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3화 – 묵향의 또 다른 모습
묵향의 또 다른 모습
양양성은 지금 거의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 무림인들은 모두들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병사들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묵향이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유광세 상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황성을 향해 진격 해 버렸기 때문이다.
연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다 그들이 일시에 빠져나가 버리자, 양양성은 적막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한적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양양성에 남아 있었다.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태산으로 급파한 홍진 장로의 보고를 듣기 위함 이었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마화는 무의식중에 손을 더듬어 옆에 누워 있을 묵향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단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지금껏 그녀 혼자 잠들었던 것처럼. 그것을 느끼 는 순간, 마화는 눈을 살며시 떴다.
‘꿈이었을까?’
누운 채 살며시 눈을 떴다. 역시나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이 번쩍 깼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토 록 사모했던 묵향과 맺어진 것이 단 하룻밤의 달콤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화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침실 안을 둘러봤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있었던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 자신 에게 달콤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남자를. 그녀는 꿈을 꾼 게 아니었던 것이다.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묵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잔뜩 굳어 있던 마화의 안색이 살며시 풀렸다.
“아뇨, 많이 잤어요.”
“이리 와. 조금 후면 해가 뜰 거야. 같이 일출을 보면서 차를 마시자고.”
과연 동편 하늘은 타는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묵향을 향해 사뿐 발걸음을 옮기려던 마화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자신이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 그대로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머리는 뒤죽박죽 엉망일 테고, 어쩌면 눈곱도 붙어 있을지 몰랐다. 화장도 안 한 것은 물론이고, 하늘거리는 잠옷 바람으로 여기에 나와 있었다. 지금 그녀는 묵향에게 자신이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가슴을 가린 뒤 뒤로 주춤 물러섰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준비하고 올게요.”
“준비할 게 뭐가 있어? 그냥 이리 와.”
하지만 마화는 묵향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후다닥 침실로 뛰쳐 들어갔다. 그녀는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신 거람.”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가 꽤나 실력 있는 고수라고 평가해 줬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그만큼 기감이 뛰어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잔 묵향이 일어나는 것조차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잠들어 있었다니……………
우선 그녀는 흐트러진 잠자리부터 깨끗이 정돈했다. 그리고 곱게 몸단장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서는데 아무거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 닌가. 세안은 물론이고 화장을 하는 데 걸린 시간도 꽤 되었지만, 옷을 고르고 입는 데 들어간 시간에 비한다면 그건 새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마화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타는 듯 붉었던 하늘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사위는 훤하게 밝았다.
하지만 묵향은 난간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묵향 옆에는 같이 마시자던 찻잔 두 개가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채 놓여 있 었다.
“미, 미안해요.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해를 바라보고 있던 묵향의 고개가 천천히 마화를 향했다.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해는 내일도 뜨는데 뭐. 아침이나 먹으러 갈까?”
“예.”
마화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같이 밤을 지새워 줄 것도 아닌데,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나한테 맞추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생활해. 정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마화에게 맞춰 줄 테니까.”
“아뇨, 저에게 맞춰 주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도 저는 꿈을 꾸는 것만 같거든요. 다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당신이 안 계시면 이 모든 행복이 다 꿈인 것 같아 두려워져요.”
“별 걱정을 다하는군. 나는 언제까지나 마화하고 함께 할 거야. 자, 아침이나 먹으러 가지.”
그렇게 말하면서 성큼 발을 떼는 묵향. 그런 묵향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밤새도록 난간에 앉아 있던 묵향의 모습하며, 그처럼 뛰어난 고수가 자신이 말을 걸기 전까지 계속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내 마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인걸까지 없애 버린 마당에 더 이상 묵향에게 무슨 고민이 남아 있겠는가. 괜한 자격지심이겠지.
마화는 빠르게 묵향 옆으로 다가가 살며시 팔짱을 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배고파요. 밥 사 줘요.”
칭얼거리는 듯한 마화의 말투에 묵향은 씩 미소 지었다.
“뭘 먹고 싶어?”
다정하게 길을 걷는 그들의 뒤를 좌호법 초진걸이 10여 명의 수하들과 함께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묵향은 소연이를 찾아갔다. 소연은 진팔과 함께 비무를 하고 있었다.
소연의 뒤쪽에 냉막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마인 한 명이 묵향을 보자 황급히 예를 올렸다. 우호법 여문기(呂文起)였다. 소연이 지금 교외에 있는 만큼, 우호법이 직접 소연을 호위하라고 대호법이 명령했던 것이다.
소연은 마화와 함께 다가오는 묵향을 보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
“수련을 하고 있었더냐?”
“예.”
묵향은 장원 안을 빙 둘러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북적거렸었는데, 오늘은 인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우호법 여문기와 그 휘하의 호법 원 고수 10명만이 강렬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구나.”
“모든 일이 끝났으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사형은 오늘 아침에 제자들을 이끌고 천지문으로 돌아갔어요.”
전쟁이 끝난 이유도 있었지만 임연이 재빨리 천지문으로 돌아가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소연을 따라다니는 호법원 고수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마교 서열 16위의 초강자인 여문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와 위압감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언제나 소연의 지 근거리에서 경호를 맡고 있다 보니 임연으로서는 도저히 평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만약 전쟁이 끝나지 않았거나,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소연에게 문파 밖에서 따로 생활해 달라고 요청했을지도 몰랐 다.
그랬기에 전투가 끝난 뒤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임연은 짐을 챙겨서 빠르게 천지문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침 양양성에 있던 대부분의 문파들 역 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소연의 대답에 묵향의 안색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진팔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결정을 내린 것이냐?”
“예, 아버님.”
묵향은 소연에게 함께 마교로 돌아갈 것을 권했었다. 하지만 소연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을 끌었다.
정파에서 성장한 그녀가 마교로 들어간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묵향은 소연이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마교 교주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번에 크나큰 곤욕을 치루지 않았던가. 결국 그녀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은 마교 외에는 없다고 봐야 했다. 마화가 소연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 생각했어.”
무척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옆에 서 있던 진팔만큼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물론 그 역시도 소연이 마교로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그 일이 현실로 닥쳐오자,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이때 홍진 장로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묵향이 묵고 있는 장원으로 갔다가, 교주가 이리로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달려온 모 양이었다.
달려오는 그의 품에는 길쭉한 나무상자 같은 것이 안겨 있었다. 10여 명의 수하들이 뒤를 따르고 있음에도 상자를 자신이 직접 들고 있는 것으로 보 아 대단히 귀중한 뭔가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홍진 장로는 묵향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묵향은 홍진 장로가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급히 질문부터 던졌다.
“어찌 되었나?”
홍진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안타까운 어조로 고했다.
“예, 두 분 다 돌아가셨더군요. 먼저 부교주님의 시신을 발견했고, 패력검제의 시신은 좀 더 깊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홍진 장로는 무릎을 꿇으며 나무 상자를 묵향에게 바쳤다.
“이건 교주님의 신물인 묵혼입니다.”
묵향은 천천히 상자를 열어 봤다. 상자 안에는 비단천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묵혼검의 파편이 놓여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폭발이었기에 화경급 고수인 패력검제가 들고 있는 묵혼검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까.
묵향은 묵혼검을 다시금 홍진 장로에게 넘겨주며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명쯤은 살아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지하 깊숙한 곳에서 한순간에 대폭발을 일으키며 동굴이 무너져 버리는 데야 그분들로서도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최소한 귀식대법이라도 쓰면서 버텼어야지.”
“저희가 시신이 있는 곳까지 파들어 가기 위해 거의 15일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설혹 대폭발 때 살아남았다 해도 귀식대법으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교주님.”
“멍청한 녀석들! 그 고생을 해서 화경에 올라놓고는,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묵향의 분노에 홍진 장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패력검제와 달리 초류빈 부교주는 교주가 직접 무공을 전수하며 키운 애제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초류빈을 잃은 교주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는 홍진 장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신들은 잘 수습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교주님. 예법에 따라 화장(葬)하여 뼛가루는 강에 뿌렸습니다.”
“잘했군. 패력검제도 화장했나?”
“그는 본교의 사람이 아닌지라 시신을 소금에 절여서 가지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유족에게 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잘했군. 그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
“수하들에게 제령문에 전달해 주라고 했습니다만, 이리로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묵향이 뭔가 고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마화의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아마도 요 근래 묵향이 보여 주던 몇몇 이상한 행동들이 다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묵향은 최소한 둘 중 한 명만이라도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 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진 장로를 돌려보낸 후, 묵향은 마화와 소연, 진팔과 함께 제령문도들이 기거하고 있는 장원으로 갔다.
장원에 도착하기 전에 진팔이 묵향에게 말을 건넸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교주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냐?”
진팔은 고개를 조아리며 묵향에게 부탁했다.
“저를 천마신교에 받아 주십시오. 천마신교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진팔이 왜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지 묵향은 빤히 알고 있었다. 소연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본교에 투신하려는 이유가 뭐냐?”
잠시 망설이던 진팔은 옆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연의 눈치를 힐끗 봤다. 주저주저하다 결국 입을 여는 진팔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사, 사저를 곁에서 모시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소연이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제,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 사제는 앞날이 창창하잖아. 나를 따라 신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정파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 들 텐데………….”
“아닙니다, 사저 사저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진팔의 수작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본교에 투신하고 싶다는 이유치고는 동기가 너무 불순해. 그냥 천지문에나 붙어 있지 그래?”
진팔은 땅바닥에 털썩 엎드려 부복하며 사정했다.
“제발 저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이 생명 다 바쳐 사저를 모시겠습니다.”
“쓰읍..,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놈이 헛소리는…………….”
뭔가 한소리 하려던 순간, 십만대산에는 소연과 친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중에 둘이 맺어질지 아닐지는 알 수가 없지만, 소연이 십만대산에 자리 잡는 데는 보탬이 될 듯도 했다.
“좋아, 본교 가입을 허락한다.”
“가, 감사합니다, 교주님!”
장원은 침통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무사가 묵향을 알아보고는 급히 안으로 통보했다. 곧이어 폭풍검 서량이 달려 나와 묵향 일행을 확대했다. 설취도 그와 함께 나왔다. 사부가 행방불명된 상태라 서량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선친(先親)의 시신을 찾아 주신 것에 대해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닐세. 겨우 이 정도 밖에 해 줄 수 없다는 게 미안할 뿐이야.”
서량은 교주와 함께 온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안으로 드시지요.”
“자네도 정신이 없을 텐데, 괜한 시간 뺏고 싶지는 않네. 타지에 나와 장례식을 치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보태 쓰게나.”
그러면서 묵향은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고액권의 전표가 몇 장인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는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거액이었다.
묵향은 그것을 전한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뒤로 돌아섰다.
이때, 서량이 급히 신법을 운용하여 묵향의 앞을 막아서며 단호하게 물었다.
“이 전표가 의미하는 게 뭡니까?”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부조(扶)라고 했지 않나.”
“왜 선친께서 그 머나먼 태산까지 가서 화를 당하셨는지, 그리고 선친의 시신을 왜 교주님의 부하들이 가져온 것인지, 그 연유를 속 시원히 밝혀 주십시오!”
서량은 허리에 차고 있던 패왕검을 손으로 잡으며 소리쳤다.
“이 검을 제게 전해 주신 분도 교주님이셨지 않습니까. 선친께서 교주님께 이 검을 맡기셨다고 말입니다. 그때는 묻지 못했지만, 지금은 묻고 싶습 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는 그것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패력검제는 본좌를 대신해서 장인걸이 파놓은 함정에 들어간 것이었어. 그를 그곳으로 보낸 책임은 본좌에게 있다네. 원망하고 싶다면 본좌를 향 해 하게.”
묵향의 무성의한 대답에 서량이 뭐라고 따지려는 순간, 뒤에 서 있던 마화가 끼어들었다. 도저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잖아요.”
“가만히 있어.”
“왜 사실을 제대로 말해 주지 않는 건데요?”
마화는 서량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대협께서 그리로 들어가신 건 서 공자를 구출하기 위해서였어요.”
서량은 마치 머리를 한 대 두들겨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저를…, 말입니까?”
“태산파의 핵심고수들을 위한 연공실에서 공자를 비롯한 인질들이 갇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교주님께서는 그곳에 초류빈 부교주님 이하 혈 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셨죠. 그때 패력검제 대협도 거기에 동참하셨구요. 그 당시에는 설마 그곳이 교주님을 없애기 위해서 치밀하게 안배된 함 정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어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서량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외쳤다.
“중요한 시점에 써먹을 수 있는 인질을 그렇게 먼 곳에다가 감금시켜 놨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은 충분히 됐어요. 그 당시에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고, 그 정보를 가져온 게 바로 무영문의 부문주였으니까요.”
여기서 무영문의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서량이었다. 그렇다. 만약 무영문에서 그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면 믿을 수밖에 도리 가 없었으리라.
“무영문이 왜 그런 거짓된 정보를…………?”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영문이 최후의 순간에 배신했어요. 장인걸과의 격전이 끝난 후에야, 춘릉 일대에 포진시켜 놨었던 본교의 정찰대 및 첩보대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살해당했다는 걸 알았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무영문뿐이에요.”
서량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영문이 왜 그런 짓을……?”
“그건 옥화무제를 붙잡아서 알아봐야겠지요. 지금 본교는 총력을 다해서 그녀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침중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묵향은 서량에게 말했다.
“어찌 되었건 모든 책임은 본좌에게 있다. 그를 그곳으로 보낸 것에 대한 최종 승인은 본좌가 내렸으니까.”
여기까지 말한 뒤 뒤로 돌아서서 문을 나서려던 묵향은 멈칫, 발길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묵향은 제령문을 떠났다.
그리고 서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선친이 왜 그 머나먼 타향에서 죽어 갔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납치당하지만 않았다면, 아버지가 거기까지 달려갈 일은 없었을 테니까.
오열하는 그를 설취가 위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묵향은 자신을 따라 나오려는 소연에게 말했다.
“너도 설취와 함께 있어라. 그 아이가 지금 의지할 곳이 없지 않느냐.”
“그래도……”
“나는 괜찮다. 도중에 들릴 데도 있고 말이야.”
“그럼 십만대산에서 뵙겠습니다, 아버지.”
묵향은 우호법 여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딸아이를 부탁하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교주님. 목숨을 바쳐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령문을 나와 걸어가던 도중, 마화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셨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옆에서 가만히 듣자니 모든 잘못을 교주님께서 덮어쓰려고 하셨잖아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묵향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적 없다. 네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마화는 힐끔 묵향의 눈치를 살핀 뒤 다시 물었다.
“혹시…, 서량 공자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까 봐 그랬던 거예요?”
묵향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마화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화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떠오르자 자신의 내심이 간파 당했다고 생각한 묵향이 당황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녀석이 나를 원수로 생각하며 열심히 수련하라고 그랬던 것뿐이야. 패력검제, 그 녀석처럼 말이지.”
그리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묵향이었다.
마화는 재빨리 뒤따라가서 묵향의 팔을 붙잡아 팔짱을 꼈다. 곤혹스러워 하는 묵향의 표정이 재미있어 뭔가 한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마화는 애써 참았다. 자칫 묵향이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들이 기거하던 장원의 모습이 보일 때쯤, 마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참, 십만대산으로는 언제 돌아가실 거죠?”
“이곳의 일은 다 끝났으니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하지.”
“준비하도록 할게요.”
“가는 길에 초씨세가에 들렀다가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