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8권 12화 –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의 유산
대화가 잘돼서 원만하게 합의가 이뤄지자 브라키어와 오크의 아버지는 돌아가고, 레어 안에는 띨띨한 오크와 아르티어스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둘 만 남게 되자,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명색이 드래곤이 몇 대 맞았다고 징징 짜며, 곧바로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냐? 이 배알도 없는, 고자질쟁이 새끼야!”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렸지만, 오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대꾸를 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또다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이미 로드인 브라키어의 판결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저리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오크는 아르티어스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녀석을 보내고 난 후, 원하던 책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르티엔이 모아놓은 각종 잡동사니 책들의 양이 상상을 초월 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책을 찾기에 앞서, 대청소가 우선되어야 할 듯 했다.
아르티어스는 판단이 서자마자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했다.
자신의 레어에 기거하고 있는 두 명의 엘프들. 둘 다 예전에는 크루마 제국에서 떵떵거리던 고위 귀족들이었지만, 지금은 드래곤의 레어 청소나 하 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팔자 사나운 엘프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주인의 행방이 묘연하긴 했지만, 그들은 딴 데로 도망치지 않았다. 레어의 주인인 아르티어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드래곤의 눈길을 피해서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자유를 속박당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드래곤의 레어에서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특히나 마법에 능한 엘프라면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꿈에서나 그리던 이상향과 마찬가지였다.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었던 최고급 마법서들이 지천으로 깔려있고, 자신들은 상상조차 못했던 마법시약 들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주인은 역마살이 끼었는지 외부로 나가기만 하면, 몇 십 년은 아예 기본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이건 정말 천 국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레어의 주인이 돌아와, 천국이 졸지에 지옥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허억!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레어에는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주저하는 듯한 엘프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가볍게 찡그리며 되물었다.
“다만?”
“브로마네스 어르신께서 침입자들을 물리치실 때, 레어 앞의 산을 통째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가보니, 레어 앞쪽의 산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풀이 우거져 제법 근사한 경치였기에, 꽤나 마음에 들어 했던 산이었다.
꽤나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었던 듯 제법 굵직한 나무들이 촘촘히 자라나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황폐하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무 엇보다 나무들 사이로 시커멓게 굳은 용암 덩어리들이 흉물스럽게 여기저기 모습을 보이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용암 덩어리는 레드 드래곤이 뿜은 브레스의 흔적이었다.
“내 이놈의 새끼를…………….”
진작에 알았다면 얼마 전에 브로마네스를 찾아갔을 때 그놈의 레어 앞도 뒤집어 엎었을 텐데, 다크를 되살리느라 정신이 없어 몰랐던 게 천추의 한 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뒤집어 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자신도 그의 레어 앞에 자리잡고 있던 거대한 엘프리 안 시를 가루로 만들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 레어에 브로마네스가 억류되어 있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자신의 장난질 때문이었다.
“젠장!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툴툴거리며 다시금 레어 안으로 돌아간 아르티어스는, 엘프들은 물론이고 드워프들까지 몽땅 다 집합시켰다. 아버지의 레어에 있는 쓸 만한 것들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긁어오자니,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예(?)들을 이끌고 아르티엔의 레어로 돌아온 아르티어스는 마법책이 쌓여있는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엘프들과 드워프들은 레어 구석구석 을 돌아다니며, 아르티엔의 유산들을 긁어모아 아르티어스의 레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르티엔이 모아놓은 책들은 마법서외에도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고, 그 수량은 어마어마했다. 이건 말이 서재지, 거의 호비트들이 건설해 놓은 대 도시의 도서관에 쌓인 책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것들을 몽땅 다 살펴봐야만 한다는 사실에 아르티어스는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아르티어스는 혹여 똑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살펴보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점검이 끝난 책들은 따로 쌓아뒀다가 어느 정도 양이 되면 한 번에 자 신의 레어로 공간이동 시켰다.
처음에 그가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책의 양에 질려 ‘아버지는 무슨 놈의 책들을 이렇게 많이 수집해 놨지?’ 하 는 원망뿐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도 원하는 책은 보이지 않았고, 쌓여있던 책의 양이 점점 줄어들수록 그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이 수집해 놨지?’가 아니라, ‘왜 이것밖에 수집을 안 해놨느냐.’로 말이다.
결국 마지막 권까지 다 살펴본 아르티어스는 울분에 찬 외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왜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은 없는 거야!”
마법에 미쳐있었던 아버지라면 키메라는 물론이고, 어쩌면 흑마법에까지 호기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아르티어스였다. 드래곤의 특 성상 흑마법을 익힐 수는 없겠지만, 그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할 수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그런 것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 다. 오로지 마법이라는 한 우물만을 깊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만큼, 아르티엔의 마법에 대한 성과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우직함에 아르티어스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그는 신경질 난 김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그대로 벽을 향해 집어던져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책은 세차게 벽에 부딪치더니, 한쪽이 우그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 날아갔 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것만으로는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삭힐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띈 것이 바닥에 쌓여있는 한 무더기의 책들이었다. 자신의 레어로 공간이동 시키고, 남은 마지막 책들.
아르티어스는 그 책들을 씩씩거리며 발길로 짓밟다가, 그것도 성에 안차는지 책들을 하나하나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의 발길질에 책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벽에 부딪쳤다. 그가 얼마나 세게 찼는지, 벽에 박혀 들어간 책이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미친 듯이 광기를 표출하던 아르티어스는,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아들놈을 만날 수 없다.
서재 주변에서 일하던 드워프들은 아르티어스가 발작을 일으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다른 곳으로 숨어버렸다.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되기는 싫 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앉아있던 아르티어스는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비틀거리며 힘없이 일어선 그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에게 시킬 수도 있겠지만, 방금 전 자신이 보인 꼴사 나운 모습이 왠지 쑥스러워 직접 움직인 것이다.
책을 한 권씩 주워 모으고 있던 그의 눈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뭔가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보였던 것이다. 서재의 벽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책장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들이 빽빽하게 꼽혀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선반들 사이로 날아간 책 한 권이 벽을 뚫고 들어가 처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발을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심결에 마나를 썼었………….’
하지만 그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마나를 썼을 리가 없다. 만약 썼다면 다른 책들도 모두 다 저렇게 벽에 박혀있어야 할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호기심에 선반 가까이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단 책을 끄집어내고, 선반 사이로 고개를 디밀고 안쪽을 살펴보니 구멍 안쪽에 작은 공간이 있는 게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급히 손가락을 구멍 앞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빛나는 작은 원구가 하나 튀어나왔다. 빛나는 작은 원구는 구멍 안으로 천천히 날아 들어갔다. 그러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구멍 안쪽의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것은 작은 방이었다.
“어라, 이런 비밀공간이 있을 줄이야!”
궁금증이 발동한 아르티어스는 급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책장을 치워버렸다. 그런 다음 마법을 동원해서 벽도 박살냈다. 그러자 비밀의 방이 훤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의 크기는 매우 작았다. 그리고 그 작은 방바닥의 대부분은 마법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는 이동 마법진이었다.
“이게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마법진이지? 혹시 비밀창고로 연결되는………….”
아르티어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마법진 위로 올라설 뻔했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억누르고, 간신히 멈춰 섰다. 뭔가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이렇 게 작은 방에 마련되어 있는 이동마법진이라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흐음…….”
일단 아르티어스는 마법진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동식처럼 보이는 살상용 마법진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추측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제대로 된 이동마법진이 분명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위험성이 감소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동용 마법진의 반대편에 뭔가 이물질이라 도 쌓아놨다면 그곳으로 공간이동해 들어가는 순간, 제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목숨이 날아갈 게 뻔했으니까.
“쩝…, 무턱대고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지.”
어쩌면 이것이 아버지의 비밀창고로 들어가는 관문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할까? 다크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책이 필 요했던 아르티어스로서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직접 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대타를 보내면 될 테니까. 운 좋게도 아르
티어스는 이런 일에 대타로 써먹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닌 엘프를 두 마리씩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엘프들을 불러들였다.
“이 안으로 들어가 봐. 그런 다음 되돌아와서 저게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라.”
아르티어스의 명령을 받은 얼스웨이 후작. 한때 대제국을 지배하며 호령했던 그다. 그런 그가 아르티어스의 말 속에 숨어있는 꿍꿍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옆에 서있는 그랜딜 공작에게 사정하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하지만 그랜딜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그는 가볍게 고개 를 끄덕여, 동료이자 옛 부하의 안녕을 빌어줬다.
이에 모든 것을 체념한 얼스웨이는 멈칫멈칫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그가 마법진 위로 올라서자, 지금껏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마법진이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동하기 시작했다. 희뿌연 빛이 번쩍하는 순간, 얼스웨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르티어스는 그랜딜 공작에게 지시했다.
“의자 하나만 가져다 줘. 그리고 너는 가서 하던 일을 마저 끝마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랜딜은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멈춰선 뒤 살짝 뒤를 돌아봤다. 텅 비어있는 마법진. 과연 얼스웨이 후작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만약 마법진 반대편에 무슨 장난이 쳐져있지만 않다면, 이곳의 좌표를 알고 있는 만큼 그는 무사히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얼스웨이가 돌아오기만을.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얼스웨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함정이었나?”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이곳에 굳이 함정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뭘까?
“으아아! 대체 왜 이런 곳에 이동용 마법진을 만들어 놓으신 거야?”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그의 뇌리에, 갑자기 평소 아버지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했었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간단한 게 진리야.』
그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부터 뀌어댔다.
“흥! 간단한 거 좋아하시네.”
아버지가 말하는 간단한 것은, 절대 간단한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마법을 익힌다고 치자. 이걸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익힐 수 있을까 궁리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아버지는 뒤통수를 쥐어박으며 으르렁거렸었다.
『마법 하나 익히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냐! 간단한 게 진리야. 일단 익히기 시작해. 아무 생각 없이 익히다 보면, 이미 자신이 그 마법 을 익힌 후라는 것을 알게 될 거다.」
그러니까 요는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는데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먼저 행동을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생각이 왜 떠오른 거지?”
맞다. 아버지는 간단한 걸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침입자를 확실히 저지할 수 있는 함정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하 며 따지고 있던 아르티어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조언했었다.
『그렇게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해 봐.』
『어떻게 말입니까?』
『네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침입하는 놈 입장에서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러면 아주 간단해지지 않겠냐?』
“침입하는 놈 입장에서라…………?”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무심결에 마법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깊숙이 숨겨진 이동 마법진을 찾아낸다면, 누구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 게 분명했다. 입구 자체가 벽 안에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던 만큼, 하늘의 도움으로 그 마법진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경계심을 풀고 덥썩 미끼를 물 게 뻔하지 않겠는가. 사실, 하마터면 아르티어스도 그렇게 할 뻔 했고 말이다.
“심리를 이용한 정말 악랄하기 짝이 없는 함정이야.”
저게 만약 함정이라면, 그러니까 어디론가 통하는 마법진을 가장한 함정이라면?
“절대 한 개만 존재할 리가 없겠지.”
뒤져보고 이런 게 여러 개 발견된다면 함정이고, 이것 하나만 있다면 함정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함정이라고 판단된다면, 미련 없이 돌아서면 된다. 아르티어스는 책장을 모두 치운 뒤 벽들을 주먹으로 톡톡 두들겨 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통통…….
벽에서 울리는 소리가 가볍다. 즉, 속이 비었다는 말이다.
벽을 깨고 안을 보니, 방금 전까지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비밀의 방과 똑같이 생긴 방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그냥 함정이었잖아.”
내친김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함정이 더 있는지 찾아봤다. 속속 드러나는 함정들. 서재 안에 만들어져 있는 함정만 해도 4개였다. 그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레어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함정들을 찾아다녔다.
유산을 가져가길 기다리던 어린 드래곤은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들어오자 화들짝 놀랐다.
“여, 여기는 어쩐 일로……………?”
“너는 알 필요 없어.”
지금 어린 드래곤이 머물고 있는 곳은 레어의 입구 쪽으로, 평소 드래곤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에 예속된 노예들이 기거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어린 드래곤은 이곳에 놓여있던 아르티엔이 쓰던 낡은 물품들은 전부 다 창고로 옮겨놓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며놓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아르티어스가 가져갈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어린 녀석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벽을 두들기며 속을 확인해 나갔다. 과연 이곳에도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벽 을 두들기다 힘을 주어 치면, 곧바로 벽이 허물어지며 비밀스런 공간이 드러나자 어린 녀석은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이곳에 둥지를 틀고 꽤나 오랜 시간을 지내왔음에도, 이런 비밀스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 그건 뭡니까? 어르신.”
대답을 안 해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어차피 여기에 둥지를 틀고 살 녀석이다. 혹여 나중에 호기심으로 라도 이 안으로 들어가서 공간이동이라도 했다가는 그날로 드래곤 하나 초상을 치르게 될까 싶어서였다.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으로 목을 쓰윽 그으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흔해빠진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한 함정이야. 공간이동을 하면, 곧바로 사망이지. 지금은 몇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개방하는 거지만, 나중에 내가 돌아간 다음에는 꼭 원상복귀 해두도록 해라. 보물을 노리고 들어온 좀도둑들 저 세상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인 함정이니까 말이야.”
“예, 어르신.”
레어 전체를 이 잡듯 뒤진 결과, 아르티어스는 무려 101개에 달하는 함정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레어 전체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보 면, 처음의 예상대로 침입자를 처치하기 위한 용도인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의문점이 아르티어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01개? 100개면 100개지, 왜 101개지?”
아버지는 완벽한 걸 좋아하는 드래곤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뿌리를 뽑을 때까지 계속하는…………. 물론 함정들을 이리저리 만들다 보니, 우연히 101개 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히 따지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의 습관상 함정의 숫자도 100개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을까? 얼토당토않은 추리인 것 같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자신의 경우에도 잘 숨겨져 있는 비밀창고를 3개씩이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처럼 마법에 미쳤던 드래곤이 비밀창고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저 함정들 중에 하나가 비밀창고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닐까? 숫자도 딱 맞잖아. 함정 100개에, 통로 1개.”
심증은 있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구멍은 101개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쓸 만한 노예는 단 1마리뿐이었으니까.
“잠깐! 가만 생각해 보니 엘프 100마리만 잡아오면, 손쉽게 해결될 문제잖아.”
자신의 추리가 맞다면 1마리는 반드시 살아서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엘프 100명의 목숨이 날아가겠지만, 자신이 죽는 것도 아닌 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해결책이 떠오르자마자 아르티어스는 엘프 사냥을 시작하러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갔다. 좀 더 깊게 생각했다면, 다른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그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드래곤은 아니었다. 하기야 원래 드래곤들이 깊게 생각하며 행동하는 종족이 아니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