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0화 – 남경 탈출
남경 탈출
황군에는 총사령관이 없다. 만약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황제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황군은 다섯 명의 중 랑장(中郞將)들에 의해 통제된다. 그중 네 명이 황도로 통하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선을 지키고, 나머지 한 명인 호분중랑장이 황궁을 수비했다. 이렇게 다섯 명에게 병력을 분산시킴으로 인해 효율성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만큼은 최소화해 놓은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중랑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동중랑장은 황도의 동쪽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연공공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휘하 병력 중 보병 4천을 동원하여 악비 대장군이 기거하던 관사를 덮쳤 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간발의 차이로 목표물을 놓쳤음을 알았다. 관사를 관리하는 총관의 말에 따르면, 대장군의 호위대는 1각쯤 전에 양 양성으로 돌아간다며 떠났다는 거였다.
“호위대의 수가 얼마나 되나?”
총관은 그들의 수가 모두 1백 기라고 알려 줬다. 모두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중 활을 휴대한 자는 5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크흐흣. 예상외로 규모가 작군. 겨우 1백 기쯤 포획하는 건 일도 아니지.”
1각(15분) 정도밖에 안 됐다면 아직 황도의 외곽 방어선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그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도망을 친다면 얘기가 다르 겠지만, 수많은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관도 위를 1기도 아닌 1백 여 기가 전력질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황도는 주요 통로마다 검문소들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그곳들을 하나하나 통과하자면 꽤나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동중랑장은 급히 전령에게 명령했다.
“양양성으로 가려면 서쪽 관도를 이용할 테지. 너는 즉시 서중랑장(西中郞將)께 달려가 놈들을 포획하라 전하거라. 한시가 급하다. 빨리 가라!”
“옛, 장군.”
전령은 서쪽 관문에 위치한 서중랑장의 사령부를 향해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전령을 보낸 뒤 그도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전령의 뒤를 따라갔 다.
동중랑장은 병사들을 다그쳐 최대한 빨리 서중랑장의 사령부로 달려갔지만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애석하게도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이끌고 간 병사 들이 강행군의 여파로 땀을 비 흘리듯 흘려대며 헐떡거리고 있을 때, 동중랑장은 서중랑장의 사령부가 위치한 토성 아래쪽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을 망연자 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군관들 중 한 명이 그런 동중랑장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군관의 군례를 받으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부터 던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놈들은 잡았느냐?”
“실패했사옵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겨우 1백 여기에 불과한 놈들을 잡지 못했다니 말이다!”
동중랑장의 협조공문을 지닌 전령이 서중랑장의 사령부에 도착하고, 또 서중랑장의 추포령(追捕令)이 떨어졌을 때쯤 악비 대장군의 호위병들은 검문소에서 통과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멈춰라! 저자들을 체포하라는 서중랑장님의 명이다!”
군관의 명령에 검문소 주위에 있던 모든 황병들이 무기를 들고, 호위병들을 몰아붙였다. 물론 그들은 호위병들이 반항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감히 오합지졸 어림군 병졸 따위가 정예 황병들에게 반항하다니,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과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돌파하라!”
뒤에서 들려온 단 한 마디 명령에 그들은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들며 창칼을 휘둘러 댔다. 그들 앞에 포진하고 있던 황병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호 위병들은 순식간에 검문소를 돌파한 후 서쪽 관도 위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 중 흑색 갑주를 걸친 자들의 무예는 정말이지 뛰어났었사옵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황병들을 단칼에 베어 버리며…….”
그 말을 들은 동중랑장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림군 따위가 황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다니……. 아무리 기마병들이었다고 하지만, 겨우 1백 기밖에 되지 않는 수가 아닌가. 지나가는 코흘리개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쟁이라며 조롱당할 게 뻔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도 두려움에 젖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군관의 말에 동중랑장은 급기야 노기를 터트렸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겐가? 놈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쇠뇌를 동원하면 되지 않나? 상자노(床弩)를 동원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면 신비궁만 해도 충분
히…….”
상자노는 초대형 쇠뇌를 말하는 것으로, 한 번에 한 발에서 일곱 발 정도의 대형 화살을 발사한다. 1천 보를 상회하는 엄청난 사거리와 아무리 두터운 중갑주라 하 더라도 단숨에 꿰뚫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춘 최강의 무기였다. 하지만 그걸 장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번처럼 순식간에 시작되고, 또 끝나 버린 격전에 상자노가 사용되지 못한 모양이다.
“적 70여 기를 사살하기는 했습니다만, 저들의 무예가 워낙 출중한지라…….”
군관의 말에 동중랑장은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남은 놈들의 무예가 출중하다고 해도 그렇지. 1백 기에서 70기를 죽였다면, 겨우 30기 정도가 남 는데 그 정도 숫자로 이곳 검문소를 돌파해서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다 죽고 겨우 목숨만 건진 30기를 못 잡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죄송하옵니다만 장군, 30기라니요?”
“이쪽으로 온 놈들의 수가 1백 기가 아닌가? 그중 70여 기를 죽였다면…….
“2백여 기가 이리로 왔사옵니다.”
“그게 사실인가? 본관은 분명 1백 기라고 들었는데…….?
“확실하옵니다.”
이렇게 대답한 군관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악비 대장군과 함께 이곳 검문소를 통과한 기마병들의 수가 150기였사옵니다. 며칠 후 대장군의 호위대라면서 50기가 더 통과했었구요. 검문소 출입대장 을 살펴보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귀관의 말대로 놈들의 수가 2백 기였다고 하세.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그, 그건…….”
동중랑장의 질책에 군관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곳은 서쪽 방어선의 핵이 아닌가? 좌우로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포진해 있고, 2백 대가 넘는 상자노에 그 몇 배나 되는 신비궁이 있지 않나!”
연이은 질책에 군관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군관과 대화를 할 마음이 없어진 동중랑장은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에잇! 집어치워라. 서중랑장께서는 어디에 계시나?”
“서중랑장께서는 기마병들을 수습하여 놈들을 뒤쫓아 가셨사옵니다.”
“서중랑장께서 직접?”
“예.”
각 지대가 보유한 기마병은 5백 기였다. 모두들 엄한 훈련을 받은 강병들이었지만, 저들의 매복기습이라도 받게 된다면 위험할 가능성도 있었다. “놈들의 무예가 그토록 출중하다면…, 수가 겨우 130기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서중랑장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겠구먼.”
그렇게 말한 동중랑장은 급히 뒤에 서 있던 부장을 불렀다.
“여보게.”
“예.”
“급히 본진에 전령을 보내 기마대를 이쪽으로 보내라 이르게. 양쪽 합해 1천 기라면 아무리 놈들의 무예가 뛰어나다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 부장이 전령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뛰어가자 동중랑장은 한심스런 눈빛으로 토성 아래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시체들을 바라봤다.
기마대가 도착하자마자 동중랑장은 그들을 이끌고 적도들의 추격에 나섰다. 연공공은 이번 사건에 악비 대장군의 호위대가 수상쩍으니 그들을 추포(追捕)하여 심 문해 보라는 명을 내렸었다. 그런데 그들이 황군의 포위망까지 돌파하며 도주한 것을 보면 확실히 뭔가 켕기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놈들을 반드시 추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마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 시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그동안 놈들은 멀리 도망쳤을 테니 더욱 서둘러야 했다. 동중랑장은 힐끗 태양을 올려다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세 시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세 시진 동안 아무리 말에 채찍질을 하며 내달린다고 해도 적도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이다.
“젠장, 밤을 새워 추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하지만 동중랑장의 예상과는 달리 한 시진 정도 말을 달리자 서중랑장의 기마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중랑장이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였기에 동중랑장은 그 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려가 군례를 올렸다. 서중랑장은 군례를 받아 주며 환히 미소 지었다.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일세.”
서중랑장은 멀리 떨어진 풀숲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숲의 뒤편에서 가느다란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은 동중랑장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저놈들이 지금 제정신입니까? 감히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태연히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니…….”
하지만 서중랑장의 반응은 달랐다. 서중랑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전투력은 생각 외로 강하다네. 황군 5백 기 정도는 상대도 안 된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지. 그렇지 않으면 탈출하던 도중 화살에 상한 자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건 잘됐군요.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이때 치는 게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 만약 자네가 도착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지금쯤 공격 명령을 내렸을 걸세. 그만큼 놓치기 아까운 기회니까 말이야.”
동중랑장은 급히 부관을 호출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달려온 부관에게 그가 명령했다.
“모두들 속옷을 찢어 말발굽을 감싸도록 해라.”
서중랑장도 옆에서 한 가지 명령을 더 내렸다.
“말발굽을 다 감싸고 난 뒤 나뭇가지들을 충분히 모아 오도록 하게.”
“예? 나뭇가지를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서중랑장은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들처럼 여기에다가 모닥불을 피우는 게야. 우리들도 여기서 밥을 지어 먹을 테니 안심하고 편히 쉬라고 말일세.”
적의 방심을 유도한 후 일거에 들이치자는 계책이다.
“호오, 그거 정말 묘책입니다.”
손바닥을 탁 치면서 감탄하던 동중랑장. 하지만 그는 곧이어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급히 덧붙였다.
“그런데 저놈들도 그렇게 위장해 놓은 거면 어떻게 하지요?”
“하하, 걱정하지 말게. 저기 저거 보이나? 반짝반짝하는 거 말일세.”
서중랑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들이 쉬고 있다는 풀숲 쪽에서 가끔 뭔가 반짝 하고 빛나는 것들이 보였다.
“저게 뭡니까?”
“이미 정찰병들을 깔아 뒀다네. 놈들이 아직 저곳에 있다는 걸 나한테 알려 주는 신호지.”
칼날의 면을 이용하여 햇빛을 반사시켜 신호를 보내다니, 과연 노회한 서중랑장이 생각해 낼 만한 계책이었다.
그들은 각기 기마대를 지휘해 양쪽 방향에서 협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출발하기에 앞서 서중랑장은 모아온 나뭇가지로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피워 놓으라고 명 령했다. 이쪽도 저들처럼 식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수십 개가 넘는 모닥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병력을 움직였다. 병사들은 말발굽을 속옷으로 감싸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막았고, 최대한 노출을 막기 위해 승마하는 대신 말을 끌고 목적한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이 자신들보다도 훨씬 더 실전 경험이 많은 능구렁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중랑장은 그 사실을 적의 군막 근처에 도착한 후에야 눈치 챘다. 근처 구릉에서 내려다본 적의 군막 안은 식사를 하며 쉬고 있어야 할 적도들은 보이지 않고, 주인없는 모닥불만 이 여기저기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헉! 그렇다면 놈들은?”
신호를 보내는 정찰병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서중랑장은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정찰병들도 저들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텐데, 왜 엉터리 신 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놈들이 어느샌가 정찰병들을 해치우고 대신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서중랑장의 의문은 더 이상 이어 지지 못했다.
“우와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적도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전원 승마하라!”
“당황하지 마라!”
휘하 장수들이 여기저기서 병사들을 격려하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곧이어 처참한 비명 소리에 묻혔다. 적에게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대가였다. 서중랑장은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연신 고함을 지르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동중랑장의 기마대는 군막 건너편으로 갔다. 적도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가장 훌륭한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실행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각개격파당할 가능성마저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서중랑장이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동중랑장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제때 달려와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을 바라볼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징을 울려라!”
동시에 서중랑장의 뒤에 서 있던 병사가 요란스럽게 징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쪽이 위급한 일을 당했다는 신호였다.
“모두들 힘을 내라. 동중랑장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서중랑장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허를 찔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적도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놀라운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서중랑장의 눈에 적도들 중 한 명이 칼을 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자는 자신의 무기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대신, 다른 쪽 팔을 들어 비스듬히 칼을 막았는데 일 견 잘려 버릴 것 같았던 그의 팔은 황병의 검격을 가볍게 튕겨 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서중랑장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적도의 팔에 붙어 있는 막대기처럼 생긴 강철보호대를 봤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전에 저런 강철보호대로 적의 공격을 막는 자들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저 영광스러웠던 찬황흑풍단이었다. 서중랑장 역시 젊었을 때 찬황 흑풍단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했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적도들의 행색이 찬황흑풍단과 비슷했다.
흑색 갑주와 팔을 감싸는 강철보호대, 그리고 각자의 앞에 붙어있는 계급을 나타내는 번호표까지. 서중랑장은 적도들이 분명 찬황흑풍단과 뭔가 관계가 있다는 것 을 직감했다. 옥영진 대장군이 참수당했을 때, 찬황흑풍단 역시 해체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흔적이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날 줄이야. 서중랑장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과거 찬황흑풍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에 대적한 이민족들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중랑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전원 후퇴하라! 후퇴!”
비명과도 같은 서중랑장의 명령에 많은 병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그의 뒤를 따랐지만, 적들과 교전에 들어간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코앞에서 죽기 살기로 칼부 림을 나누고 있는 상대를 놔두고 등을 보인다는 것은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기울어 가던 전황이 서중랑장의 후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급격히 적도들 쪽으로 기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쳐진 황병들을 다 해치워 버린 적도들이 도망치는 서중랑장과 그 부하들을 뒤쫓아 달려왔다. 그리고 목숨을 건 추격전이 벌어졌다. 적도들에 게 따라잡힌 서중랑장의 부하들은 하나씩 등 뒤로 칼을 맞고 쓰러지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두두두두!
바로 그때 저 앞쪽에서 동중랑장의 기마대가 나타났다. 징소리를 듣자마자 적의 비어 있는 군막을 가로지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동중랑장의 기마대는 모두들 칼과 창을 뽑아 들고, 충돌에 대비한 채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서중랑장은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목숨만은 건진 것이다. 심적 여유를 되찾은 서중랑장은 고개를 슬며시 뒤로 돌렸다. 적도들이 아직까지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중랑장의 기마대가 나타나자 적도들은 뒤로 말머리를 돌려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동중랑장의 기마대가 자신들을 지나쳐 앞으로 내달 리려고 할 때, 서중랑장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예? 하지만.
“한순간에 4백에 가까운 병사들을 잃었네. 저들에게는 거의 피해도 주지 못하고 말일세. 말을 타고 갑주를 입고 있지만 저들은 대장군의 호위병이 아니라 무림인 이 확실해.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들을 지니고 있단 말일세.”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용맹을 떨쳤던 서중랑장이다. 그런데 그런 장수가 적에게 이렇게까지 공포를 느끼다니, 동중랑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 그렇다면 저들이 혹시 1만여 기로 금의 정예 20만을 막았다는 바로 그 흑풍대라는 말입니까?”
흑풍대. 그러고 보니 찬황흑풍단과 이름까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서중랑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군. 아니, 확실하네.”
“하지만 우상시 공공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네.”
“저는 부하들의 실력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동중랑장은 기마대를 이끌고 흑풍대로 추정되는 적도들을 쫓아갔다. 동중랑장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적도들이 마교의 정예 흑풍대라는 것을 어 렴풋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서중랑장이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깨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연공공으로부터 마교의 교주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호위대에 숨어 있으니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부하들이라는 게 바로 흑풍대였다니..
적도들이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지만 동중랑장은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연공공의 명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잘 알기 때문 이다. 그리고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적의 수는 겨우 1백여 기, 이쪽은 5백 기. 5 대 1의 싸움이다. 수적 우위에 있는 한, 한번 해 볼 만한 싸움이었다. 동중랑장은 불안 에 떨면서도 연신 말에 채찍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나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