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10화 – 기억봉인 마법
기억봉인 마법
“이 아이입니다, 신관님.”
그로부터 며칠 뒤, 신관을 집으로 초대한 커밍스는 라이를 향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에 앉거라, 라이. 신관님께서 네 고통을 덜어주실 게다.”
고통을 덜어줄 거라는 말에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다는 뜻인가? 그런데 자신에 대한 권리는 커밍스의 것인데, 왜 신관이? 라 이로서는 커밍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커밍스도 라이의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신관이 들으라고 한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라이가 헛소리를 나불거려 산통을 깰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이가 대꾸를 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신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부탁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신관님.”
“예, 자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형제님.”
신관은 앉아 있는 라이의 뒤편에 섰다. 신관의 손은 라이의 머리 위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며 주문의 수순을 밟아갔다. 주문이 점차 길어질수록 그의 손에서 뿜어나 오는 빛의 강도는 조금씩 강해졌다.
“리멤브런스 실(Remembrance Seal;기억봉인)!”
신관의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라이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자, 어떠십니까? 형제님.”
라이는 눈을 멀뚱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관님께서는 혹시 저한테 무슨 치료마법이라도 구사하신 겁니까? 저는 별로 아픈 데도 없는데요…….”
라이의 대답에 신관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분이 누구시죠?”
신관의 질문에, 라이는 왜 그런 뻔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제 주인님이시죠.”
“주인님의 이름이 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커밍스님이십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뭔지 아시나요?”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던 신관은 커밍스에게 말했다.
“이상하군요. 신성마법이 듣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마법은 성공했는데…….”
커밍스는 곧바로 손을 들어 신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신관님께서 네게 치료마법을 베푸신 거다. 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 한다고 내가 부탁드렸거든. 자, 이제 여기 일은 끝났으니, 훈련장으로 돌아가 보거라.” “예, 주인님.”
라이가 돌아가고 난 다음, 커밍스는 신관에게 물었다.
“방금 하신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이 실패했다는 겁니까?”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당해보기에 뭐라고 말씀을 드릴수가 없는데……. 뭔가가 마법을 방해했다고밖에는…….”
커밍스는 일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을 방해했다고요?”
“예.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어쩌면 마법을 방해하는 특별한 마법도구를 지니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노예 따위가 그런 귀중한 걸 지니고 있을 리가…….”
여기까지 말하던 커밍스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녀석의 정체 자체가 왠지 조금 수상쩍은 부 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녀석이 자신을 목표로 접근해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달려가서 억지로 사왔지.
“딴 놈을 목표로 잡았었는데, 우연히 내가 먼저 구입해 버린 건가? 아니면 경기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그 일을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것인가?”
마법이 통하지도 않는데 신관을 계속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실례되지 않을 정도의 금액을 신관에게 건넸다. 신관이 돈을 바라고 이리
로 온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음에 또다시 부려먹으려면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었다.
신관을 보내자마자 그는 교관을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소장님.”
“그 녀석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뭔가 수상쩍은 게 없던가?”
“수상쩍은 거라뇨? 그런 걸 숨기면서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소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불알 두 쪽 빼고는 아무것도 가질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커밍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때, 여자노예가 나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마인 테귤러라는 분께서 주인님을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여자노예의 말에 커밍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인 테귤러. 이쪽 업계에서는 꽤나 전설적인 인물이다. 어린 노예를 교육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는 데 있어서는 서로가 비슷했지만, 그 분야는 완전히 달랐다. 테귤러는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최고급품만을 취급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커밍스가 취급하는 주된 품목은 검투장용 노예였다.
취급 품목이 다른 만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커밍스는 테귤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일까? 하지만 궁리하느라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기에는 테귤러는 너무나도 거물이었으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라고…, 아니지. 내가 직접 나가보는 게 좋겠구나.”
사람 좋아 보이는 소탈한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는 중년인. 꽤나 살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원판이 잘 생겼기 때문이리라. “바쁘신데 찾아뵌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자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귤러 씨.”
서로 간에 인사가 오고간 후, 테귤러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그만큼 커밍스가 만만하다는 뜻이리라.
“이번에 구입하신 노예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라이라고 하는……..
“아, 검투장에서 구입한 그 녀석 말씀이시군요.”
“예. 그 아이를 저에게 넘겨주실 수는 없으시겠소?”
굉장히 무례한 요구였지만, 커밍스는 감히 따지지 못했다. 그만큼 테귤러는 이곳 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검투 노예는 취급하지 않으신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물론 검투용 노예는 취급하지 않소. 하지만 호위용 노예는 키우고 있지요. 나는 그 아이를 호위용으로 키워볼까 생각했소.”
노예를 호위로 쓰면 유리한 점이 아주 많다. 특히 비밀유지에 있어서 말이다. 그렇기에 호위 노예의 가격은 아주 비싼 편이었다. 그리고 노예의 실력이 높을수록, 그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호위 노예의 가격이 비싼 걸 뻔히 알면서도, 커밍스는 호위용 노예 시장에 감히 뛰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류층 인물을 밀착해서 호위해야 하는 만큼 무예도 뛰어나야 했지만, 상류층의 예절 또한 확실하게 몸에 배도록 만들어놔야 했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무예라면 몰라도, 예절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타고난 검투사입니다. 귀족들 호위나 한다고 처박혀 있기에는 그 재능이 아깝지요. 제 대답은 거절입니다.”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테귤러의 낯빛이 변했다. 어느새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지고, 탐욕에 가득 찬 얼굴이 드러났다. 테귤러는 심히 불쾌하다는 듯 짜증 어린 어조로 위협했다.
“크흠! 내 청을 거절하는 건 귀하의 신상에 썩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 40골드 드리겠소. 두 번 권하지는 않겠소. 이번에는 잘 생각해서 대답하는 게 좋 을 거요.”
30골드 주고 놈을 사왔으니, 40골드에 판다면 10골드는 이익인 셈이었다. 하지만 라이의 가치가 겨우 40골드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면, 테귤러 같은 거물이 직접 달려와서 협박을 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커밍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여기서 ‘NO’를 한다면 한순간의 기분이야 좋을지 몰라도, 얼마 지 나지 않아 자신은 폭삭 망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그만큼 이 도시에서 테귤러의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커밍스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그 정도라면 고, 공정한 것 같군요. 테귤러 씨.”
화가 치밀다 보니 목소리마저 떨린다. 그 떨림을 테귤러도 눈치 챘을 것이다. 씨익 미소 짓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다. “여기 있소. 녀석에 대한 서류 일체를 넘겨받고 싶소.”
이미 준비해 왔는지, 그는 품속에서 작은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툭 하고 던졌다. 그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라이를 테귤러에게 넘겨줘 버렸다는 말에 교관은 굉장히 아쉬워했다.
“아니, 소장님. 저놈을 테귤러 같은 악당에게 넘겨주시다니…….”
커밍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놈은 놓친 게 아니라, 잡아놓은 걸 뺏긴 게 아닌가. 커밍스로서는 미칠 지경일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하, 하지만.”
“됐어. 어쩌면 녀석은 테귤러에게 갈 운명이었는지도…….”
여기까지 말하던 커밍스는 갑자기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구나! 바로 그거였어.”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장님.”
커밍스는 혹시 주위에 엿듣는 자가 없는지 슬쩍 둘러봤다. 있는 거라고는 테귤러를 접대하느라 내왔던 다과(茶果)를 치우고 있는 여자노예뿐이었다. 즉, 아무도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라이 같은 녀석이 나한테 넘어왔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커밍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자네는 모르겠지만 무슨 짓을 해놨는지 녀석에게는 신관의 기억봉인 마법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교관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직 기억봉인을 실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하지 않으신 게 아니라,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아, 그래서 그때 녀석이 뭔가 이상한 걸 지니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셨던 거군요.”
“그래.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 그런데 오늘, 녀석을 테귤러에게 강탈당하고서야 깨달았어. 녀석은 테귤러를 목표로 어딘가에서 키워진 놈이라는 것을 말이야.”
“암살자…, 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절대적이지.”
“어쨌건 소장님의 원수는 그 녀석이 갚아주겠군요.”
“그래, 그 망할 테귤러 놈만 사라져 준다면 이 도시도 좀 더 살 만해질 텐데 말이야.”
라이를 테귤러에게 뺏긴 커밍스는 불타는 복수심에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더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테귤러가 상류층에 납품하기 위해 키우는 호위용 노예의 절대 다수는 늘씬한 미녀들이었다. 미녀들은 무예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도 서로 데려가려고 야단이었 으니까. 최소한의 노력을 투자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는 여자 노예만 한 게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자 노예를 취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경우처럼 재능이 뛰어난 놈일 경우에는 중간매매만 해도 충분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 었다. 그가 중간매매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정도 인재를 제대로 키울 만한 검법도, 또 교관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커밍스의 집무실이 소박함의 극치를 보여줬다면, 테귤러의 집무실은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바닥은 물론이고 벽면, 천장까지도 아름다운 대리석 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돌의 느낌을 완화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상들, 가구들도 모두 다 최고급품들뿐이다.
테귤러를 시중들기 위해 문가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여자노예들. 몸매도 늘씬할뿐더러, 두 명 다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거의 반나체에 가까울 정도로 간소한 옷차림만을 하고 있다. 테귤러를 찾아온 손님들 중에서는 여자노예를 보고 한눈에 홀딱 빠져가지고는 즉석에서 거금을 지불하고 사간 사람까지 있 었을 정도다.
하지만 테귤러의 사무실에 들어선 무술교관은 그녀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들은 팔기 위해 전시해 둔 상품들로서, 모두 다 순결한 처녀들이었다. 멋 모르고 찝쩍거렸던 놈들치고 단 한 명도 살아남은 놈은 없었다. 그들의 처리에 직접 관여까지 했던 무술교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타고난 전사의 기질이 엿보이는 놈이라고 하던데, 자네가 데리고 있어 보니 과연 그렇던가?”
테귤러의 물음에 무술교관은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뭔가 좀 수상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소장님.”
“수상쩍은 부분?”
테귤러의 무술교관은 과거 용병으로 꽤나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고급검술을 익히지 못했다는 한계로 인해 그래듀에이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실력에 있어 서 그리 뒤처지는 인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인물이 커밍스가 알아낸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흐음…, 이미 검술을 익혔다는 말이지? 그것도 꽤나 깊은 수준까지.”
“예. 제 느낌으로는 틀림없습니다. 녀석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습니다.”
잠시 궁리하던 테귤러. 그는 신음성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크흠…, 암살자라는 말이로군.”
“십중팔구는 그렇습니다.”
“어떤 놈이 보냈을까?”
“커밍스란 놈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놈을 당장…….”
이 시대 대부분의 세력가들이 그러하듯, 테귤러 또한 사병(私兵)들을 키우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도심지 내에서 무장한 병력을 대량으로 키우는 것은 곤란했기 에, 용병대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테귤러는 손을 슬쩍 들어 교관의 말을 막았다.
“경거망동할 사안은 아닐세. 그렇게 대놓고 암살자를 넣는 경우가 있던가? 더군다나 커밍스에게서 놈을 내가 뺏어왔지 않나. 아마, 뛰어난 인재라면 내가 곧장 달 려들 줄 알고, 어떤 놈인가가 함정을 판 것일 게야.”
자신이 하고 있는 노예사업의 폭은 대단히 넓었고, 원수진 놈들 또한 그만큼이나 많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 암살자를 보낸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 만테귤러의 입가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크크, 겨우 암살자 따위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가소로운 것들.”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죽…….”
여기까지 말하던 테귤러는 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군.”
테귤러가 사용하려는 방법은, 우연히도 커밍스가 쓴 방법과 똑같았다. 물론 거기에 초대된 신관의 질은 테귤러 쪽이 한 등급 높았다. 그는 대신관을 끌어들였던 것 이다. 물론 종파는 달랐지만……
“허어, 그것 참 이상하군요. 이럴 리가 없는데…….”
기억봉인 마법을 두 번씩이나 썼음에도 불구하고 먹혀 들어가지 않자, 대신관은 라이가 뭔가 신성마법을 막는 특별한 마법도구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 장했다.
의심 많은 테귤러는 그 자리에서 라이의 옷을 남김없이 벗겨버리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 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대신관님.”
테귤러의 말에 대신관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그것 참..
이때,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교관이 끼어들었다.
“혹시 몸속에 숨긴 게 아닐까요?”
“참,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몸속에 그런 걸 집어넣고 꿰매 버리면 감쪽같을 테니까.”
교관은 라이의 몸을 샅샅이 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그 어느 곳에서도 꿰맨 흔적 따위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으로 직접 몸을 더듬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몸 전체를 이 잡듯 주물렀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요, 대신관님.”
대신관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 떨어져 제대로 마법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대신관은 곧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잠깐 비켜보시구려. 다른 마법을 써보게.”
대신관은 기억봉인이 아니라, 다른 마법을 써봤다.
“불의 힘으로 세상을 정화해 주소서. 화이어!”
대신관의 주문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시뻘건 불덩어리 하나가 둥실 떠오르더니 라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난데없는 불벼락에 라이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라이의 온몸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그 모습을 본 대신관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라이가 뭔가 마법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법을 막았다고 주장했었는데, 라이의 살이 노릇하게 익어버렸으니 무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 마법이 통하는군요.”
대신관은 급히 치료마법을 시전하여 라이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대신관은 황급히 둘러댔다.
“아마 특이체질인 모양입니다. 보십시오. 다른 마법은 몽땅 다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까?”
테귤러는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신관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특이체질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억지가 있는 듯 싶습니다만.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곱씹던 대신관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신의 가호를 받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저 아이를 총애한 어떤 신이, 자신을 떠받드는 저 아이의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겠지요.”
암살자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큰 놈이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대신관에게 대놓고 그렇게 따질 수는 없었다.
“고위 신관도 아닌데, 신의 가호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 아이는 신관도 아니고, 한낱 노예일 뿐인데 말입니다.”
“글쎄요. 이래서 어찌 한낱 인간이 깊고 깊은 신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닐런지요.”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갔지만, 대신관이 와서 해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한 가지는 있었다. 녀석의 기억을 봉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 말이다.
“끄응, 저놈을 어떻게 하지?”
“그냥 죽여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편이 뒤끝도 깨끗하고 말입니다.”
교관의 말에 테귤러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대꾸했다.
“뒤끝이야 그쪽이 깨끗하겠지만, 나는 생돈 40골드를 날리게 된다는 게 문제지.”
“고문을 해볼까요?”
“고문을 한다 해서 놈이 실토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문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릴 정도로 어수룩했다면 테귤러는 지금의 이 엄청난 부를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활한 두뇌와 재빠른 행동 력! 그게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으니까.
“녀석을 다시 이리로 데려와.”
“옛, 소장님.”
테귤러의 호출을 받은 라이는 그가 거주하는 집의 호화로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신관에게 기억봉인 마법을 받기 위해 처음에 불려왔을 때는, 워낙 긴 장했던 탓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빠르게 현 상황에 적응하는 것, 어쩌면 라이가 가지고 있는 가 장 큰 장점 중 하나가 그것일지도 몰랐다.
“이쪽으로 와.”
자신을 안내하는 여자노예.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기에 뒤따라가는 게 곤욕스러울 지경이었다.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보니, 눈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난감했다.
“여기야. 잠깐만 기다려.”
여자노예는 문을 두드린 후 말했다.
“주인님, 라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예.”
문을 살짝 열어주며 여자노예는 말했다.
“들어가 봐.”
라이가 그녀의 젖가슴 앞을 살짝 스치며 들어가는 그 순간, 여자노예는 짓궂은 어조로 라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엉덩이 예뻤어?”
라이의 얼굴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까지 얼굴이 화끈거린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저 앞에 주인이 앉아 있는 만큼, 급히 마음을 진 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난 죽었다.’
테귤러의 집에 있는 여자노예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그가 쓰기 위해 놔두고 있는 노예와 판매용 노예다. 사용하기 위해 놔둔 노예의 경우, 테귤러가 특 별히 허락을 내려 하룻밤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녀들을 건드렸다가는 경을 치게 된다.
그녀들도 그러한데, 판매용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떻게 잘 숨겼다고 해도, 판매가 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처녀라고 해서 프리미엄을 듬뿍 지불하고 구입해간 고객이,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여자노예를 건드렸다가 실종된 남자들에 대한 얘기를 이미 수없이 들었던 라이였기에,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자신이 여자노예에게 수작을 걸었다고 주인이 오해
라도 하면, 내일 떠오르는 해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했던 라이였기에, 이런 사소한 것조차 쉽사리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 다.
“이런 젠장, 미치겠네.’
시뻘건 얼굴로 다가오는 라이를 보며 테귤러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라이는 푹 꿇어앉으며 애걸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절대로 흑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주인님.”
순간 테귤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라이를 이리로 데리고 온 여자노예가 장난을 쳤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나도 잘 안다. 그 아이가 너를 보고 장난을 쳤다는 것을 말이야. 자, 이쪽으로 앉거라. 오늘 참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지? 대신관께서 너를 괴롭힌 거라고 착각하 면 곤란하기에 불렀단다. 자, 마음껏 들도록 해라. 배고프지 않느냐?”
테귤러가 손으로 가리키는 탁자 위에는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고기 종류만 해도 4종류나 되는 데다, 각종 과일들, 향기로운 빵, 그리고 바삭한 과 자들까지…….
영양적인 균형은 잘 갖춰져 있었지만, 맛하고는 무관한 음식들만 먹어왔던 라이였다. 저 음식들 안에 독약이 들어 있으면 어떠하랴. 그로서는 도저히 향기로운 음 식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먹고 있는 라이를 음흉한 눈빛으로 힐끗 바라보는 테귤러. 그는 라이의 잔에 포도주를 듬뿍 따라주며 말했다.
“너무 급하게 먹으면 체하지. 자, 목도 축여가며 천천히 들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주인님.”
“대신관께서 너에게 행한 것은 너의 육체적 능력을 좀 더 활성화시키기 위한 비법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누가 뭐래도 너는 요 근래 입수한 노예들 중에서 눈에 띌 정도로 뛰어난 인재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너같이 뛰어난 인재가 어떻게 노예가 된 거지? 노예문 서를 보면, 말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고 되어 있던데 말이야.”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테귤러의 인상이 빛을 바라는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저 눈빛. 이미 포도주까지 한잔 들이킨 후라, 언제나 신중했던 라이조차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저는 절대로 도둑질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라이는 집을 떠난 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몽땅 다 얘기했다. 오크에게 잡혀 1년 동안 개고생을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납치되어 여기까지 팔려온 모든 과정 들을 말이다.
“저런, 어린 나이에 그런 고생을 했다니. 참으로 안됐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발 저를 풀어주십시오.”
“글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말해주기가 곤란하구나. 나로서도 너를 구입해 오는 데 막대한 돈을 지불한 상태라서 말이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테귤러는 라이를 숙소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지금껏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무술교관은 라이가 돌아가자마자 테귤러의 방으로 들어왔다.
“녀석의 말을 믿으십니까?”
방금까지 짓고 있던 인자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테귤러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전혀.”
“그렇다면 고문을 하시지 않고, 왜 그냥 돌려보내셨습니까?”
“녀석의 눈을 봤지. 자네는 옆방에 있었기에 녀석의 눈을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놈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네. 녀석은 자신이 한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어.”
“그런 연극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테귤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자네는 이상하지 않나? 녀석에게 정신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녀석의 정신은 이미 누군가가 손을 본 게 틀림없어.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정신계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아예 막아버린 것이겠지. 그랬기에 대신관조차도 어쩔 수 없었고 말이야.”
말을 듣던 무술교관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겨우 그런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가지고 진실을 꿰뚫으시다니. 그렇다면 녀석에게는 고문을 해봤자,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겠군요.”
“대신관조차도 두 손을 들 정도로 철저히 정신을 통제해 놓았으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까?”
““녀석의 노예문서를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아. 적혀 있는 것이라고는 노예가 된 후의 것들이지, 그 전의 기록들은 거의 공란으로 되어 있거든. 아무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 단체에서 뭔가를 획책하려다 일이 잘못되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테귤러가 계속 암살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워낙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테귤러 또한 그점을 이용하여 미녀 호위노예를 비싼 가격에 팔아먹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데리고 있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자칫 엉뚱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이지. 이럴 때는 좋은 방법이 있어. 최대한 놈을 빨리 팔아버리는 거야. 물론 적당한 가격을 받고.”
테귤러는 라이에 대한 처리를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문가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던 여자노예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말리스 선생을 모셔오너라.”
“예, 주인님.”
테귤러는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수련마법사(Mage: 3~4 사이클급 마법을 익힌 마법사)인 말리스에게 부탁했다.
“붉은 전갈(Red Scorpion) 용병단에 통신을 연결해 주게.”
“예.”
용병단에는 외부인이 접촉할 수 있는 공개된 통신채널이 한 개쯤은 있다. 고객들의 의뢰를 수월하게 접수받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붉은 전갈 용병단과의 마법통신 이 개통되자, 테귤러는 상대편 마법사에게 전했다.
“저는 마인 테귤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귀 용병단 단장님과의 통신을 원하는데, 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수정구는 시커먼 색으로 변해버렸다. 상대편 마법사가 화상 전송을 의도적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먹통이던 수정구가 다시 훤 하게 밝아졌다. 수정구 안에는 새로운 인물의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강직한 모습의 건장한 사내였다.
“안녕하셨습니까, 단장님.”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예. 이번에 꽤 괜찮은 아이가 하나 들어와서 말입니다. 혹시 구입하실 의향이 있으신가 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단장은 차갑게 대꾸했다.
“계집 노예라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네.”
“제가 팔려고 하는 아이는 사내아입니다. 이제 갓 16세로서, 타고난 무재(武)라고 하더군요. 귀족 집안에 호위노예로 빈둥거리며 살다가 죽게 하기에는 너무 아 까운 아이라서 단장님께 먼저 소개시켜 드리는 겁니다.”
“흐음…….”
좋은 물건을 탈취하는 데 있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당이었지만, 물건을 파는 데 있어서는 꽤나 신뢰도가 높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게 테귤러였다. 판매처 는 왕국의 상류층이다. 따라서 속이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가격에 넘겨 신용을 쌓는 편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온 것이다. 등치는 것은 하층민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
“잠깐. 가격은 어떻게 되나?”
“150골드입니다.”
150골드라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아주 뛰어난 용병을 1년 동안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고, 기가 막힌 미모를 지닌 묘인족 1마리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했 다.
“녀석의 실력이 그렇게 좋나?”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2~3년 정도면 충분히 본전은 뽑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더군다나 나이까지 어린 만큼,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친다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까지 시키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단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흐음…, 꽤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군. 하지만 그런 인재를 나한테 건네려고 하는 이유는?”
“단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로서는 그 아이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 아이의 미래를 두고, 오랜 시간 고심해 본 후 내린 결단입니다. 이렇 게 썩혀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이거든요.”
단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쪽으로 내 대리인을 보내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는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저쪽에서 통신을 끊어버린 것이다.
대신관이 라이의 기억을 봉인한답시고 그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 버린 바로 그날 밤. 라이는 난생 처음 보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인을 꿈속에서 만났다. 햇볕에 살짝 그을린 것 같은 피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 가장 특이했던 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옷차림이었다.
몸에 쫙 달라붙게 재단한 얇은 천으로 제작된 옷이었는데, 그녀의 가녀린 몸매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껏 자신이 만나본 여자들 중에서도 그 녀가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미모에서는 테귤러의 집에서 본 여자노예들에 비해 떨어졌지만 그녀에게서는 상큼한 뭔가가 있었다. 여자를 거의 겪어보지 않은 그였기에 뭐라고 표현하 기는 힘들었지만, 매력적인 뭔가가…….
어쨌건 그 여인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화 상대는 사내인 모양이다. 사내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
곧이어 여인은 흙바닥에 특이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다리를 이상하게 꼬고 앉은 것이다.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녀의 겉모습뿐이 아 니라, 그녀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까지도 또렷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그녀의 아랫배 근처에서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곧 엄청난 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곳에서 만 그 세력을 키워나간 기운은, 그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속을 한 바퀴 돌면서 움직이는 기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몸 전체를 돌아 원위치로 돌아온 기운은, 쉬지 않고 다시금 밖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운이 여인의 몸속을 한 바퀴 돌 때마 다, 조금씩 덩어리가 불어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운의 덩어리가 여인의 몸속을 한참 동안 회전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에 마치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괴이한 덩어리가 조금씩 생겨나오기 시 작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듯 하던 여인도 그 기운이 정수리 위쪽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눈에 띄게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괴이한 덩어리는 점점 더 커졌고, 또 좀 더 색이 짙어졌다.
꽤나 오랜 시간 그 자세를 유지하던 여인은, 머리 위에 응축되어 있던 안개 같은 것을 코로 쑥 빨아들이더니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그녀는 검을 들고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촌장네 기사들도 검형(劍形)을 연습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기사들의 검술 수련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사들의 수련은 땀방울이 먼저 떠오른다. 그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검형을 배워 익혔기에 몸에 배게 수련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술 수련은 고된 땀방울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무희가 검무를 추듯, 그 동작이 부드럽고 우아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이국적인 느낌의 얇은 천으 로 된 옷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에 착착 감기고 있었기에, 그녀의 늘씬한 몸매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고 있는 그의 눈을 황홀하게 해주고 있었다.
만약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라이는 그녀가 검을 수련하는 것이 아닌, 그저 춤을 추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라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검무가 뭔가 이상하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검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노을과 같은 그런 붉디 붉은 색깔의 빛이. 그리고 한순간 그녀가 곧게 뻗은 검끝에서 뿜어 져 나온 그 붉은 빛이.
콰꽈꽈꽝!
그 빛에 부딪치는 것은 모든 게 다 터져나가 버렸다. 흙도, 돌도, 나무도.. 말도 안 되는 그 모습을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던 라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개꿈이라는 것을.
‘그래, 맞아. 꿈이야.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이 검을 들고 저런 짓을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라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검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무는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때 갑자기 머리에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크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끔찍한 사내의 목소리. 요 근래 자신의 단잠을 깨우고 있는 선배 노예의 목소리였다.
“이 자식이 일어나라니까, 잠꼬대는. 빨리 안 일어나?”
라이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 예.”
“날이 밝았는데도 속 편하게 잘도 자는군. 빨리 씻어라. 곧 아침수련이 시작되니까.”
“예, 아이고 머리야.”
지금까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벌떡 일어났었으니까. 그만큼 라이가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미적거리다가 머리통을 맞기까지 했다. 집 떠난 이후로 이렇게 푹 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너무 깊게 잠든 탓인가? 뭔가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이 내 몸의 육체적 능력을 활성화시켰다고 했지? 그것 때문에 이렇게 깊은 잠이 든 건가? 아차차. 이러고 있을 틈이 없지. 빨리 씻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