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6화 – 드러나는 진실

드러나는 진실

황도에 돌아온 재상 진회는 즉시 추밀사 류태청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류태청은 이미 처형당한 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처형에는 참지정사 섭평이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다. 진회는 그걸 알아내자마자 즉시 섭평을 불러들였다.

“본관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서둘러 류태청을 처형한 이유부터 물어보고 싶구려.”

서슬 퍼런 진회의 질책에도 섭평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가 모든 죄를 자복한 상태였고, 황상 폐하의 윤허마저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처형을 뒤로 미룰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의 죄가 명명백백하다고 해도 그 정도의 고위관리를 겨우 며칠 동안 심문하고 처형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도대체 그를 그렇게 서둘러 처형 한 저의가 뭔가? 혹 내가 그를 만나면 자네에게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기나?”

“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문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류태청의 처형을 주도한 인물은 형부의…….”

진회는 거칠게 탁자를 탕 하고 치며 외쳤다.

“자네, 지금 본관을 놀리는 것인가?”

“예?”

“어서 진실을 말해 보게. 이미 악비 대장군도 류태청도 죽어 버렸네. 자네는 본관이 믿고 의지했었던 자네마저 처형해 버리기를 원하는가?”

“……”

진회의 분노가 진짜임을 눈치 챈 섭평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며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설프게 대답을 했다가는 분명 자신의 목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게 뻔했다. 그런 그의 뇌리에 연공공과의 밀담이 떠올랐다.

연공공이 자신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마교의 교주라는 자를 반역죄로 엮어 달라는 것이다. 그 요구에 참지정사 섭평은 흔쾌히 승낙했다. 안 그래도 그놈의 마교 교주는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었다. 자신이 세워 놨었던 모든 계획이 어긋나게 된 게 바로 그 망할 교주 새끼 때문이니까.

처음 류태청으로 하여금 악비 대장군을 구속하게 한 명분은 바로 역모 혐의였다. 일단 잡아들인 다음 자백만 받아 낸다면, 그를 역적으로 처형한다 해도 그 누구도 반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하며 추궁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비는 끈질기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섭평은 걱정하 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 놈이라도 고문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결국에는 없는 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교 교주라는 놈 때문에 벌어졌다. 그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압박해 들어왔기에 섭평은 교주가 악비가 구금되어 있는 위치를 알아내기 전에 그 를 처형해 버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악비가 그놈에 의해 구출되면 자신은 분노에 가득찬 악비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게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악비에게 반역을 도모했다는 시인을 받아 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반역도 안 한 인물을 죽인 셈이니 그 죄를 누군가는 덮어써야만 했다. 그것도 진회가 황궁에 돌아오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그는 증거 인멸도 할 겸, 류태청이 독단적으로 악비를 처형한 것으로 뒤집어씌워 사건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진회가 류태청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루라도 빨리 그를 처형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황궁을 뛰어다니며 황제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계속된 진회의 추궁에 섭평은 재빨리 잔대가리를 굴렸다. 진회에게 역모와 같은 어설픈 거짓을 말했다가는 당장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게 뻔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 까? 한참을 고민하던 섭평은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밀약을 맺은 연공공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섭평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 후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휴~~, 군벌 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 재상께서도 아시다시피 국경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 무림인들의 덕분 아니겠습니까? 악비는 그런 무림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 악가군(岳家軍)에 35만 대군이 있다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오합지졸들입니다. 과연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북진해서 1 백만에 달하는 금의 정예대군을 격파할 수 있겠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진회로서도 반론을 제기하기가 힘들었다.

“그건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무림인들이 지금과 같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걸 간파한 악비는 북진을 한다고 하고 서는 무림인들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다니며 그들이 세운 공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꿀꺽 삼키려는 속셈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즉, 악비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누 구를 집어넣어도 결과는 똑같아진다는 말이지요.”

악비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진회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진행된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습니까?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악가군이 아닙니다. 일당백의 무서운 무술실력을 지닌 무림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가을에 무한 일대로 침입해 들어왔던 금의 별동대 20만이 겨우 3만 남짓밖에 안 되는 무림인들에게 전멸당했 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흐음…….”

“무림인들이 양양성 방어전에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그 뒤 승전에 따른 혜택은 누가 가장 크게 봤습니까? 바로 악비였지 않습니까? 금나라와의 방어선을 유지하 고 있는 여러 군벌들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황실의 지원을 거의 못 받고 있습니다. 악비 대장군이 30만 대병을 모집해서 무장시키고 또 훈련시키고 있는 동안 다 른 군벌들이 증원한 병력을 모두 다 합쳐도 10만이 될까 말까 한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악비가 송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장군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 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벌써 군벌을 해체하고 추밀원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테니 말입니다.”

악비 대장군을 없애야 했던 이유를 참지정사 섭평은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는 그가 억지로 갖다 붙인 것도 몇 가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현 상황을 직시한 것이었기에 진회로서도 그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진회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그만큼 진회는 악비를 아꼈 기 때문이다.

“악비 대장군에게 힘을 몰아 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당장 노도(怒濤)와도 같이 밀려드는 금의 세력을 저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를 얻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방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북진을 단행하려고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 시점에서 북진을 하고 또 금을 정벌하는 데 성공해 보십시오. 송제국의 모든 것이 악비의 손에 놀아날 위험성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섭평의 생각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분명 악비가 북진을 감행하여 성공한다면 악비의 위명과 힘은 황실의 힘을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이다. 지금도 35만 악 가군은 황실에서 내리는 명령보다 악비 대장군을 더 따르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때쯤 실전을 통해 35만 악가군은 정예병으로 변화해 있을 터이다. 그런 악비 대장군이 혹시라도 불온한 마음을 먹는다면 송 황실에서는 아무런 제재 도 할 수 없을 게 뻔하다.

진회의 표정이 약간 변화하자 섭평은 마치 자신의 충심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외쳤다.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재상께서도 악비가 북진하겠다고 하는 걸 끝까지 반대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진회가 북진을 반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한 번의 승리로 인해 송의 명줄이 조금이라도 더 연장되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진회는 송 이 재기 불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길은 중원의 주인이 한시라도 빨리 바뀌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진회가 송의 멸망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굳히지 못한 이유는 바로 악비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걸출한 무인(武人)이 잃어버린 북쪽 영토를 되찾고, 또 뒤이어 금나라까지 멸한다면 더 이상 송을 위협할 이민족은 없어진다. 또다시 수백 년간 제국이 존속할 가능성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현명한 황제가 나오고, 자신의 온힘을 다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런 희망이 진회로 하여금 송이 망하도록 그냥 방치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악비의 죽음은 그 모든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한 가지뿐이다. 송의 멸망을 가속화시켜 조금이라도 빨리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도 록 만드는 것. 그것만이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길이 될 것이다.

진회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정색하며 섭평에게 명령을 내렸다.

“추밀원이 반드시 군권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가 한번 그렇게 만들어 보게.”

갑작스런 진회의 명령에 섭평은 찔끔했다.

“예?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 황상 폐하께 고하여 자네에게 추밀원을 맡기도록 하겠네.”

“예? 그, 그건…….”

진회의 말에 섭평이 당혹스러워할 만도 했다. 자신에게 추밀원을 맡기겠다는 말은 곧 자신의 직위를 강등하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지금 추밀원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추밀사였던 류태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네는 지금까지 나한테 군권이 추밀원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그럼 그렇게 해 보게. 지금 추밀원은 유명무실한 상태지만 군벌들로부터 군권을 회수한다면 과거처럼 중서성과 쌍벽을 이루게 될 걸세. 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없나?”

진회의 도발에 섭평은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악비를 없앤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 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네. 내일 정식으로 폐하의 첩지(牒紙)가 내려갈 걸세.”

예를 표한 후 진회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섭평의 안색은 이러다 숙청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직으로 끌어내린 후 적당한 누 명을 씌워 제거하는 것. 그게 지금까지 섭평 자신이 가장 즐겨 써 왔던 정적 제거의 수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