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7권 5화 – 연공공의 고뇌

연공공의 고뇌

추밀사 섭평의 제의를 받은 지 며칠이 흘렀지만, 연공공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확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게 섭평의 제의를 받아 들일 마음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섭평의 방해로 인해, 토벌군을 구성하는 일은 아직까지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섭평이 바라는 대로 이뤄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황실을 떠받치는 비밀기관인 황성사는 벌써 부터 행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선봉군을 지휘하고 있는 유광세 상장군 등 급진파에 속한 장수들에게는 암살자를 보냈고, 여문덕 상장군 등 온건파로 분류되는 장수들에게는 회유 하기 위한 밀사를 파견했다. 그들의 회유는 성공해도 그만이고, 실패해도 그만이었다. 밀사의 주목적은 그들 간에 분열과 이간질을 시키는 것이었으 니까.

지금 반란군의 세력은 정면으로 부딪치기에는 너무나도 강했다. 그런 만큼 그 기세를 감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장수 몇 명을 암살하고 회유하여 서 로 간에 이간질을 시킨다면 저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조만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게 뻔했다.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만한 상황이 되면 그 즉시 놈의 목을 쳐 버리는 게 좋겠어.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놈이거든.’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소로운 놈, 감히 본관을 회유하려 하다니……

며칠 지나지 않아 암살자와 밀사를 파견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섭평의 목이 떨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공공의 그런 유쾌한 기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갑자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환관 한 명이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연공공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결과가 나오려면 너무 이르다. 그렇다면 뭔가 생각지도 못한 변괴가 생겼다는 소리인데…

“대체 무슨 일이냐?”

“급보가 도착했사옵니다. 공공.”

“말해 보거라.”

“마교도들이 춘릉성 인근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뒀다고 하옵니다.”

연공공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감정을 거의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연공공인 만큼,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연공공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교가 춘릉성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과 그곳으로 금나라의 대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보고를 받아 알 고 있었다.

그리고 연공공은 마교도들이 전멸당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겨우 3만 여에 불과한 마교도들이 어찌 60만에 달하는 금나라의 대군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그것도 금나라의 대원수가 직접 이끄는 최고의 정예를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아니 황성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게 사실이냐?”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공공, 금나라 패잔병들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수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대승을 거뒀다고 하옵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는지 연공공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이냐…………….”

마교가 이렇게나 엄청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교주를 압박한답시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자신은 자고 있는 호랑이의 코털을 하 나씩 뽑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때, 갑자기 뭔가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교주가 은원을 맺게 된 원인은 바로 악비 대장군 때문이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교주는 양양 성에서 주둔하며 그곳의 장수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그렇다면 만약 교주가 반란군을 돕고 있다면?

연공공은 맥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그렇다면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어떻게 운이 좋아서 반란군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들과 친분이 있는 교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장군 몇 명 제거하고 황도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마교의 세력이 별 볼일 없는 것이라면 연공공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춘릉성 전투만 보더라도 마교의 전력이 제국

의 무력을 상회하는 것임이 밝혀진 이상, 그로서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 환관!”

연공공의 부름에 곱상하게 생긴 환관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하시옵소서, 공공.”

“지금 당장 추밀사에게 달려가 내가 만나자는 말을 전하거라.”

“예.”

“그리고 황성사에 기별을 넣어, 마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제공해 달라고 하거라. 아무리 허무맹랑한 정보라도 좋다. 설혹 황실의 위엄에 어 긋난다고 해서 그 정보를 빼서도 안 된다. 알겠느냐?”

“예, 공공.”

추밀사 섭평은 연공공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곧바로 달려왔다. 연공공이 자신을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하 련만, 배짱만큼은 두둑한 섭평은 전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반란군의 존재였다. 즉, 반란군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한, 연공공이 자신을 죽일 리는 없는 것이다.

“찾으셨습니까? 공공.”

“부르고 보니, 바쁜 사람을 이리로 오라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구려. 차라리 본관이 찾아갈 것을………….”

연공공의 말에 섭평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공공께서 부르신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와야지요.”

“자, 앉으시오. 마침 좋은 차가 들어온 게 있어서….”

연공공은 밖에 대고 다과를 가져오라 일렀다. 이미 준비해 뒀었는지 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예쁜 궁녀가 다과를 놓고는 물러갔 다.

다과를 나누며 가벼운 얘기를 잠시 하다 연공공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일전에 귀관께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들을 제어하실 수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소?”

섭평은 슬며시 주위를 둘러본 다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랬었지요.”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소?”

“본관은 지금껏 공공께 허언을 아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좋소. 귀관이 그렇게까지 자신한다면, 내 한손을 보태리다.”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래, 내 도움을 원한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본관이 뭘 해 드리면 되겠소?”

연공공의 질문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섭평이 약간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요구조건을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연공공이 필요한 시점은 반란군이 황성에 입성할 때까지였으니까.

“먼저, 황성사를 움직여 여문덕 상장군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 그를 잃어버린다면 저로서도 반란군을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좋소, 그렇게 해 드리리다.”

“그리고 중랑장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섭평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연공공의 신분상 중랑장들과 꽤나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란군 진압에 황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거요?”

“예, 공공.”

“알겠소.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리다.”

“그럼 공공만 믿겠습니다.”

섭평이 돌아가고 난 뒤 어떻게 이번 위기를 타개할 것인지 연공공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밖에서 유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성사에서 자료가 도착했사옵니다, 공공.”

“가져오너라.”

“예.”

“너도 앉아서 읽거라.”

연공공의 지시에 유 환관은 가지고 온 자료들을 꼼꼼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유 환관은 연공공이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연공 공이 마음을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유일한 심복이기도 했다.

연공공은 먼저 황성사의 공식기록부터 집어 들었다. 그 내용의 상당수는 이미 그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무림의 세력들에 대한 간략한 요약, 그 리고 세력이 가장 큰 방파들의 대략적인 역사 등등…………. 기록의 요지는 그들이 가진 힘이 강대하기는 하지만, 결코 황실을 넘보지는 않는다. 그런 만 큼 괜히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식기록을 읽으며 마교와 관련된 부분을 신경 써서 읽다 보니 예전에는 몰랐던 범상치 않은 글이 눈에 띄었다.

9파1방, 5대세가를 정점으로 하는 여러 명문들………. 그들이 뭉쳐서 이룩된 연합체가 바로 무림맹이다. 그런데 그 무림맹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꼽 히고 있는 게 천마신교, 즉 마교라는 단체라는 것이다.

마교는 저 머나먼 세외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몇 차례나 중원정복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림맹에 의해 격퇴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림맹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중원침공을 단행할 정도라면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였을 텐데……….”

무림맹에서는 금나라의 기습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황성에 2개의 문파를 파견해 줬다. 내성(內城)의 수비를 돕고 있는 게 여승들로 이뤄진 항산파였 고, 외성(外城)의 수비를 돕고 있는 건 공동파였다.

그리 많은 숫자를 보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연공공은 그들이 다년간의 수련을 쌓은 실력 있는 고수들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들이 지닌 전력만 해도 상당한 것이거늘, 문파의 본거지에는 황실에 파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고수들이 있을 게 뻔한 사실이 아니겠는 가.

결국 그런 문파 십수 개를 합쳐 놓은 것과 맞먹는 힘을 지닌 게 마교라는 소리였다.

“크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거늘. 내가 이토록 아둔했다니………….”

연공공은 이번에는 ‘믿을 수 없는’ 자료들을 훑어봤다. 황성사의 정보 분석자들은 한낱 무림의 문파 따위가 황실을 뒤엎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을 보 유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자료들을 터무니없는 거짓정보로 단정 짓고 있었다. 무림은 황실로부터 독립권을 얻으려고 노력해 왔고, 그런 독 립권을 얻기 위해 무림에서 날조한 정보라는 것이다.

황성사가 무림이라는 단체를 얕잡아볼 수 있었던 토대에는 무림맹이 한몫 했다. 정파로 이뤄진 무림맹은 될 수 있다면 황실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 록 가능한 한 협조적으로 나왔다. 금나라의 침공 때 한팔 거들어 줬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낮추는 무림맹의 행동을 두고 황성사는 그들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오판했다.

연공공도 이전까지만 해도 무림에 대한 자료들 중 상당수가 허무맹랑한 엉터리들이라고 치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교 단독으로 금나라의 60만 대군을 괴멸시켜 버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림에 대한 정보들은 재평가 되어야 마땅 했다.

“도대체 정보를 취급한다는 놈들이 이런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뭣들 하고 있었던 게야!”

연공공의 분노에 유 환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머리로는 그게 한계였을 것이옵니다, 공공. 그만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면, 응당 황실을 장악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 입관이 문제겠지요.”

유환관의 말에 연공공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일리가 있구나. 본관도 그들이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황실을 가만히 놔두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마교는 마음먹기만 한다면 천년제국을 건설하고도 남음이 있는 단체가 아니겠느냐. 그것도 중원 역사상 최강의.”

“아마…,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다른 데 있는 것이겠지요.”

“하기야…….”

마교가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다면, 금나라의 대군을 박살낸 다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금나라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철수해 버렸다. 저 머나먼 오지, 십만대산이라고 불린다는 곳으로, 거기가 어딘지는 황성사의 첩자들 도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상태였다.

“마교 교주라는 자와 접촉할 수 있겠느냐?”

“아마 힘들 것이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니 말이옵니다. 이곳에 있는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가 없으 나, 20여 년쯤 전에 중원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마교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물론 마교가 근래 다시 분타들을 개설하며 활발히 세력 확장을 하고 있었지만, 황성사의 첩보조직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 방파 따위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연공공의 머릿속에는 교주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 한 가지가 떠올랐었다.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교주가 반란군을 돕고 있다면, 그쪽을 통해 교주와의 연결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에는 추밀사를 이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교주와는 이미 사이가 비틀린 상태가 아니옵니까. 그러니 거기보다는 무림맹에 먼저 손을 뻗어 보시옵소서. 무림맹도 그리 나약한 단체는 아니니 말이옵니다.”

“그것도 그렇구나. 정진사태(靜眞師太)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로 가셨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으니, 늘 계시던 곳에 계실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사태에게 사람을 보내 이리로…, 아니 본관이 그리로 직접 가겠다.”

정진사태를 찾아간 연공공은 단도직입적으로 무림맹 맹주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맹주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빈승이 도울 수 있다면…………..

“아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맹주를 만나 뵙고 직접 말씀드리고 싶군요.”

연공공의 말에 정진사태는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 내가 맹주와 독대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공공, 맹주께 청을 넣는 거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다만, 시일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정진사태는 맹주가 물러나기 직전인 상황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맹주와 연공공이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속사정까지 얘기해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나중에 신임 맹주가 올라서고 난 다음에 청을 넣어보면 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급한 일인데, 시일을 좀 당겨 줄 수는 없으시겠소?”

“저희 문파 내의 일이라면 그렇게 해 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맹의 일은 빈승도 손을 쓰기가 난감합니다.”

“허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쨌거나 본관이 맹주를 만날 수 있도록 수속이나 밟아 주시구려.” “예, 그렇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공공.”

더 이상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낀 연공공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허허. 그것 참…….”

연공공은 입맛이 썼다. 맹주와의 만남이 필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반란이 성공한 다음에는 이미 늦어 버리는 것이다. 연공공은 한탄했다.

“교주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