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권 2화 – 수라도제의 야무진 꿈

수라도제의 야무진 꿈

설취는 사부님께 드리기 위해 차를 나르던 중이었다. 이때, 갑자기 묵향이 내실 쪽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설취는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장창!

사숙을 만나면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 당사자가 나타나다 보니 설취는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뱅 뱅 돌고 있었지만, 막상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안쪽에서 사부의 중후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목소리에 설취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묵향 사숙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부서지듯 벌컥 열리며 만통음제가 달려 나왔다. 묵향의 모습을 발견한 만통음제는 얼마나 반가운지 묵향의 손을 덥석 잡은 뒤 놓 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왔구먼. 어서 들어오게. 동생을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늘… 허허, 너무나도 반갑구먼.”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만통음제의 환대가 묵향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했다.

한참 동안 묵향에 대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설취를 향해 지시했다.

“취아는 빨리 가서 좋은 술을 구해 오너라. 오늘 같은 날 마시지 않는다면 언제 마신다는 말이냐.”

“예.”

그날 묵향과 만통음제는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며 악기를 연주했다. 오랜 시간 지음(知音)을 찾아 외로이 떠돌던 금음(琴)은 그날 오랜만에 피리 소리를 만나 아 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 사저에의 연정에 괴로워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던 진팔의 귀에 금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지금껏 들어왔던 것과 달리 애절함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고 진팔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타는 건가?”

진팔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지금까지 들어왔던 만통음제의 금음과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진팔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음률을 낼 수 있는 사 람은 만통음제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금음을 휘감아 돌며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두 가지 음은 절묘하게 어울리며 진팔의 마음 을 뒤흔들었다.

“어엇! 저 피리 소리…. 저게 만통음제 어르신이 그토록 찾고 계시던 친구 분이신 모양이구나. 정말 잘 어울리는군.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하네. 무림명숙이 실 게 분명한데 말이야.”

진팔은 어느 고인이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피리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상상해 보았다. 분명 티끌 한 점 없는 고아한 풍모의 고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념도 잠시, 진팔은 곧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어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만통음제는 수라도제를 만나러 갔다. 수라도제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전갈을 보내 왔기 때문이다. 만통음제가 나간 후,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묵향은 악기 손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묵향이 섬세한 비단 천으로 피리를 닦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기침하셨습니까? 사숙님.”

설취의 다소곳한 음성이었다.

“들어오너라.”

설취는 방금 만든 향긋한 내음의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노부는 그런 거 따지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잠시 차를 마시던 묵향은 설취를 지그시 바라봤다. 차를 건넸으면 나가는 것이 순서일 텐데,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앉아 있다. 묵향이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보 니 뭔가 자신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형님이 안 계실 때 찾아온 것을 보니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저…, 한 가지…….”

“그래, 말해 보거라.”

잠시 망설이던 설취는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과거 사숙께서 천양에 있는 천일루(泉溢樓)에 가 보신 적이 있는지요.”

워낙 뜬금없는 질문이라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사실 묵향이 천일루에 간 게 몇십 년 전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겠는가.

“천일루라.. 글쎄, 가 봤는지 안 가 봤는지 기억에 없는걸.”

“천일루에서 무산오웅(巫山五雄)이라 불리던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베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곳이 천일루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벤 기억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무당파에 찾아가서 무력 시위까지 벌인 적이 있었고, 또 며칠 전에 무당파에 찾아갔을 때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과 함께 얘기까지 나눴으니 그 사건이 기억나지 않을 리 없었다.

묵향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혹시 너도 그곳에 있었느냐?”

설취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사실이었구나. 그때 그 사람이 사숙이었어.’

“흠,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생각조차 못 해 봤구나.”

“소녀가 무림에 나와서 처음 본 일이었는데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혹여 노부가 그때 네게 못할 짓을 했던 게냐?”

“아, 아닙니다. 사숙.”

화들짝 놀라며 세차게 고개를 젓는 설취였지만, 묵향이 가만히 바라보니 아무래도 느낌상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묵향은 속으로 ‘젠장, 뭔가 있기는 있군’하고 생각 했지만, 구태여 물어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나가 보거라. 차는 잘 마시마.”

“예.”

설취가 나가고 난 후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저 아이가 무산오웅하고 관계가 있었나?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들의 복수를 한답시고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칼을 뽑아 들면 어떻게 하 지? 형님이 아끼는 제자인데 죽일 수도 없고. 거참, 일이 재미없게 꼬이는군.”

묵향이 혀를 끌끌 차고 있던 그 시간, 수라도제는 만통음제와 패력검제 그리고 어제저녁 도착한 황룡무제와 함께 양양성 내에 마련된 자그마한 밀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룡무제를 소개하며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수라도제는 정색을 하며 그들을 아침 일찍 이곳으로 청한 이유를 밝혔다.

“어제 황룡문주와 함께 마교 교주가 도착했소.”

그 말에 패력검제의 눈썹이 격동하는 그의 내면을 반영하듯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황룡무제야 그와 함께 왔으니 알 것이 분명했고, 또 다른 한 명인 만통음제는 어제 밤늦게까지 묵향과 술잔을 나눴으니 수라도제의 말이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노부가 그대들을 청한 것은 이 기회를 빌려 그를 없애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기 위함이오. 그는 마교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라는 칭호를 받고 있고, 그가 교주가 된 이래로 마교의 위세가 날로 상승하고 있음이 사실이지 않소이까. 지금 그는 간 크게도 단 한 명의 호위 무사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와 있소.”

여기에는 정파 무림의 핵심 전력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 네 명으로만 그를 상대해야 한다면 조금 힘이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각 문파가 자랑 하는 신검합일급에 이르는 쟁쟁한 고수들까지 몽땅 다 동원한다면 충분히 교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수라도제로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만통음제가 얼굴 가득 노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노부를 불러내더니 겨우 그따위 망발이나 하려고 한 것이오? 노부는 그런 치졸한 일에 끼지 않겠소. 아니, 만약 노부의 의제(義弟)를 건드리려 하 는 자가 있다면 노부가 직접 그놈의 멱줄을 따 버릴 것이니 그리 아시오!”

만통음제는 벌떡 일어서더니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셋은 한동안 기가 막혀서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설마 만통음제가 마교 교주의 의형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수라도제가 만통음제가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패력검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거기에는 반대입니다.”

“아니, 어떻게 자네까지 그럴 수 있는가? 자네의 사문은 마교와 크나큰 은원 관계를 맺고 있음을 노부가 잘 아는데…….”

그 말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낮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를 암습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수라도제 어르신께 크게 실망했습니다.”

황룡무제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힘 있게 말했다.

“그 의견에 저도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이쪽을 믿고 단신으로 온 동맹자에게 취할 행동은 절대로 아니지요. 방금 전에 하신 어르신의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 니다.”

다른 둘도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 버린 후, 수라도제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수라도제로서는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는 마교 교주를 때려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 는 혼자가 아닌가. 물론 정의를 추구하는 정파 무림인으로서 연수 합공으로 습격을 한다는 것이 수라도제로서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다 무림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나쁜 녀석들! 오냐, 네놈들이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다면 노부 혼자서라도 해 주마. 여기 네놈들 말고 고수가 한 명도 없는 줄 아느냐?”

수라도제의 입에서는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라도제는 크게 소리쳐 모든 무사들을 모으라고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는 못했다. 왜냐하면 수라도제의 마음속에서 그래 봐야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탈마급 고수 한 명도 감당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거기에 만통음제까지 가세한다면 그들을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그들이 정면 대결을 해 온다 면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망치려고 작정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허허~, 참.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노부의 실수로다. 화경까지 올라간 자들이라서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자만심이 크다는 것을 간과한 노부의 실수야. 아직까지 세상의 쓴맛을 적게 본 그 녀석들의 입장에서 합공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겠지. 거기에다가 그 늙은 것이 교주 놈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너무나도 뼈아프구먼.

수라도제는 묵향이 이들과 조금씩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 차츰 이성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머릿속은 흡사 찬물이라도 들이킨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나저나 이 일을 어찌한다? 그 늙은 것이 교주에게 이 일을 일러바친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게 생겼는데?”

아침 일찍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고 나갔던 의형이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만통음제가 이렇듯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심기가 상하셨습니까?”

“아, 동생, 내 말 좀 들어 보게나.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는지.”

그러면서 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묵향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다 들은 묵향이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만통음제는 표정을 굳히며 다급하게 말했 다.

“그렇게 웃고 있을 시간이 없네. 지금 빨리 짐을 챙겨서 이곳을 뜨는 게 좋을 듯하이. 안 그런가?”

다급한 만통음제의 심정과는 달리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핫! 과연 수라도제. 아마도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겠죠. 형님까지 합세한다면 운 좋으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과거 한중길 교주에게 이런 식으로 한 번 당해 본 적이 있는 소제입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기에 온 줄 아십니까? 만약 여기에 형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부교주들 중에서 한두 명을 데려왔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형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혼자 온 거죠. 4대 1로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일이 3대 2가 되면 가능이 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이곳에는 정파의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다네. 그들을 모두 동원한다면.”

묵향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만통음제의 말을 막았다.

“정면 대결이라면 모르지만 도망치려고만 들면 그런 놈들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제 수하들도 와 있습니다. 그런 만큼 머릿수로 밀 어붙이는 것 따위는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만통음제의 안색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하시고 양양성이나 좀 구경시켜 주십시오. 주위의 경관이 십만대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수려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