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8화 – 아미파 여승들과 흑풍대 무사

아미파 여승들과 흑풍대 무사

과거 무림맹의 장로, 맹호검군 백량이 금나라 황제의 목을 베겠다며 부하들을 이끌고 금나라 황궁을 급습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일은 실패였다. 금나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장인걸이 치밀한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였기에,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기습작전이 실패한 후, 무림맹에서는 금나라에서 보복으로 이쪽 황제의 목을 베기 위해 암살자들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만약 상대가 천마혈 검대원들 중 일부를 투입해 온다면, 현재 황궁에 배치된 전력으로 그들을 막아 낼 수가 있을까? 개방에 의뢰해서 알아본 결과, 결론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만큼 황병들의 무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것이다.

무림맹이 이렇게 부산을 떠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황제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전황이 일시에 뒤바뀔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무림맹 의 지도부는 황궁에 고수들을 투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곳에 누구를 파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한다고는 하 지만, 황궁은 금남(禁男)의 구역이 아닌가. 그렇다고 맹의 고수들을 거세(去勢)해 환관으로 만들어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여승들로 이뤄진 문파인 아미파(峨嵋派)의 투입이었다. 아미파는 9파1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의 명문이다. 불교에 심취한 아미파의 고승들은 무림의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고, 덕분에 요 근래 다른 문파들이 환란을 겪을 때도 그것을 피해 갈 수가 있었다.

여승이라 황궁에 투입하기도 좋았고, 타 문파에 비해 고수들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무림맹의 제안을 아미파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했다. 만약 이 제의를 거절한다면, 다른 문파들처럼 양양성에 대규모의 고수들을 파견해야만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 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미파가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진사태(靜眞師太)다. 예순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도를 닦는 이들의 모범이 된다고 세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비구니였다.

“사부님, 제자 지선(智宣)이옵니다.”

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경전을 외우며 염주를 굴리고 있던 정진사태는 애제자의 목소리에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들어오너라.”

문이 살며시 열린 후, 궁녀의 복장을 차려입은 지선이 들어왔다. 아미파의 승복을 입고 움직이면, 혹 다른 이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취한 조치였다. 황실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여고수들은 정교하게 만든 가발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얼핏 봐서는 일반 궁녀들과의 구분이 불가능했다. 지선은 1대제자였기에 꽤나 나이가 많았지만, 고강한 내공으로 인해 약간 나이든 궁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선은 방금 끓인 향긋한 차를 스승에게 건넨 후,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연공공(燕公公)께서 스승님을 뵙자고 청해 오셨습니다.”

그 말에 정진사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천천히 돌고 있던 염주 알이 그 움직임을 딱 멈췄던 것이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 둘러져 있는 염주는 적동 (赤銅)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푸른빛의 녹이 끼어 있어 유서 깊은 물건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는지 정진사태가 입을 열었다.

“연공공이?”

그렇게 말하는 정진사태의 표정만 봐도, 내심 그녀가 얼마나 연공공이라는 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공공은 황궁 내에서 꽤나 높은 직위의 환관 인 데다가, 황궁을 경호하는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자의 청을 쉽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정진사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만큼 싫 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진사태는 느릿느릿 말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 오늘 아침부터 연공에 들어가 만나 뵙기 힘들겠다고 전하거라.”

그 말에 지선은 환히 웃으며 납죽 고개를 숙인 뒤 외쳤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넘치고 있었다. 정진사태 정도 되는 고수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화경의 벽을 깨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강호무림에 또 다른 무(武)의 절대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사부님.”

하지만 정진사태는 고개를 흔들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경하는 무슨. 그를 만나기 싫어 둘러대는 것이지. 아쉽게도 깨달음과는 관계없는 일이로구나.”

“그, 그렇다면…….?

여기까지 말한 지선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불자의 신분임에도 거짓을 말할 정도로 사부가 연공공을 만나기 꺼려하는 마음이 전해 왔기 때문이다.

“연공공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부님.”

사부의 방을 나선 지선은 연공공의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연공공과 대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지

위를 고려했을 때, 다른 사람을 보내 청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행위였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요. 그래, 사태(師太)님의 답을 가져오셨나요?”

환관 특유의 찢어지는 듯한 고성.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속이 메슥거리도록 만드는 오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 환관이었지만, 연공공의 목소리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더군다나 위로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 매부리코가 합쳐지자 아무리 좋게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는 인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속살을 훑는 듯한 뱀과도 같은 저 음침한 시선을 받으면 애써 가라앉힌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선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였으므로.

“사부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으신 모양입니다. 그 후로 계속 명상을 하고 계시기에, 아무래도 한동안 밖으로 나오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깨달음이라면…, 바로 그 깨달음을 말씀하시는 거요?”

음침한 시선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자, 지선은 상대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선은 애써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연공공.”

“크흠,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조석지간에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많은 깨달음 중에서 하나를 더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행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소이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지선은 실례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시간을 끈 뒤 서둘러서 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계속 대화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연공공.”

“바쁘신 와중에 저와 사태님의 심부름까지 하시게 하여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그럼…….?”

서로 간에 오고 간 주된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연공공이 한 말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상 대의 기분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방금 전에 오간 대화도 그렇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그때 지선이 받은 느낌은 ‘알고 있는 것도 실천하지 않는 주제에, 무 슨 얼어죽을 깨달음?’ 이런 식으로 비웃는 듯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녀는 다급히 ‘아미타불’을 연호했다. 안 그러면 무심결에 욕설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오랜 시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그녀의 심기를 단 몇 마디의 말로 이토록 뒤집어 놓은 것을 보면 연공공이란 인물도 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현재 궁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고수는 책임자인 정진사태(靜眞師太)를 포함하여 총 245명. 그중 50명 정도가 자신이 맡은 지점에 매복하여 침입자에 대비하 고, 나머지는 교대로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경비를 하고 있다.

그중 지선과 같은 1대제자들이 맡은 일이 가장 중요했다. 정진사태를 보좌하며 2대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황궁 전체의 방어선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지 수시로 점검한다. 그리고 황제에 대한 근접 경호 또한 1대제자들이 맡은 임무였다. 그녀들 중에서 두 명이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황제를 경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선은 연공공의 방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맡은 지역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방어 상태를 점검했다. 처음 그녀가 황궁에 왔을 때는 곧잘 길을 잃어버렸을 정도 로 황궁은 대단히 넓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규모의 황궁조차도 옛 황도인 개봉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초라하다 할 정도라고 하니, 지선으로서는 옛 황궁의 규모 가 얼마나 큰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녀의 귀에 작지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같은 내가고수가 아니라면 듣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의외로 그 소리는 멀리 퍼져 황 궁 전체에까지 울렸다.

“침입자?”

지선은 지체 없이 호각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2대제자 다섯 명을 중심으로 3, 4대제자 20여 명이 여덟 명 의 사내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비무장인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독이나 암기를 품속에 숨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쌍 방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지선의 물음에 2대제자인 혜인(惠仁)은 사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채 재빨리 대답했다.

“몇 시진째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황궁 내부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관찰해 보니 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에…….”

지선이 사내들을 바라보니 과연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불쑥 솟은 것이, 혜인의 말대로 상당한 무공을 연마했음이 분명했다. 지선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외쳤다.

“시주들의 정체를 밝혀 주시지요.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후에 벌어질 사태에 대한 책임은 시주들께서 지셔야 할 겁니다.”

사내들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지 전음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선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전음을 날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제자들의 긴장감이 온몸에 느껴질 만큼 장내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 장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결론이 났는지 사내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천마신교의 흑풍대 소속 무사들이오.”

마교라는 말에 아미파 여승들의 안색이 조금 더 굳어졌다. 정파의 한 축으로서 마교와 오랜 세월 원수처럼 싸워 왔던 그녀들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리라. 더 군다나 이곳은 황궁, 마교의 무사들이 왜 왔단 말인가. 사내들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매가 실쭉 가늘어지는 순간이다.

“마교의 무사들이 이곳 황궁에는 무슨 일인가요?”

“우리들은 양양성에서부터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여 이곳 황도로 왔소. 그런데 그분께서 어제 입궁하신 후 행방불명되셨소.”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지선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장군이 황궁 안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 있느냐?”

물론 그녀의 이런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1대제자인 그녀가 모르는 일을 그녀보다 낮은 위치의 제자들이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제자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 지선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금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무림맹이 마교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저 마교도들이 진짜 마교도일까? 하는 의심 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녀가 상대해 온 마교도들은 하나같이 마기라고 불리는 아주 기분 나쁜 음습한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냈었다. 그런데 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지선은 냉소를 지으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빈니는 시주들의 말씀을 믿기 힘들군요. 먼저 귀하들이 천마신교 소속의 무사들이라는 증거부터 보여 주세요. 빈니는 시주들이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믿기 힘드니 말이에요.”

사내는 어쩔 수 없는지 품속을 뒤져 명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흑풍대 소속 제111십인대장 조창(趙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내 수하들이지요.”

하지만 지선은 명패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이 마교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명패라고 던져 준 사각형의 길쭉한 나무 전반에 걸쳐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黑風隊 (흑풍대 일일일)’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글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나무의 재질이 귀한 흑단목이었고, 문양이나 글자를 새긴 장인의 솜씨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마교의 명패라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지선은 명패를 조창에게 돌려주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군요.”

“그렇다면 천인장께…….”

여기까지 말하던 조창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도 믿어 주지 않는데, 임충의 말이라고 믿어 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괜히 임충의 위치 를 가르쳐 줬다가, 이들이 임충까지 체포하겠다고 덤비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

“양양성에 알아보도록 하시오. 아니, 전쟁이 한참이니 이곳에도 양양성 쪽과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 있을 거요. 그곳에 알아보면 본교에서 흑풍대를 양양성에 투입 했음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물론 그렇게 하겠어요. 대신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귀하들을 구속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미파 여승들의 긴장감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높아졌다. 반항하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순간 조창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다. 괜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은 겨우 여덟 명.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대의 수가 네 배가 넘는다는 것도 불리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은 지금 비무장이라는 사실이다. 황궁에 들어오기 위해 무장을 해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투를 통해 여승들인 것으로 생각되는 상대편의 무공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창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 나왔다.

“어쩔 수 없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