인물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쇼! 자, 모두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폭우를 뚫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방 노인은 처음에는 그들이 표사들인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 노인은 곧이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 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손님들의 몸에서는 사람을 억누르는 것 같은 괴이한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사들은 절대로 몸에서 저런 기운을 뿜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방 노인의 손님 대하는 태도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객잔 안으로 들어선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초립을 벗어 탁자 옆에 놨다. 그것을 본 점소이는 재빨리 두 사람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사람 이 많은 만큼 빨리빨리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드릴깝쇼? 손님.”

점소이가 방글거리는 얼굴로 말을 걸었지만 오히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상대가 대꾸했다.

“야, 비 맞은 사람 처음 보냐? 뭐가 좋아서 헤실거리는 거야?”

그러자 그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봐, 비에 젖는 것이 싫으면 내공으로 튕겨 버리면 될 일이지, 그냥 다 맞아 놓고 왜 이제 와서 점소이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거야?”

체격은 앞에 앉아 있는 사내에 비해 왜소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약간 비굴한 표정으로 꼬리를 말며 허둥지둥 대답 했다.

“교주님께서 그냥 맞으시는데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수하들도 다 저와 같은 생각으로 비를 맞았을 텐데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군. 누가 맞으라고 했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음식이나 시켜.”

“예? 예. 이봐, 오리탕하고 술 좀 가져와.”

점소이가 한눈에 척 봐도 그들 간의 상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객잔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무사들로 꽉 차 있었지만 유독 이 둘이 앉은 자리에는 그 누 구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이 두 사람이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소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점소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주문을 받지도 않고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주방장에게 처음에 주문하는 오리탕 두 그릇은 가장 신경 써서 만 들라고 덧붙여 주문했다. 겉으로는 안 그렇게 보였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점소이는 거친 무사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방에서 주문을 받은 식사가 나오기 시작하자 점소이는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재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객잔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일시 적으로 들이닥쳤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점소이 한 명만으로는 모자라는 감이 있었다. 그 덕분에 방 노인까지도 음식을 날라야만 했다.

꽈당.

이때, 문을 거칠게 열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장한이 들어왔다. 그 또한 빗속을 뚫고 왔기에 온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장한의 뒤로 대여섯 명의 수하인 듯한 인물들의 모습도 보였다. 장한의 모습을 보자마자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매가 날카로운 장한은 돈을 위해서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악질적인 포두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점소이는 자신이 언제 움찔했었냐는 듯 재빨리 다가가서 방글거리는 얼굴로 인사했다. 어찌 되었건 상대는 관부의 힘을 뒤에 업고 있는 포두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상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어서옵쇼, 임 포두 나으리. 죄송스럽지만 지금 빈 자리가 없는뎁쇼. 이거 어떻게 하나…….”

임 포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점소이를 옆으로 와락 밀치며 당당하게 외쳤다.

“본관은 임대방 포두라고 하오. 방금 도착한 상단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소이다.”

옆으로 밀쳐진 점소이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탁자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생각한 인물이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점소이의 예상과는 달리 그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장대한 덩치의 사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칼에 베인 듯 보이는 긴 상처가 뺨에 나 있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인 물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큰 규모의 상단이 이곳을 통과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출동했소이다. 이 물건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오?”

보나마나 이 물건들이 어디서 왔느냐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갈 거냐, 그리고 서류는 제대로 가지고 왔느냐 등등 각종 검사를 통해 트집을 잡으며 돈푼이나 뜯어내 자는 수작이라는 것을 점소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그에게 살그머니 돈을 쥐어 주는 상인들을 몇 번인가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품속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어 임 포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천마신교에서 필요한 물건들이오.”

천마신교라는 말에 점소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천마신교라면 십만대산에 자리 잡은 거대한 무림의 문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의 곳곳까지 미쳤었다. 그렇기에 유사시에는 군대가 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요와 금에 이르는 강대한 이민족 제국들의 연 이은 등장으로 그쪽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중원의 서쪽은 지금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는 자신의 욕심만을 채 우는 탐욕스런 관리가 날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탐욕스러운 관리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단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대한 무림의 문파들이었다. 중앙에서 지원을 해 주지를 못하니, 그들로서는 문파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 일대는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마교의 세력권이었다.

점소이의 안색도 창백해졌지만, 임 포두의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임 포두는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저렇게 많은 물자를 옮기시다니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허허허,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돈푼이나 뜯어먹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행차했던 임 포두는 상대가 마교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재빨리 꼬리를 말아 버렸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상대가 시비를 걸면 오히려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임 포두가 사라지고 난 후, 마교도들의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점소이와 방 노인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으며 친절해졌다. 등 뒤로는 연신 식은땀이 흘렀지만 말이다.

이렇듯 마교의 세력권 안에서는 관이 매우 협조적으로 움직였기에, 묵향이 이끄는 수송대는 아무런 사고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마교의 세력권이 끝나는 시점에서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