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1권 4화 – 마화의 걱정거리

마화의 걱정거리

한참 동안 연무장에서 진팔을 기다리고 있던 묵향은 드디어 짜증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옆에 앉아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만통음제가 지루한지 나지막히 하품을 한 후 은근히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묵향의 속을 긁었다.

“우형이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야반도주를 했을 게야.”

“그토록 협박을 해 놨…….”

그 말에 뒤쪽에 서 있던 마화가 성깔어린 눈매로 묵향을 바라보며 다그쳤다.

“협박이라니요?”

그 말에 묵향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야.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협박씩이나 하면서까지 놈을 가르치겠냐?”

마화는 묵향의 변명을 못들은 척 천지문도들이 기거하는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 소저도 안 나오시는 것을 보면 천지문에 무슨 일이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묵향은 내심 궁금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허락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가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예, 교주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마화가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묵향에게 보고했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어젯밤 출발했다고 합니다. 비밀을 요하는 작전인 듯 그 행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다면 내일 수련은 하지 못하겠다 고 전갈을 보내는 것이 예의일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비밀 작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묵향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만통음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당연한 거야. 질녀는 추근덕거리는 자네를 썩 좋게 보지 않고 있을 테니 말하지 않았을 테고, 진팔이 그놈이야 이 기회에 지옥과도 같은 수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자네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그냥 내뺀 것이겠지.”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놈! 돌아오기만 해 봐라. 본좌가 그냥 놔두나. 감히 보고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내빼?”

이빨을 뿌드득 갈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가 묵향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밀 작전이라면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놔둬도 상관없을까요?”

“괜찮겠지. 그 아이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놈도 옆에 있잖아. 거기에다가 그런 비밀스러운 작전에 천지문만 보낸 것도 아닐 텐데 뭐가 걱정이야.”

묵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천지문이 지닌 실력이 어떻든 일단 천지문은 정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문파였다. 신뢰하지 않는 그들에게 단독작전을 줘서 내보 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건 그렇고 선물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으니 물건이 제대로 왔는지 한번 가 볼까.”

선물이라는 것은 물론 묵향의 지시로 대별산맥에 도착한 마교의 주력부대를 말함이다. 그 말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늘 밤 가 보시겠습니까?”

마화의 질문에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만통음제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선물이라니……. 혹시 술인가?”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관심을 보이실 물건은 아니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건 그렇고 오늘 할 일이 없어졌는데 함께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묵향이 만통음제와 함께 음악을 논하며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 마화는 천지문이 수행 중이라는 비밀 작전이 뭔지 알아보러 동분서주 했다. 묵향은 양녀인 소연과 진팔의 실력을 믿기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 버렸지만, 마화의 입장은 달랐다. 뭐니뭐니 해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그녀의 안위

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화가 그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양성에 모여 있는 무림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서문세가의 고위층 인물들이 마교도인 그녀를 아예 상대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묵향이 서문세가 사람들을 상대로 드잡이질을 해 놨으니 그들이 냉대를 해도 할 말은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리저리 궁리하던 마화가 발길을 돌린 곳은 묵향과 친분이 있는 황룡무제의 처소였다.

“금군이 회남 인근에서 도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했었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이번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구태여 귀교의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교주에게 이번 일을 통보하지 않 기로 합의했었소. 뭐, 혼원패권 장로가 큰소리치고 간 만큼 실패하지는 않을 테니 귀교에서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하구려.”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기습 작전에 동원된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뭐 같은 배를 탄 처지인데 못 알려 줄 것은 없겠지요. 하북팽가의 고수 5백을 주축으로 하여 3천5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소.”

솔직한 대답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예. 이렇듯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룡무제 대협.”

“무슨 말을……. 교주 같은 냉철하신 분이 그토록 격노하셨던 것으로 보아 노부가 알지 못하는 뒷사정이 있는 듯한데…, 오히려 정파를 자처하는 이쪽에서 속 좁 게 나가는 것 같아서 노부가 되려 교주를 뵐 낮이 없소.”

황룡무제를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그녀가 입수할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였다. 아마도 패력검제를 찾아가서 물어봐도 더 이상의 정보는 얻기 힘들 듯했다. 그 작전 에 투입된 인원과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마화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제 정보 수집을 그만둘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 래도 뭔가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토록 막강한 세력이 동원될 정도의 작전이라면 그게 도대체 뭘까? 그리고 그런 중요한 작전에 왜 천지문이 동원되었을까? 이 런 생각이 들자, 마화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무영문에 정보를 의뢰하기로 결심했다. 무영문은 지금까지 흑풍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 다.

며칠 후 무영문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이 건네준 서신에는 현재 회남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전의 전개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왜 천지문만 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다른 문파들은 홍택호로 이동한 것이지요?”

그 물음에 무영문에서 온 전령은 미안한 듯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왜 이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본문과 협동하여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디서 정보를……?”

“아마도 개방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참. 개방이 있었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마화는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전령을 치하했다.

“이번에도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여러모로 본교를 도와주고 계신 점, 문주님과 태상문주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옛, 그리고 이번 작전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정보가 도착할 텐데, 계속 연락을 받으실 건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폐가 안 된다면 부탁드리고 싶군요.”

“옛,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전령이 돌아간 후, 마화는 관지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아무래도 전략이나 전술 등 작전을 짜는데 있어서는 그가 자신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여기 나와 있는 정보만으로 무림 연합이 사용할 작전이 뭔지를 알 수 있겠느냐 이 말인가?”

“예, 장로님.”

“글쎄…….”

관지는 마화가 내민 자료들을 쭉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무림 연합의 기습조 3천5백이 비밀리에 출발했다. 그러다가 기습목표 부근의 상륙지점에 5백여 명만 남고 나머지는 3천은 홍택호 쪽으로 방향을 잡고 계속 이동 중이다, 그런 말이군.”

“예. 장로님. 그 자료만으로 무림 연합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관지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런데 자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그러는가?”

관지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이 의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교주라면 자신에게 직접 물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마화라는 말인데, 그녀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관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화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관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뭐, 자네와 나 사이에 못 알려 줄 것도 없겠지. 일단 이들의 행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회하(淮河)가 아닌가? 모두 다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최상승 경공술이라 도 익혔다면 몰라도 3천5백씩이나 되는 인원이 동시에 강을 건넌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 더군다나 회하의 폭은 대단히 넓기에 경공술 따위로 건널 수 있는 거 리가 아니야. 그렇다면 배밖에는 답이 없는데, 수백 척씩이나 되는 배를 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걸?”

마화도 충분히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겠군요.”

“하지만 5백 정도라면 작은 배 50여 척만 구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들만으로 목표를 친다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상대방도 그 정도 대비는 해 놨을 겁니다. 그런 곳을 겨우 5백으로 친다는 것은 자살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귀관의 말이 옳다. 그 때문에 적들의 이목을 다른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겠지.”

그러면서 관지는 손가락으로 3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움직이는 선상(線上)을 쭉 앞질러 가서 홍택호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가면 송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먼저 연락을 넣어 전선(戰船)들을 보내달라고 하여 중간쯤에서 합류할 수도 있겠지. 그런 다음 송군의 협력 하에 대대적인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금군의 눈길을 끈다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상당수의 고수들이 이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추리라고 봐야겠지.”

“그렇겠군요.”

“그 사이에 50여 척의 배를 구한 매복조가 몰래 강을 건너서 적들을 기습하고 빠지는 거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일세. 물론 저들에게 또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마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관지는 피식 미소짓더니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천문에 능통하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많은 변수들이 가로막고 있는데 말일세. 먼저 이 작전의 핵심은 장인걸처럼 뛰어난 인물을 속여야 한다는 것에 있지. 노부 같으면 그런 요행수를 바라느니 본교의 혈랑대 같은 최정예를 투입해서 단번에 끝내 버리는 수법을 사용했을 거야. 요는 불 만 지르면 끝이니까.”

마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꼭 그렇게 말할 이유는 없겠지. 이쪽을 치고 들어가는 3천이 제대로 해 주기만 한다면 장인걸은 이쪽을 주목할 수밖에 없을 거야.”

“제대로 해 준다고 하시면?”

“이쪽의 세력만으로도 충분히 이 일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장인걸에게 인지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지. 가령 화경급 고수 몇 명이 바람잡이를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장인걸은 싫어도 이쪽 세력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테니, 상대적으로 이곳은 텅 빌 것이 아니겠나?”

순간 마화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화경급 고수는 단 한 명도 이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희망을 버리 지 않았다. 팽선이 이끄는 고수의 수는 3천. 적지 않은 전력이었다. 그들이라면 혹시 장인걸의 이목을 끌 수 있지 않을까?

마화의 표정을 살피던 관지는 뭔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화가 그걸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 중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마화는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대주께서 가지실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없앤 것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관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말했다.

“그래, 그게 무엇인가?”

“여기 투입된 문파들의 명단입니다.”

관지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화가 하는 말이 꼭 예전에 군문에 있을 때, 장수들끼리 모여 몇 가지 조건을 놔두고 어떤 계책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을 지를 토론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파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이 지닌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보다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겠지. 말해 보게.”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문파는 하북팽가, 무당파, 서문세가, 종남파, 당문, 황보세가.”

여기까지 말하던 마화는 잠시 관지의 표정을 살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지문입니다.”

그 말에 관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천지문을 이끄는 소연과 교주의 관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관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질책했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기에.

“천지문이라고? 그것이 사실인가?”

마화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왜 장로님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각 문파에서 5백씩의 인원을 지원받아 총수 3천5백을 동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관지는 자신의 머리를 냉철하게 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교주와 관계된 일. 여기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관 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수석 장로님께서 보내신 선물을 보러 가셨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마화는 아무래도 조금 뒤가 캥겼는지 급히 덧붙였다.

“교주님께서는 천지문이 비밀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이미 아십니다. 교주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다면서 그냥 넘기셨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해서…….”

“흐음…….”

마화의 대답에 관지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묵향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구태여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묵향의 양 녀가 관계되어 있는 일이기에 마냥 손 놓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자네의 말대로라면 함께 행동하는 문파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서문세가가 주도한다면, 필시 수라도제가 나섰다는 말. 그가 움직인다면 충 분히 장인걸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

“예? 그게 아니라…, 저는 이번 작전을 주도하는 것이 하북팽가의 팽선이라는 장로라고 들었습니다만…….”

관지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뭣이? 그렇다면 그들은 결코 장인걸을 속일 수 없다. 그놈들은 장인걸이 그토록 만만하게 보였다는 말인가?”

“팽선이 이끄는 3천의 고수라면 그래도 그의 이목을 끌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 되는 추측이라고 생각하는가? 장인걸은 한때 본교의 교주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밑에는 천마혈검대까지 있는데, 겨우 어중이떠중이 3천을 끌어모아 놓은 것이 무슨 압박감을 주겠느냐는 말이다. 뭔가 심한 압박감을 가할 수 있어야 상대로 하여금 판단 착오를 강요할 수 있는 거야.”

관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지도를 살펴보더니 마화에게 명령했다.

“어쩔 수 없다. 귀관은 즉시 달려가서 교주님께 직접 이 사실을 전해라. 잘못되면 소 소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이야.”

“설마 그 정도까지…….”

하지만 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가 아니다. 소 소저께서 저들과 접전을 벌일 곳은 회하 건너편이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우리들이 그분을 도와드릴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서야 마화는 관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회하가 문제였던 것이다. 9천에 달하는 흑풍대를 출동시킨다고 해도, 회하가 가로막고 있 는 이상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해도 소연을 지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인마(人馬)를 한순간에 도강시킬 방법이 없기에.

“예. 속하는 즉시 교주님께 가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동안 본관은 만일을 대비하여 천지문과 양양성 간에 연락망을 개설해 두겠으니 그리 알고 있거라.”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옛.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묵향과 철영 부교주가 술잔을 기울이며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고 있을 때, 송 제국의 황궁에서도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회의라 고 해야 참석자는 겨우 세 명 뿐이었다. 왜냐하면 악비 대장군이 올린 주청(淸) 자체가 매우 기밀을 요하는 사안(事案)이었기에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떠들어 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악비 대장군이 북진을 하겠다니 참으로 대견한 일이로다. 그래, 재상의 생각은 어떠한고?”

황제는 연경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유쾌한 어조로 말했지만, 진회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건 불가하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유광세(劉世) 상장군은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불신에 가득찬 눈빛으로 진회를 노려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젯밤 그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고, 진회는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다고 확답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여기서 딴 소리를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유광세 상장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회는 시치미를 뚝 떼고 황제에게 간했다.

“황상 폐하께옵서 북쪽의 오랑캐들을 몰아내시고 황토를 수복하고자 하시는 간절한 마음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다만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이 문제이

옵니다. 일단, 각 장수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병권부터 회수하여 중앙군으로 흡수 통합한 연후에, 그 힘을 더욱 키워 저들을 도모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옵니다.” 진회의 말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현재 송의 중앙군은 완전히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예로 군사편제가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상장군 따위 가 감히 황제 앞에 나서서 주청을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송의 군사편제에 따르면 일선 장군들의 집합체인 정군관에서 작전을 입안하여 그것을 추밀원에 보고하면, 추밀원에서 검토하여 수장인 추밀사(樞密使)가 황제에 게 직접 보고를 올린 후 허락을 받아내도록 되어 있었다.

정군관에 소속된 주요 장수들이 연경 대회전에서 대부분 전사했고, 이어진 금군의 내습으로 황도(皇都)가 함락 당하면서 3천에 달하는 신하들이 금의 포로로 잡 혀 압송 당했었다. 그 안에는 추밀원에 소속된 핵심 관리들도 포함되었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렇듯 중앙군이 그 기둥뿌리부터 완벽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악비 대장군 같은 몇몇 장수들이 세력을 구 축하여 금군에 저항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황실에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군량이나, 무기 등속의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군벌(軍閥)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군벌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자가 바로 악비 대장군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 주위의 모든 군벌들을 통솔할 권한이 없는 그가 황토를 수복하기 위 해 북침을 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었다.

“황상 폐하.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재상의 말씀은 너무나도 소극적인 판단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소장들은 노도와 같이 진격해 오던 오랑캐의 세력을 저지하는 것 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남양 방면으로 패퇴하도록 만들었사옵니다. 그때 떨어져 나간 오랑캐들의 목만 해도 20여만 개에 달할 정도이오니 금이 당한 피 해는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아니겠사옵니까? 대승을 거두어 적의 세력이 약해진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다시 북벌을 단행할 기회가 오겠사옵니까?”

진회는 발끈해서 상장군에게 외쳤다.

“어디 쓸모없는 망언으로 황상 폐하의 이목을 가리려고 하는가?”

진회는 고개를 돌려 유광세 상장군을 꾸짖은 후 황제에게 충심어린 어조로 간(諫)했다.

“황상 폐하, 금이 10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하시옵소서. 설혹, 적병 20만을 물리쳤다고 해도 아직 80만에 달하는 대군이 온전하게 남아있음이옵 니다. 요행히 천혜의 험지인 양양성의 지리적 잇점을 활용하여 이번에 대승을 거둔 것도 사실이긴 하옵니다만, 악비 대장군의 주청대로 앞서 나가 싸운다면 그 지리 적인 잇점마저 포기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지금 악비 대장군의 휘하에 50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 중 40만은 근래에 급히 징집하 여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들만으로 80만에 달하는 금의 정병(精兵)과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그리고 이쪽에서 40만의 병사들을 서둘러 징집했듯이, 금에서도 틀림없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끌어 모 았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것은 재상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그에 질세라 유광세 상장군은 또다시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상 폐하. 재상의 의견이 일견 옳을 수도 있사오나, 전쟁을 하는데는 시기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금이 중원의 북방을 삼킨 것은 겨우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사옵 니다. 여기서 저들에게 시간을 더 준다면 점령한 영토를 확실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안정시킬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하지만 지금 저들을 친다면 그자들은 내우외환 (內憂外患)을 맞이하여 자신들이 지닌 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황상 폐하, 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일견 생각해 보면 상장군의 말에도 일리는 있구먼.”

이렇듯 오락가락하는 황제 때문에 그 둘은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설전(舌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회의가 길어지자 유광세 상장 군이 문관인 진회에게 말발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원래가 군대라는 곳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집단이다 보니, 그곳에서 성장한 상장군에게 진회와의 말싸움에 서 이길 것을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주문이었던 것이다.

밤도 늦어졌기에 황제는 길게 하품을 한 후, 이 지루한 말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경들의 의견이 모두 다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나, 짐은 재상의 의견이 조금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노라. 지금은 오랑캐들의 세력이 심히 융성하니, 그들과 맞 서는 것 보다는 후일을 도모함이 옳도다.”

그 말에 진회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 폐하, 영민하신 결정이시옵니다.”

황제가 결정을 내려 버리자, 유광세 상장군은 분하고 원통했지만,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황제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 가 타부타 하는 것은 잘못하면 대역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소? 황상 폐하의 윤허는 받았소?”

악비 대장군의 물음에, 유광세 상장군은 고개를 떨구며 풀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송구스럽다니, 설마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이상하구려. 재상께서 옆에서 도와주셨다면 충분히 윤허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본관은 예상했었는데……..”

유광세 상장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북진을 반대한 것이 바로 그 망할 재상 놈입니다.”

악비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소장이 어찌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악비는 유 상장군에게 의문스런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본관이 귀관에게 분명히 말했지 않았었나? 먼저 재상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이야.”

“소장을 의심하시다니 참으로 서운합니다, 대장군, 소장은 틀림없이 대장군께서 명하신대로 재상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재상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허 락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황상 폐하 앞에 서서 그렇게 소장의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유 상장군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노성을 터뜨렸다.

“젠장! 그런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해대는 망할 새끼는 즉시 모가지를 비틀어놨어야 하는데…….”

“말이 지나치구먼. 그래도 그분께서는 일국의 재상이 아니신가. 그분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겠지.”

악비는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유 상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유 상장군은 황제 앞에서 망신을 당했을 때가 떠오르는지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만약 그렇다면 그 전날 소장에게 북진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 줬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해 줄 시간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단 말입니다. 이런 식 으로 물을 먹이는 것을 보면 그놈은 틀림없이 오랑캐놈들에게 뇌물이라도 받아 처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억측은 입에 담는 게 아닐세.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한다? 이제 봄이 코앞에 닥쳤는데 말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황상께 간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지원 따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치고 올라가면 어떻겠습니까? 금과 싸워서 승리만 하면 모든 허물은 묻혀질 겁니다.”

악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상 폐하께서 북진을 불허하셨는데, 병사들을 움직였다가는 곧바로 항명죄에 걸린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처음부터 황상 폐하께 간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소장을 다시 한 번 더 남경에 보내주십시오. 충분히 자료를 준비하여 북진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면 재상도 더 이상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닐세. 그것보다는 본관이 직접 재상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재상만 잘 설득시킬 수 있다면,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아낼 수도 있겠지.”

“그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놈이 뇌물을 받아먹은 것이 확실하다면, 대장군께서 곤경을 당하실 수도 있음이옵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뇌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게. 내가 예전에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생각이 올곧은 훌륭한 분이셨다네. 그분은 결코 뇌물 같은 것에 흔들리실 분이 아닐세.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