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3화 – 마화도 여자랍니다

마화도 여자랍니다

제령문도들이 묵고 있는 장원은 양양성의 동문 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10여 필에 달하는 말과 수십 명에 달하는 제령문 식솔들이 지내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더군다나 장원에는 무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작은 연무장까지 달려 있었다.

연무장에서 치열한 비무를 하고 있는 남녀, 바로 서량과 설취다. 서량은 폭풍검이라는 명호답게 마치 폭풍과도 같은 사나운 검세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에 대적하 는 설취는 구름 사이로 꽃잎이 날아다니듯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검으로 맞서고 있다.

나이는 설취가 일곱 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검술은 서량 쪽이 훨씬 더 깊이 있게 깨닫고 있는 상태다. 설취의 경우 서량과 달리 문파의 대를 이을 필요가 없는 만큼, 만통음제가 그녀의 수련을 심하게 닦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격차였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설취도 대사형인 냉파천처럼 뼈를 깎는 수련을 시켰다면 서량에게 그리 심하게 뒤쳐지지는 않았으리라.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서량은 재빨리 옆쪽으로 달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수건을 가져다가 설취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서 공자.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정말 기분 좋네요.”

“시원한 거라도 가져오라고 이를까요?”

그걸 마시면서 잠시 담소라도 나누자는 말이다. 하지만 설취는 살짝 하늘을 살펴본 뒤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이만 가 봐야겠어요. 사부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테고, 더 이상 서 공자의 시간을 뺏는다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니 말이에요.”

서량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손을 저었다.

“시간을 뺏는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설 소저.”

“패력검제 대협께서 출타하신 후, 서 공자께서 문파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신다고 들었는걸요. 그걸 잘 알면서도…….”

“전혀 폐가 되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참, 오랜만에 오셨는데, 조 소저와 얘기라도 나누고 가시죠. 요즘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꽤 적적해 하 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조 소저의 말벗이요?”

설취의 반문에 서량은 아차 싶었다. 설취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말을 돌리다 보니 실수를 한 것이다.

근래 조령은 패력검제로부터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패력검제는 조령과 사제지간을 맺지 않았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무공만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을 뿐 이다. 그것도 별 볼일 없는 무공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패력검제가 조령을 자신의 정식 제자로 삼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정체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에 서량은 조령과 사형제지간이 아닌, 그냥 아버지의 손님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조령의 나이 스물 둘. 일반적인 여성의 나이로 봤을 때는 꽤나 나이 먹은 축에 들어가겠지만, 이곳 무림에서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웬만한 명가의 여식들이라면 무공수련을 끝내고 출도할 때의 나이가 가볍게 서른을 넘겨 버리니 말이다.

더군다나 설취의 경우 제자까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제자인 송화의 나이가 조령과 엇비슷할 정도니, 설취에게 조령의 말벗이나 해 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 실례되는 부탁일 수도 있다. 일단 말을 꺼내 놓은 상태에서 그걸 깨달은 서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저,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조 소저가 여기 와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또 지금 아버지도 안 계신 만큼 뭔가 조언을 청할 상대도 없고, 그래서 설 소저께 서 조 소저를 제자처럼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횡설수설이다. 하지만 상대가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설취가 아니다. 그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서 공자께서 조 소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군요. 패력검제 대협께서 안 계신 동안이라도 제가 신경 써 드릴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조 소저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요?”

서량은 부랴부랴 아랫사람을 불러 조 소저가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에게 알아본 결과 두 시진쯤 전에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서량은 그녀의 행방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제법 실력 있는 호위 무사가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이리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조령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계속 아랫사람 을 불렀던 것은 조금이라도 설취와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조령의 행방을 알 수 없자 설취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무 늦어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조 소저하고는 다음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볼게요.”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대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지, 설취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량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염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게 말하며 사부의 방문을 열었지만, 설취의 예상과 달리 만통음제는 방 안에 없었다.

“어디에 가셨지?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네.”

그녀는 급히 물을 끓였다. 몸이 불편한 사부에게 향긋한 차를 올리기 위해서. 하지만 뜨겁게 끓인 물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기다려도 사부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 다 지친 그녀는 이리저리 객잔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만통음제의 모습은 객잔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셨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비록 상처를 입어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천하에 자신의 사부를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설취였다. 그랬기에 사부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을 하지 않고, 잠시 밖으로 산보를 나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고 있는데도 만통음제가 돌아오지 않자 설취의 미간에 근심의 기색이 살짝 떠올랐다. 밤이 되면 묵향 사숙이 매일처럼 그래왔듯이 술병을 들고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만큼 사부는 어딘가 볼일이 있어 나갔다고 해도 밤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옆에서 보면 샘이 날 정도로 묵향에 대한 만통음제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설취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초초한 모습으로 방 안을 서성거리던 설취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가 저물어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사부는 물론이고 매일처럼 모 습을 드러내던 묵향 사숙마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설취는 숙소를 나와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자신의 사부가 묵향 사숙이 있는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사부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사부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장인걸에게 워낙 호되게 당했었기에 상처가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의생이 만통음제의 몸에서 잘라 낸 썩은 살덩이만 해도 한 근은 족히 되었을 정도 였으니, 그런 치명상을 당하고도 목숨을 건진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었다.

마교의 무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설취는 사부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마화를 찾았다. 양양성에서 하루 이틀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모시는 분들끼리 서로 호형호제를 하다 보니 그녀들도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설취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화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 고 있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점차 잊혀져 가던 자신의 첫사랑이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중년의 나 이라고는 해도 아직 누군가와 사랑의 감정을 공유해 보지 못했던 설취로서는 조금씩 되살아나는 예전의 감정을 당혹스런 마음으로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에 묵향에 대한 마화의 짝사랑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정 때문인지, 설취는 그런 마화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마화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간 설취는 그녀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저 왔어요, 언니.”

“어, 왔니? 어서 와.”

하지만 말과 달리 마화의 안색은 썩 밝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꼴 보기 싫은데 너 왜 왔니?”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설취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평상시에는 몰랐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마화가 아주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저…, 시간을 잘못 택해 온 것 같네요. 저는 그만 가 볼게요. 별로 다른 볼일은 없었고…, 지나가다가 언니 얼굴이나 볼까 해서 온 것뿐이에요.”

허둥지둥 밖으로 다시 나가려는 설취의 옷섶을 꽉 잡아당기며 마화가 급히 말했다.

“기왕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저…, 그렇지만 언니 기분도 별로 안 좋으신 거 같고…….”

“내가?”

그제야 마화는 아차 싶은 모양이다. 무심결에 설취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기왕에 찾아 온 손님을 이대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는 될 수 있으면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털털하게 말했다.

“내가 성격이 좀 그래서 그래. 방금 전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든.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들어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보 낼 수는 없잖아, 응?”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그럴까요?”

설취는 마화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이곳으로 온 용건부터 슬며시 꺼냈다.

“언니, 혹시 사부님께서 여기 오시지 않으셨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

여기까지 말하던 마화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눈치 챘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취에게 말했다.

“아마 교주님하고 같이 계실 거야. 교주님께서 말을 두 필 끌고 나가셨거든.”

평상시 묵향은 말을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을 타고 이동해 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 두 필을 끌고 나갔다는 것은, 곧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교주…, 사숙님하고요? 사숙께서는 어디에 가셨는데요?”

마화는 설취가 마실 차를 끓이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상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옥화무제를 만나러 만현으로 가셨어.”

설취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만현에요? 아주 급한 볼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지금까지 사부님께서 어딜 가실 때면 꼭 행선지를 알려 주시곤 했는데, 이번엔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신 걸 보면.”

설취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는 마화의 목소리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급한 볼일이라기보다는 그건 교주님께서 흔히 쓰시는 방법이야. 교주님께서는 자신의 행선지나, 행동할 예정을 수하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시거든. 상관의 움직 임을 부하들이 정확하게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부하들이 게을러진다는 게 그분의 지론이시지.”

별 해괴한 지론을 다 들어 본다고 생각하며, 설취는 되물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걸 아는 거 하고, 게을러지는 게 무슨 연관이 있죠?”

“상관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부하들이 마음 놓지 못하고 계속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지, 아마.”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설취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마화는 콧방귀를 뀌며 툴툴거렸다.

“흥! 일리가 있기는 뭐가 있어? 그분이 그런 짓 안 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해. 그리고 그분도 그걸 잘 알고 있고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건, 교주 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얄팍한 잔꾀라구.”

오랜만에 성깔을 드러내고 있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마화는 차가 끓자 설취에게 따라줬다. 그런 다음 어디선가 술병 하나를 가져온 뒤 자신의 잔에는 차 대신 술을 가득 따르는 것이었다.

“미안, 나는 차보다는 이게 좋아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던 설취는, 한 번에 쭉 들이켠 다음 또다시 찻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마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렇게 기밀을 요하는 일은 아니야. 그냥 황도에 갈 일이 생겼는데, 모두들 서로 가겠다고 경쟁이 붙어서 말이지.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화가 왜 저기압인지 알 수 있었다.

“황도에 가지 못하게 되셔서 그런 거군요?”

마화는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정당하게 경쟁에서 졌다면 내가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아, 글쎄 나는 부대주니까 제비를 뽑을 자격이 없다고 하잖아. 쪼잔한 놈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만 제비 를 뽑더라구. 하는 짓이 너무 치사하지 않아?”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녀와 가장 친한 임충(任充)이었다. 임충은 이 임무는 천인장이 할 일인 만큼, 부대주인 마화는 빠져 달라고 냉 담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때의 뻔뻔하기 그지없었던 임충의 낯짝을 생각하면 너무 분해서 절로 이빨이 뽀드득 갈리는 마화였다.

설취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황도에 무척 가고 싶으셨던 모양이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무 일도 없고 너무 심심하잖아. 얼마 전에 한바탕 벌어졌던 것도 교주님 혼자서 쓱싹 끝내 버렸고 말이야. 모두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황도에 가면 그 러니까…, 시장에서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으면 사기도 하고…….”

마화의 얘기를 듣는 순간, 설취는 곧바로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화가 내심 묵향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설취도 이미 알고 있는 일 이다. 아마 그 때문에 황도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는 제대로 된 장신구 하나 구입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죠. 사실 여기는 너무 물건이 없잖아요? 거기 가면 예쁜 속옷도 많을 텐데……?

미끼는 던져졌고, 마화는 아무 생각 없이 덥석 그 미끼를 물었다.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맨날 산간벽지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에휴!”

아무리 선머슴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도 여자다. 그것도 사모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묵향 앞에서라면 언제까지라 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마화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가시는 분께 예쁜 거 좀 사 오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마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 그놈도 숙맥이라서 그런 가게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더군다나 창피하게 속옷을 사다 달라고 어떻게 부탁해. 에휴, 내 팔자야.”

설취는 이런 마화의 털털한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마화가 투덜거리는 모습을 환히 웃으면서 바라보던 설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좀 드릴까요? 비단으로 된 건데, 감촉이 아주 좋아요.”

“정말? 그런데 동생도 입어야 하잖아?”

반색을 하며 좋아라하다 곧 고개를 흔드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그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예전에 서역에서 온 상인에게 한 번에 많이 산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 입을 거 많아요.”

“그럼 좀 부탁해도 될까?”

마화가 좋아하는 모습에 미소 짓던 설취가 뭔가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

“근데 사숙께서는 언제 돌아오실 것 같아요?”

갑작스런 설취의 질문에 마화는 난처한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워낙 대중없이 움직이시는 분이시라서……. 짧으면 3일, 길게 잡으면…….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네. 몇 달 후, 아니 어쩌면 몇 년 후라도 불쑥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라서 말이야. 가장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셨던 기록은 24년 3개월이야. 모두들 돌 아가신 줄 알았지.”

그 말에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요?”

“정말이야. 그동안 뭐 하셨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야. 그런 부분은 통 말씀을 안 하시거든.”

“사숙께서 속마음을 드러내시지 않아서 섭섭하신가 봐요.”

설취는 이제 비어버린 자신의 찻잔 가득 술을 따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저도 오랜만에 한잔해도 되죠? 돌아가 봐야 객잔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에요.”

“큭큭, 좋지!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마셔 볼까?”

마화는 설취가 내민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

양양성을 떠난 묵향과 만통음제는 관도를 따라 의창(宜昌)까지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 장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강삼협(長江 三峽)의 장관이다. 경치만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배라도 한 척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유람이 되겠지만, 묵향은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 었다. 왜냐하면 옥화무제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에 시간 내에 만현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창에서 만현까지 육로를 이용해 달려갔다. 그 길은 절벽의 중간을 뚫어 내놓은 것이었기에 경치는 멋있을지 몰라도, 담이 작다면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한 가닥 길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절벽이요, 그 반대편은 천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 싯누 런 흙탕물이 마치 황룡이 용트림이라도 하듯 웅장한 기세로 흘러간다. 절벽 위쪽에서 작은 돌조각이라도 아래로 떨어지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운 것이 사 실이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한순간에 잊혀질 정도로 황홀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습니까, 형님. 꽤 근사하죠?”

풍류를 즐기는 만통음제인 만큼, 중원 곳곳에 경치가 좋다는 곳치고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물론 여기도 몇 번씩이나 와 봤었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제자들을 거 느리고. 하지만 묵향의 표정을 바라보니 그는 이곳에 처음 와 본 듯했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 만통음제는 마치 이곳에 처음 와 본 듯 장단을 맞춰 줬다.

“호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먼. 그런데 동생은 이런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나?”

경치를 둘러보며 흡족해하는 만통음제의 모습에 묵향도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마교의 정보 조직도 때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하 놈들 보고 양양성 근처에 경치가 괜찮은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여기를 권하더군요. 관지 녀석의 말로는 처음 시작되는 경치가 그러니까 뭐라더 라? 하여튼 그런 게 있는데, 세 가지 경치가 순서대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라 어떤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대로 시간 내서 구경해 볼 만은 하죠?”

묵향다운 말에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 지으며 절경을 감상했다. 사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곳이 서릉협(西陵峽)의 절경이고, 계속해서 무협(巫峽)과 구당협(瞿塘峽)

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인들이 붙여 놓은 그런 명칭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위의 경치에 반응하여 가슴 가 득 솟구쳐 오르는 이 진한 감동이 더욱 중요한 것이거늘.

더군다나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자신을 위해 마교의 정보 조직까지 움직인 것 같아 그 마음 씀씀이에 만통음제의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다.

“세 가지 경치면 어떻고, 여섯 가지 경치면 어떤가? 이 아름다운 경치보다 훨씬 좋은 동생이 있는데 말일세.”

말을 잠시 멈춘 만통음제는 품속에 손을 넣어 술병을 꺼내며 환히 웃었다.

“허허, 그리고 여기 술이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

“물론입니다, 형님.”

두 의형제는 호탕하게 웃음과 술, 그리고 서로 간의 추억을 나누며 만현을 향해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