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5권 1화 – 황제가 될 수 없는 3가지 이유
황제가 될 수 없는 3가지 이유
묵향에 의해 황도가 기습 공격당한 후유증은 예상외로 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팠던 것은 황제의 서거였다. 장인걸은 혼란에 빠진 정국을 추스르면서도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일이 차기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자신의 마음대로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주인 없는 밥상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숟가락을 걸쳐 놓으려는 노골적인 움직임 때문이었다.
현재 황위 계승권을 인정받고 있는 황자는 3명이다. 모두 다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 중 쓸만한 재목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장인걸은 두말 않고 그를 황제로 추대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들 욕심만 목구멍까지 찼을 뿐, 황제가 될 만한 소양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자신이 내심 점찍은 차기 황제감에게 비밀리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자들이라면 몰라도 그라면 미래를 함께 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지 니고 있었으니까.
늦은 밤에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온 장인걸의 행보에 완옌 우퀴마이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님을 맞이했다. 상대는 낮에 다시 찾아오라고 돌려보낼 만큼 만만한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안판 발극렬(譜版 勃極烈 : 제1부족장).”
“대원수께서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자, 이쪽으로…….”
장인걸을 자리로 안내한 우퀴마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 있는 호위병들에게 밖으로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이런 늦은 밤에 사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면 뭔가 비밀스러운 용건이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호위병들이 밖으로 모두 나가자 장인걸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우퀴마이가 차기 황제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뜻밖의 제의에 선황제였던 아구다의 동생, 우퀴마이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으르렁거렸다.
“대원수께서는 형님의 아들들이 있는데, 저에게 황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장인걸은 침중한 안색으로 답변했다.
“만약 황권이 안정되어 있고, 제국의 앞날이 반석 위에 놓인 것처럼 튼튼하다면 자네에게 이런 부탁은 하지도 않았을 걸세.”
“그 말씀은 인정하기 어렵군요. 물론 적들이 쳐들어와 황도를 불사르고, 형님을 시해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닙니까. 송나라 최 고의 장수라던 악비도 죽었고, 이제 적들의 최후 방어선만 돌파하면…..
우퀴마이의 반론에 장인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있다네. 아니, 자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신(大臣)들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면서 장인걸은 지금 적이 망하기 일보직전이 아니라는 걸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송나라 하나만 두고 생각한다면 별것도 아니지만, 무술에 능한 집단들 이 이 전쟁에 끼어들어 송나라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송을 돕는 무림인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대한 장인걸의 설명에 우퀴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론을 했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뭐,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장인걸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들고 힘을 가했다.
퍽!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벽옥으로 깎아 만든 찻잔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자, 보고 있던 우퀴마이의 얼굴은 경악감으로 가득 찼다. 힘이 쌘 사람이라면 손아귀 힘만으로도 찻잔을 깰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가루로 만든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가볍게 손을 쥔 것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장인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나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네. 하지만 이 손으로 장정 수백 명이라도 때려죽일 수 있지. 이게 바로 무공의 힘이라네.”
우퀴마이는 그럼에도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반론을 꺼냈다.
“압니다. 대장군께서 하늘도 놀라게 할 정도의 용력(勇力)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리 금나라에는 수십만의 정예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그 무림인이라는 자들이 우리의 병사들을 모두 쳐부술 만큼 강하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우퀴마이의 예상과는 달리, 장인걸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을지는 붙어 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나는 무림인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네. 자네 혹시 이번에 연경으로 습격해 들어온 자
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 있는가?”
“그, 그건 잘…….?”
그러고 보니 소문만 무성할 뿐 적들의 자세한 규모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몇만 명이 한꺼번에 기습 공격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건 혼란을 염려한 장인걸이 사전에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안판 발극렬인 우퀴마이조차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 황도로 쳐들어온 적의 수는 겨우 백여 명뿐이었다네.”
“헐!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황도에서 전사한 근위병의 숫자만 만 단위가 넘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금나라 내에서도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채 피신을 못 한 황제 까지 서거했다. 그런데 그런 참사를 저지른 적의 수가 겨우 백 명 남짓밖에 안 된다는 말에 우퀴마이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을 우리는 무림인이라고 부른다네. 그리고 이번에 황도에 쳐들어온 자들은 그런 무림인들 중 일부에 불과하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무림인 들이 지금 송 황실의 편을 들고 있는 게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장인걸은 묵향과 그 부하들이 무림에서도 정상급의 실력자들이라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퀴마이가 무림인들이 모두 이번에 습격해 들어온 자들과 비 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게 자신의 말을 풀어 가는 데 있어 수월했기 때문이다.
장인걸의 예상대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우퀴마이는 잠시 후, 힘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과연 우리가 승리할 수는 있는 겁니까?”
그러자 장인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가 전력으로 상대한다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지금처럼 황권이나 차지하겠다고 집안싸 움을 해서는 절대 승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것일세.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우퀴마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급작스런 제의를 받았으니 아무래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며 장인걸은 가만히 기다 렸다.
이윽고 고민을 끝냈는지 우퀴마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장인걸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릇이 모자라는 저에게 그런 청을 하실 게 아니라, 차라리 대원수께서 황위를 이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야속 형님께서 예전에 대장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전 례가 있으니, 다른 발극렬들도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일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이 군부의 힘을 휘어잡고 있는 장인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문제는 장인걸 이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황제와 같은 권력이 아닌 무(武)의 극(極)이었고, 묵향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무림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우퀴마이를 상대로 그런 걸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자네의 말은 고맙지만, 3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제국의 황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네. 첫째, 내가 완옌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지만, 내 몸속에는 성스러운 완옌의 피 가 단 한 방울도 흐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로는, 내가 황위를 차지할 마음을 먹기에는 선황제를 너무 좋아했었지. 그리고 그 이유는 아직도 유효하다 네. 나는 선황제 못지않게 자네도 좋아하거든.”
말을 듣던 우퀴마이의 얼굴에 희미하긴 하지만 감동의 물결이 흘러갔다. 자신을 그토록 높게 평가해 주고, 또 신뢰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는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부족의 미래에 대해 꿈을 나눴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저마다 워낙 바빴기에 한 자리에 앉아 차 한 잔 나누기도 힘들었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내가 황제 노릇까지 하면서 상대하기에는 적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세. 나는 선황제 때처럼 뒤를 걱정하지 않고 전쟁에만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란다네. 알겠는가? 황자들 중에는 그런 능력을 지닌 놈이 단 한 명도 없지만, 자네에게는 나의 바램을 이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저를 생각해 주시는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자들을 제쳐 두고 제가 황위를 잇는다는 것은…….”
장인걸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원통하게 죽은 선황제의 복수는 하지 않을 생각인가?”
복수라는 말에 우퀴마이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형을 잃은 슬픔만 생각했지 그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우퀴마 이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그러지,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네.”
며칠 뒤, 우퀴마이가 밀정을 보내 장인걸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 즉시 장인걸은 천마혈검대에 우퀴마이의 호위를 명령했다. 우퀴마이가 제위에 오를 것을 승낙한 이상, 언제 정적(政敵)들이 보낸 살수가 그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지금껏 생각해 낸 장인걸의 계획은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시간 여유가 없는 그에게 그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잠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리던 장인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경에 와 있는 다른 발극렬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6명의 대 족장. 즉, 발극렬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우퀴마이를 황위에 올리는 데 있어 가장 우선해서 처리해야만 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중립을 취하고 있던 발극렬 2명의 지지를 얻어 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장인걸이 지지한다는 말은 곧 제국의 군부가 지지하는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거기에 장인
걸은 선황제가 가장 신임했었던 인물. 황권에 대한 야망만 있었다면 이미 황제가 되어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장인걸이 지지하는 사람인 만큼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장인걸이 지지하는 우퀴마이는 제국 최대, 최강의 부족인 완옌부의 발극렬이 아니던가.
하지만 다른 3명의 발극렬들은 황실과 이권이 걸려 있었기에 상황이 앞의 둘과는 전혀 달랐다. 즉, 그들은 황자들의 장인들이었던 것이다. 훗날 3명의 황자들 중 누군가는 아구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게 뻔한 만큼, 권력욕이 강한 발극렬들은 저마다 황실과의 결혼을 추진했었다.
그렇게 권력욕이 강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장인걸에게 우퀴마이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참살당할 것 같다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범인들이 공포스런 마기를 흘리는 장인걸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5명의 발극렬들을 찾아다니며 우퀴마이를 지지하겠다는 확약을 받았지만 장인걸은 편복대를 시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강한 야망은 죽음의 공포조차 이겨 낼 수 있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마기(魔氣)에 짓눌려 대답을 하긴 했지만, 야망이 강한 발극렬들은 기회만 있으면 뒤통수를 치려고 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장인걸이 내심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발극렬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편복대주가 보고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
“국론홀로가 황성을 떠나셨습니다.”
“뭐야! 언제?”
“교주님과 독대를 하고난 다음 날 새벽이옵니다.”
“쯧, 멍청한 놈.”
결국 자신의 사위에게 황위를 주기 위해 장인걸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위가 황제만 될 수 있다면, 그는 일인지하(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의 자리를 꿰찰 수 있을 테니까.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사위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말을 듣던 장인걸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고수들을 보내 놈을 없애 버려!”
단호한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되옵니다, 교주님.”
“뭐가 안 된단 말이냐?”
“그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의 일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옵니다. 그렇다면 셋째 황자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다고 지금 셋째 황자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침음성만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흐음…….?”
“아무리 작은 규모라 해도 내전을 벌인다는 건 국력 낭비이옵니다. 일단 분쟁이 시작되면 서로 간에 없었던 원한도 생길 테고, 그렇다면 화합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옵니다. 또, 내전이 시작되면 다른 두 발극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사옵니까.”
장인걸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 마교에서도 그 웬수같은 놈과 내전을 벌이다가 몽땅 다 말아먹었던 전례가 있었지 않은가. 치솟는 화를 억지로 억누른 장인걸은 편복대주를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국론홀로에게 사람을 보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황도로 돌아오라고 전해라. 본좌와 겨뤄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일 테니까.”
“존명!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몽고쪽 정세는 어떤가?”
최근 황위 계승 문제로 골머리가 아팠던 장인걸이었다. 더 이상 그놈의 황위 계승 따위의 대화는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기분 전환삼아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장인걸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수하들의 추측으로는 아마 날이 풀리기만 하면 서남부 최대의 부족장인 옹칸과 테무진이라는 신흥 부족장이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뭔가?”
“작년 가을에 그 둘이 연합하여 타타르라는 대부족을 멸망시켰사옵니다. 이제 몽고 초원에는 그 두 세력을 당할 자가 없게 되었으니, 누가 몽고의 맹주가 될 것인 지 결판을 내야 할 게 아니겠사옵니까.”
“흠, 맹호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중얼거리던 장인걸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쪽 국경을 건드리고 있는 게 테무진이라는 놈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교주님.”
편복대주의 대답에 장인걸은 환히 웃으며 무릎을 쳤다.
“잘됐군! 그렇다면 북방의 병력을 좀 빼도 상관없겠어. 놈은 지금 옹칸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말이야.”
“그건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서 편복대주는 현재 몽고가 금나라 국경을 침입해 들어오는 건 단순한 약탈을 위한 것이지, 대대적인 침입이 아님을 강조했다. 척박한 몽고의 대지에서 혹 독한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부족한 식량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약탈이었다.
“식량 보충을 위해 놈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계절은 봄이옵니다. 일 년 중 가장 식량이 모자라는 계절이니까요. 그런 만큼 지금 국경에서 병력을 빼낸다는 건 수비를 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곤란하옵니다.”
편복대주의 설명에 장인걸은 분노 어린 어조로 외쳤다.
“대대적인 침입도 아니고, 몇 십, 몇 백 기 정도가 기습해 들어온다고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니……. 참으로 무능한 놈들 같으니라구!”
장인걸의 분노에 편복대주는 잽싸게 고개를 숙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면으로 붙는 것도 아니고 틈만 나면 이곳저곳에서 쑤시고 들어오기 때문에, 장대한 국경선 전체를 철통같이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몽고와의 국경 일대는 지금 완전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니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동력이 좋은 몽고 도적 떼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와 분탕질을 일삼고 있었기에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편복대주의 보고를 듣던 장인걸의 가슴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판에, 하찮은 몽고놈들까지 딴죽을 걸고 있다니…….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답답해서 해 본 말에 편복대주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 장인걸은 오히려 의외라는 듯 급히 되물었다.
““방법이 있다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었느냐!”
장인걸의 질책에 편복대주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것이라서…….”
“당장 말해 보거라! 네 계책을 쓸지 안 쓸지는 본좌의 몫이니.”
“선황제께서 몽고에 파견한 사신 일행이 며칠 전 황성에 도착했사옵니다.”
“몽고에 사신을 보냈었다고? 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편복대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황제께서는 남쪽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북쪽의 안정을 도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대족장 테무진과 동맹을 맺는 거라고 생각 하신 모양입니다.”
말을 듣던 장인걸은 고개를 주억거려 자신의 생각도 같음을 표시했다. 사실, 지금 몽고 국경에 배치된 병력의 수는 엄청난 것이다. 놈들과 동맹만 맺을 수 있다면 그 병사들 중 일부를 남쪽으로 빼돌릴 수 있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처는 송나라가 있는 남쪽이었다.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것은 양 보해도 상관이 없다. 나중에 다시 뺏어오면 그만이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장인걸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기대가 섞인 어조로 물었다.
“선황제는 여진족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지. 그래, 놈의 대답은?”
“저…, 그게…….”
편복대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장인걸은 약간 표정을 굳히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촌놈이 원하는 게 뭐라던가? 가감없이 정확히 말해 보라!”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으시옵소서.”
편복대주가 서두를 이렇게 꺼냈을 정도로 테무진이 요구한 건 엄청난 것이었다. 그중 가장 말도 안되는 것 4가지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과거 송에서 요에 바쳤던 세폐와 동일한 액수의 세폐를 매년 보내 줄 것.
둘째, 매년 20만관(750톤)의 철을 보내 줄 것.
셋째, 도검(刀劍)을 제작할 수 있는 우수한 장인 천 명을 보내 줄 것.
넷째, 황녀를 시집보내 올 것.
과거 송에서 요에 바쳤던 세폐는 정말이지 엄청난 액수였다. 변방 오랑캐 주제에 이렇게 막대한 양을 매년 달라고 하면, 이쪽에서 얌전히 줄 거라고 기대를 했다는 말인가? 편복대주의 보고를 채 다 듣기도 전에 장인걸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정말이지 놈의 대가리를 잘라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열어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장인걸은 앉아 있던 의자 팔걸이를 거칠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 이 망할 놈을 당장!”
“고정하시옵소서, 교주님.”
“구태여 그런 놈과 동맹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당장 옹칸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해!”
의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옹칸에게 말이옵니까?”
“그래, 옹칸을 밀어준다면 테무진을 박살 내 버릴 게 아니냐? 아니, 박살 내지 못해도 상관은 없지. 송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발목을 잡아 주면 되니까. 그렇게 되면 테무진이 자연 이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지 않겠나?”
장인걸의 말에 편복대주는 조심스럽게 반론을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지만, 그 방법으로는 본국이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사옵니다. 옹칸에게 지원 물자를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테무진의 영토를 거쳐야 만 하옵니다. 마차 한두 대 분량도 아닌, 대규모의 지원 물자를 테무진이 가만히 놔둘 리 없지 않사옵니까? 설혹, 운 좋게 옹칸을 지원하는데 성공하여 테무진이 밀 린다고 하더라도 약탈 행위는 중지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이 국경으로 밀려들어 약탈 행위를 해 댈 게 뻔하니 말이옵니다.”
금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그 기반이 약했다. 그런 상황에서 약탈 행위를 방치하여 민심이 흉흉해진다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 다.
하지만 편복대주나 장인걸이 걱정하는 것은 민심 따위가 아니었다. 국경의 방어선이 헐거워지면, 지금은 자신들보다 대국이기에 금을 건드리지 않고 있던 수많은 몽고 부족들이 대놓고 침공해 올 우려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송과의 전쟁에 전념을 다하고 있는 장인걸로서는 더 이상의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여력이 없었으니까.
“젠장!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이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장인걸의 입에 갑자기 음흉스런 미소가 걸렸다.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 생각해 보니 그리 대단한 요구 사항도 아니었구먼. 놈에게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답신을 보내도록 해라.”
장인걸의 갑작스런 명령에 편복대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옵니다.”
장인걸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또 뭐가 있느냐. 재물이야 나중에 차차 보내 준다고 하면서 시간을 끌면 그만이요, 어디서 반반한 계집 하나 구해다 황녀라고 해서 보내 버리 면 되는 게 아닌가. 그 야만족놈들이 황녀의 얼굴을 알고 있을 턱이 없으니까 말이다. 오호, 그래! 아예 101조 아이를 하나 보내서, 그 촌놈의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리는 것도 좋겠군.”
101조라는 말이 떨어지자 편복대주는 내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1조는 편복대 소속이면서도 그녀들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장인걸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장인걸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첩보조다.
그녀들은 미모도 뛰어났지만, 고관대작들의 관심을 끌만한 지성과 교양을 익힐 수 있도록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키운 조직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한낱 변방 부 족장 따위의 성노리개로 헌납한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치마만 둘러도 환장을 하고 달려들 야만스런 놈들한테 말이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이 분노한 나머지 너무 급하게 결정을 내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인계를 쓰는 것은 좋습니다만, 황녀를 보내야 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아주 민감한 사안이옵니다. 황녀가 진짜냐 가짜냐를 떠나서, 황녀를 몽고의 부족장에게로 시집보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국으로서는 크나큰 치욕이 될 테니 말이옵니다. 그 대신 테무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되겠지요. 그런 정치적 기류를 뻔히 알고 있을 대신들이 이러한 협상을 절대로 용납할 리 없사옵니다.”
“흥, 제까짓 것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장인걸의 모습에 편복대주는 내심 한숨을 쉬면서도 급하게 입을 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국과의 동맹은 황제의 윤허가 있어야만 가능하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계속해서 편복대주가 반론을 펼치자, 장인걸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퀴마이에게 말해서 허락을 받으면 될 거 아닌가!”
“정식으로 즉위식을 치루지 않은 그는, 아직 황제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더군다나 이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옵니다. 선황제께서 살아 계시다면 혹 모르 겠사오나, 아직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우퀴마이로서는 절대로 들끓는 대신들을 무마할 수 없사옵니다. 잘못되면 교주님께서 모든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장인걸은 손을 내저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아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게야. 이번에 묵향놈이 황도를 기습한 덕에 상당수의 대신들이 죽어 버렸지 않았나. 그 자리를 우리 쪽 사람들로 채워 넣 기만 해도 큰 힘이 되지 않겠나?”
“하지만 대신들을 임명하려면 신황제의 즉위식이 끝난 후에야 가능하옵니다.”
그러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못 참겠다는 듯 갑자기 장인걸이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나 생각해 봐!”
장인걸의 분노에 편복대주는 잽싸게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존명!”
보고를 마치고 편복대주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장인걸이 슬쩍 물었다.
“참, 우리들의 황녀는 잘 지내고 있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편복대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 황녀의 칭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 8명이나 됐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장인걸이 우리들의 황녀’라 고 부를 만한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예, 기대 이상으로 쏠쏠한 정보를 저희에게 보내 주시고 계시옵니다.”
“아구다가 아꼈던 아이다. 그 아이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도록.”
“존명!”
편복대주가 돌아간 후, 장인걸은 차를 마시며 음흉스런 미소를 지었다.
“흠, 놈이 원하는 게 황녀라면, 줘야지. 누구를 보낼까?”
편복대주는 101조 소속 첩자를 보내는 것에 회의적이었지만, 그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장인걸이 편복대주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가르친 아이들이 바로 101조였기 때문이다.
편복대에 소속된 여자 대원들 중 가장 뛰어난 자질과 미모를 지닌 아이들만 모아 놓은 게 101조였다. 게다가 장인걸이 신경 써서 가르쳤기에 무공도 비교적 우수 한 편이었다. 여기까지는 편복대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장인걸은 그녀들에게 마교의 가장 사악한 마공 중 하나인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을 비밀리에 전 수해 줬다.
장인걸이 그 사실을 자신의 심복인 편복대주에게까지 숨길 필요성을 느꼈을 정도로 그 무공은 너무나도 위험한 양날의 검이었다. 사람의 심지를 제압하여 마음대 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 장인걸의 뒤통수를 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공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특히 지금 장인걸은 황실이나 군부 등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자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지 않는가. 따라서 101조 조원들만 제대로 이용한다면 지금 장인걸이 차지하고 있는 기반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101 조 대원을 투입할 때는 자신의 허가를 받도록 해 놓은 것이고.
지금껏 수많은 배신을 경험하며 성장해 온 장인걸이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신이 상대에게 행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그는 그 누구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게 되 어 버렸다. 배신이라는 게 너무나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그 결과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인걸은 경호무사에게 명령했다.
“우퀴마이를 만나러 갈 것이다. 준비하도록!”
“존명!”
“어서 오십시오, 대원수.”
환대하는 우퀴마이 앞에 장인걸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신(臣) 장인걸, 대금제국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선제 폐하께 그러했듯, 폐하를 위해서도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분골쇄신(粉骨碎身)할 것을 맹세하겠사옵니 Ct.”
우퀴마이는 다급히 장인걸의 상체를 들어올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대원수. 저는 아직 제위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신이 결정한 이상,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신 거나 다름없사옵니다.”
그야말로 광오한 표현이었지만, 그의 표현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만큼 장인걸이 금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막대한 것이었으니까.
“다른 발극렬들은 만나 보셨습니까?”
“국론홀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하께서 황위를 이으시는 것에 대해 찬성했사옵니다. 마침 이달 보름이 길하다고 하니, 그날 즉위식을 올리시는 게 어떻겠사옵니 까?”
갑작스런 제안에 우퀴마이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급히 되물었다.
“너무 날짜가 급하지 않겠습니까?”
“송과의 전쟁을 하고 있는 이런 비상시국에 제국의 황위를 오랜 시간 비워 둘 수는 없는 일이오니, 대신들도 이해할 것이옵니다.”
이때, 시커먼 인영(人影) 하나가 날아와서 저택 지붕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저택 주변에는 천마혈검대원들이 물샐틈없는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인영 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장인걸의 귓속으로 가느다란 전음이 들려왔다.
<대주님의 전갈이옵니다.>
《무슨 일이냐?》
<일황자께서 그 추종세력들과 함께 황도를 탈출했다 하옵니다. 그런데 그 탈출 방향이 국론홀로와 완전히 다른 방향이라 하옵니다.>
“이런 빌어먹을!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별게 다 속을 썩이는군.’
장인걸은 내심 아차 싶었다. 국론홀로가 황도를 떠났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일황자가 이렇듯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수하들을 시 켜 국론홀로를 다시 돌아오게 한 후, 적당히 윽박질러 우퀴마이를 지지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정통 후계자인 일황자까지 그 대열에 동참했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장인걸 앞에서는 허허거리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국론홀로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황도에 남아 있어 봐야 장인걸의 뜻대로 흘러갈 게 뻔하니, 황 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지금 외에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장인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자, 우퀴마이는 괴이쩍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 내용 어디에도 장인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대원수.”
“아, 아니옵니다, 폐하.”
장인걸은 별거 아니라는 듯 둘러대면서도 지붕 위에 자리 잡은 인영에게 어기전성을 보냈다.
《누구를 보냈느냐?》
<사안이 사안인지라, 대주께서는 왕걸(王傑) 대장께 청하시어 급히 추격하도록 하셨사옵니다.>
편복대주가 곧바로 천마혈검대 제6대를 투입했다는 말에 장인걸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을 할 수는 없었다. 삼황자와도 연결되어 있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국론홀로인 만큼, 무슨 함정을 파 놨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황자가 황도를 떠난 시각은?》
<정확히는 알 수 없사오나, 2시진을 넘기지는 않았을 거라고 들었사옵니다.>
《다른 황자들과 발극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고 전하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야.》
<존명!>
이때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장인걸을 향해 우퀴마이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대원수의 안색이 어두운 걸 보니, 혹 국론홀로가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아아, 폐하께서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장인걸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몽고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우퀴마이를 찾아온 것이기도 했지만.
“참, 그러고 보니 몽고에 파견했던 사신이 돌아왔사온데, 그 보고는 들으셨사옵니까?”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장인걸은 테무진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듣던 우퀴마이는 터무니없는 테무진의 요구에 기분이 상했는지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보고 를 마치고 잠시 뜸을 들인 장인걸은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거부하기에는 현재 제국이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급박하옵니다. 차라리 적당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송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퀴마이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황녀를 보내라는 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가짜 황녀를 보내 미인계를 쓴다면, 놈을 자멸의 길로 밀어 넣을 수 있사옵니다. 소장이 이럴 때 써먹으려고 키워 둔 아이가 하나 있사온데……”
가짜라면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한 장인걸의 예상과는 달리 우퀴마이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원수, 아무리 가짜라고 하지만 대금제국 황녀를 몽고의 부족장 따위에게 시집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공개로 보낸다면…….”
“국가 간의 일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당장 테무진 쪽에서 온 사방에 소문을 퍼뜨릴 게 뻔한데 말입니다. 사향을 수십 겹으로 감싼다고 해도, 결국에는 향기가 새 나오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건 당연한 추측이었다. 나쁜 일도 아니고, 대제국의 황녀를 자신의 첩, 혹은 며느리로 받게 되었는데 그걸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 부족장들이 그 사실을 알면 자신의 입지는 더욱 높아질 게 분명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 그 소문을 퍼뜨려 댈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무역상들을 통해 다시금 금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쪽에서만 숨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우퀴마이의 단호한 거부에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장인걸은 더 이상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직 즉위식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사오니 다른 방도를 모색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침중한 장인걸의 표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우퀴마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꼭 몽고를 끌어들여야만 합니까?”
“북쪽 국경선에 발목이 잡혀 있는 병력만 30만에 달하옵니다. 몽고의 원병을 끌어들이는 건 고사하고, 주둔군의 일부만이라도 남쪽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장인걸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우퀴마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대원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나도 방법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던 장인걸은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일이 생길 때마다 정치적 논리에 맞춰 일일이 신경을 쓰는 것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장인걸은 예전 마교 교주로 있었을 때가 너무도 그리웠다. 강력한 힘,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충성스런 수하들. 하지만 예전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장인 걸은 묵향에 대한 원한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를 으드득 갈던 장인걸은 뭔가 기분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약점을 내가 움켜쥐었으니, 네놈의 최후도 그리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