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9화 – 쓰레기 문파 천지문의 심법

쓰레기 문파 천지문의 심법

“대원수님, 이변이 일어났사옵니다.”

밖에서 달려오는 검은 옷차림의 중년의 문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한인의 생김새였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말 또한 유창한 한어였다. 바로 이자가 장 인걸의 귀 노릇을 하고 있는 편복대(??隊)의 대주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남쪽 전선에서 전서가 도착했나이다.”

“그래?”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서 문서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전서에 기록된 암호를 풀어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파저 원수가 패배했다? 놀라운 소식이로다. 뛰어난 용장인 그가 생존자가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대패를 당하다니. 이제 더 이상 송에는 그를 상대할 만한 군사력 이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었거늘……. 아직까지도 그만한 병력이 남아 있었더란 말이냐?”

편복대주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본대가 풀어놓은 첩자의 보고를 종합해 봤을 때, 무림인들이 개입한 것이 확실하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은 놀랬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인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전쟁의 흐름이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뭣이? 무림인이 개입했다고? 그래, 그 수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옛, 3만 정도라고 들었나이다. 그들이 송군 기마병 1만여와 합동하여 작전을 펼쳤다고 하옵니다.”

“3만이라고?”

무림인 3만이라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옛! 속하가 조사해 본 바로는 무림맹주가 격문을 돌려 본국과의 전쟁에 가담하라고 수많은 문파들을 부추겼다고 하옵니다.”

“크으윽! 무림맹 네놈들이 감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던 장인걸은 곧이어 뭔가 떠올랐다는 듯 편복대주에게 물었다.

“마교(摩敎)의 동태는 어떻다고 하더냐? 무림맹이 3만이나 되는 고수들을 이쪽에 동원했다는 것을 알면 마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 말에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속하가 알아 본 바에 의하면 마교는 금과 전쟁하는 동안 서로 불가침하기로 무림맹과 협약을 맺었다고 하더이다.”

그 말에 장인걸은 노성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런 망할 녀석들! 손톱만 한 기회라도 있다면 마도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 그놈들의 사명이거늘, 감히 불가침 협약을 맺어? 그놈들이 왜 그따위 협약을 맺는다는 말이냐? 혹시, 본좌가 이곳에 있음을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대원수께옵서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어떤 조치를 취해 왔어야 옳지 않겠사옵니까? 대원수께옵서 묵향 교주를 처치 한 후, 천마신교는 지난 20여 년간 아주 조용히 지내 왔사옵니다. 대원수께옵서 자신들의 교주를 살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 에 도달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설무지라는 뛰어난 군사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지라 천마신교를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제 그도 죽었지 않사옵니까? 속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부교주들 간에 교주직을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내분이 시작되지 않았나 사료되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마 교는 외부에 힘을 쏟을 처지가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는지 장인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던 장인걸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편복대주에게 말했다.

“양지에 장군을 불러라.”

편복대주가 밖에 나가서 양지에 장군을 부르라고 통고한 후 돌아오자, 장인걸은 이리저리 계책을 떠올리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이봐.”

“옛, 대원수님.”

“전서구를 띄워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무안 대장군에게 최대한 빨리 후퇴하라 일러라.”

“예?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무안 대장군은 역전의 맹장이옵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무안 대장군에게 증원군을 보내 그 일대에 압력을 가하면 서 적들을 양양성에 묶어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아무리 무안 대장군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는 무림인들이다. 이쯤에서 손을 터는 것이 좋아. 안 그러면 본좌는 파저에 이어 무안까지 잃게 될지도 모르 니 말이다. 지금 즉시 시행해라.”

“옛l.”

편복대주가 무안 대장군에게 전서를 보내기 위해 달려 나간 후, 양지에 장군이 도착했다. 그는 장인걸에게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부르셨사옵니까? 대원수님.”

“그래, 본좌는 지금 급히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곳을 정리하기 위해 남아야 하는데……. 10만을 줄 테니, 그것으로 요의 잔당들을 깨 끗하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장인걸이 거느린 대군은 요의 잔당들 중에서 가장 큰 세력들은 다 괴멸시켜 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자들만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속하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해 임무를 완수하겠사옵니다.”

“잔당들의 세력이 날로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게다. 본좌는 내일 일찍 떠날 것이다. 귀관도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게야.” “옛.”

양양성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던 금군 10만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양양성의 수비군들도 방어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채 금군의 동태를 살폈 다. 적들이 공격해 들어오려고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금군은 질서 정연하게 한 곳에 집합하더니 곧 이동하기 시작했다. 금군이 물러난 다음 날, 검은 갑주 로 몸을 감싼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마대는 주위를 빙 둘러본 후, 곧바로 금군이 물러간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도대체 어느 쪽 소속인지 알 수 없었다. 금군인지 송군인 지, 아니면 무림맹인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주의 형상이 송군의 양식이었기에 어쩌면 송군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송군이라면 왜 악비 대 장군에게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수라도제가 직접 이끄는 2천 명의 무림인들이 양양성에 도착했다. 다섯 무리들 가운데 무공이 뛰어난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이 가장 먼저 도착 한 것이다. 그들이 지닌 경공술이 워낙 높은 만큼 최단거리로 가로질러 달려왔기에 흑풍대와의 거리 차이를 현격하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양양성을 지키고 있던 패력검제와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수라도제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패력검제에 비해 수라도제가 훨씬 더 연배 가 높았기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패력검제는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수라도제 대협.”

“만나서 반갑네. 그래,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가.”

둘은 찻잔을 사이에 놓고 지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눈 대화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남하해 오던 20만에 달하던 금군의 궤멸이었다. “피해가 크지는 않았습니까?”

“의외로 피해가 적었다네. 그것도 다 마교 애들 덕분이지.”

“마교 애들이라고요? 마교도 여기에 동참했습니까?”

“허어, 참. 자네는 못들은 모양이군.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가 금을 무찌르자고 협정을 맺은 지가 얼마나 지났는데……. 하기야 이곳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마교 녀석들은 어디 갔나? 우리보다 한참 앞질러 갔으니 벌써 도착했을 텐데 말일세.”

“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패력검제는 여기에서 마교도들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생각해 보던 패력검제는 어제 봤던 기마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기야 여기 있으면서 본 특이한 존재는 그 흑색 기마대뿐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그들이 마교도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그 어떤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저, 어제 이상한 무리를 봤는데 말입니다. 모두들 흑색 갑주로 무장을 갖춘 기마대였습니다. 혹시 그들이?”

“바로 그들이 내가 말했던 마교도들일세.”

“예? 아무리 봐도 마교도 같지는 않았는데요? 원래 마교도들은 괴상한 기운을 뿜어내지 않습니까?”

패력검제의 말에 수라도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도 그렇게 느꼈겠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단체였어. 특히나 그 수장되는 인물인 관지라는 장로는 어찌 보면 무림인이 아니라 일국의 대장군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패력검제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 그런 자가 마교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노부가 한 번 만나 봤는데 관지라는 인물은 정말 마교에서 썩기에 너무나도 아까운 사내더구먼. 정말 훌륭한 무인이었다네. 자네에게도 소개시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표정을 짓던 패력검제는 곧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후퇴하는 금군을 따라 갔으니, 조만간 기회가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저도 대협께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그러나?”

“만통음제라고 불리는 분이시죠.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금군 진영을 뚫고 제자와 함께 들어오셨지요.”

만통음제라는 말에 수라도제도 대단히 흥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음의 대가라는 풍문은 들었지만, 사실 그도 지금까지 만통음제를 만나 본 적이 없었으니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허, 그분이 이곳에 계신다는 말인가. 빨리 만나 보고 싶군.”

성내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걸어가자 제법 규모가 큰 객점이 보였다.

“바로 이곳입니다.”

패력검제는 점소이에게 부탁하여 만통음제에게 자신이 찾아왔음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웬 중년 여인이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만통음제의 제자인 설취였다. 그녀는 패력검제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패력검제 대협.”

설취의 안내로 패력검제와 수라도제는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신선 같은 모습으로 명상을 즐기고 있던 만통음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 통음제가 내놓은 맛있는 술과 음악을 즐기며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눴다. 모두들 중원을 떨게 만드는 최강의 고수들인 만큼 처음 만난 자리니 할 얘기도 많았을 것이 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패력검제는 수라도제에게 말했다.

“또 한 명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수라도제는 미소 띤 어조로 물었다.

“허허, 이번에도 3황5제에 속한 인물인가?”

지금 천하의 최고수는 다시금 3황5제가 되어 있었다. 현천검제가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시체만이 즐비하게 쌓여 있던 화산에서 현천검제의 시체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제거되었는지, 그 속사정을 알고 있던 무림맹은 현천검제가 마교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공표했다. 그렇기에 6제가 5제로 바뀐 것 이다.

“아닙니다. 몇 달 전에 만난 강호의 후기지수인데, 대단히 뛰어난 녀석입니다.”

말을 하는 패력검제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뛰어난 후기지수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한번 만나 보는 것이 좋겠지.”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노부도 함께 갔으면 하오.”

안 그래도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잘된 것이다.

“물론이죠. 선배님께서도 꽤 흥미를 느낄 만한 녀석일 겁니다.”

“바로 저 녀석입니다.”

패력검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높디높은 성벽 위에 걸터앉아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만통음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법 쓸 만한 녀석이외다. 도대체 사문이 어디요?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는 도가 계열이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수라도제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도 만통음제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난 후였고, 그녀가 풍기는 기 운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밖으로 느껴지지 않는 아주 잘 갈무리된 기도를 말이다.

“천지문인가?”

그 말에 만통음제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서 천지문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천지문은 강호에 소문난 쓰레기 문파였다. 물론 마교와 제휴한 것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져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교주와 호형호제하는 그에게 있어서 마교에 대한 선입관 따위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만 믿는 것이 다. 그가 강호행 중에 만나 봤던 몇몇 천지문도들 중에서 저런 특이한 기도를 풍기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패력검제의 반응은 만통음제의 예상 밖이었다. 패력검제는 기겁하듯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패력검제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수라도제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많은 강호 경험을 쌓다보면 그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이지.”

그 말에 만통음제의 눈이 실쭉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노부에게 빗대서 하는 표현이오?”

잘못하면 싸움 나게 생겼기에 수라도제는 다급히 말했다.

“농담이올시다, 원..

성질도 급하다고 내심 투덜거리며 수라도제는 말을 이었다.

“저 아이와 아주 비슷한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그 아이는 천지문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아마 며칠 지나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외다.” “호오, 그래요? 그 말이 맞는지 나중에 두고 봅시다.”

만통제의 말이었고, 패력검제의 생각은 달랐다. 진팔에게 도를 가르쳤다는 삼사저에 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소연이라는 아이입니까?”

그 말에 이번에는 수라도제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대꾸했다.

“어, 어떻게 알았는가?”

“물론 저 녀석이 알려 줘서 알았지요.”

“그 아이는 벌써 노부가 찍었으니 넘볼 생각 하지 말게.”

그 말에 패력검제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새장가라도 드실 생각이십니까?”

수라도제는 당황한 듯 대꾸했다.

“그, 그건 아니고… 노부가 혼처를 알아 봐 주겠다고 말해 놨으니 그리 알란 말일세.”

슬며시 그녀를 서문세가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수라도제였다. 사실 그가 알아 봐 주는 혼처라고 해 봐야 서문세가의 사람일 것이 뻔하니 말이다. “서문세가가 오늘날 왜 그리 세력이 큰지 알겠습니다. 오늘 아주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려.”

패력검제의 말 속에서 뼈가 있는 듯했지만 수라도제는 빙긋 웃으며 두리뭉실하게 대꾸했다.

“허, 무슨 그런 말을. 노부는 단지 뛰어난 인재에게 어울리는 넓은 물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뿐, 별다른 욕심은 없다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워낙 덩어리가 커서 털도 안 뽑고 통째로 삼키시면 목구멍에 걸릴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하지만 패력검제는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아는 것이다. 진팔의 기도가 특이한 것은 태허무령심법 때문이다. 그런데 수라도제 의 말에 따른다면 그 소연이라는 아이도 그와 똑같은 심법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심법 또한 교주가 알려 줬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둘의 뒤에는 교주가 있다. 수라도제가 그녀를 꿀꺽하겠다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어 어쩌면 교주와 칼부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직접 교주와 싸워 본 적이 있는 패력검제다. 그렇기에 아무리 천하의 수라도제라고 해도 교주와 싸우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아는 것이다.

‘흐흐흣, 선배도 한번 당해 보시구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순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근엄하기 그지없는 수라도제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는 패력검제였다.

며칠 후 소연 일행이 도착했다. 그녀를 바라본 만통음제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확실히 수라도제의 말대로 진팔이라는 녀석과 그 기도가 너무나도 흡사했다. “허어, 참. 저런 고수들을 키울 수 있다니……. 천지문은 소문과 달리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이로다. 그토록 노력해서 노부는 겨우 한 놈을 건졌거늘. 천지 문주는 복도 많은 인물이로고.”

패력검제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저 또한 제 아들 놈 하나를 겨우 절정의 반열에 올려놨을 뿐이니 말입니다. 가시죠. 수라도제 선배가 소연이라는 아이를 소개해 준다고 했으니 만 나 봐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수라도제나 만통음제의 경우 신검합일급에 들어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을 것이다. 또, 이번에 결성된 무림맹 연합에 속해 있는 인물들 중에서 그 정도 실력 을 지닌 고수들의 수는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문파가 자랑하는 정예들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첫째,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천지문의 제자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특이한 기도였다. 전문적인 살 수처럼 웬만한 이목으로는 정확한 실력을 꼬집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지닌 기도가 아주 은밀했다. 어떤 심법으로, 어떤 무공을 익히면 저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 아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저(師姐)!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진팔의 당혹스런 물음에 소연은 살짝 아미를 찌푸리며 대꾸했다.

“원래는 임 사형께서 나오시려고 했었지만, 내가 대신 오겠다고 했다. 네가 행방불명되었으니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진팔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저.”

진팔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를 보니, 그동안 무공이 몰라보게 진보하였구나. 아무튼 축하할 일이구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진팔은 뒤쪽을 힐끗 본 다음 소연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사저께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는데요.”

“누군데 그러느냐?”

소연이 보니 저 뒤쪽에서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한 명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3황5제의 한 사람, 수 라도제 대협이다. 그리고 남은 셋이 더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리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 내를 자신에게 소개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둘 다 30대 정도로 보였고,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 말은 그들의 실력이 그녀의 상상을 초월할 정 도로 뛰어나다는 말일 것이다. 저런 사람들과 사제가 어울리고 있었다니……. 그것을 보면 사제의 가출(?)이 꽤 유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는 소연이었다.

패력검제는 수라도제 등과 함께 소연을 만나 간단하게 다과를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눴다. 그런 다음 패력검제는 그들과 헤어져 문도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돌 아갔다. 길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패력검제는 문 앞에 서 있는 남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만통음제와 그의 제자였다. 아마도 경공술을 사용하여 앞질러와 여기 서 패력검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오시게나.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구먼.”

객에게 주인이 자기 집 앞에서 어서오라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우스웠지만, 패력검제는 그들을 자신의 거처로 초청했다.

만통음제는 제자를 따로 떼 놓고, 패력검제와 둘만 자리를 잡았다. 차가 나온 후, 만통음제는 자기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밝혔다.

“슬쩍 눈치를 보니까 자네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더군.”

그 말에 패력검제는 슬쩍 시치미를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저 둘에 얽힌 비밀을 말일세. 천지문의 다른 제자들이 풍기는 기도와 비교했을 때, 그 둘은 너무나도 달라. 자네는 뭔가 알면서 숨기는 듯한데. 노부에게 알 려 줄 수는 없겠나? 비밀은 꼭 지키겠네.”

만통음제의 경우 정사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하는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 다. 보통 사람들이 정파와 사파라는 큰 둘레를 그어 놓고 사람을 사귄다면, 그는 음악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선을 긋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런 인물인 만큼 진 팔이 가진 비밀을 알려 줘 봐야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천지문이 마교와 협정을 맺은 유일한 문파라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었기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상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던 만통음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서, 설마 저것이 마공이라는 말인가? 마교의 무공과 정파의 무공이 합쳐지면 저런 독특한 기도를 풍기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구먼. 노부는 정통적인 현문의 것이라고 봤었는데…..

그 말에 패력검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교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마교는 그 어떤 문파보다도 더 많은 정파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각 문파에서 절전된 것까지도 가 지고 있죠.”

만통음제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그래서 자네가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군.”

“그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다 아는데, 무공 몇 가지 흘러 들어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뭔가?”

“저들이 익힌 심법이 현문에서도 잊혀져 버린 태허무령심법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통음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태허무령심법을 익힌 것이 뭐 그렇게 허물이 되겠는가. 그게 마교에서 흘러나왔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말한 만통음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현문이 만든 심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태허무령심법이었 다. 그런데 왜 그것이 도중에 절전되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워낙 뛰어난 것이었기에 인정받은 소수만이 익히다가 대가 끊어져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심법이었기에 누구나 다 익히도록 권장되었는데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지독하게 대성하기 어렵다는 점.

그렇다면 마교에서 그 심법이 적힌 비급만 슬쩍 건네준 것이 아니라 빨리 익힐 수 있도록 모종의 도움까지 줬다는 말이 된다. 마교가 골빈 집단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나 잡고 그만한 공을 들일 이유가 없다. 진팔과 소연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마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는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만한 투자를 할 만큼.

“허어, 참. 일이 아주 심하게 꼬여 있구먼. 그래서 자네가 삼키다가 목에 걸릴 거라고 말했던 것이로군.”

패력검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말이 그 상황에서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 노부가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이지.”

여기까지 말한 만통음제는 느닷없이 어기전성을 날렸다.

《교주가 저들의 뒤에 있는 것인가?》

그러자 패력검제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허어, 과연 대단하십니다. 어찌하여 선배님의 명호에 ‘만통(萬通)’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인지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 지은 후 입을 열었다.

“그래, 저 둘 중에 그가 총애하는 아이는 누구인가? 아마도 자네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저라고 그 둘을 다 대해 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팔이라는 녀석이 그의 욕을 엄청 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진팔은 아니라고 짐작할 뿐이지 요.”

“그렇다면 소연이라는 아이겠군. 그가 왜 그 아이를 그토록 총애하는 것이지? 이해할 수가 없구먼.”

패력검제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곧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님. 어쩌면 한순간의 변덕이 아닐까요? 진팔이의 경우를 보니까 거의 충동적으로 가르쳐 준 모양이던데 말입니다. 진팔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심법을 배운 게 아니라 지독한 고문만 당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혈도에 강한 자극을 준 것을 가지고 고문이라며 엄살을 떠는지도 모르죠.”

잠시 말이 없던 만통음제는 문득 어기전성을 던졌다.

《자네, 진골축근마공(珍骨縮筋魔功)이라고 들어봤나?》

패력검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뇨, 들어 보기도 처음입니다만.”

《노부가 알고 있는 친구들 중에 사파의 인물들도 몇 있지. 그들에게서 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수법들 중에서 몇 가지를 들은 기억이 있네. 그중에 진 골축근마공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마공이 있었지.>

“그, 그렇습니까?”

《말이 마공이지, 그건 마교가 개발한 최고의 속성법이라고 할 수 있다네. 그걸 받으면 임의로 환골탈태를 한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뼈와 근육이 재배치된다고 하 네. 똑같은 시간 동안 운기를 해도 그 효과는 몇 배가 될 걸세.》

패력검제는 만통음제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만통음제의 말대로 그런 마공이 진짜 존재하고 또, 환골탈태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만 있다면 신검합일의 경지까지는 순식간에 올라갈 수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무공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효과가 큰 대신 단점도 몇 가지 있다고 들었네. 일단 시전자의 능력이 최소한 극마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시전받을 때 지독한 고통을 당한다는 점이야. 이때,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단 한 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모든 게 허사가 되지. 그리고 두 번 다시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들었다네. 아주 재미있는 무공이었 기에 노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이제서야 패력검제는 왜 만통음제가 어기전성으로 이 사실을 말해야만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만통음제의 말은 진골축근마공을 그가 직접 시전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허어, 참. 바로 그것이었군요. 진팔이 받았다는 것이.》

《그래, 엄청난 기연을 받은 것이지. 모든 마교도들이 꿈에도 그리는 대법을 받은 거야.》

패력검제는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린 다음 말했다.

“저는 또, 어떤 혈을 자극하면 내력을 쌓는 속도가 올라가나 하고 연구하고 있었더니, 그게 말짱 헛고생이었군요.”

만통음제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시행착오의 연속이 아니던가. 똑같은 잘못을 연속해서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현자로 불리는 세상이지. 자네가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그는 정사를 불문하고 아주 다방면의 무공에 조예가 깊다네.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게야.”

수라도제 일행과 헤어진 진팔 일행이 자신들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무사들을 거느리고 양양성에 도착한 천풍검 곡추였다. 곡추를 본 진팔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으로 물들었다.

“허억! 아, 아니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순간, 곡추는 그때 자신이 너무 심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진팔이 이렇게 경기가 들 정도로 놀란다면, 아무래도 사과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 는가. 하지만 그건 곡추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진팔이 이렇게 경악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귀, 귀신이다.”

그 말에 곡추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그러자 소연은 점잖은 어조로 진팔을 질책했다.

“천풍검 대협께 무슨 그렇게 망령되게 말을 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사과 드리거라.”

“그, 그게…, 저자는 그때 분명히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말에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곡추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소연은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천풍검 대협께서는 바로 저 앞에 건강하게 서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곡추가 거들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때 나도 죽는 줄 알았소.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그렇게 심한 독수를 가해 온 것이 아니었소. 사혈에서 1촌 위를 가격했을 뿐이니까.”

그 말에 진팔은 아직도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렇습니까? 하, 하기야…, 지금 생각해 보니 워낙 정신이 없어서 대협께서 돌아가셨는지 확인까지는 못해 본 거 같습니다. 사실 모두 다 죽었을 거로 생각했 으니까요. 그의 손에 걸려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무하다고 들었거든요.”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다네. 그런데 자네도 건강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일세. 그때 너무 못할 짓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줄곧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자네의 이런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아, 아닙니다. 천풍검 대협께서야 무슨 잘못이 있었겠습니까? 다 위에서 시키니까 하신 일이시겠죠.”

진팔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풍검 곡추가 강호에는 상당히 명망 있는 고수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소연이 진팔에게 전음을 날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저>

<그런데 대화 중에 나오는 ‘그’라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거냐? ‘그’가 누군지 모르니까 도통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마교 교주 말입니다.>

마교 교주라는 말에 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사이, 천풍검 곡추가 진팔에게 말했다.

“그때 그곳에 자네도 있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곳에서 죽은 사람은 단 둘밖에 없었다네. 둘 다 그의 신위를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나던 녀석들이었지. 대 남궁세가 에 어찌 그런 소인배들이 끼어들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던 그 덕분에 쓸모없는 놈들이 추려져 버린 셈이 되었지. 그렇기에 그가 내 부하 둘 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는다네.”

곡추가 이 말을 털어놓는 것은 진팔이 나중에 창궁 18수를 보면 두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 뻔하기에 미리 말해 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곡추의 성 격상 없는 일을 만들어서 말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해 준 것이다.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군.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그가 훌륭한 무인이라고 생각하네. 이번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천지문주께서 소문과는 달리 정말 대 단한 분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소문에 개의치 않고 그의 사람됨을 제대로 판단하여 맹약을 체결했다는 것만 봐도 대단한 분이시지 않은가.”

아버지에 대한 칭찬에 진팔은 포권하며 답례했다.

“엄친을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풍검 대협.”

“나는 느낀 대로를 얘기했을 뿐일세.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몇 발자국 걸어가던 곡추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참! 그때, 자네하고 함께 가던 일행들에게도 내 사과를 전해 주게나. 이미 사람을 상하게 해 놓고 이런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일세. 정 마음에 안 든다면 남궁세가로 찾아오라고 전하게. 피 값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직접 지겠네.”

당당한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천풍검 곡추의 뒷모습을 보며, 진팔은 무언지 모를 뿌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과연 무인이라면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때, 옆에서 소연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게 이것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구나. 너도 저런 무인이 되거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무인이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저.”

“그래 어떻게 된 일이냐? 자초지종을 말해 보거라.”

진팔은 사저와 나란히 걸어가며 자신이 무림에서 겪은 일을 잔잔한 어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마교 교주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일부터 시작해서, 패력 검제를 만난 후 벌어진 일까지 아주 자세한 것이다. 한참 말하던 진팔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소연에게 말했다.

“사저, 패력검제 어르신의 집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봤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소연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사제에게 대답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처음에는 조금 지루하실지 모르지만 뒷부분은 정신없이 빠져 들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그러니까 일단 다 들어 본 후에 사저께서 평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 기는 갑과 을이라는 노인들이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패력검제의 저택에 기거하며 수십 번도 넘게 읽은 비급이다. 그렇다보니 진팔은 그 비급의 내용을 막힘없이 술술 외우고 있었다. 비급의 내용을 들려 주면서 진팔 은 소연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과연 이것을 들으면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초반의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들이 이어질 때, 소연은 지루한지 살짝 하품까지 했다. 물론 자신을 위해 얘기를 들려 주고 있는 진팔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한 것 이었지만, 유심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진팔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지루한 듯하던 소연의 표정은 이야기가 후반으로 진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뀌고 말았 다. 소연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진팔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다급히 말했다.

“그 책을 어떻게 보게 된 것이냐?”

소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면서도 진팔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예? 그건 왜 그러십니까? 그냥 그분의 서재에 꽂혀 있기에 재미 삼아 본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소연은 주위를 살피며 진팔에게 경고했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책을 봤다는 말은 하지도 말거라. 특히 그 이야기가 패력검제 어르신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건 제령문이 소중히 간직해 오던 무공비급임이 틀림없는데, 그것을 네가 우연한 기회에 훔쳐봤음이 틀림없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진팔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듯하자 소연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그 비급에 오가는 대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예에 대해 논하는 것인지 지금 몰라서 나한테 이러는 것이냐? 그 정도라면 무림지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 닐 정도야. 내 생각으로는 그 둘은 모두 화경급의 고수들. 그들의 논검이 무림지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책이 무림지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냐.”

진팔은 그제서야 껄껄 웃으며 넉살좋게 말했다.

“과연 사저의 안목은 높으시군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패력검제 어르신께서 직접 저에게 보여 주신 비급이었으니까요.”

소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직접 보여 주셨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제가 왜 사저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 의심이 가신다면 패력검제 어르신께 직접 물어보십시오.”

진팔의 장담에 소연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안심이로구나. 나는 또 네가 경솔한 행동을 했나 싶었다. 그건 그렇고 그토록 엄청난 비급을 그분께서는 왜 너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이냐? 혹시 짚이는 것이 있느냐?”

사실 그런 무가지보를 아무런 이유 없이 보여 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보여 줬을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저. 딱히 원하신 것도 없었고, 그냥 이 책 한번 읽어 보게나 하면서 던져 주신 것이었으니까요.”

소연은 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구나. 과연 그분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네게 그 책을 보여 주신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연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팔의 말 속에는 패력검제와 마교 교주 간에 얽힌 이야기는 빠진 상태였기에 그녀로서는 그 부 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소연은 진팔에게서 교주와 뇌전검황의 논검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 스스로 자신이 지금 화경의 벽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소연에게 어 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수라도제가 이끄는 세력이 모두 다 도착한 다음, 수라도제는 악비 대장군의 처소를 찾아갔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이 일대를 총괄하는 관군의 수장과 의논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쪽에서는 좀 더 전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대장군의 의향은 어떠시오?”

수라도제의 제안에 악비 대장군은 난색을 표명했다.

“지금 전진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겠소? 현재 이곳에 있는 어림군이라고 해 봐야 3만이 채 안 되오. 그리고 이 일대의 어림군을 모두 다 끌어 모은다고 해도 7 만을 넘기 어렵소이다. 그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본관은 생각하오. 차후에 조금 더 준비가 갖춰진 후에..

수라도제는 악비 대장군의 말을 끊으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좀 더 시간이 경과된 후라면 늦소이다. 적의 대군을 물리친 지금,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전군을 이끌고 북상하는 것이 좋소. 그런 다음 우리 쪽에서 싸우기에 알 맞은 위치를 선택하여 적을 기다리는 것이 유리하오. 여기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면 적들은 새로운 병력을 재차 투입해 올 것이 분명하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물론 악비의 생각도 같았다. 하지만 현재 관군의 전력은 너무나도 형편없지 않은가.

“이쪽에 충분한 병력이 있다면 귀하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할 수 있소. 하지만 현재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금군의 총 군세는 1백만에 이른다고 하오. 그중 50만만 남하해 온다고 해도 지금의 병력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이오. 차라리 천혜의 요새인 이곳에서 적을 기다리는 편이 옳다고 본관은 생각하오.”

수라도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젠장, 말이 안 통하는군.”

“어쩔 수 없소이다. 현실이 그런 만큼…….”

이제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자 수라도제는 노성을 터뜨렸다.

“좋소. 대장군의 의사가 그렇다면 이쪽 단독으로라도 움직이겠소.”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수라도제를 향해 악비 대장군이 다급히 말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개별 행동을 하다가 각개격파당한다면 대 송제국은 그야말로 끝장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귀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조금만…, 아니 내년 봄까지만 기다려 주시겠소? 조금 있으면 곧 겨울이오. 금군도 전열을 정비했다가 봄이 되어야 움직이기 시작 할 것이오. 그때쯤 되면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거요.”

수라도제는 돌아서서 말했다.

“좋소. 그때쯤이면 이쪽에도 좀 더 많은 인원이 모일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마교에서 흑풍대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양쪽을 합해 봐야 겨우 4만이 채 안 되는 수다. 그들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금군 수십만을 상대로 싸우기는 껄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특히나 마교와 연합해야 하는 만큼 그 위험 부담은 가중되는 셈이었다. 서로 간에 손발이 안 맞는 것도 예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지 못할 마교도들인 만큼 상황이 아주 안 좋아지면 자기들만 슬그머니 전장을 이탈해 버릴 위험성마저 있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어쩔 수 없이 악비 대장군의 제안 을 받아들인 것이다.

수라도제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영문에 다음 군사 행동은 봄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아울러서 흑풍대에게 그 사실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악비 대 장군은 바로 그날부터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훈련을 강도 높게 시행했다. 이번 겨울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느냐에 따라 제국의 미래가 결 정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