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9권 2화 – 여행의 시작

여행의 시작

크라레스 제국을 탈출한 백작이 둥지를 튼 곳은 ‘오츠아’라는 북쪽 변방에 위치한 왕국이었다. 영토는 꽤나 넓은 편이었지만, 거주하는 인구수는 보잘것이 없는 약소국으로서, 영토의 대부분이 아직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불모의 대지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울창한 삼림지대.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남쪽의 무더운 기후에 조성된다는 밀림과는 달리 나무들이 조밀하게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렇듯 말을 타고 이동할 수가 있는 것이었지만.

헤슬러 남작은 일행들을 독려하여 꽤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물론 서두른다고 서두르고는 있었지만,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산길을 가야 했기에 속도는 생각만큼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일행들은 라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지역에 들어서 있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자님.”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헤슬러 경.”

여기서 야영한다는 말에 라이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엉덩이부터 주물러댔다. 말을 탄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엉덩이가 아픈 것인 줄은 지금껏 상상도 해본 적이 없 었기 때문이다.

“이봐, 라이. 네 엉덩이가 먼저가 아니라, 말부터 돌보는 게 먼저야. 알겠냐?”

라이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말을 돌보고 있었다. 라이는 말을 타고 나와서 노숙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을 주의 깊게 훔쳐보고는 그 대로 따라서 했다.

말 등에 매여 있는 묵직한 안장을 풀자마자, 땀에 젖은 말 등이 드러나며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하루 종일 환기도 되지 않고 땀에 절어 있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씻겨 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으니 모두들 닦아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말 등을 깨끗이 닦아준 다음에는, 밤새 말이 뜯어먹을 수 있도록 풀이 많은 곳을 골라 고삐를 묶어줬다. 말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후에야 사람 이 쉴 수 있었다. 저마다 보따리에서 먹을 걸 꺼내 우물거린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틈틈이 보따리에서 먹을 걸 꺼내 요기를 했었다. 그런 만큼 저녁에 자기 전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라이는 기 대했다. 하지만 모두들 요리를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는 안 합니까?”

라이의 질문에 헤슬러 남작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 일대는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다.”

붉은 흙을 이용해서 머리털을 장식하는 걸 즐기는 오크들이기에 편의상 붉은머리 오크라고 불렀다. 겨우 하루 만에 붉은머리 오크족의 영토까지 들어왔다니. 말이 라는 동물을 이용했을 때, 이동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새삼 절감하는 라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라이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오크의 영토라서 왜? 오크의 영토와 식사 준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라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자, 외곽 쪽에 앉아 있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그는 여기 있는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인상이 좋은 편이었고, 실제 성격 또한 그 러했다. 루크는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오크는 불을 겁내지 않아. 그런 만큼 요리를 한답시고 불을 피워놓으면 그건 바로 ‘우리들이 여기에 있으니 습격해 주쇼’하고 오크들에게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 는 거지. 이제 알겠냐?”

“아, 고마워요, 루크 아저씨.”

루크는 아직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다 삼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루에서 커다란 소시지 한 덩어리를 꺼내 크게 잘라내며 말했다.

“너는 야영을 해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런 기초적인 상식조차 모르고 있는 걸 보면.”

“예, 아저씨. 아버지를 따라서 사냥은 몇 번 다녀봤지만, 야영은…….”

얘기를 듣고 있는 헤슬러 남작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며, 라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헤슬러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경험이 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던 모양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야영을 하면서 불을 피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몬스터들이 꽤나 많거든. 특히 오크들이 문제지. 녀석들은 늑대만큼 이나 냄새를 잘 맡으면서도 전혀 불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대충 식사를 마친 타일러가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집어 들더니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기라도 할 생각인가?”

입 안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라이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짐을 들고는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에 한 명씩 올라갔지만, 헤슬러 남작만은 공자를 도와 그와 함께 올라갔다. 밤새도록 그를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뜻이리라.

제일 먼저 나무 위로 올라간 타일러가 가지 위에 앉아서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는 걸 보면, 정말 나무 위에서 자려는 모양이다. ‘젠장. 나무 위에서 자야 할 줄이야…….?

눈치를 보던 라이는 어쩔 수 없이 낑낑거리며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안장을 제외하고 말에 실었던 짐들까지 모두 다 등에 지고 있는 데다가, 몸에는 묵직한 갑옷 까지 걸치고 있으니 나무를 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몸놀림이 날렵한 그라고 하지만, 이렇게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나무를 오르는 건 정말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옆나무를 오르고 있는 조셉 녀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녀석은 덩치가 큰 걸 자랑이라도 하듯 아주 쉽게 쓱쓱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도 낑 낑거리며 올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이의 눈에는 그가 아주 쉽게쉽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제기랄!”

‘저 돼지 같은 녀석도 올라가는데, 내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라이는 악에 받쳐서 사력을 다해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다른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는 정도의 높이에까지 올라섰을 때쯤, 라이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결국에는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

라이는 이마에 흥건히 솟아오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자부심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른들 중에서 아무라도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길 잔뜩 기대하며. 하지만 라이는 그런 헛된 기대는 금방 버려야 했다. 생각해 보니 주위에 있는 어른들은 모두 다 자기 아버지뻘인 중년의 기사들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의 상체는 라이의 것보다 훨씬 더 두껍고 무거운 철판갑옷이었다. 그런 아저씨들도 모두 다 나무를 탈 때 땀 한 방울 안 흘린 것처럼 보이는데, 어찌 새파란 자 신이 힘들다는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라이는 행여 다른 사람이 들을 세라 낮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작부터 이렇게 고난의 연속이어서야, 앞으로의 일정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흉내 내어 자세를 잡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굵은 가지 위로 다리를 쭉 뻗으니 그런대로 잠을 잘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했다. 하지만 평소 잠을 자면서 몸부림이 심한 라이였기에, 혹시 밑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떨어질 테면 떨어지라지.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때, 헤슬러 남작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불침번은 타일러가 서.”

“예.”

헤슬러 남작은 불침번을 설 순서를 지시했다. 물론 공자는 그 순서에서 당연히 빠져 있었다.

점차 어둠이 짙어오기 시작하며, 라이의 기념할 만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나무 위에 자리잡은 라이는 곧이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이 다.

헤슬러 남작은 언제 말을 상실할지 알 수 없었기에, 말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하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는 필요 이상으로 일행을 닦달하며 강행군을 감행했다. 건장한 라이가 겨우 하루 동안의 여행으로 녹초가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큭!”

얼굴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에 라이는 잠에서 깼다. 달빛조차 나무 그늘에 가려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잠결에 벌떡 일어서려 했던 라이는 무게 중심이 흔들리며 하마터면 땅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다.

“허억!”

한순간에 잠이 확 깬다.

이때,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일어났냐?”

“예? 아, 예.”

“1시간 불침번 서고 루크와 교대해라.”

“알겠습니다.”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나를 깨워. 알겠냐?”

“예.”

방금 전에 땅바닥에 떨어져 죽을 뻔한 탓에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어둡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약간 소리를 내서 중얼거려 보는 라이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자 어둠에 눈이 익어 어렴풋하기는 했지만 차츰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절반쯤은 눈으로 보고 나머지 절반쯤은 귀로 듣고 있다고 봐야 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주위가 잘 보이지 않다보니,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날벌레소리, 바람 때문에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소리…….

언제부터 자신이 졸기 시작했는지는 라이도 몰랐다. 워낙 좁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다 보니, 잠에서 깨어난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다시 금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퍽!

“크억!”

배가 터져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에 라이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배를 감싸쥔 채 상체를 앞으로 엎드리고 있는데, 이 번에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등 뒤로 느껴지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헉!”

그제야 라이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들겨 패고 있었던 것이다. 짙은 어둠 속이라 상대가 뭐로 자신을 두들기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모, 몬스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몬스터가 왜 자신을 두들겨 패고만 있겠는가. 진짜 몬스터라면 처음부터 죽이려고 들었지, 이렇게 때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때, 갑자기 상대가 자신의 목줄을 움켜쥐고 힘껏 조여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컥컥.”

어둠을 뚫고 냉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헤슬러 남작의 목소리였다. 라이는 소름이 쫙 끼쳤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냉정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슬러 남작은 라이가 졸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불침번을 서면서 한번만 더 졸았다가는 죽여버릴 테다. 알겠냐?”

라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손의 힘이 풀렸다.

“너는 동료들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렸다. 네가 병사라면 이미 패죽여 버렸겠지만, 아직 어리다는 점을 감안하여 살려주는 거다. 다시는 불침번을 설 때 졸지 마 라.”

“예, 예.”

라이는 온몸이 아리는 고통 때문에 밤새도록 신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라이였기에, 어젯밤에 벌어진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시종을 할 필요가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돌려보내줄까? 아니, 돌아가라고 한다고 해도, 누군가 가 영지까지 안내해 줄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도 모르는 그가 영지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온 사방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단 한 마리도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 쨌건 혼자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길이었다.

“젠장, 두고 보자. 두고 봐. 헤슬러 남작, 언젠가는 오늘 일을 반드시 갚아 줄 거야.”

물론 대놓고 떠들어 댄 것은 아니다. 행여 누가 들을 세라 입속으로 중얼거린 말이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서러울 줄이야.

“어떤 짓을 해서라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거야.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 자신도 현재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급 기사의 자식인 자신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 고지식한 아버지라고 씹어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꽤나 컸었던 라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기댈 수도 없 었다.

혹독했던 첫날, 헤슬러는 꼬맹이들의 정신을 다잡아주기 위해(안 그러면 앞으로의 여행이 꽤나 힘들어질 테니까) 좀 가혹하게 몰아붙인 감이 있었지만, 그게 라이 에게는 오히려 약이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라이는 급속도로 현 상황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그는 더 이상 불침번을 서면서 졸지 않았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힘들더라도 무조건 일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말을 타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은데다 매일같이 강행군을 하고 있다 보니 아무리 라이의 몸이 튼튼하다고 해도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엉덩이와 허리가 무지 쑤시고 아팠다. 말의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허리야…….?”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아 균형을 잡으니, 나무 위였지만 허리 운동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허리를 빙빙 돌리기도 하고, 또 다른 손으로 뭉친 근육을 주무르 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주위의 깊은 어둠 속을 샅샅이 훑어나간다. 마을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라이는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갑자기 라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디선가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급히 숨소리조차 죽이는 라이.

부시럭, 부시럭……..

불침번을 서면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순간, 라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뭔가가 저쪽에 있는 거 같아.’

하지만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라이는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나무 밑에는 말들이 매여 있었다. 몇 마리는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 2마리는 달빛에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적응된 눈이었기에 미약한 달빛임에도 불구하고, 말들의 표정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녀석들은 풀을 뜯지 않고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뭔 가를 느낀 듯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야.”

당황하기는 했지만 라이는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 그건 아마도 몬스터의 흉폭한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기에 얻어진 침착함인지도 모른다. 라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미리 준비해 뒀던 작은 돌멩이를 한 개 꺼내어 헤슬러 남작을 향해 던졌다. 나무 그늘에 가려 있어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그가 어디 쯤에서 잠이 들었는지 확인해 뒀었던 것이다.

곧이어 헤슬러 남작의 피로에 지친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동쪽 방향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말들의 움직임도 뭔가 수상하고 말입니다.”

헤슬러가 급히 밑을 내려다보니 말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들은 뭔가에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녀석, 주위 경계를 제대로 했군.’

첫날, 벼르고 있다가 제대로 걸려들었을 때 박살을 내놓은 게 꽤나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식의 신병 길들이기 쯤이야, 오랜 세월 백작 밑에서 기사 생 활을 해온 헤슬러 남작에게는 흔히 해오던 일이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길을 들이려면 초반에 제대로 하는 게 최고다. 나중에 뒤늦게 길들이려고 해봐야 그때는 이미 늦다. 이미 타성에 젖어버려 제대로 된 습관을 몸 에 붙여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헤슬러는 급히 사람들을 모두 다 깨웠다.

“밑에 뭔가 있다.”

모두들 화살을 장전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겨눈다. 여차하면 바로 발사할 수 있도록. 놈도 이쪽의 부산함을 느낀 것인지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그때부터 기 나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상대가 혹여 오크라면, 이쪽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미지의 적이었다. 다시금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무를 피해 숲의 밑바닥까지 내려온 달빛에 적의 모습이 잠깐이 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드러났다.

2.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장대한 체구, 새파랗게 번쩍이는 두 눈, 개처럼 생긴 길쭉한 주둥이, 길게 솟아나와 있는 무시무시한 송곳니. ‘숲의 유령’이라고 불리 는 트롤이었다.

트롤은 아주 강한 몬스터였다. 거기에다가 놈의 회복력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웬만한 상처쯤은 조금만 쉬면 회복될 정도이기에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놈은 무리를 짓지 않는 몬스터라는 사실이었다. 즉, 저 녀석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는 말이다.

잠시 긴장하기는 했지만, 트롤을 활로 겨누고 있자니 점차 마음이 안정된다. 사람들이 트롤을 ‘숲의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놈의 행동이 워낙 은밀하기 때문 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무리를 짓지 않는 육식동물들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대놓고 쫓아 다녀봐야 잡혀줄 사냥감은 단 하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트롤의 은밀한 접근을 자신은 눈치 챘다. 라이의 얼굴에 짙은 자부심이 어렸다.

‘유령이라고 하더니, 별것도 아니잖아.’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을 때나 유령 소리를 듣는 것이다. 놈은 이미 포착되었고, 지금 모두들 놈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화살촉에는 대형몬스터를 상대하기에 적 합하도록 상처 회복을 방해하는 독약까지 발라져 있다. 제아무리 트롤이라고 해도 화살세례를 받는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라이는 침착하게 헤슬러 남작의 발 사 명령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트롤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중이다. 눈치 빠른 말들이 트롤의 접근을 파악하고는 겁에 질려 동요하 고 있었지만, 트롤은 느긋했다. 도망쳐 봤자, 곧바로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슉!

그때, 갑자기 화살 한 발이 트롤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시위를 놨다. 라이만이 시위를 놓을 타이밍을 놓친 채 멍하니 활을 겨누고 있 을 뿐이다.

퍽!

첫발은 트롤의 몸에 꽂혔지만, 뒤이어 날아간 다른 화살들은 모두 다 빗나갔다. 화살에 맞자마자 트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어떤 새끼가 쐈어?”

헤슬러 남작이 내뱉는 욕설이 들려왔다. 사실, 그의 명령이 있기 전에 화살을 쏴서는 안 됐던 것이다.

만약 놈이 일반적인 육식동물이라면, 그것도 단독 생활을 하는 육식동물이었다면 상황은 여기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화살을 한 대 맞은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테니까. 그들은 상처 입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그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롤은 달랐다. 녀석들은 상처회복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그리고 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놈들은 단독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적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주 호전적인 몬스터였다.

상처 입은 트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어두운 데다가 속도까지 빠르다 보니 놈에게 활을 겨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때, 라이가 놀라서 입을 쫙 벌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트롤이 몸을 날리더니, 몽둥이를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대형급 몬스터의 움직임이라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이다.

붕~ 하고 놈의 몸이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그 상태에서 다른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는 탄력을 이용해 더욱 높이 몸을 띄웠다. 덩치 큰 트롤이 마치 원숭이처 럼 나무를 타는 모습에 라이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는 자신이 나무 위에 있는 만큼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왜 트롤을 ‘숲의 유령’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었다.

트롤같이 덩치가 큰 몬스터들은 나무를 탈 줄 알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걸어서 이동한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몸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나무를 타면, 사람에 비해 월등한 운동신경과 균형감각, 그리고 강인한 근력으로 원숭이만큼이나 재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즉, 트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나무 위는 결코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젠장! 어디로 갔어?”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눈치 챈 트롤은 무식하게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놈은 교활하게도 옆쪽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듯 싶더니 나무그늘 속으로 몸 을 숨겨버렸다. 한밤중이다 보니 놈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낼 방법이 없다.

그때 헤슬러 남작은 트롤의 몸무게 때문에 흔들린 마지막 나무어림을 겨냥한 채 외쳤다.

“저 근처인 것 같다. 모두들 주의 깊게 살펴 봐. 리챠드는 오른쪽, 타일러는 왼쪽!”

모두의 시선이 한쪽 방향으로 집중되었을 때, 리챠드와 타일러는 각기 지시받은 대로 그 옆 부분을 훑었다. 워낙에 재빨리 움직이는 놈이다 보니 아직도 그곳에 있 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때, 타일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10시 방향!”

모두들 일제히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몽둥이를 치켜든 채 나뭇가지들을 징검다리 삼아 공간을 도약해 오고 있는 트롤의 무 시무시한 모습을.

트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타일러 같은 노련한 기사조차도 자신의 코앞에까지 트롤이 돌진해 들어오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 정도다.

하지만 이때, 신이 돌봤는지 트롤이 마지막 도약을 위해 밟은 나뭇가지가 우지끈 하는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 트롤은 몽둥이를 치켜든 자세 그대로 땅바닥으로 추 락해 버리고 말았다.

퍼버벅!

“크아아악!”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트롤이 나뭇가지 위로 떨어진 건지, 아니면 아래쪽에 돋아나 있는 작은 나무 위로 떨어진 건지…….

혼이 빠져버린 타일러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아래쪽을 향해 저마다 화살을 날렸다. 물론 1발만을 쐈을 뿐, 재빨리 재장전 한 채 모두들 아래쪽을 주시한다. “죽지는…, 않았겠죠?”

“겨우 7미터 높이다. 타격이야 좀 받았겠지만,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

모두들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펴봤지만, 트롤의 움직임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놈이 물러난 모양이다.

10여 분 정도를 기다리던 헤슬러 남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검을 뽑아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일견 목숨을 내건 행동처럼 보였지만, 헤슬러로서는 선택의 여지 가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대비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헤슬러를 제외한 모두가 활에 화살을 먹인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헤슬러는 아래쪽을 잠시 살펴보더니 곧바로 나무 위로 올라왔다.

“놈이 물러난 게 확실해. 타일러, 자네가 서 있는 나무의 아래쪽 가지가 부러져 있고, 거기에 피가 흠뻑 묻어 있는 걸 보면 아마 추락하면서 찔린 모양이야. 피의 양 으로 보아 꽤 큰 상처를 입었음에 틀림없어.”

“먹이에 대한 집착이 강한 놈인 만큼, 새벽녘에 다시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웬만큼 상처를 입었다 해도 그 시간쯤이면 충분히 회복이 될 테니까요.”

“내 생각도 그래. 어쨌건 지금은 좀 쉬어 두도록 해.”

“예.”

다른 기사들에게 그렇게 말한 헤슬러 남작은 이번에는 소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활을 쏜 놈이 누구냐?”

어둠 속에서 헤슬러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안 그래도 살기 어린 목소리로 질책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까지 보다 보니 라이는 실신할 지경이었다. 자기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이, 너냐?”

라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남작님. 저,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죠셉, 너냐?”

죠셉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자신이 두려움에 질려 화살을 발사했다는 것도 그 자신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껏 그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 다. 마을 아이들 중에서도 백작의 자식들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가장 강했다.

남을 두들겨 패며 괴롭힌 적은 많아도, 괴롭힘을 당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을을 습격한답시고 왔던 몬스터들을 향해 화살을 쏴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런 자신이 트롤 따위를 보고 공포에 질리다니…….

사실 라이가 트롤의 모습을 보고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녀석이 나무를 탈 줄 모를 거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죠셉은 달랐다. 그는 트롤이 나무를 엄청나게 잘 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공포에 떨어야만 했던 것 이다.

“이런 개새끼! 너구나.”

헤슬러 남작은 나무 밑으로 내려가더니 곧이어 죠셉이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 무자비하게 죠셉을 두들겨 팼다. 이번에는 운 좋게 넘 어갈 수 있었지만,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동료들의 목숨이 날아가기에 적당히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 제발 다시는 안 그럴게요. 흑흑…….?”

죠셉이 이렇게 심하게 매질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마을이라면 그의 아버지의 후광이 있기에 설혹 헤슬러 남작이라고 할지라도 죠셉을 이렇게 막 대할 수는 없었 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죠셉을 바로 잡아 놓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헤슬러 남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손속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