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1화 -구사일생의 기적묵향 2권 1화 –

구사일생의 기적

그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더욱 큰 고통에 신음하며 다시 누워야만 했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어 렴풋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더 또렷한 형상 을 만들어 갔다.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기적이야. 빨리 대인께 알리게.”

“예.”

“이걸 마셔 보게나.”

어떤 사람이 그에게 쓴 한약을 줬다. 그 사람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그는 입에 대어 주는 한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그는 다시 누워 잠이 들 었다. 한동안 그가 한 일은 약을 먹고 자는 일뿐이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는 그럭저럭 기운을 차렸다. 그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한 사내가 그를 찾아왔다. 사내는 학자풍의 아주 근엄하게 생긴 사람으로, 수염을 곱게 길렀으며 상당히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었다. 사내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가?”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사내는 옆에 있는 의원(醫員)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

“내가 자네를 낚시하면서 건졌다면 믿겠나? 꿈에 아주 큰 잉어가 걸려 올라오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더니, 이건 잉어가 아니라 인어(人魚)를 낚 아 버렸군. 자네 이름은 뭔가? 이름, 이름 말일세.”

“이름?”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자 상대는 의원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 기억을 못 한다는 게 사실이구만. 설마 하고 왔는데………….”

“그렇게 아쉬워하진 마십시오. 한 야인(野人)을 이 정도까지 돌봐 주셨는데, 그도 고마워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게 아닐세. 저자의 몸에서 뽑아낸 검은 저자의 것이 확실한가?”

“예, 그 검(劍)은 기이하게도 도(刀)처럼 적당히 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더군요. 하지만 대단한 명검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세나.”

의원은 옆에 치워 둔 검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검집에서 검을 약간 뽑아 보았다.

“과연 대단한 명검이군. 그런데 이자는 어찌해서 자신의 검에 단전을 찔렸을까?”

“그건 소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 심장에도 비수가 박혀 있었지만, 비수가 빠지지 않은 덕분에 출혈이 적어 살았지요. 침술로 그의 심장을 아 주 서서히 뛰게 만들고 비수를 뽑아내어 명약으로 다스렸는데… 거의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데도 살아났습니다. 그의 생명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비수도 이자의 것일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비수의 집은 그의 품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몸에서 옥패(玉牌) 하나와 이것 하나만 발견했습니다.”

의원은 기이한 문자가 적혀 있는 천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이건 어디의 문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야 학문이 짧아서………….”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가 될지 모르니 내가 보관하기로 하지. 이 정도 보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면 무림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일 텐데, 혹시 자네는 들어 본 적이 없나? 과거에는 자네도 무림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잖나?”

“저야 그렇게 대단한 고수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자는 얼굴은 대단히 젊지만 이빨이 누런 걸로 보아…………. 실제 젊은이는 이 정도로 이빨이 상하지 않거든요. 혹시나 말로만 들어 본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고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설마하니 그 정도 고수일라구.”

“아닙니다. 그 「墨魂(묵혼)」이라는 글자가 음각된 보검이나 이 비수, 온 내장이 뒤틀릴 정도의 심한 내상(內傷), 그리고 제가 아무리 침술이 좋다하지 만 전신 혈맥(脈)이 대부분 파괴되어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는데도 살아나는 대단한 생명력과 치유력. 이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가 아 니면 힘들죠. 거기다 그의 상처도 대부분 무공에 의해 입은 상처입니다.”

“대부분?”

“예, 물에 떠 내려오며 바위에 찍힌 상처를 제외하면 모두라는 뜻입니다.”

“자네가 보기에 어느 문파의 무공인 것 같나?”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장력의 패도함을 가지고 말한다면 사파(邪派)의 무공 같지만, 정파(派)라 자처하는 문파에도 이 정도로 악독한 무 공이 약간씩은 있기에 짐작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무기에 의해 입은 상처가 아니고 대부분 장력을 통해 입은 것이기에 더욱 파악하기 힘들죠.” “참 안됐군. 보아하니 그런대로 잘생긴 얼굴인 것 같은데, 절반은 완전히 떡이 되었으니…………….”

“바위에 부딪치며 생긴 상처가 이만하길 다행이죠. 거기에 뼈도 여러 군데가 부러져서 지금 겨우 접골(骨)이 된 상태인걸요.”

“이자가 무림인이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기억을 되찾는다면 자신이 익힌 비급의 내용을 알려 줄 수는 있겠죠.”

“호… 맞아,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군.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볼 테니 잘 돌봐 주게.”

“예.”

사람들은 그를 병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기억을 완전히 상실하여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데다 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왼손마저도 약간 이상하게 붙어

있었다. 그 병신은 상장군(上將軍) 옥상) 대인의 저택에서 말 돌보는 일을 했다. 옥상은 자를 청영(淸永)이라 부를 만큼 대쪽처럼 꼿꼿한 위인이 었는데, 그의 아버지 옥영진 대장군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아마 그놈의 청렴한 성격 덕분에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일찌감치 몸통과 목이 분리될 가 능성이 다분할 정도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군무에만 종사해 와서 현감 등 가끔씩 아부성 뇌물이 필요한 관직을 거치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 는지도 모른다.

옥청영에게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둘은 사내였고 둘은 계집아이였다. 계집아이들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병신의 모습을 한 번씩 훔쳐보곤 했 다. 첫째 딸은 그런대로 명문의 대갓집 여인네처럼 다소곳하며 순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는 괄괄할 성격으로 말 타기를 즐겼으며 어쩌다 성질 이 나면 말이 더럽다는 트집을 잡아 그 병신을 괴롭히면서 기분 전환을 하곤 했다. 첫째 아들은 무림의 한 방파에 가서 무술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마 주칠 일이 없었고, 막내아들은 제법 의젓한 게 도령의 풍도가 풍기는 아이였다. 이 아이는 말 타는 걸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마(愛馬)를 잘 돌봐 주는 병신에게 먹다 남은 간식이 있으면 손수건에 싸 두었다가 가져다주곤 했다.

병신이 집에 들어온 지도 어언 여섯 달이 흘렀다. 병신은 힘이 점점 좋아지더니 이제는 보통 장정 두 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들 수 있는 것들을 혼자 서 들어 옮겼다. 그 때문에 하인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그를 불러 시키고는 술을 약간 사 줬는데, 특히나 고량주를 좋아해 고량주를 사 준다면 그 많 은 짐을 혼자 나르라고 해도 열심히 날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모습이 옥청영의 눈에도 띄었고 그에 놀란 옥청영은 마구간을 책임지는 하인을 불 렀다. 하인이 굽신거리며 다가오자 옥청영은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마구간에서 일하는 그 젊은이 정말 힘이 좋더군. 그래 처음부터 그랬던가?”

“아닙니다요. 처음에는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더니,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비쩍 마른 놈이 힘이 세어져서 요즘에는 집 안의 온갖 무거운 물건은 그 녀석이 다 나르고 있습니다요.”

“그래? 이상하군. 그래, 일은 잘하나?”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기분이 내켜야만 하죠. 말 돌보는 일은 그래도 열심히 하는데, 그 외의 일은 아예 손도 안대죠. 거기다 한 번 하기 싫다고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해도 안 합니다. 그놈이 원체 고량주를 좋아하는지라 물건 나를 때는 술로 꾀어서 일을 시키고 있습죠.”

“자네 말을 들으니 그는 좋고 싫은 걸 꽤 가리는 모양이군.”

“예, 하루는 한참 바쁜데 넋을 잃고 국화를 바라보고 있기에 소인이 화가 나서 엉덩이를 한번 차 줬을 정도로 국화를 좋아합죠. 물어보니 왠지 가슴 이 뭉클한 게 따스한 느낌이 들어 좋다고 하더군입쇼.”

“그는 꽃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군.”

“아닙니다요. 가을부터 지금까지 그 녀석과 함께 지내면서 알아낸 사실인데 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꽃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이상하 게 싫다고 그러더군요.”

“그래? 그럼 그 외에도 싫거나 좋다고 하는 게 있나?”

“그 외에는 거의 그저 그런 편입죠. 그렇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만 원체 황소고집이라 자기가 한 번 싫다고 작정하면 뭐로 꾀어도 안 듣 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고량주 줄 테니 부탁 좀 들어줄래?’ 하는 식으로 꾀어서 나중에 일거리를 일러 주면 웬만한 일은 다 합죠.”

“이 의원 댁에 사람을 보내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주게. 그리고 이 의원이 도착하면 그 젊은이를 나한테 보내 주고.”

“알겠습니다요.”

“물러가 보게나.”

“예, 나으리.”

이 의원이 도착하자 옥청영은 그를 환대하며 말했다.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이상한 일이라뇨?”

“그 젊은이가 무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나?”

“만에 하나 정도의 가능성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의 힘이 점점 세진다니…, 이게 아마 공력(功)이 돌아오는 증거가 아닐까 해서 자네를 불렀네. 좀 있으면 그가 올 테니 진맥을 해 주시 게.”

“예.”

“마침 저기 오는군. 이리 오너라.”

병신이 다가오자 옥청영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이르고 이 의원에게 진맥을 보게 했다. 이 의원은 한참 진맥을 하더니 말했다.

“기괴한 일이군요. 내력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럼 언제쯤 회복될 것 같나?”

“지금 그의 몸에는 상당한 내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여러 곳의 혈도가 파괴된 채인지라 아직도 몸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도 예전과는 달리 상당수의 혈도가 다시 뚫렸군요. 이상한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막혔거나 파괴되었던 혈도가 자신의 내력으로 뚫릴 가능성이 없는 건가?”

“없다고 봐야죠. 안 그러면 왜 그렇게도 무림인들이 주화입마(走入魔)를 겁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자는 저절로 뚫렸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뚫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이 의원은 병신의 얼굴을 향해 재빨리 주먹을 날렸다. 충분히 공력을 실어 날린 주먹질이기에 맞으면 소(牛)도 뻗을 정도로 강맹한 힘을 지 니고 있었다. 그 병신은 의원의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순간적으로 의원의 면상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날렸다. 의원은 반격까지 있을 거라고는 예 상하지 못한지라 경악성을 지르며 왼손으로 병신의 주먹을 흘렸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초식을 사용하여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초 식을 사용하여 권을 날리자 병신은 더 대응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한쪽 다리가 말을 잘 안 듣는지라 고스란히 다섯 대를 얻어맞고 말았 다. 쓰러진 병신이 몹시 아픈 듯 맞은 곳을 주무르는 걸 보며 이 의원이 물었다.

“어떻게 처음의 주먹을 피했지?”

“너는… 너는… 나쁘다…………… 왜 나를 때리냐?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병신이 억울한 듯 씩씩거리자 이 의원은 깊은 숨을 쉬며 옥청영에게 말했다.

“대단하군요. 모든 기억을 소실한 지금도 여태까지 쌓아 둔 수련에 따라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다니. 거기다 그의 주먹질에는 대단한 공력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공력이 실려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모든 걸 알겠군요.”

“동작 하나하나에라니. 그렇다면 저자의 모든 동작이 초식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지만 사실입니다.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을 뿐, 그의 움직임에는 공력이 실려 있습니다. 세상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의식적인 모든 몸동작에 공력이 실려 있다면…, 뜻이 일어나면 진기가 흐르고 진기가 흐르는 데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그 무림에서 말하는 현경의 경지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는 정파의 기둥으로 추앙받던 구휘 대협뿐입니다. 만약에 이자가 현경의 고수였다면 벌써 무 림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자가 현경의 고수일 리는 없죠. 하지만 어쨌든 그에 근접한 경지까지 이루었던 자임에는 틀림없습 니다.”

옥청영이 생각에 잠긴 듯하자 이 의원이 갑자기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뭔가?”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보는 겁니다. 혹시나 예전에 한 번이라도 익힌 적이 있는 무공이라면 반응이 약간 다를 겁니다. 그러다 보면 그의 사문(門) 을 알아낼 수도 있겠죠.”

“그것 참 좋은 의견이네. 그런데 그렇게 잡다한 무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큰 나으리께 부탁해 보시죠.”

“아버님도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셔서 내 부탁을 들어주실 수는 없을 거야. 지금까지도 찬황흑풍단의 잃어버린 세력을 반도 회복 못 한 상태 라…………. 참! 비급을 좀 보내 달라고 하면 되겠군. 그리고 각 파의 고수 몇 명을 함께 보내 달라고 해서 가르쳐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 기 전에 자네가 좀 가르쳐 볼 수는 없나?”

“예, 좋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다음 날부터 병신에 대한 무공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의원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은 그 병신이 도무지 무공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 다. 여러 가지 검법도 가르쳐 보고, 장법, 지법, 조법(爪法), 권법, 각법(脚法) 등도 가르쳐 봤으나 도무지 관심이 없는 상대를 가르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머리를 써서, 병신이 있는 곳에서 막내아들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막내아들은 평소에 병신에게 잘 대해 주어 꽤 신뢰를 받고 있었기에, 그를 통해 병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생각한 것이다. 막내아들에게 무공 을 가르치면 병신은 근처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국화를 보기도 했다. 아직 국화가 필 때가 아니라 파릇하게 잎만 무성할 뿐 봉오리조차 없 는데도, 병신은 국화를 좋아했고 자주 국화를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이 의원은 막내아들에게 무공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제법 가르침을 소화해 냈으므로 그로서도 관심도 안 보이 는 병신보다는 이 붙임성 있는 아이에게 흠뻑 빠져 들어 막내를 가르치는 데 쏠쏠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토납법(吐納法)을 가르치고 있었다.

“단전에 호흡을 천천히 끌어들였다 내뱉는 것을 토납술이라 하는데, 그럴 때 온몸에 기를 일주천시키는 방법에 따라 수많은 운기행공법들이 존재한 단다.”

“일주천이 뭐예요?”

“그러니까 기를 어떤 정해진 혈도를 따라 몸 전체를 한 바퀴 돌리는 것을 일주천이라 하지. 기를 통과시켜야 하는 혈도는 각 문파의 운기조식법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언제 숨을 내뱉고 마실지도 세심하게 정해져 있어서 만약 조금이라도 틀리면 큰 화를 당할 우려가 있다.”

“그런데 왜 꼭 호흡을 도중에 정확히 분배해야 하죠?”

“왜냐하면 대자연의 기를 호흡을 통해 몸속에 끌어들여 …………….”

병신은 대자연의 기라는 말을 듣고는 뭔가 떠오르는 듯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병신은 날마다 꾸는 악몽 때문에 밤을 겁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자 그는 온몸을 떨며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악몽의 내용은 언제나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그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깨고 보면 악몽의 내용을 기억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악몽의 시작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그의 몸에 시커먼 칼을 찔러 넣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고, 그냥 공포와 후회, 살아야 한다는 생각 등 수없이 많은 불가사의한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끝에는 언제나 국화꽃이 그를 포근히 감싸 주지만 곧이어 그 국화꽃도 악당들의 손에 찢어져 나가고, 그는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 이다.

병신은 구석진 곳에 숨어들자 마음이 놓였고 자신에게 공포를 안겨 줬던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다.

‘대자연의 기? 대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대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한 번 맴돌기 시작한 그 단어들은 그의 마음속을 끊임없이 헤매기 시작했고 그는 어느새 무아의 경지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가 병신의 몸에 모여 들어 어느 한순간 단전에 차오르자 그 기는 순식간에 깨어진 단전을 회복시켰 다. 그 엄청난 기는 몸속을 용솟음치며 막히거나 파괴된 혈도를 차례차례 뚫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있었지만 이미 병신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은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모든 혈도가 뚫리자 몸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의복은 재가 되어 흩날렸고 피부도 새카맣게 타 버렸다. 병신이 일으키는 무 시무시한 기의 회오리를 감지한 이 의원은 놀라서 다가갔다가, 병신이 뭔가를 행하며 엄청난 기를 방출하고 있는 걸 보고 질리고 말았다.

‘정말로 이자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고수로구나. 저건 아마 말로만 듣던 환골탈태(換骨奪胎)인 모양인데… 환골탈태하려면 거의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진짜 화경의 고수란 말인가?’

어느덧 병신의 기는 점점 잦아들어 밖으로 뿜어 나오던 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 후에도 오랫동안 병신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걸 보고 혹시나 죽은 게 아닌가 해서 막내아들이 만져 보려 하자 이 의원이 그의 손길을 막았다.

“그를 방해하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하면 지금의 그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주화입마가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럼, 잘못하면 생명을 잃거나 병신이 되기도 하지. 고수들은 그 나름대로 폭주하기 시작하는 기를 한곳에 가두어 생명을 구하는 기법들을 알고 있 지만 저자는 그걸 모두 잊어버렸기에 잘못되면 바로 죽게 된단다.”

이윽고 그 병신이 눈을 떴다. 구석에 숨어 있는 자신을 두 사람이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느낀 그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피하려고 슬그머 니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의복이 가루가 되어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의 피부를 덮고 있던 검게 탄 부분이 떨어져 내리면서 백옥과도 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또 얼굴 한쪽을 흉악하게 만들고 있던 상처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걸 보고 가장 놀란 것은 막내아들이었다. 병신은 자신이 완전히 발 가벗은 상태라는 걸 깨닫자 나는 듯이 달려서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병신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자 병신이라 불리던 사내의 이빨이 몽땅 다 빠져 버렸다. 그리고는 하얗고 예쁜 이빨이 새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가 한동 안 이빨이 없이 돌아다니자 사람들은 그를 할아범이라고 놀려 댔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 그의 이빨이 완전히 다 자라나자 그가 제법 미남이라는 사실 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전보다 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욱 놀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옥청영은 자신의 아버지인 옥영진 대장군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그 이야기에 옥영진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오랜만에 만난 아들은 본체만체하고 옥영진은 먼저 ‘그’의 행방부터 물었다.

“네가 말한 그는 어디 있느냐? 한번 만나 보고 싶으니 이리 불러오너라.”

“그 전에 보실 게 있습니다. 청아!”

“예, 아버님”

“묵혼검을 가져오너라.”

“예.”

그러더니 둘째딸은 마지못해 묵혼검을 그의 아버지에게 건넸다. 말괄량이 아가씨는 아버지의 방에 있던 묵혼검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려서, 며칠을

졸라 겨우 얻어 냈던 것이다. 그는 검을 옥영진에게 주면서 말했다.

“처음 그자를 발견했을 때 단전에 박혀 있었는데 그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 꼭 맞는 걸로 보아 그자의 검인 것이 확실합니다.”

옥영진은 검을 뽑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주 좋은 검이다. 조금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여기에 음각으로 쓰여 있군. 「墨魂(묵혼)」이라…………. 이건 완전히 현철(玄)로 만들었구나. 거기다 이 섬세한 솜씨는 정말 보기 드문 명장(明匠)이 만든 거야.”

이어 묵혼검의 검집을 살펴보며 말했다.

“투박한 듯하면서도 고고한 기상이 어려 있으니 이 검집 또한 이 검을 만든 사람이 같이 만든 듯하구나.”

“아버님, 그렇다면 이건 누가 만든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자의 심장에 박혀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탁자에서 하나의 비수를 꺼내어 옥영진에게 보여 주었다.

“비수의 집은 제가 부근의 장인에게 부탁하여 만들었습니다. 그자의 몸에서 비수의 집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흠 이건 「墨影(묵영)」이라 음각되어 있군. 이 묵영비(墨影比)를 만든 자의 세심하고도 섬세함은 과연 묵혼검을 만든 자의 실력과 비슷해. 거기다 묵 자를 같이 넣어 만든 이름이나 손잡이의 모양까지 거의 유사함이 많구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한 벌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자는 기억을 잃고 있으나 대단한 경지의 무공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환골탈태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료하는 걸로 보아 최소한 화경의 고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밖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매화를 아주 싫어하며 국화와 고량주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싫 다고 생각되면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매화? 너는 매화란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게 없느냐?”

“글쎄요…….”

옥청영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짓자 옥영진이 아들을 나무랐다.

“멍청한 녀석! 너는 현 무림맹주가 누군지도 모르느냐?”

“그거야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靑鶴)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의 절기는 뭐냐?”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 아! 제가 멍청했습니다.”

“이걸로 그자에 대한 정보가 최소한 무림맹에만은 흘러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구나. 그의 사문은 어디인 것 같더냐?”

“그건 직접 보시죠. 소자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이수량(李修良)이라는 의원이 있는데, 그는 무림인 출신이라 그에게 부탁하 여 여러 가지로 알아봤지만 도저히 추측이 불가능했습니다. 여봐라.”

“예.”

“가서 국광)이를 데려오너라.”

“예.”

“국광이라니?”

“저도 몰랐는데 그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니까 모두들 그를 병신이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 모든 상처가 없어져 버리자 그가 국화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붙여 준 이름인 모양입니다.”

“국광이라・・・・・・ 그것도 괜찮군.”

이때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요?”

“들어오게나.”

옥영진 대장군에게 국광과의 만남은 충격적이었다. 우선 그자의 몸과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숨기지 않는 정심한 기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낀 것이 다.

‘정말 대단한 고수! 그렇지만 저 정도에 이르면 기를 숨기는데 이자는 숨기려 들지 않는구나. 하지만 몸속으로 갈무리되어 미미하게 흘러나오기에 고도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알아채기는 힘들 거야.’

“자네가 국광인가?”

“예, 모두들 그렇게 부릅죠.”

“자네, 노부를 도와 일을 할 수 없겠나?”

“그건 나으리의 부탁이십니까? 아니면 주인 나으리의 부탁이십니까?”

“노부의 부탁일세.”

“그렇다면 싫습니다.”

“왜?”

“저는 이 집이 좋고 말들도 좋거든요.”

국광이 이렇게 말을 뱉어 버리자 옥청영은 기겁을 해서 국광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진땀을 뺐다.

“아버님을 따라가게.”

“왜 제가 저 나으리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건, 그건…, 나보다는 아버님이 자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아버님을 잘 모실 수 없겠나?”

“주인 나으리의 부탁이라면 들어드립지요. 대신……”

“대신?”

“그 부탁은 주인 나으리가 살아 계신 동안만 지켜질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제 생명의 은인은 주인 나으리뿐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다음은 제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겁니다. 그 점은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살아 있다면 자네에게는 손해가 아닌가?”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입죠.”

옥청영은 그제야 한숨 돌린 듯 옥영진에게 말했다.

“아버님, 언제 떠나실 건지요?”

“내일 아침에 떠날 거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 간의 회포나 풀자꾸나.”

“자네는 나가 보게나. 아참! 이건 자네 것이니 가져가게.”

국광은 검은색의 검과 비수를 보면서 약간 망설이는 것 같더니 물었다.

“이게 제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네. 이제 와서 말이네만 이 검은 자네의 아랫배에 박혀 있던 것이야.”

그 말을 들은 국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옥청영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검집은 자네의 허리의 검대(劍帶)에 묶여 있던 것이고, 두 개가 완전히 일치하는 걸로 보아 이 묵혼검은 자네의 것이 확실하네. 그리고 이 묵 영비는 자네의 심장에 박혀 있었는데, 집은 자네에게 없었지만 그래도 묵혼검을 만든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하니 그것 또한 자네 것이 야. 자네가 가져가게. 이 둘은 대단한 보검으로 이만한 걸 다시 구하기도 힘들 걸세.”

국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며시 묵혼검을 약간 꺼내 봤다. 검은색의 검신이 빠져나오자 국광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오랫동안 꿈에서 보며 의문을 품었던 그 검이었던 것이다. 묵혼이라는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은 걸로 보아 아무래도 자기 것이 분명한 것 같기에 검대를 허리에 차고 비수를 품속에 넣었다. 국광이 주섬주섬 챙기는 모양을 보던 옥청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것도 자네 것일세.”

그러면서 서랍 속에 보관해 뒀던 천 조각과 옥으로 섬세하게 다듬은 자그마한 옥패를 가져와 국광에게 내밀었다.

“그 외에 다른 종잇조각들도 자네 품속에 들어 있었지만 원체 오랜 시간 물에 불은 탓인지 뭔지 알 수 없었네. 이상한 건 자네 품속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점이었어. 어쩌면 은표나 금표만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종이는 완전히 물에 녹아 버렸으니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오직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었네.

이 천 조각에는 기이한 문자가 쓰여 있는데, 지금은 자네가 읽을 수 없겠지만 나중에 기억을 되찾는 데 보탬이 될지도 모르니 소중하게 간직하게. 그 리고 이 패는 아마 자네의 신분을 나타내는 걸 거야. 붉은 옥에 용이 살아 있는 듯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는데, 대단한 솜씨의 작품이지. 이것 또한 잘 간직하다 보면 아마 자네의 과거를 알아내는 열쇠가 될 걸세. 거기에 자네의 몸에 꽂힌 것들이 자네의 검과 비수였으니 아주 잘 아는 사람에게 암 습당했을 가능성이 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자네를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여태까지 열심히 일해 준 보답일세.”

하지만 국광은 옥청영이 내미는 은자를 거절했다.

“생명을 살려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냥 집을 나서는 것도 아니고 큰 나으리를 따라가는 것이니 먹고 자는 데는 불편이 없을 테고,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고 국광이 나가 버리자 옥청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님,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자는 완전한 무인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돈 자체를 우습게 보는 것 같으니까요. 국광을 잘 부탁드립니다. 여태까지 같이 지내면서 알아본 바로는 처음부터 살살 구슬리는 방법이 저자를 다루는 최고의 방법이죠. 어떤 말을 꺼냈을 때 거부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걸 뒤 집는다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하고 싶다는 대로 그냥 놔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타고난 성격은 아마 지속되는 모양이지요. 아마 과거에도 저자는 제멋대로이고 융통성이 하나도 없었을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다면 저 정도의 고수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고, 또 자신의 검에 찔린 채로 떠 내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