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3화 – 함정인가? 아니면 기회인가?
함정인가? 아니면 기회인가?
마교에서 비급들을 입수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그로 인해 맹주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약조한 대로 장인걸에게 밀사를 파견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 럼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맹주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흑살마왕에게 누구를 보내는 게 좋을꼬?”
참으로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제대로 된 협정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니 문제인 것이다. 즉, 사자로 파견된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맹주님.”
보다 못한 청호진인이 자청했지만, 맹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청호진인은 끈질겼다.
“아무나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흑살마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맹주님의 최측근이 아닌 인물이 사자로 온다면 의심할 게 뻔하겠지요. 그러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
맹주는 다시 한 번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본 감찰부주 역시 간곡한 음성으로 청했다.
“사형이 안 된다면 저를 보내…….”
“어허, 너희 두 사람은 절대 안 된다. 마교에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이 있음을 벌써 잊었더냐?”
맹주의 지적에 두 사람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령섭혼심법은 상대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악질적인 마공이다. 그걸 이용해서 대상의 심지를 제압한 후, 맹 내의 기밀사항들을 물어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특히, 이번 일이 함정인지 아닌지 캐내 보기라도 한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들통 날 게 뻔했다.
정순한 내공을 쌓은 도인에게는 그런 사악한 마공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장인걸이 그 마공을 쓸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편법 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일단 단전을 파괴해서 내공을 흩어 버린 다음, 고문을 통해 정신까지 황폐화시킨 후라면 아무리 도사의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마령섭혼심법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 으리라.
인질을 온전한 상태로 돌려보내야 한다면 그런 악독한 수법을 쓰지 않겠지만, 일단 인질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 장인걸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맹의 일에 대해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 적임자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맹주의 측근이 아닌 사람을 밀사로 보내자니 장인걸이 의심을 할 게 뻔하고……. 이래저래 고민인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감찰부주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수 사제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수를 말이더냐……?”
“사제는 맹 내의 일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으니 만약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흑살마왕이 캐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만수진인은 맹주의 측근이기는 했지만, 장로회의에서 듣는 정도를 제외하면 깊은 정보는 거의 알고 있지 못했다. 어쩌면 감찰부주는 처음부터 만수진인을 밀사로 보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번 일에 대해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순간 맹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끼던 사질들 중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다니……. 하지만 운이 좋다면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장인걸이 오판을 해 주 기만 한다면.
“무량수불…, 잘되어야 할 터인데…….”
맹주의 부탁에 만수진인은 군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장인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호위는 물론이고 수행원이나 짐꾼 또한 없었다. 다만, 그의 품속에 맹주 가 장인걸에게 전하는 두툼한 서신 한 통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절대적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걸 흑살마왕 본인에게 직접 전해라.”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전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반드시 전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노부가 너를 택한 거니까.”
자신에 대한 사숙(師叔)의 굳건한 믿음에 만수진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서신을 흑살마왕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마. 무림의 안녕은 물론이고, 무당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몇 군데에서 부교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는 했사온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 교주님께 말씀 올리지 못한 것이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확인되지 않은 거라고 해도 상관없다. 말해 보거라.”
“예.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사오나,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그가 십만대산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옵니다.”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십만대산에? 거기에 갔다는 게 왜 가장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냐?”
“다른 곳에서는 그자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정보가 꽤나 공신력이 있는 곳에서 획득한 것이라는 것이 옵고, 세 번째는 그자가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유일한 정보인지라…
“그래, 뭣 때문에 놈이 십만대산으로 갔다고 하더냐?”
“예. 이번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만큼, 장로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부교주가 올해 안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면, 십만대산으로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장로회에서 선언했다고 하더군요.”
편복대주의 보고에 장인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예? 이건 무림맹 내에서도 꽤나 고위급에서 흘러 들어온 정보이옵니다.”
“너는 십만대산에서 성장하지 않았기에, 그런 엉터리 정보를 믿었던 것이겠지. 본교에서 교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교주가 장로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 따위는 결단코 일어나지 않아. 수하들은 교주의 명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완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설혹, 교주가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장로들이 반발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장인걸은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힘과 공포로 억누르면 된다. 물론 그러다가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면 수하들에 의해 축출당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다 그자의 힘이 모자라는 것일 뿐,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느냐.”
“그렇다면 그가 십만대산으로 돌아간 이유가……?”
장인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확언했다.
“십만대산에 있는 모든 병력을 꺼내 이쪽으로 집결시키기 위해서겠지. 아니, 그따위 일로 놈이 직접 거기까지 달려갔을 리 없다. 명령서만 보내도 충분하니까 말 이야. 그편이 편리할 뿐더러, 훨씬 빠르지 않겠느냐?”
장인걸은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지도 쪽으로 시선을 획 돌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비밀분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놈이 그런 곳에서 허송세월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겠지.” 장인걸은 양양성 일대의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라면 이 일대 어딘가에 마교의 모든 전력이 집결되어 있을 게다.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게 놈의 장기니까.”
과거 십만대산을 기습당했을 때도, 그는 놈의 주력부대가 이동하고 있다는 걸 눈치조차 채지 못했었다. 그는 똑같은 일을 두 번씩이나 당할 만큼 멍청한 인물은 절 대로 아니었다.
편복대주는 슬쩍 장인걸의 눈치를 살핀 후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만약 모든 병력을 꺼냈다면…, 그렇다면 십만대산이 텅 비어 있을 게 아니겠사옵니까? 집결지를 찾는다고 시간 낭비를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병력을 투입해 빈집을 터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꽤 타당한 의견이었지만, 그건 마교의 현실을 모르는 계책이었다.
“구양운 장로에게서 듣지 못했느냐? 십만대산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불허한 이유는, 그곳이 천혜의 요새라는 점도 있지만 원로원(元老阮)의 존재 때 문이야. 원로원이 보유한 무력은 본교 전체 무력의 3할에 달하지. 모두들 과거에 한가락씩 했던 놈들이 은퇴해서 원로원에 들어가는 거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 LF?”
전체 무력의 3할에 달한다는 말에 편복대주는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로군요. 그런데 어찌하여 속하가 아직까지 원로원의 존재를 듣지 못했는지……?”
“원로원은 교주의 명령을 받지 않아. 그리고 그 어떤 공격에도 가담하지 않지. 원로원이 움직이는 경우는 단 한 가지, 십만대산이 적의 공격에 노출됐을 때뿐이 야.”
“그래서 여태껏 외부에…….
“교주가 중원 정벌을 하겠답시고 모든 고수들을 이끌고 나가서 몽땅 다 죽어 버렸다고 해도 그게 본교의 패망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유지. 이제 알겠느냐?” “예, 교주님.”
“편복대의 총력을 동원해서라도 놈을 반드시 찾아내라!”
“존명!”
이때, 밖에서 가벼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장인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찔끔한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양해를 구한 다음 급히 문 쪽으 로 달려갔다. 회의 도중에 방해받는 걸 장인걸은 대단히 싫어했다. 흐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잠시 소곤거리던 편복대주가 급히 장인걸에게 돌아왔다.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인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예민한 귀는 이미 편복대주 가 문 앞에서 주고받은 말을 빠짐없이 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만수라는 말코가 누군데 나한테까지 보고가 올라온단 말이더냐?”
“무당파의 전대고수들 중 한 명인 만수진인이옵니다.”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그제서야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무림맹의 장로로서 맹주의 최측근들 중 한 명이었다.
“그를 본좌가 만나 볼 필요가 있을까?”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온 거라면 그렇습지요. 하지만 그는 이곳에 혼자 왔사옵니다.”
순간 장인걸의 눈매가 실쭉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일이라는 말이로군.”
“예.”
“설마 그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말코들이 굴복을……?”
장인걸은 자신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중원 북부를 점령한 후, 장인걸은 영토 내에 있는 제법 이름깨나 알려져 있던 문파들을 몽땅 다 토벌해 버렸다. 저항이 만만찮았지만, 장인걸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들을 잡아들인 이유는 단 한 가지, 무림맹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옥에 감금해 놓은 무림인들의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을 몽땅 다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수없이 했음에도, 무림맹의 반응은 완전히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금나라에 대한 적대 행위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자신의 협박이 씨알도 먹히지 않고 있다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에 분기탱천한 장인걸은 그 보복으로 잡아들인 인질들에 대한 세뇌 작업을 지시해 버렸다. 인질로서 가치를 상실한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써먹는 게 그의 방식 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뻣뻣하던 무림맹이 갑자기 숙이고 들어온다? 그것도 지금은 마교의 동참으로 인해 저쪽이 월등한 전력적 우세를 보이고 있는데 말이다.
“거참, 이해할 수가 없구먼. 맹주가 본좌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느냐?”
“뭔지는 모르겠사오나 비밀스런 제안을 하기 위해서 달려온 것이겠지요.”
비밀스런 제안이라는 말에 장인걸은 슬쩍 입맛을 다신 후, 편복대주에게 명했다.
“말코를 만나 보도록 하지.”
“존명!”
잠시 후, 만수진인이 무장의 안내를 받으며 장인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제 갓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팽팽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무당파가 자랑하 는 전대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한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대단히 남성적인 얼굴이었다.
불진으로 도복의 먼지를 탁탁 터는 그의 모습에서, 이런 마의 소굴에 자신이 들어온 것에 대한 짙은 불쾌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장인걸 은 저 말코가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만수진인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여기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장인 걸에게 건네며 말했다.
“맹주께서 전하는 친서(親書)올시다.”
그 서신을 편복대주가 장인걸을 대신해서 받은 다음, 장인걸에게 고개를 돌려 그의 허락을 구했다. 장인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편복대주는 봉인을 뜯고 내용 물을 먼저 읽었다. 혹, 독극물이라든지 생각지도 못했던 암수를 사용할 우려가 있기에 취해지는 의례적인 안전장치였다. 사실 독극물을 써봤자 극마급 고수인 장인 걸에게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겠지만.
꼼꼼히 내용물을 살펴본 편복대주는 서신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장인걸에게 전했다. 읽고 싶지 않다고 해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용의 상당 부분이 편복대주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까닭에 장인걸에게 서신을 바치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편복대주의 감정 상태를 장인걸이 놓칠 리 없다. 과연 맹주가 어떤 제안을 했기에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편복대주를 저렇게 만들어 놨을까? 잠시 후, 맹주의 서신을 읽어 가는 장인걸의 눈동자에도 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문의 서신에는 현재 무림맹이 처한 상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 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교 교주에 대한 험담이었다. 교 주가 저질러 놓은 여러 사건들, 그런 그의 오만한 행동때문에 맹은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특히, 이번에 교주가 단독으로 연경을 친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맹주는 지적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을 교주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 었다면, 맹과 합동작전을 전개했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 그는 전쟁의 승리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는 자와 동맹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바, 자신으로서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런 만큼 귀하는
우리와의 동맹을 어찌 생각하는가 하고 맹주는 묻고 있었다.
맹주는 장인걸이 금나라 장수로서 오랜 기간 금 황제를 위해 충성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장인걸이 신의가 없는 인물이었다면 오래전에 그 자신이 금의 황제가 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장인걸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만수진인에게 이죽거렸다.
“이걸 본좌에게 믿으라는 말이더냐?”
만수진인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서신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빈도는 전혀 모르고 있는 만큼,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렵소이다.”
“내용조차 모른다고? 여기 있다. 한번 읽어 보거라.”
서신은 장인걸의 손에서 떠나 천천히 만수진인에게로 날아갔다. 대단히 뛰어난 허공섭물의 응용이었다.
서신을 받아 급히 읽고 있는 만수진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읽어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닌 듯했다.
서신을 다 읽은 후, 고개를 드는 만수진인의 얼굴에는 짙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왜 이따위 서신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힘들게 달려온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그래, 이제 읽어 봤으니 얘기해 줄 수 있겠지? 그걸 본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순간 만수진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만으로 봤을 때, 그는 지금 맹주가 추진하는 일을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믿지 않더라도 빈도로서는 별로 상관없소이다.”
장인걸은 만수진인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본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맹주가 진실로 본좌와 조약 맺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밀사로 파견된 네놈조차도 조약을 맺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회의적 인데, 어찌 본좌가 이따위 허무맹랑한 말에 혹하기를 바란단 말이더냐?”
장인걸의 질문에 만수진인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는 더 이상 장인걸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맹주의 명을 완수한 만큼, 이제 그는 모든 걸 다 털어 버리고 맹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건 빈도도 이해할 수 없는 바외다. 다만, 맹주께서 손수 그 서신을 빈도에게 주시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귀하에게 전하라고 명하셨기에 이리 달려왔을 뿐이 오. 서신을 귀하에게 전달했으니, 빈도로서는 할 일을 다 했소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귀하의 선택일 뿐.”
“좋다. 본좌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여기에 머무르겠는가?”
순간 거절하려던 만수진인은 뭘 생각했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신을 가져가라는 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장인걸은 수하를 불러 만수진인에게 숙소를 마련해 줄 것과 그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라고 명했다.
만수진인이 물러간 후, 그는 편복대주에게 물었다.
“함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수룩하다 보니, 오히려 사기극이라고 치부해 버리기가 더욱 힘들구나.”
만수진인에게서 넘겨받은 서신을 세심하게 읽고 있던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물음에 서신을 슬쩍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만수진인이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함정이나 파겠다며 소모해 버릴 만한 인물은 아닙지요. 속하의 판단으로는 함정은 아닌 듯하옵니다. 맹주는 동맹이 체결됨 과 동시에 양양성에 파견된 모든 무사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했사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함정을 팔 수 있겠사옵니까?”
장인걸도 그 말에는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좌의 생각도 그래. 그게 더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한데…. 당최 이런 제의를 맹주가 본좌에게 하는 영문을 모르겠구먼.”
“한 가지 가능성은 그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온데…….”
장인걸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가짜라고 보기에는 무공이 너무 뛰어나.”
장인걸은 극마급 고수답게 한눈에 상대의 무공 수준을 파악해 냈다. 무당파가 자랑하는 전대의 고수답게 만수진인의 무공은 화경의 벽에 가로막힌,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의 말에 편복대주는 맹주 쪽의 제안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봤다. 만약 이게 함정이 아니라 진짜라면?
“저쪽의 제안이 진짜라고 가정해 본다면, 교주님께서는 맹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용의가 있으시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음산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게 진짜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그 전에, 너는 이게 놈들이 시간을 끌기 위한 잔꾀가 아닌지부터 철저하게 조사해 보거라.”
“존명!”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편복대주에게 조사해 보라고 명령하기는 했지만, 장인걸은 내심 이게 함정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 조약을 통해 맹주가 원하는 게 대단히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장차 금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지금까지 중원을 제패했었던 역대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무림을 그냥 놔둬 달라는 것이다.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양양성에서 무림연합의 고수들을 몽땅 다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 정도 요구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지. 사실, 묵가놈을 없애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림맹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은 없으니까. 먼저 함께 손 잡고 묵가놈부터 없앤 뒤 그 다음에 무림맹을 없애는 게 순서겠지.”
갑자기 장인걸은 미친 듯 광소를 터뜨리며 외쳤다.
“크하하핫! 내 손으로 본교의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 본 게 몇 년 만이던가. 지금까지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짜증스런 것들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