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19화 – 기묘한 동거

기묘한 동거

참회동(懺悔洞).

소림승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면벽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장소다. 물론 아무나 이곳에서 참회를 하는 것은 아니고, 최 소한 1개월 이상의 참회를 필요로 하는 중죄를 저지른 승려들만 보내진다.

참회동은 깊게 파여진 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벽면이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 흔적마저도 없다. 있다면 참회동 안쪽에서 새어 나 오는 미약한 불빛뿐이다.

적막만이 감도는 참회동 앞에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하듯 수라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라도제는 잠시 참회동 안을 바라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대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후, 동굴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시구려.”

수라도제가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안쪽에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노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낡은 장삼 위쪽으로 손으로 잡고 살짝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 드러나 있다. 3황(三皇)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대사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이것은 수라도제가 지금껏 상상해 왔던 공 공대사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었다.

“험험, 불도를 닦으시는 데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대사를 뵙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공공대사는 면벽을 하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문 시주.”

공공대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자 수라도제의 얼굴에는 가벼운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저를…, 대사를 뵌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오래전, 시주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기운을 지니신 분과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분의 이름은 서문종(西門宗)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빈승은 기억하고 있 으니, 그분의 후예라면 서문 씨가 아니겠소이까?”

“아버지를 만나셨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런데 서문 시주께서 빈승을 찾으신 까닭은 무엇이오?”

공공대사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초라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 지와 인연(因緣)이 닿아 있는 무림의 선배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이리로 찾아온 마교 교주를 만나셨을 겁니다. 어쩌면 그자가 자신을 마교 교주라고 소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수라도제가 묵향의 생김새를 설명하려 하는데,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를 만나 봤소.”

“아, 그자가 자신의 소개를 제대로 했었던 모양이군요.”

“허허, 아미타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불호가 들리자 참회동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공공대사는 바짝 마른 손가락 사이로 커다란 염주를 습관적으로 돌리고 있을 뿐, 먼 저 대화의 물꼬를 틀 마음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다시 한 번 공공대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자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그 내용을 시주께서 관심을 가지실 이유가 있소이까?”

“물론 제가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겠지만…….”

수라도제는 갈등하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대사께서는 연배도 높으실 뿐 아니라, 3황 중에서 으뜸에 놓이셨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보셨을 때, 그 교주라는 자 는 어떤 것 같던가요?”

하지만 공공대사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수라도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허허, 3황의 으뜸이라니 별 말씀을…….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빈승이 어찌 그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단지 인연이 있어 마교의 교주를 만나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지금껏 빈승이 알고 있던 마교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심성을 지니신 시주였소이다.”

“제가 대사께 그자의 심성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무공입니다. 혹자는 그가 탈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하는 그의

무공 말입니다. 대사께서 보시기에 그가 어느 경지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말을 하던 수라도제는 묵향과 마주쳤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 게 말해 주었다.

모든 설명을 다 듣고도 공공대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염주알만 굴리고 있던 공공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시주께서 너무 큰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저어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시주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화경과 현 경 사이의 간격은 넓다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주께서는 화경에 못 미친 자와 화경을 이룩한 자의 무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시오?”

수라도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무사라면 모르겠지만 어찌 그런 것을 모르겠는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대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검합일에 든 자가 화경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의식의 틀을 깨야 하죠. 그것이 얼마나 힘 들면 모두들 그것을 화경의 벽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습니까.”

가만히 수라도제의 말을 듣던 공공대사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경 또한 마찬가지외다. 화경의 무공을 지닌 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본적인 관념까지 뒤집어 버려야 할 정도로 높은 벽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그 차이 는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소.”

이건 수라도제로서도 전혀 기대를 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같은 화경급 고수로서 묵향과 있었던 일에 대해 토론하고, 상대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공공대사의 대답은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것이 아닌 한 차원 높은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라도제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는 현경의 벽을 넘으셨다는 말입니까?”

“면벽수련을 하다가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경험했지요.”

두 번째 환골탈태.

그것은 곧 현경의 벽을 뚫었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던 것을 이 비쩍 마른 노승이 이루어 냈다는 사실에 수라도제는 강 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축하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겨, 경하드립니다, 대사.”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짓. 시주께 축하받을 이유는 없소이다, 아미타불.”

부러운 눈빛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문 뒤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 결례인 줄은 알지만 현경의 벽을 어찌 깨야 합니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공공대사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수라도제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 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고련을 했었던가.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에 는 죽음보다 더한 혼란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평생을 진리처럼 믿어 왔던 관념을 깨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물론 세속의 명리를 초월한 공공대사였기에 자신이 겪었던 깨달음의 조언을 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오히려 상대에게 더욱 큰 혼란만 안겨 줄 것 같아 망설이 는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나 성품이 다른 것처럼 나타나는 현경의 벽이 같을 리 없다. 그 말은 벽을 깨기 위한 실마리는 스스로가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빈승이 무슨 길을 알려 드릴 수 있겠소. 오히려 시주의 깨달음에 방해만 될 뿐일 게요.”

공공대사의 거절에 수라도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조언 몇 마디 듣는다고 화경의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렇다면 무림에 존재하는 화경급 고수의 제자들은 모두 다 화경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례로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아들마저도 화경으로 만들지 못했다. 벽은 스스로 깨야만 하는 것이다. 누가 대신 깨 줄 수는 없다. 대신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스승의 작은 조언이라도 듣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라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라도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넉살좋게 웃으며 들고 있던 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대사의 조언을 듣기 전에는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해 주실 때까지 한동안 여기서 기거해야겠군요.”

“허허, 나무아미타불.”

능글맞은 모습으로 빙글거리는 수라도제를 바라보던 공공대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불호를 외울 뿐이었다. 그날부터 수라도제와 공공대사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