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2화 – 칼을 반대로 겨누다
칼을 반대로 겨누다
추밀사 섭평은 여문덕 상장군 등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황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 연공공을 만났다.
가벼운 대화를 하며 틈을 엿보던 섭평은 연공공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밝혔다.
“오늘 유광세 상장군과 여문덕 상장군이 거병할 겁니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연공공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거병(擧兵)이라 함은 병사를 일으킨다는 말인데, 상당히 애매모호한 표현이었다.
“금나라로 쳐들어간다는 말이오?”
봄이 되면 금나라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것은 악비 대장군의 작전이었다. 물론 그러다가 목이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그가 죽자, 자 연히 그가 세웠던 작전 또한 폐기되었다.
섭평은 씨익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어서는 차향을 음미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실내에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목표는 황성입니다.”
그 순간 연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추밀사.”
“자자, 진정하십시오, 공공. 며칠 후면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아니, 황성사와 연결되어 계시니 그 전에 먼저 아시게 되겠군요.”
슬며시 자리에 앉는 연공공. 물론 상대의 기선에 제압당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섭평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공공이 곧장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은, 섭평이 뭘 믿고 여기 와서 그딴 소리를 하는지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공공이 황성사의 수장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섭평이 알게 된 것은 교주와 얽힌 직후였다. 형부에 수감되 어 있던 독두개를 황성사에서 나온 인물들이 상대하는 그 순간, 연공공이 지닌 또 하나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복수심에 눈 이 멀어 저지른 연공공의 실수였지만 말이다.
섭평이 자신의 또 하나의 신분을 어찌 알았건 그건 관심이 없는 연공공이다. 그는 평소에는 잘 짓지 않던 냉혹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잘 알고 있는 그대가 굳이 호랑이 아가리 앞에 머리를 들이미는 이유가 뭐요?”
황성사가 하는 일이 바로 황실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발본색원(拔本塞源) 아니던가.
“공공의 도움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공공은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헛웃음을 뿌렸다.
“하핫! 농이 심하시구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부(武)들의 세상이 되는 걸 바라시는 겁니까? 머릿속에 든 것은 없지만, 모두들 전쟁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자들이지 요. 더군다나 그들의 휘하에는 40만이나 되는 대병력까지 있습니다. 설혹, 진압에 성공한다고 해도, 제국의 기반마저 뒤틀릴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는 연공공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크흠…….”
“만약 연공공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반군의 수뇌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들의 세상을 한번 만들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공 공과 저의 세상 말입니다.”
우리들의 세상이라는 말에 연공공의 눈이 번쩍 빛난다. 천하를 쥘 수 있다는 말에 욕심이 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곧이어 연공공은 의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반란에 성공하는 순간, 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쥐어지게 되겠지요. 그런 그들을 무슨 수로 제어할 셈이시오?”
“주모자들 중 한 명인 여문덕 상장군과 제가 가깝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를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맹세까지 받았지요. 그를 이용하면 됩니 다.”
섭평이 쥐고 있는 패가 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마, 오늘 거병하겠다는 것도 그를 통해 알아냈을 것이다.
“흐음…, 여문덕이라………….”
아무런 말이 없던 연공공은 한참 후에야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공공. 하지만 빨리 결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섭평이 돌아가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연공공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은 감히 발걸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차를 가져 오너라.”
연공공의 명령에 환관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그런 다음 연공공의 옆에 다소곳한 자세로 자리 잡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툭 내던진 연공공의 물음에 환관은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간드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사료되옵니다, 공공.”
“흠…, 그건 그렇지.”
연공공은 찻잔을 들어 향긋한 차향을 음미한 다음, 조금 마셨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문제는 지금 추밀사를 없앤다 해도 너무 늦었다는 거야.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킨 장수들을 몽땅 다 한꺼번에 없앤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 고.”
“모두는 힘들겠지만 주동자 두셋 정도라면 충분히 암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정도는 본관도 알고 있느니!”
연공공의 말에 환관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동자 몇 명을 암살한다고 해서 무마될 단계는 이미 지나 버렸다. 일단 병력을 일으킨 후에는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장수들도 잘 알고 있 다. 도중에 그만둔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군이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주동자 몇 명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그만둘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없어짐으로 인해 장수들을 통제하기만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일단은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가….?’
고심하던 연공공은 환관에게 명령했다.
“추밀사에게 호위를 몇 명 붙여 놔라.”
“그리 하겠사옵니다.”
뾰족한 수가 없는 이상, 일단은 몸을 웅크리며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성은 발칵 뒤집혔다. 반란군의 규모는 무려 35만! 황성을 수비하고 있는 황군이 제아무리 정예라고 하지만 그 수가 겨우 5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정대신들은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선봉군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맹장으로 이름 높은 유광세 상장군이다. 그는 조정이 대비책을 갖출 시간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거병과 동 시에 엄청난 속도로 황도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각이 아쉬운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진회는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썩어빠진 관료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허둥댈 뿐이었다.
몇몇 고관들은 일찌감치 야반도주를 해 버린 상태였고, 대부분은 눈치만을 살피며 언제 황도를 떠날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반란군이 가하고 있는 압박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진회처럼 노회한 인물이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추밀사 섭평 때문이었다. 군부의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가 눈에 보이지 않게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책 회의가 지지부진하자, 진회는 무림맹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맹은 진회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오랑캐와의 전쟁이라면 거기에 참가할 명분 이 있었지만, 동족끼리의 전투에까지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춘릉성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맹을 재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교의 주력부대가 움직일 때는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여 전속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산간지 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도(官道)를 통해 이동하라는 철영 부교주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마교도들은 마치 자신들이 개선군(凱旋軍)이라도 되는 듯 보무도 당당하게 대로를 행진했다. 하지만 행인이 많은 관도를 통해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강아지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음산한 마기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코를 박고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백성들을 위해 금나라와 대회전을 벌인 후인지라 사람의 행사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이토록 푸대접을 하다니.
“이렇게 천천히 이동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대산으로 돌아가 푹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군사의 조언에 철영 부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의 말이 옳다는 건 알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구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교주님.”
“지금 우리가 철수하는 게 군사는 옳다고 생각하나?”
철영의 물음에 설민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이미 목적은 다 이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물론 설민의 말은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마교 출신이 아니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마교에서 성장하며 교의 오랜 염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철영은 군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목적을 다 이뤘다고? 대체 무슨 목적을 이뤘다는 말인가? 본교의 꿈은 무림일통(武林一統)! 그걸 현실로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코앞까
지 왔었네. 이번 기회에 정파놈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원 전체를 정복해 나갔어야만 했단 말일세.”
철영의 말을 듣던 설민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부교주의 생각이 이럴 정도라면, 휘하 고수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부교주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아무래도 휘하 고수들을 좀 더 다독일 필요가 있겠군요.”
“그 때문에 무력시위 하듯 천천히 돌아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후다닥 돌아가면 뭔가에 쫓겨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일세.”
설민은 철영이 왜 이렇게 느지렁거리며 십만대산으로 향하는 것인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좀 더 직접적으로 다독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직접적으로?”
“예, 교의 중추적인 분들을 모아 연회라도 베풀며, 지난 전투에 대해 치하를 하시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고개를 끄덕인 철영은 곧바로 수하를 불러 오늘 밤 대대적인 연회를 열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마교의 거의 모든 핵심고수들이 모여 연회를 즐긴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승전축하연이었던 만큼, 시작은 왁자지껄했다. 모두들 서로의 전공을 자랑하는 아주 기분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점차 술에 취해가자 분위기가 조금 씩 어수선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철영이 가장 우려하던 사태로 발전했다.
그 시작은 장로 서열 2위인 동방뇌무 장로였다. 그는 커다란 술잔을 들고는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부교주를 빤히 바 라보며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가 되더라도 그때 정파 놈들을 완전히 끝장을 냈어야 했습니다.”
철영 부교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물론 끝장을 낼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본교 또한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을 걸세. 자, 쓸데없는 얘긴 그만두세. 대승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나누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로군.”
철영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관지 장로도 동의를 표했다.
“부교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아마 교주님께서도 그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으신 거겠지요.”
철영 부교주에게 직접 따지기는 힘들었지만, 관지 장로가 한 마디 하자 동방뇌무 장로는 잘됐다는 듯 관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잡것들을 몰살시킬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댓가는 치러야지. 자네는 무림맹을 멸하는데, 아무 희생도 없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관지 장로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하지 못하자, 기가 산 동방뇌무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쭉 둘러보며 외쳤다.
“모두들 잘 알겠지만, 지금껏 본교는 수차례에 걸쳐 중원 원정을 단행했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가능했단 말이야! 모 두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동방뇌무 장로의 지적에 천진악 장로 역시 불만 어린 표정으로 동조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건 동방 장로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춘릉에서 무림맹에 심대한 타격을 가한 다음, 곧바로 무림맹 총단으로 쳐들어갔다면 놈들의 씨를 완전히 말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뭔가 고명(高明)하신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것이겠지만, 무식 한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더군요.”
천진악 장로는 군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군사, 교주님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를 알고 있으시오?”
천진악 장로가 갑자기 자신을 걸고 들어오자, 설민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안 그래도 모두들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기에 마공을 익히지 않 은 군사로서는 그 눈빛을 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래서 내가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교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니 무조건 참가하라는 부교주의 명령이 있었다. 아니, 설혹 그 명령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철영에게 다른 장로들을 다독일 것을 조언했던 그였기에 이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문제는 술자리에서 장로들의 불만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설민의 잘못이었다. 마교는 강자지존 즉, 힘을 숭상하는 단체다. 그런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고수일 경우 타당한 불만이라면 거침없이 내뿜을 수도 있었다. 물론 상관이 그걸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최고위직인 철영이나 대호법이 자신들의 불만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참지 않고 불만을 내뿜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알지 못하는 설민에게 있어서 이 술자리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동방뇌무 장로의 얘기가 교주의 귀에 들어갔을 때, 교주가 어떤 반응을 벌일 것인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렸다.
물론 평소에 보던 교주라면 이 정도는 호탕하게 넘길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심약한 그로서는 한 번씩 잔혹한 모습을 드러내던 묵향의 그 뒷면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질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교주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그건…….”
창백하게 질린 설민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동방뇌무 장로는 분을 참기 힘들다는 듯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
“복안은 무슨 얼어죽을 복안!”
쾅!
“히익!”
설민의 안색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세인들에게 사람백정이라고까지 불리는 동방뇌무 장로다. 작달막한 키에다가 연경에서의 전투로 인해 한쪽 팔까지 없는 불구자가 되었지만, 그가 내뿜고 있는 위압감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교주님께서 천하제일고수이심은 분명하나, 그분은 무공만 익히셨어. 사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교주님께서는 장로직은 물론이고, 그 어 떤 전투단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으시지 않나.”
그 순간 철영 부교주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동방뇌무 장로의 기세쯤은 한낱 새 발의 피쯤으로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광폭한 기운 이.
술기운을 빌어 별 생각 없이 불만을 토로하던 장로들이었지만, 철영 부교주의 기세에 모두들 찔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영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방 장로! 말이 심한 것 같군.”
동방뇌무 장로도 자신이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거나하게 마신 술탓이긴 했지만, 그만큼 마지막에 내려진 교주 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말실수를 했다고 느끼면서도 동방뇌무 장로는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고, 딱히 자 신의 말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킨 다음 말했다.
“저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교주님께서도 자신이 없으시니까 전투 시에는 그 지휘를 부교주께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교주님의 지휘 능력을 문제 삼는 건 문제가 있지 않겠나? 결국 교주님께서는 승리하셨네.”
지금껏 아무런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한중평 장로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저도 이번에 교주님께서 정파와의 결전을 회피하신 것은 불만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이번에 교주님께서 이룩하신 위대한 업 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중평 장로의 말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가 교주를 성토하는 것에서 살며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철영은 느꼈다.
“자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짐작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교주님께서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것이겠지. 이번에 장인걸과의 전쟁도 그렇 지 않았나. 설마 정파 놈들하고 손을 잡으실 줄이야…………. 안 그렇소? 대호법.”
철영의 물음에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호계악 대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허허, 물론이지요. 저는 지금껏 세 분의 교주를 모셨었지만, 당금의 교주님이 가장 심계가 깊으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 잡것들과 손을 잡으 시겠다고 하셨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만, 결국에는 모든 게 교주님께서 생각하신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장로들도 대호법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림맹과 공개적으로 손을 맞잡고 일을 벌인 교주는 묵향이 최초였으니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들 생각하지 말게. 노부는 조만간에 교주님께서 무림일통을 위한 행보를 시작하실 거라고 믿네. 그분이 아니시라면 그 누가 있어 본교의 염원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묵향이 있음으로 인해 현 마교가 사상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철영은 자리에 앉아있는 장로들을 쭉 둘러본 다음 힘차게 외쳤다.
“자, 오랜만에 모였는데 술이나 드세. 꼭 피를 봐야 맛인가? 무림맹, 그 잡것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놓은 것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교주 님이시라면 머잖아 본교의 염원을 이룩해 주실 걸세. 자, 모두들 잔을 들게나. 그날을 위하여!”
“그날을 위하여!”
철영의 선창에 모두들 술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방금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모두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찾아올 그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