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9화 – 섭평의 승부수 (23권 끝)
섭평의 승부수
황성에서 무한은 1천5백여 리나 떨어져 있다. 전선 시찰이 화급을 요하는 게 아니었다면 섭평은 양자강(揚子江)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 만 이번 일은 화급을 요하는 일이었다. 재상 진회가 손을 쓰기 전에 악가군 장수들을 회유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었다. 만약 진회가 역모를 이유로 그들을 숙청 하고, 대신 자신의 심복들을 악가군에 배치한다면 군권은 자신이 아닌 재상에게로 귀속될 우려가 있다.
섭평은 기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훈련에 아낌없는 투자를 한 강병들이었기에 무예도 뛰어난 데다가 승마 실력들도 좋았다. 더군다나 황병들이 보유한 것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준마들을 지니고 있었기에 예정보다 반나절이나 빨리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북성의 성도(省都) 무한에 도착한 첫날, 섭평은 호북성 성주(省)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안부를 전했다. 무한까지 온 마당에 성주를 만나지 않고 자신의 볼 일만 본 뒤 딴 데로 가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성주와의 만남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짧게 끝낸 다음 섭평이 서둘러 달려간 곳은 병영(兵營)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병사들과 만나 간단하게나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물어봤고, 또 불편한 사항은 뭔지 들어 주는 척 대화를 나눴다. 그는 특히 젊은 장수들과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밤이 되자 여문덕 상장군이 주최한 조촐한 연회가 벌어졌다. 섭평은 그 자리에서도 장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은 무인들을 무시하는 고고한 선비와는 거리 가 먼 존재임을 알렸다.
밤이 깊어져 연회가 파했을 때, 섭평은 여문덕 상장군에게 술이나 한잔 나누자며 청했다. 섭평과 그 수행원들을 위해 마련해 둔 저택에는 그의 사병들이 형형한 눈 빛을 빛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한눈에 척 봐도 대단히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었다.
“자자, 이리 오시게. 방금 전 귀관이 베풀어 준 연회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여러 장수들 앞에서는 사적인 대화도 나누기 힘들었기에 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세. 그러니 부담없이 마음껏 즐기게나.”
여문덕 상장군은 섭평이 지나치리만큼 친근하게 자신을 대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재상 진회 가 보내온 공문에는 분명히 추밀원으로 모든 군권을 귀속시키겠다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자신은 역모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은 악비 대장군의 심복이다. 당연히 뭔가 트집을 잡아 자신의 목을 날리기 위해 섭평이 애를 쓸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여문덕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리를 권하는 섭평의 손짓에 여문덕은 예를 표하며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을 무렵 섭평은 슬쩍 말을 꺼냈다.
“악비 대장군이 아무리 황실에서 감당하기 힘든 대군벌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금나라의 침공을 저지한 크나큰 공을 세운 장수였지. 내 귀관만큼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황도에서 몇 번 만나 본 느낌으로도 뛰어난 실력에 비해 참 겸손한 인물이었어.”
악비 대장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던 장수인 만큼 자신의 상관을 칭찬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여문덕 상장군의 표정이 천천히 누그러 지기 시작했다.
“일세의 영웅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야만 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 아닌가?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시국에 말일세.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미끼를 던지는데도 불구하고 여문덕은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런 말을 꺼내는 상대의 진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상께서 결정하신 일을, 일개 무장이 어찌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황상 폐하께서 임명하신 분인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셨다는 건 그 누구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잘못하신 거야.”
슬쩍 여문덕의 눈치를 살핀 섭평은 상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섭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문덕의 앞에 고개를 조 아렸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여문덕은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무슨 행동이시옵니까?”
“자네에게 죄를 청하기 위함일세. 사실 악비 대장군을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날세.”
“그, 그게 무슨……?”
오랜 세월 음모와 권력 다툼으로 밤을 새우는 황궁에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라온 섭평이었기에 그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여문덕 같은 고지식한 자는 쉽게 자 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룻밤 사이에 그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섭평으로서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상대의 평정심을 일단 흔들어 놔야 했던 것이다.
“악비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재상이 그를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급한 마음에 일단 류태청으로 하여금 그를 수감하게 하였네. 설마하 니 추밀원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에게까지 손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지. 시간을 번 뒤 황상 폐하께 고해 악비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설마 류태청이 재상의 손에 놀아나는 놈이었을 줄이야. 어찌 되었든 악비의 죽음에는 그것을 막지 못한 내 잘못도 크다는 말일세.”
지금까지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여문덕에게 그의 고백은 섭평을 다시 보게 만들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섭평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섭평은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1할의 거짓을 위해 9할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류태청이 마교 교주라는 놈에게 고문 을 당해 모든 것을 실토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악비의 심복들인 유광세 상장군이나 여문덕도 알고 있을 게 아닌가. 하지만 진회가 악비를 처형 한 것은 자신이라고 공표를 했다는 것에 생각이 스치자 자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섭평은 짐짓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상은 내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나를 바로 이 추밀원에 처박아 버리더군.”
그 말은 충분히 여문덕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섭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지정사, 그러니까 부재상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실권도 없는 이름뿐인 추밀사로 좌천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상장군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악비 대장군 때문일 줄이 야……. 섭평은 그야말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진회에게 밉보여 시골 구석으로 좌천당한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돌아가신 대장군을 대신해 추밀사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일세. 좌천당할 것이 두려워 아부만을 일삼는다면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그러면서 섭평은 슬그머니 뭔가를 여문덕 앞에 밀어 놓았다. 여문덕은 그게 뭔가 하고 바라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건 피에 절은 관복과 잘린 머리카락이었다. 그게 누구 것인지 여문덕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이것은?”
“대장군의 유품일세. 그의 심복이었던 자네와 유광세 상장군에게 전해 주려고 몰래 감춰 뒀었다네. 그걸 이제야 전해 줄 수 있게 되었구먼.”
“뭐, 뭐라고 감사를 올려야 할지…….”
유품을 받아 드는 여문덕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장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을 위로하려 제사를 지내려 했으나 시체 는 고사하고 유품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대장군의 유품을 받게 될 줄이야. 여문덕의 두 눈에 점차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섭평은 잠시 여문덕이 충분히 슬픔에 잠겨 들 시간을 계산한 뒤 비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재상은 과거에는 청렴하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변질되어 버렸다네.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악비 대장군 같은 거목을 찍어 내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섭평은 여문덕의 손을 덥썩 붙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장군이 나를 좀 도와주게. 황실의 안녕과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재상과 같은 썩어 빠진 뿌리는 캐내어야만 하네.”
슬픔에 잠겨 있던 여문덕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첩자들이 우글거리는 판에 이런 민감한 말을 하다니……. 여문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 으로 대꾸했다.
“아무리 술에 취하셨다고는 하나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혹시 첩자들에 대한 걱정이라면 접게나.”
섭평은 집 주위를 엄중하게 에워싸고 있는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오랫동안 본가에서 키운 내 사병들일세. 저들 역시 의기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 절대 첩자 따위는 없음을 내 보증하지. 나는 오늘 상장군의 진심을 알고 싶 었기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세. 될 수 있다면 숨김없이 허심탄회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진심 어린 섭평의 간청에 여문덕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인을 도와 드리고 싶으나 소장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자네와 나는 한배를 탈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상은 악비 대장군을 모반죄로 처형한 것을 만천하에 공포했네. 그런데 그 모반이라는 것이 대장군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숙청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상장군에게 들은 바 있기에 여문덕은 침착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자네가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자네가 숙청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겠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일세. 우리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재상을 견제하도록 하세나.”
“아무리 추밀사 대인이시라도 그런 약속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
여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섭평은 말을 끊었다.
“물론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네. 하지만 악비 대장군의 무죄를 증명하고 그를 복권시킬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자네에게 모반죄 따위를 물을 수는 없을 걸세.” 대장군의 복권이라는 말에 여문덕 상장군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네. 현재 송제국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악가군이 나를 밀어만 준다면 말일세.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군제를 개편, 이름뿐인 추밀사가 아니라 진정한 군부의 수장으로 거듭날 수가 있지. 그렇게만 된다면 그 힘을 이용해서 재상을 탄핵할 수 있지 않겠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과거 군권을 지니고 있을 때 추밀원은 중서성과 쌍벽을 이뤘었다. 즉, 중서성의 수장인 재상과 추밀원의 수장인 추밀사는 거의 동
등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평화시에도 그렇게 추밀사의 권력이 막강했었는데 지금은 금나라를 앞에 둔 전시가 아닌가?
“내일 본관은 양양성으로 떠나 유광세 상장군도 설득할 생각일세. 자네가 동참해 준다면 양양성으로 향하는 내 마음도 가벼워질 텐데……. 부디 대장군과 같은 사람이 반역자의 오명을 후세에 남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먼. 허허이, 참으로 난제로구먼. 난제야.”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문덕 상장군은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섭평이 한 제의 때문이었다. 고지식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현재의 조정을 개혁할 필요 성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대소신료들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야 할 때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떨치고 일어나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 다는 사실이었다.
여문덕은 대장군의 유품을 앞에 놓고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장군, 소장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장군이 아니 계시니 전혀 앞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장군, 소장 어찌하면 좋겠냔 말입니다.”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가슴을 메이는 여문덕의 비통한 음성 또한 켜켜이 쌓여만 갔다.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섭평은 숙취로 인한 두통을 억누르기 위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윽……..”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황도에서 이곳까지 강행군을 한 탓에 피로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주량에 훨씬 못 미치게 술을 마셨음에도 불 구하고 섭평은 크게 취했다.
“대인, 기침하셨습니까? 시비들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아니다. 그나저나 상장군은 기침하셨느냐?”
“지금 당장 달려가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섭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다. 내가 직접 가 보마.”
여문덕을 찾아가는 섭평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토록 구슬렸는데도 여문덕은 단 한 마디도 승낙의 뜻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평이 여문덕의 방 앞에 도착하자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장군, 기침하셨소?”
그러자 잠시 후 목이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죠.”
문도 열어 보지 않고 감히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하다니. 섭평의 안색이 불쾌감으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애써 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문덕이 대장군의 유품을 앞에 두고 좌정을 하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웠는지 그의 안색은 초췌했다. 섭평은 뭔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 다. 무겁게 가라앉은 여문덕의 얼굴을 보니 왠지 말을 꺼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가 싶더니 여문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섭평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대인, 부족한 몸이지만 제가 필요하시다면 그 뜻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런, 갑자기 왜 이러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섭평은 기쁨에 환히 웃으며 여문덕을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우리들은 송의 정기를 다시 세우기 위해 뜻을 모은 동지가 아니겠소. 절대 장군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도록 내 노력하리다.”
“대인, 소장의 목숨을 바치오리다.”
흡족한 기분으로 여문덕과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섭평은 양양성에서 유광세 상장군이 칼을 갈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곳으로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한 건 처리 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오른 것도 잠시, 곧이어 그의 머릿속은 유광세 상장군은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자신을 향해 급히 달려오고 있는 여문덕 상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섭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온화한 미소를 보냈다.
“어허, 아직 출발하려면 멀었는데, 벌써 배웅을 나오셨소?”
“큰일 났습니다, 대인.”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섭평에게 여문덕은 전서를 내밀며 외쳤다.
“대규모의 왜구가 절강성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뭣이?!”
섭평은 급히 전서를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절강성에 상륙한 왜구의 규모는 무려 1만.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추밀원에서는 그에게 순시를 중 지하고 당장 황도로 돌아올 것을 청하고 있었다.
순간 섭평의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광세를 포섭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여문덕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지만, 그들은 아직 제대로 훈련이 안 된 신병들이다. 하지만 유광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대 송제국 최고의 정예인 것이다. 그런 엄청난 세력을 보유한 유광세 상장군의 포섭 을 포기하고 황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만약 이 공문을 무시한다면 곧바로 재상 진회에게 보고가 올라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진회가 자신이 이쪽으로 온 진정한 의도를 눈치 챌 우려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진회는 자신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결국 섭평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유광 세 상장군을 포섭하러 가든지 아니면 아직까지는 자신의 힘이 모자람을 통감하며 진회의 눈치를 살펴야 할지…….
“크으으…, 이걸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묵향> 2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