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권 19화 – 열락의 결과

열락의 결과

관지는 마길수 상장군 이하 대부분의 백인대장급 이상 고급 장수들이 옥영진 대장군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간 후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면밀한 점검을 하고 있었다. 평상시 일과가 끝나면 막사에 모여 술을 마시는 게 거의 당연한 일과처럼 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백인대장급 이상이 없 으니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수습하기 힘들다는 걸 의식한 때문이다. 수하들에게는 내일 진하게 한잔하자는 약속을 해 두고 방비 태세를 유지했다.

지금 요와의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기에 요로서도 총력전을 펼쳐 원정군이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의 휴식과 보급을 완료한 후 다시 요와의 전선(戰線)에 투입될지도 모른다. 거기에 오랜 전쟁으로 민심도 흉흉했고 그를 이용해 어쩌면 모반이 일어날지 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막사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인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상대는 관지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옥영진 대장군의 경호원이라 할 수 있는 무림인이었는데,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암행, 첩보 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옥영진 대장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충복(忠僕)이었다. 그는 관지의 앞에 부복(俯伏)하며 긴급히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뭔가?”

“대장군 관저를 금의위의 무사들이 포위하는 것을 보고 속하는 나으리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달려왔습니다.”

“뭐라고? 금의위가 왜?”

“이번에 대영반이 엄승의 수족으로 교체되었기에 아무래도 흑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속히 결단을…….”

‘대장군 정도의 인물을 무조건 체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건 황상의 묵계(默契)가 있어야 가능한 일. 지금 군을 움직이면 대장군은 구하겠지 만 역적의 누명을 면키 어렵고, 또 외면하자니 정의가 아니로구나. 어찌하면 좋을까……………’

“금의위 무사가 몇 명이나 동원되었더냐?”

“1천 명가량 되옵니다.”

“1천 명이라. 그렇다면 이쪽에서 도울 필요도 없다. 금의위의 실력이 뻔한데.. 그들의 실력으로는 대장군을 잡을 수 없지. 다만 대장군이 어떤 결 단을 내리느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나.”

“그러하오나 금의위와 함께 친황대의 무사 10여 명이 있었사온데… 그중 한 명은 친황대의 대장 해공공이 분명했습니다. 친황대까지 동원되었다면 대장군께서 순순히 포박을 받지 않았을 때 모든 고급 장수들까지 없앨 수 있다는 계산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해공공과 친황대가 분명하더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해공공은 황궁 5대 고수 중의 한 명. 그도 대장군과 상장군의 무위(武位)를 모르지 않을 터…………. 충분한 승산이 있기에 달려들었겠지. 그렇다면?” “맹각(覺)!”

“예, 대장.”

“대장군을 구출하러 간다. 이건 황명이 아니기에 출동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자네가 자원자를 모집하라.”

“옛!”

“자원자들은 무장을 갖추고 연무장(練武場)에 집합하라.”

“ol!”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관지는 자원자 4천여 기를 이끌고 옥영진 대장군의 관저를 향해 출동했다. 4천 기 정도만을 이끌고 떠난 이유는 지금 수행하려는 일 자체가 살얼음 판을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무림인 출신으로 의를 숭상하는 자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가담한다 하더라도 집안에 피해가 없는 자 들만을 고른 것이다. 관부에 인척이 있어 역적으로 몰리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4천여 기에 이르는 흑풍단이 무장을 갖추고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으나 이들의 진격도 성 외곽에서 괴이한 인물들의 출현으로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관지는 한눈에 흑의를 입은 상대들이 정상적인 수행을 쌓은 무사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마기 가 음울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고 황홀한 여체에 싸여 시간을 보내던 국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점차 정신이 들기 시작한 국광은 본 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나체인 자신 옆에는 오랜 정사의 흔적을 온몸에 지닌 설약벽이 기진해 누워 있었다.

‘내가 살아 있단 말인가?”

몸속에 기를 일주천시켜 봤으나 이상하게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력은 없어진 것도 생긴 것도 없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동자공을 익힌 게 아닌가? 아니면 이들이 나를 묵향이란 인물로 착각한 것인가……………. 알 수가 없군.’

국광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데 이윽고 정신을 차린 설약벽이 국광을 보고 대경해서 외쳤다.

“부교주… 당신은, 당신은… 동자공을 익힌 게 아니었나요?”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침상 옆에 서 있는 국광의 상태만을 보고 다급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이 우스워 국광은 미소를 지 었다. 하지만 곧 약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글쎄, 나는 전에 어떤 녀석에게도 말했듯이 부교주가 아닌지도 몰라. 어쨌든 이번 일로 동자공을 익히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

국광의 말에 설약벽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가……………. 당신은 부교주가 맞아요. 당신에게 금을 가르친 것은 저라구요.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국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 금을 가르친 건 당신이었어. 혹시나 했는데.

국광은 묵혼을 허리에 차면서 설약벽을 돌아보았다.

“그럼 과거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나?”

설약벽은 일어나 앉은 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겉옷을 주워 입었다.

“당신이 동자공도 안 익혔고, 또 이렇게 정력이 좋은 줄 알았다면 진작에 안기는 건데.. “약 탓이지 정력이 좋은 건 아냐. 엄살 그만 떨고 이제 대답을 해 주실까?”

“…….아야야, 온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군요.”

“간단히 말해 드리죠. 당신은 마교의 부교주였어요. 당신의 강함이 교주와 다른 부교주들에게는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당신을 처치한 것이죠.” “다른 부교주들?”

“예. 교주, 능비계, 장인걸 부교주 모두 4마제(四魔帝)로 꼽히는 극마(極魔)의 고수들이죠. 당신이 없어진 지금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의 사이가 점차 나빠졌지만, 당신이 존재하는 한 당신을 없애는 데 힘을 합칠 것이 분명해요.”

“재미있군. 하지만 나도 그들에게 호락호락 당할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아.”

“과거에는 그랬죠. 하지만 본교에서 익혔던 모든 무공을 잊어버린 지금, 당신은 그들의 합공을 당할 수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그때는 그때고…………… 나는 과거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상황에서 복수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대신 상대가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을 끊고 잠시 생각을 하던 국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그대를 지금 죽이고 싶지는 않아. 하기야 나에게 살수를 쓰지도 않았는데 죽일 필요도 없지. 나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나?” 설약벽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살려 주신다니 고맙군요. 좋을 대로 하세요.”

“좋을 대로 하라고?”

“예, 이 집에는 본교의 고수는 한 명도 없어요. 모두들 옥영진 대장군의 집에 몰려가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을 가로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뭐라고? 거긴 왜 갔지?”

“왜긴요. 옥영진 대장군을 처치하기 위해 갔죠.”

“이런 맙소사.”

그와 동시에 국광의 신형(形)은 창문을 뚫고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