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8화 – 악비 대장군의 행방, 그리고 혈전
악비 대장군의 행방, 그리고 혈전
우상시 연공공은 중상을 당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황군 진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무영문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었 지만, 그들이 워낙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연공공은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황군 진지에 겨우 도착한 연공공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뭔가 큰 환난을 당 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황군 진지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연공공을 발견하자마자 달려 나왔다.
연공공은 궁내의 환관들이 입는 관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경계를 서고 있던 황군 병사들이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들은 연공공을 부축하여 병영 안으로 들어 갔고, 그중 한 명은 당직을 서고 있는 장수에게 이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황군 교령이 한눈에 연공공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우상시 공공이 아니십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십니까?”
그 말에 묵향에게 납치돼 온갖 고문을 당했던 것이 떠오르자 연공공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잡혀 갔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도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네.”
“대인께 무례를 저지른 놈들의 거처를 알려 주십시오. 소장이 달려가 그놈들을 당장!”
“그렇게 섣불리 건드릴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황군 교령을 만류하는 연공공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여기까지 탈출해 오는 동안 틈만 나면 복수를 생각했었다. 지독할 만큼 강렬한 복수심이 그를 이 곳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상대는 이 시대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문파들 중 하나인 마교(魔敎)의 수괴(首魁)다.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놈의 무 공은 엄청났다. 그런 만큼 조심에 조심을 기하지 않는 한 놈을 놓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개방의 거지들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납치하고 극악한 고문을 행했던 그 빌어먹을 마교 교주 놈을 잡는 게 먼저였다. 잡아서 자신이 겪었 던 고통의 수십 배를 돌려줘야 했다.
교주 놈을 잡기 위해 그가 생각해 둔 한 가지 계책이 있었다. 그 계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놈이 뭘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기에 가 능했다.
“몇 가지 도와줄 일이 있네.”
“하명만 하십시오, 공공.”
“날래고 믿을 만한 녀석들을 다섯만 뽑아 주게. 서신을 보낼 게 있네.”
“예, 즉시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교령이 자신의 심복들 중에서 기마술에 뛰어난 자들을 부르러 나간 사이, 연공공은 그들에게 맡길 서신을 작성했다. 가장 먼저 그가 쓴 서신은 황궁에 있는 자신의 심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아무래도 실력 있는 고수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작성한 것은 황성사로 보낼 서신이었다. 자신이 당한 일을 다른 간부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공동파와 아미파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오랜 세월 황궁에서 일해 온 때문인지 우아한 서체로 쭉쭉 써 내려가던 그는 갑자기 붓을 멈추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런! 이렇게 쓰면 안 되잖아.”
황성사에 보내는 서신이야 이번에 그가 당한 불미스런 일들을 사실대로 기록한다고 해도 아미파와 공동파에 보낼 것들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사실 대로 기록한다면 저들이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마교 교주의 무공이 워낙 강한 만큼 그를 없애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만약 교주를 없앴다는 게 마교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전면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양양성에서는 마교와 정파라는 것들이 힘을 합쳐 오랑캐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교주라는 것을 알면 공동파와 아미파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힘을 빌려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까?”
잠시 궁리하던 연공공은 일단 자신을 납치한 괴한이 마교 교주라는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괴한은 마교 교주가 아니라 강력한 무공을 지닌 ‘정체불 명의 고수’로 바뀌었다.
자신의 서신을 소지한 다섯 명의 전령들이 전력질주하며 만들어 낸 경쾌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이미 마 교 교주 놈이 붙잡혀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놈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한 이상, 생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미파와 공동파는 물론이고, 중무장한 황군 5천까지 동원된다면 그 누가 도망칠 수 있겠는가.
“놈을 어떻게 죽여 줄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연공공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래! 놈이 말했던 대로 육시를 해서 그 잡것들에게 존엄한 황실의 권위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이 되는지 알려 줘야겠어. 그래, 바로 그거야. 케케케케케!”
나름대로 통쾌하게 소리 내어 웃는 연공공이었지만 그 기괴한 고음의 목소리 탓에, 주변에서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 나쁜 경험을 해 야만 했다.
* * *
연공공의 서신을 찬찬히 읽은 후, 비호검 이평 장로는 그것을 가지고 온 전령에게 물었다.
“서신을 읽어 보니 아미파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라고 쓰여 있는데…, 그쪽은 황궁에 매인 상태인데 과연 지원 나올 여력이 있겠나?”
“우상시 공공의 청인데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나올 것입니다.”
전령의 말에 그제서야 이평 장로는 연공공이 십상시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라면 설사 황제를 호위하는 무사라도 빼올 것이다. 그만큼 십상시가 휘두르는 권력의 힘은 엄청났다.
“알겠네. 정해진 시간에 그쪽에 도착할 것이라고 공공께 전해주게나.”
“예,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이평 장로의 말에 전령은 군례를 올린 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돌아가자마자, 이평 장로는 1대제자들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최대한 빨리 출동 준비를 갖춰라. 상대는 소수인 만큼 검과 암기 몇 가지 정도만 가져가도 충분하다.”
믿고 존경하는 장로의 명령이니 의문을 제시하는 제자는 당연히 없었다. 1대제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옛, 장로님!”
이평 장로의 명령에 제자들이 무장을 갖추기 위해 밖으로 모두 달려 나갔지만 그의 적전제자인 허진산(珍山)은 남았다. 허진산은 검대에 놓여 있는 사부의 애검 을 꺼내, 두 손으로 사부께 바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 무슨 일이신데 그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노부가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이평 장로는 서신을 허진산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이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 연공공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게다. 그는 황궁의 실세다. 그가 본문을 밀어주기만 한다면, 본문이 다시 한 번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 게야.”
공동파는 과거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무림맹주로 있을 때 최고의 성세를 달렸었다. 하지만 그가 행방불명된 후 거듭되는 불상사로 인해 지금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공동파는 다시 한 번 재도약의 발판을 황실에서 마련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너무 나도 빨리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급히 서신을 다 읽어 본 허진산은 조심스럽게 사부에게 의문나는 점을 물었다.
“서신에 따르면 적도(敵徒)를 잡는 데 본문만이 아니라 아미파와 황군까지 투입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면 놈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 칠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설혹 놈들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공이 그만큼 희석될 것이 뻔합니다, 사부님.”
그 말에 이평 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다.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서두르는 게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놈들을 친다. 알겠느냐?”
“옛, 사부님.”
이때, 밖에서 1대제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출동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평 장로는 검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자, 가자.”
이평 장로가 거느린 공동파 제자들은 순식간에 목표 지점인 추밀사의 저택에 도착했다. 목적지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기에, 경공술을 사용해서 내달 리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평 장로는 도착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적도들을 찾아라. 설혹 낌새를 챘다고 하더라도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옛!”
1대제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후, 각기 자신들을 따르는 2, 3대제자들을 거느리고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큭, 겨우 적도 몇 놈 잡는데 아미파와 힘을 합치라니. 연공공은 본문의 능력을 너무나도 무시하는군.”
그렇게 투덜거리며 이평 장로는 주위를 둘러봤다. 연공공의 말대로 적도들 중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림인이 있다면, 자신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파악하 고 벌써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봐도 누군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듯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깊숙이 숨어 버렸다면 골치깨나 아프겠는데..
지금 그가 우려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놈들이 어딘가로 숨어 들어갔을 경우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수색해 나간다면 결국 잡아낼 수 있겠지만, 이평 장로는 적도들 을 잡는 공을 아미파와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면 결국 적도들을 최단시간 내에 포착하여 격멸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때 갑자기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던 문하제자들이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암행복(暗行服)을 입은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흐흣, 잡았구나.”
흐뭇하게 미소 짓는 이평 장로였지만, 그 미소는 얼마가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얼마나 놀라운 광경을 봤는지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면인은 공동파의 제자들이 포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순간 번쩍하고 신형을 움 직였다.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이평 장로조차도 그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놓쳤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퍼퍼퍽!
놀랍게도 그 괴한은 순식간에 세 명의 문하제자들을 때려눕히더니, 곧바로 그들 중 한 명의 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복면인을 중심으로 은빛 곡선의 파도가 화려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문하제자들 십수 명이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나뒹군 것도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 젠장, 고수로구나. 모두들 비켜라. 노부가 상대하겠다.”
이평 장로는 상승의 신법을 발휘하여 공중에서 아홉 바퀴나 곡예를 하듯 화려하게 돌며 문하제자들 앞에 착지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앞으로 튕겨 나가듯 복 면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과연 일문의 장로다운 절정의 경공신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문하제자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게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복면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이평 장로는 복면인의 검 격이 자신에게 날아온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상대를 얕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얼핏 봤을 때 복면인의 무공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인은 쓸데 없는 공력의 낭비를 최대한 자제하며, 상대를 해치우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공력만을 쓰고 있었다. 그 말은 복면인이 정말 엄청난 고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지금껏 제자들을 상대할 때는 그리 대단한 검식을 사용하지 않았었지만, 이평 장로를 향해 날아온 것은 그 파괴력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극도로 응축된 내공을 담고 있는 강력한 초식. 공동파의 장로답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순간, 이평 장로는 사력을 다해 자신이 익힌 무공 중 최강의 초식으로 강력한 검막(劍膜)을 구축했다.
콰콰쾅!
검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고막이 멍멍해 질 정도의 굉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평 장로의 검막이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상대는 상상 이상의 고 수였다. 이평 장로가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검막이 깨져 나간 순간, 이평 장로는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상대의 검 이 자신의 목을 쓸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촌각의 시간이 흘렀어도 적의 공격은 없었다. 어쩌면 적도 자신의 검막을 무너뜨리면서 충격을 받아, 연속 공격을 가할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평 장로는 정신없이 뒤로 빠졌다.
이평 장로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잡을 때까지도 복면인의 공격은 없었다. 아니 복면인은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의아한 시선으로 이평 장로가 복면괴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괴한의 입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 그걸 익힌 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너는 그 검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복면인의 물음에 이평 장로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저자는 어떻게 제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이 무공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말인가? 공동파 수뇌부 몇몇 을 제외하면 무림에서 이 무공을 알아볼 사람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 저자가 과거 공동파에서 파문당한 선배였다는 말인가? 짧은 시간이었지 만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이평 장로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귀, 귀하는 누구시길래 그걸. .?”
“젠장! 그녀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군.”
마치 살인에 재미라도 들린 듯 닥치는 대로 공동파 제자들을 죽여 대던 괴한은 갑자기 모든 흥이 사라진 듯했다. 그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긴 채 그 장소를 이탈하려 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궁 쪽 방향에서 수십이 넘는 인영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인영들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던 아미파의 지원세력이었다. 아미파 고수들은 도착 하자마자 피바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복면인을 향해 다짜고짜 공격을 개시했다. 수많은 공동파 제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복면인과의 대화는 무의 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미파 제자들은 복면인에게 접근하며 저마다 품속에서 아미파 고유의 암기인 조핵정(棗核釘)을 꺼내 던졌다. 무림인들의 경우 같은 문파의 소속이라 할지라도 각자 지닌 암기는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달랐지만, 아미파는 모두 조핵정만을 사용했다. 대추씨와 비슷하게 생긴 조핵정은 통짜쇠로 만들어져 제법 묵직했기에 장 거리의 적도 공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한쪽은 뾰족하게 또 다른 쪽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어, 살상은 물론이고 적의 혈도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수백 발의 조핵정이 발출되어 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 황궁 경호를 위해 뽑은 아미파의 내로라할 만한 실력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암기들은 무시무 시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갔다. 그녀들은 복면인이 벌집이 되어 쓰러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티티팅.
일순 복면인의 검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그의 주위로 두터운 벽을 쌓았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조핵정들은 콩 볶는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무위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녀들은 그와 똑같은 한 수를 사용해서 조핵정을 찢어발기던 인물을 이미 경험 한 적이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이 저마다 경악성을 질러 댔다.
“악! 바로 그자에욧!”
“모두들 조심해!”
어젯밤 황궁에서 만난 괴한을 그녀들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그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절감해야만 했다. 괴한과 아미파의 충돌은 어처구 니없을 정도로 짧게 끝났지만, 그녀들이 강자에 대한 경외(敬畏)와 공포(恐怖)를 가슴속 깊이 새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고수가 황궁에 둘씩이 나 잠입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 서 있는 복면인은 어젯밤 만났던 바로 그놈이 분명했다.
정진사태의 명에 따라 동문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지선은 있는 힘껏 외쳤다.
“모두 피햇!”
순간 복면인의 앞을 가로막았던 아미파 여승들은 마치 대나무가 쪼개지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복면인은 미처 옆으로 비키지 못한 여승들을 일말의 주저도 없 이 베어 버리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승 셋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지만, 누구 하나 복면인을 향해 달려드는 자는 없었다. 달려들어 봐야 아 예 상대가 안 됨을 그녀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서 복면인의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돌려 지선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상대는 공동파의 장로였기에 지선은 예의를 갖춰 정중히 대답했다.
“소승도 잘 모릅니다.”
“방금 전에 보니 모두들 저자를 아는 듯하던데……?”
이평 장로의 눈에 의심의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자 지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평 장 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법을 사용했다면…, 혹 항마연환검진을 말하시는 거요?”
“그렇습니다. 비호검 대협.”
“그, 그럴 리가…….”
“아미타불,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입니다.”
지선의 솔직한 대답에 이평 장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평 장로는 아미파의 항마연환검진이 얼마나 뛰어난 검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 문파의 최 고의무공이나 검진은 다른 문파들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검진을, 그것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발동시킨 걸 혼자서 단숨에 뭉개 버렸다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믿기 힘든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지만 이평 장로는 지선의 말이 사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직접 복면인과 검을 나누지 않았던가. 상대의 무시 무시한 검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이번 사건에 뭔가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간파했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의 고수라면 필히 무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 복면인은 자신의 검법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런 실력자가 뭣 때문에 연공공의 납치에 관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때 실내로 들어갔던 제자들 중 하나가 이평 장로에게 보고했다.
“추밀사 대인을 찾았습니다, 장로님. 지독한 고문을 받은 듯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 보입니다.”
“그래? 빨리 의생에게 모시도록 해라.”
“옛, 장로님.”
이평 장로는 자신의 애제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진산아.”
“옛, 사부님!”
“일은 거의 끝난 듯하니 뒤처리를 네게 맡기겠다. 노부는 잠시 어디 들렀다가 돌아가마.”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평 장로가 제자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을 옆에 서 있던 지선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다니, 필시 뭔가를 알아챈 것이 분명하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지선은 재빨리 자신의 사매에게 같은 지시를 내린 후 어디론가 달려가는 이평 장로의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
복면인에게 너무나도 가볍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평 장로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최대 속도로 경공을 전개하자 얼마 지나지도 않 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연공공이 몸을 추스르고 있는 병영이었다.
경비를 맡고 있던 군관은 이평 장로와 지선을 웬 환관에게로 안내했다. 이평 장로는 그를 처음 만났지만 지선은 연공공의 거처를 드나들던 도중에 그를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환관이 지선을 알아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아, 지선 스님이셨군요. 그래, 무슨 일로 우상시 공공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지선 대신 이평 장로가 그 말에 대답했다.
“공공께서 이번에 노부와 지선 스님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셨는데, 그 일로 상의드릴 게 있다고 전하시면 아실 겁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다음에 찾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공공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환관은 급한 일이 있다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평 장로는 이미 연공공이 자신들을 왜 만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눈치 채고 있었다. 상승의 고수인 그는 연공공이 있음직한 막사 안쪽에서 누군가가 운기조식을 하고 있음을 기의 움직임을 통해 파악했던 것이다. 그게 아마 연공공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연공공이 내공의 고 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이평 장로에게 있어서는 작금의 사실은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상당히 강력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연공공은 주위의 이목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해 운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평 장로는 슬쩍 뒤에 서 있는 지선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그녀의 안색은 평온했다.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이평 장로는 다시 환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노부를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예서 기다리겠소.”
“그래도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건 좀…….”
“화급을 요하는 일이오. 나중에 공공께서 기침하신 후 귀하가 나를 돌려보내신 걸 아신다면 크게 역정 내실지도 모르오. 그래도 노부보고 그냥 가라고 하겠소?” 환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환관이 물러간 후 이평 장로는 지선에게 전음을 날렸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르는 척할 필요 없네. 그래,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연공공이 무공을 익혔다는 걸 말일세.>
<소승도 그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
그렇게 말하면서 이평 장로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마치 침입자라도 있는지 경계하듯 말이다. 그걸 보며 지선은 왜 이평 장로가 굳이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환관 에게 고집을 부렸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이평 장로는 지금 누군가가 몰래 침투해 연공공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의 호법이라도 되는 듯이. 두 사람은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연공공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시구려, 이 장로.”
연공공은 이평 장로의 뒤에 서 있는 지선에게도 아는 척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연공공의 대응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지선 스님이었다. 딱히 하대를 하는 것 은 아니었지만 뭔가 묘하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묘한 말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어이쿠, 지선 스님께서도 오셨구려. 거기서 그냥 기다릴 게 아니라 통보라도 해 주지 그러셨소? 그래,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소?”
이평 장로는 거두절미하고 찾아온 용건부터 말했다.
“공공께서 지목하신 그 괴한의 정체를 알고 싶습니다.”
“괴한들을 잡으셨소?”
“잡지 못했기에 묻는 말입니다.”
연공공은 이평 장로의 대답에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공동파에 아미파, 거기에다가 황군을 5천씩이나 지원해주라 일렀거늘, 어찌 그놈들을 놓칠 수가 있단 말이오?”
“공공의 말씀대로 그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한꺼번에 공격을 가한다면 잡아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많은 수가 일제히 움직이도록 놈들이 수수방관하고 있 을 리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말씀하신 적도들 중 한 명의 무공은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수십에 달하는 본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제 목 까지 날아갈 뻔했으니까요.”
“……”
“도대체 그자가 누굽니까? 그런 자가 무명일 리 없으니 빨리 정체를 알려 주시지요. 그자에게서 본문의 핏값을 받아 내야겠습니다.”
그렇게 채근을 하는데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평 장로의 눈동자에는 연공공에 대한 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말로는 놈들을 잡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놈들을 없앨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더군다나 서찰에는 분명히 적도들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자신이 본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알려 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연공공은 잠시 고심했다. 이걸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숨겨야 하나.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다. 놈이 벌써 공동파 제자 수십 명을 도륙했을 뿐만 아니 라, 이평 장로의 목숨까지 뺐을 뻔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자라면 무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고수임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일 테고……. 그렇게 추론해 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을 마교 교주가 벌였음을 눈치 챌 게 분명했다.
결국 다 눈치 챌 게 분명한데 괜히 그 사실을 숨겼다가는 나중에 자신의 의도를 의심받게 될 수도 있다. 아니, 의심받을 게 분명했다. 마음을 정한 연공공은 헛기침 을 몇 번 내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꼭 본관이 알려 줄 필요가 있겠소?”
그러면서 연공공은 지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선 스님에게 물어보시오. 그날, 그놈을 본관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온 당사자였으니 말이오.”
순간 이평 장로의 목이 획 돌아갔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지선을 쏘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대놓고 까발릴 줄은 몰랐기에 지선의 안색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너무 당혹스러웠기에 지선은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네.”
계속된 이평 장로의 채근에 지선은 할 수 없이 그날 자신이 처했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연공공이 대단히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 다는 걸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미파가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공공의 무공을 믿었기 에 괴한을 연공공이 있는 서재 쪽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지선은 불제자로서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이 못내 괴로워 내심 계속해서 참회진언 (懺悔眞言)을 떠올려야 했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그자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은 소승의 실수였습니다. 소승으로 인해 크나큰 고초를 겪으신 공공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호오~, 지선 스님은 본관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음을 어떻게 알고 계셨소?”
나름대로 조심했는데 지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니 연공공으로서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 질문에 지선은 사부를 팔기로 했다. 이왕 시작한 거짓말이었기에 죄 책감을 느끼면서도 지선은 계속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황궁이 무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상시 공공과 같은 뛰어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지금껏 연공공은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음지에서만 무공과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무림의 명문이라는 9파1방의 장로급 고수가 말이다. 연공공으로서는 매우 기분 좋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자신이 그 개고생을 하게 만든 지선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 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옅어졌다.
“정진사태께서는 실로 대단한 안목을 지니신 분이구려.”
얘기가 자꾸 옆으로 새 나가는 듯하자 이평 장로는 연공공을 향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선 스님은 알지 못한다고 하니 공공께서 알고 계신 거라도 제발 알려 주시길 청합니다.”
“흠, 괴한의 정체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던 건 아니오. 본관도 그자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러면서 연공공은 이평 장로와 지선의 눈치를 힐끗 살핀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본관이 납치되었을 때 그자들끼리 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소. 적도들 중 거지인 듯 보이는 자가 놈을 보고 ‘교주’라고 부르더이다. 무림에 마교라는 단체가 있 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곳의 수괴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연공공의 입에서 마교의 교주라는 말이 나오자 이평 장로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공공.”
“본관도 그게 정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적도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거요. 그자들이 본관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호칭을 입에 올린 것일 수도 있지 않겠 소? 이미 황병들을 보내 본관이 잡혀 있던 곳을 치라고 일렀소. 놈들을 잡아들여 족쳐 보면, 진짜로 놈의 정체가 마교 교주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요. 본관은 적도들의 정체를 숨기고자 한 게 아니라, 확실치 않은 정보를 주어 두 분이 일을 추진하는 데 혼란을 야기할까 두려워 밝히지 않은 것뿐, 다른 뜻은 없었소.”
“그, 그러셨습니까?”
연공공의 말은 충분히 그럴듯했기에 이평 장로는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그때 조용히 서 있던 지선이 문득 입을 열었다.
“마교 교주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일까요?”
이평 장로는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대꾸했다.
“어쩌면 교주가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아직까지 놈의 정체를 속단하는 것은 금물일세.”
“하지만 교주의 악행은 아미산에까지 들려오더군요. 소승의 생각으로는 그런 인물과 손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아마도 그녀는 무림에 퍼져 있는 묵향에 대한 소문만으로 이런 판단을 하는 모양이다. 소문이 진짜라면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두는 이런 못된 짓을 수천 번은 하 고도 남았을 악당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평 장로의 생각은 달랐다.
“소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맹에서 그런 것도 감안하지 않고 그와 손을 잡았겠는가? 그리고 마교는 오랑캐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공을 세움 으로써 맹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줬다네.”
“그렇다면 장로님께서는 범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무공이 매우 강한 자들 중 교주라고 불리는 자가 현 마교 교주인 암흑마제 말고 둘이 더 있지. 그건 바로 혈교의 교주와 마교의 전대교주인 흑살마왕일세. 노부는 암흑마제보다는 흑살마왕 쪽에 더 큰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네만…….”
그 말에 연공공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장로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틀릴 수도 있소. 본관이 고문을 당하면서 느낀 건데…, 그자가 악비 대장군을 찾는 이유는 구출하기 위함이었지 찾아내서 죽 이고자 함은 아닌 듯했소. 물론 그 자체가 연극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본관은 그자의 언행에서 그렇게 느꼈다는 말이오.”
그 말에 지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양양성에서 악비 대장군을 경호해 이곳에 온 무리들 중에 마교도들이 있었습니다.”
“마교도들이 말인가?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나?”
“악비 대장군을 찾겠다며 황궁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10여 명의 마교도들을 며칠간 구금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확한 신분을 알 수 없었기에 이곳 개방 분타주께 의뢰하여 양양성에 기별을 넣어 달라고 했었지요. 교주가 양양성에 있다고 들었으니 그가 그걸 듣고 황성으로 달려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그 말에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확신한 연공공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선 스님의 말이 사실인지는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연공공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두 사람도 입을 다물고 이 일로 인해 자파가 어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지더 니 중무장한 장수 한 명이 당당한 걸음으로 갑주를 철그렁거리며 들어왔다. 화려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높은 직위를 지닌 무장인 듯싶었다. 그는 절 도 있는 동작으로 연공공에게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우상시 공공, 반도들의 저항이 거세기는 했지만 공공께서 지시하신 대로 저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했습니다.”
장수의 보고에 연공공은 미소 지으며 치하했다.
“동중랑장(東中郞將)에게 크게 신세를 지는구려.”
“수고랄 게 뭐 있겠습니까? 소장으로서는 그저 공공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래, 남경 분타주는 사로잡았는가?”
“예, 공공. 하지만 워낙 상처가 심해 당장 심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공공은 개방의 남경 분타주를 사로잡았다는 보고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죽지 않기만 하면 된다. 감히 자신을 향해 얼른 죽여야 한다고 이죽거리던 그 거 지 놈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는 연공공이었다. 탈출하던 중 정상적인 몸이 아닌 상태에서 손을 썼지만, 상대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는 누구보다도 연공 공이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상처로 인해 탈출하지도 못하고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자의 무공수위로 봤을 때 결코 황군에게 사로잡힐 만큼 녹 록한 인물은 아니었다.
“뭐, 심문이야 천천히 해도 되겠지. 그 외에 다른 놈들은 얼마나 붙잡았는가?”
“모두 125명을 잡았습니다. 가급적이면 지시대로 생포하려고 노력했사오나, 저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고로 어쩔 수 없이 태반은 사살(殺)하지 않을 수 없었습 니다.”
황군의 주력 병기는 신비궁이라고 불리는 휴대용 쇠뇌였다. 장전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효 사거리가 무려 2백 보나 되는 강력한 무기다. 앞쪽에서 칼과 창 등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개방도들을 상대하는 동안, 뒤쪽에 있는 사수(射手)들이 신비궁을 이용하여 저항하는 개방도들을 사살해 버렸던 것이다.
화살이 갑옷을 꿰뚫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그 활의 유효 사거리로 잡는다. 갑옷까지 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내포한 화살인 만큼, 개방도들의 무술실력 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신비궁의 밥이 되기 딱 알맞았던 것이다.
“그 정도 잡아들였으면 충분한 것 같구먼. 내 동중랑장의 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공이라니요, 다만 명대로 행했을 따름입니다.”
“안 그래도 신세를 진 김에 한 번 더 손을 빌려 줄 수 있겠는가?”
연공공은 황실의 실세였다. 그런 그에게 빚을 만들어 둔다는 것은 자신의 출세에 든든한 토대가 되어 줄 것이 분명했기에, 동중랑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하명만 하십시오.”
“그 거지 떼들과 모의하여 본관을 납치, 고문했던 자의 정체를 대충 파악해 냈다네. 아마 그자는 무림인으로서 마교라는 단체의 수장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 데……. 방금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마교 쪽에서 악비 대장군의 호위로 일부 무사들을 보낸 모양일세. 만약 이번 사단을 일으킨 자가 마교 교주라면, 그자는 지금 자신의 부하들 틈 속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재빨리 말귀를 알아들은 동중랑장은 호탕하게 말했다.
“대장군을 수행하여 성도에 들어온 자들을 모두 다 체포한 뒤 철저히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상시 공공.”
연공공의 예상대로 묵향은 임충 일행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에 도착해 있었다. 사건을 일으킨 후 부하들 틈에 슬쩍 숨어들어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함께 양양성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대장군은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임충의 물음에 묵향은 썩 좋지 못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모두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해라. 지금 즉시 양양성으로 돌아간다.”
“예? 그렇다면 악비 대장군은…….”
묵향은 내뱉듯 중얼거렸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묵향의 표정으로 봤을 때, 악비 대장군의 죽음 뒤에는 뭔가 치졸하기 그지없는 음모가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임충은 감히 그걸 묵향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 다. 그리고 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그는 즉각 밖으로 달려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짐을 챙겨라. 양양성으로 회군한다.”
부하들에게 명령한 임충은 악비 대장군의 호위대에도 전령을 보냈다. 자신들은 지금 바로 양양성으로 회군할 건데 그쪽은 어떻게 할 거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임 충은 어떻게 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악비 대장군께서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