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15화 – 설민의 계책 (24권 끝)

설민의 계책

곤륜파가 도착한 지 3일 후, 조령과 쟈타르가 양양성에 도착했다.

조령은 여전히 철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를 보호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쟈타르의 모습은 과거 강건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이 솟구치게 했다. 조령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하지만 않았다면 저 정도 중상을 당했을 리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묵향은 먼발치에서 마교 무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조령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소연이는 잡혀갔는데, 어떻게 저런 형편없는 계집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

노골적으로 조령을 폄하하는 묵향의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를 꼭 생포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소 소저를 비롯해서 설 소저, 그리고 서 공자 정도예요. 나머지는 필요 없었다는 말이죠.”

과연 생각해 보니 마화의 말이 그럴듯했다. 자신이 만약 이번 납치 계획을 짰다고 해도 휘하의 모든 고수들에게 그 셋만을 노리라고 명령했을 테니까.

“어쩌면 일부러 저들을 놔준 것일 수도 있어요. 자신들이 소 소저 일행들을 납치해 갔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죠.”

“빌어먹을! 꼴 보기 싫으니 저 계집애보고 이쪽에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해.”

묵향은 그렇게 명령했지만 마화는 차마 조령이 장원에 출입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설취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해 이런 사태가 벌어졌기에 죄책감이 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며 묵향이 집무실로 들어간 후, 마화는 조령에게로 걸어갔다. 조령은 흑풍대원들에게 소연의 행방을 찾았는지, 찾았다면 구출 계획은 있는지 등에 대해 열심히 묻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마화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자 황급히 아는 척을 했다.

“어머, 언니. 안녕하셨어요?”

우울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보고 살갑게 인사하는 조령을 마화는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저기에서 정보들을 모으고 있으니, 조만간에 그들을 구출해 낼 수 있을 거야.”

“하, 하지만 제가 설 언니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던 게 너무나도 한스러워요.”

“그리로 갔다가 납치된 게 네 탓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조령은 일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조령의 모습에 마화는 다시 밝게 웃어 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답답하면 언제든지 놀러 와.”

“예, 언니.”

* * *

묵향이 집무실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관지가 들어왔다.

“군사가 전서를 보내왔습니다.”

“설민이? 줘 봐.”

묵향에게 건넨 보고서는 암호로 기록되어 있던 전서를 해독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직접 해독한 관지는 보고서의 내용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다 읽은 묵향은 심각한 표정으로 관지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장인걸을 밖으로 꾀어내야 한다는 것에는 속하도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본진에다가 어떤 함정들을 파 놨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그걸 놈도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작년 가을에도 놈은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휘하의 장졸들만 움직였어.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 협적이었지.”

“본교가 지닌 최대의 강점은 소수 정예라는 것입니다. 소수 정예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을 단숨에 파고들어 짧은 시간 안에 끝장을 내

버려야 한다는 거죠.”

맞는 말이었기에 묵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워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쪽에 유리한 전장으로 놈을 끌어들여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군사의 계책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고리타분한 무림맹의 대가리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지가 가장 큰 관건이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겠죠. 시간은 많습니다. 총타에서 고수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묵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옥화무제에게 연락을 보내. 본좌가 만나자고 말이야.”

“예? 왜 갑자기 옥화무제를 만나시려고……?”

“현재로서는 우리의 제안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 물론 적당한 대가를 제공해야 움직이겠지만.”

그러자 관지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반론을 꺼냈다.

“옥화무제 여협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게 좋을지 속하로서는…….”

“왜?”

“지금은 그쪽에서 우리 쪽에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만, 교주님의 약점을 파악하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옥화무제는 뱀같은 여인입니다. 교활하기 그지없는 뱀을 너무 가까이 두시면 교주님께 자칫 독니를 들이댈까 걱정이 되는지라..

그 말에 묵향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뱀이라.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잠시 후, 웃음을 멈춘 묵향은 관지에게 명령했다.

“괜찮아, 대충 얼버무리며 설명할 거니까. 만남을 주선하도록 해.”

“존명”

“그리고 철영이 입수한 그거 있지? 두어 개만 줘 봐.”

묵향의 말에 관지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그것까지 주실 생각이십니까?”

묵향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어때. 우리 쪽에서는 모방해서 만들 수도 없다며? 이런 때는 인심을 팍팍 쓰는 게 좋은 거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게 되면 본좌가 말하지 않아도 알 아서 움직일 테니 말이야.”

듣고 보니 충분히 말이 됐다. 관지는 묵향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오랜만이야.”

괜히 친한 척하는 묵향에게 옥화무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찾은 거죠?”

“아아, 그렇게 딱딱하게 얘기하지 말라고. 자, 우선 자리에 앉지?”

옥화무제가 자리에 앉자, 묵향은 점소이에게 명령했다.

“아까 시킨 음식 가져와.”

“예, 대인!”

말 한마디에 점소이가 굽신거리는 걸 보면 아주 비싼 음식을 시킨 모양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용문객잔이 자랑하는 가장 호화로운 음식들이 줄을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옥화무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별일이군요. 생전 안 하던 행동까지 하는 걸 보면 이번 부탁은 꽤나 어려운 일인 모양이죠?”

“눈치가 너무 빨라도 피곤하군. 그냥 자연스럽게 즐기면 안 되나?”

“미안하군요. 영문도 모르는 음식을 먹었다가는 배탈이 날 것 같아서 말이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음식부터 들지?”

“무슨 일이죠?”

계속되는 묵향의 권유에도 옥화무제는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자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봉서 하나를 꺼냈다.

“어쩔 수 없군. 이게 내 생각이야.”

묵향이 건넨 봉서를 옥화무제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서신에서 그녀가 눈을 떼는 순간,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서신은 한순간 불에 타올라 재가 되어 흩어졌다. 옥화무제가 삼매진화로 서신을 불태워 버린 것 이다.

옥화무제는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단단히 미쳤군요. 이딴 계책을 맹주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나요?”

말도 안 된다는 옥화무제의 반응에도 묵향은 태연했다. 그는 음식을 접시에 덜어서 먹으며 말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어요. 그런데 뭐 하려고 맹주가 그런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려 하겠어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교는 이번 전쟁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으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옥화무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흡!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두고 보면 알 거야. 본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허튼소리는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묵향의 말투에 옥화무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어떻게 협박하더라도 맹주가 이 계책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드러났다가는 맹주직에서 쫓겨날 가능성마저 있 으니까요.”

“실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내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 생각을 해 보라구. 이번에 본좌가 연경을 친 것은 알고 있겠지?”

옥화무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연경의 절반을 불사르고, 황제까지 참살하는 쾌거를 이뤘는데 그걸 모를 리 없죠. 그리고 남양으로의 양동 작전은 아주 훌륭했어요. 장인걸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쯧, 천하의 무영문도 별수 없구먼. 겉으로 드러난 것만 알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이죽거리는 묵향의 말투에 옥화무제의 미간에 내천자(川)자 새겨졌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무영문을 씹어 대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꾸를 하는 옥화무제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내가 모르는 뒷얘기라도 있다는 거예요?”

“이번 작전에서 본교는 막심한 타격을 입었어. 거의 1개 전투단에 준하는 전력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지. 이런 피해를 한 번만 더 당한다면 아무리 본교라고 해도 밑천이 거덜날지도 몰라.”

옥화무제는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묵향이 말한 1개 전투단이, 특1급 고수들로 구성된 1종대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기 때문이다.

“놈은 우리가 쳐들어갈 만한 예상 지점 곳곳에 함정을 설치 해 놨더군. 이번 작전을 통해 그게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아냈다는 게 큰 성과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역 으로 그걸 뻔히 알면서 놈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수 없다는 점도 절실하게 깨닫게 됐지. 그 사실을 알기 위해 내 목숨을 대가로 치를 뻔했으니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옥화무제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특1급 고수로 구성된 1종대와 묵향이 직접 움직이는 마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군.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걸 꺼내야겠군.”

묵향은 품속에서 어린애 머리통만 한 시커먼 쇠구슬을 두 개 꺼냈다.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놈들이 이번에 사용한 신무기들 중 하나야. 이 위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두꺼운 실에다가 불을 붙이면…….”

무영문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웬만한 암기에 대한 정보는 다 안다고 자부하는 옥화무제였다. 하지만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암기가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쾅! 하고 터지면서 수백 개나 되는 철질려가 사방으로 튀어나가지. 놈들은 이걸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개 이상 보유하고 있을지도 몰라.”

“도저히 믿기 힘들군요.”

“못 믿겠으면 나중에 터뜨려 봐. 그것 때문에 전력의 태반이 한순간에 날아갔으니까.”

그 말에 옥화무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묵향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난 암기였던 것이다.

“소중한 정보 정말 고마워요.”

“그 외에 양쪽에 날이 붙어 있는 창도 조심해야 할걸? 그거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니까. 웬만한 놈은 그걸 다 가지고 있기에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워.”

어지간한 무기라면 묵향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랬기에 옥화무제는 귀를 쫑긋 세우며 다급히 물었다.

“그건 노획한 게 없었나요?”

“바라는 게 너무 많군. 이것도 어렵게 입수한 거야.”

“어쨌거나 고마워요. 당신의 제안은 이걸 한번 터뜨려 본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죠. 그러니까 장인걸이 워낙 강력한 함정들을 파 놨기에 안으로 들어가서 는 승산이 없으니, 밖으로 끌어내자는 거 아니에요?”

“이제야 내 생각의 핵심을 이해하는군.”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무림맹이 얻게 되는 건 뭐죠?”

“이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뭐 그런 거야. 자, 보라구.”

묵향은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탁자 위에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옥화무제는 그런 묵향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 다.

사실 워낙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녀였기에 묵향이 이런 설명을 하기도 전에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던 것이다.

“당신이 나한테 계책을 설명할 일이 다 있다니. 이렇게 세속에 물드는 것보다 단순 무식했던 예전의 당신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봐,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짜증어린 묵향의 물음에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당신, 보기보다 설명을 잘하는군요.”

의외의 칭찬에 묵향은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의 내심과는 전혀 다른 퉁명스러움이었다.

“젠장,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잘 들어. 한 번만 설명해 줄 거니까.”

하지만 옥화무제는 묵향의 설명을 듣지 않고, 핏대를 세워 가며 설명을 하고 있는 묵향의 열기 어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구경하듯.

“이렇게 보면, 제법 귀여운 구석이 남아 있단 말이야…….’

설명을 끝마친 묵향이 옥화무제의 조언을 구했다.

“어때?”

“그렇게 나쁜 계책은 아니네요.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어요.”

“말해 봐. 중원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의 조언이니 세이경청(洗耳傾聽)해야겠지?”

묵향의 칭찬에 옥화무제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치켜세워봐야 달라질 건 없어요. 자, 들어 봐요. 첫째, 맹주가 이 제안에 찬성할 리 없어요. 만약 이게 밖으로 밝혀지기만 한다면 파멸이니까요.”

“둘째, 장인걸을 완벽하게 속여야만 하는데, 이런 엉터리 함정에 걸려들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영악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제안하는 거잖아. 맹주는 그쪽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맡아 줘. 그러면 장인걸은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옥화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만약 이대로 진행한다면 마교 쪽의 피해가 엄청날 텐데, 그걸 알고나 있는 거예요?”

묵향은 술 한 잔을 입속에 털어 넣은 다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도대체가 알 수가 없군요. 이렇게까지 해서 당신이 뭘 얻겠다는 건지…….”

잠시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던 옥화무제는 갑자기 묵향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얻게 될 걸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정확히 말해 줘요. 그래야 내가 맹주를 설득하기도 쉬우니까요. 나도 납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맹주를 납득시킬 수 있겠 “어요?”

“장인걸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한이라고 한다면 불충분한가?”

옥화무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많이 부족해요. 원한은 훨씬 이전에 발생했으니, 이제 와서 당신이 광분하고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죠.”

대답을 하지 않고 한동안 묵향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 그쪽에도 의뢰가 들어갔으니 모를 리는 없겠지. 석량 형님 말이야.”

“석량?”

옥화무제가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며, 묵향은 급히 말을 이었다.

“참, 만통음제라고 하는 게 알아듣기 편하겠군.”

“만통음제가 왜요?”

“그의 실종에 장인걸이 개입되어 있어. 그리고 놈들은 그걸 시인했고…….?”

순간 옥화무제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설마, 만통음제를 구출하기 위해 이런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잠시 머뭇거리던 묵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 천지문도 몇 명과 제령문의 후계자인 서량, 그리고 만통음제 형님의 제자인 설취가 납치됐어. 장인걸 그놈에게…….”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물어물 말했지만, 옥화무제는 그 중에서 ‘천지문’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천지문도 몇 명이라고요? 그렇다면 혹시…, 소 낭자 때문인가요?”

그 물음이 묵향에게 준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다. 그 순간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니 말이다. 지금껏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주 지 않았었던 묵향의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며, 옥화무제는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묵향은 급히 표정을 추스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당최 영문을 모르겠군.”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짐짓 무표정을 가장하며 술잔을 들이키고 있는 묵향을 향해,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 지으며 어기전성을 보냈다.

《당신 딸을 말하는 거예요.》

“풋!”

너무 놀라 입속에 있던 술까지 뿜어 낸 묵향은 옥화무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걸 언제 알았지?”

“언젠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당신과 영인이의 정략결혼을 계획할 때쯤이었던 것 같네요. 워낙 오래전 일이니까…….”

“무영문의 정보력은 정말 놀랍군.”

“과찬이에요.”

그렇게 대답한 옥화무제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덧붙였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본문에서 새나 간 게 절대로 아니에요. 그런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래요.”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옥화무제의 어조 깊은 곳에는 그녀가 납치된 데 대해서 자신들에게까지 혐의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이 섞여 있었다. 하 지만 그녀의 우려와 달리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건 알고 있어. 장인걸이 소연이를 납치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니까.”

“두 번째라구요?”

“뭐, 옛날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그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

“양녀 때문이라는 게 좀 의외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됐어요.”

<묵향> 2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