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18화 – 뜻밖의 구원자

뜻밖의 구원자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붕 떠서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 같고,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고…….

“물… 물…….”

다른 것은 몰라도 물을 안 먹고 사람이 오랫동안 살 수는 없다. 밥이야 한 달 정도 안 먹어도 살지만 물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공주의 경우 거의 24시진(48시 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뛰는 자의 무뚝뚝한 대답…….

“조금만 참으십시오. 해가 지고 나면 물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엄청난 시간이 남았지만, 본의 아니게도 묵향이 한 말은 진실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미쳤다고 지금 물을 가져다주냐? 좀 더 고생을 시킨 다음 가져다주지. 자, 다음에는 뭘로 생고생을 시키지? 흐흐흐흐흐…….?

공주도 물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만 묵향을 뒤쫓아 오는 무리들의 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자가 건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대나무나 사기, 또는 가죽으로 만든 자그마한 물병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제법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 이틀에 걸친 격렬한 달리기를 견딜 재간이 없 었던 것이다. 거기다 묵향은 물이 졸졸거리는 소리를 멀찍이에서 듣고는 뻔뻔스럽게도 그쪽을 피해서 도망 다녔으니 그보다 무공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추격 자들은 여태껏 아예 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주는 세 번째 맞이하는 야영에서 처음으로 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흑의 위사는 먹을 것을 구해 온답시고 자신을 놔두고 떠났다가 거의 두 시진이 넘어 나타나 서는 자신의 신발 한 짝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물이 있으니 드시지요.”

흑의 위사가 신고 있는 냄새 나는 가죽신 안에 물이 들어 있었다. 흑의 위사는 그릇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가죽신을 벗어 거기에 물을 담아 왔다는 답이었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평상시의 공주라면 도저히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3일을 굶으면 도둑질을 안 할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음식도 그렇거늘 하물며 물이 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냄새 나는 가죽신에 담긴 물을 마시고야 말았다.

하지만 흑의 위사가 장만해 온 식사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흑의 위사는 가까스로 구했다면서 30여 마리의 털이 숭숭 돋아난 큼직한 송충이들을 나뭇가지에 꿰 어서는 불에 구워 공주에게 권했던 것이다.

공주는 상대가 먹는 모습을 보면 더욱 허기를 느낄 것이 분명하기에 아예 돌아누웠고, 그 때문에 그녀는 묵향도 맛있는 소리를 내며 먹는 척만 했지 숲 속으로 불 에 잘 익은 송충이들을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묵향이라도 그것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좋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묵향이야 오늘도 오리탕 두 그릇에 반주 로 고량주 한 병까지 비운 다음 이리 달려왔으니 먹으나 안 먹으나 별 상관이 없었지만 공주는…….

다음 날 아침도 변함없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쫓고 쫓기는……. ‘그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묵향의 계획대로 공주를 ‘말려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묵향이 헐레벌떡 쫓아오는 적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도망치고 있는데 웬 껄렁하게 생긴 녀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인물로 유약하게 보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왼쪽 눈 위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 뺨 위까지 이어지는 얕은 검상 덕분에 그의 얼굴 은 한편으로 굳건해 보였다. 그의 양쪽 어깨 위에는 1척 반(약 45센티미터)이나 되는, 검에 극성인 외문병기(外門兵器)인 호조(虎爪)가 얹혀 있었다. 남루해 보이는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아마도 떠돌이 무사인 듯한 인물이었지만 묵향의 앞을 경쾌한 몸놀림으로 가로막은 것으로 미루어 꽤나 한 수 하는 작자처럼 보였다. “이런, 매복이 있었나?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경공을 지닌 놈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어젯밤에 예상 경로에 수하들을 매복시켰던지.’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무공으로……. 묵향은 곧 그의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며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적을 제압할 목적보 다는 도망칠 목적이 강했기에 내력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황급히 물러서며 외쳤다.

“멈추시오. 소생은 적이 아니오. 당신들을 돕고 싶어서 그러오.”

묵향은 뒤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다시 몸을 날리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딴 곳으로 꺼져.”

사내도 뒤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거의 30여 명이나 되는 무사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더니 묵향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려 왔다. 묵향이 측정하기에 지금 자 신의 계획을 망치고 있는 이 망할 녀석의 무공은 상당히 뛰어났다.

“재수 옴 붙었군. 저놈의 실력이면 저 뒤쪽에서 쫓아오는 놈들 모두를 처치할 수 있을 거야. 저놈이 나를 돕겠다고 들면 곤란한데…….

“도대체 왜 쫓기는 거요?”

“이런, 망할.. 꺼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상대는 끈덕지게 묵향을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때 묵향으로서는 재수 없게도 배고픔과 목마름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공주 가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상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끼야야악!”

그녀는 아마도 옆에서 따라오는 상대가 여태껏 자신을 추적해 왔던 적들로 오인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말을 걸자 차츰 안정을 취하면서 사정을 설명하 기 시작했다.

“나는 나쁜 놈이 아니오. 무슨 일이오?”

“본녀는 대 송제국의 공주다. 저 뒤의 반도들에게 쫓기는 중인데 그대는 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의무를 다해 본녀를 도와라.”

“공주 마마라고요?”

“그렇다, 본녀가 진영이다.”

상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은 이 녀석을 떨쳐 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놈은 공주 마마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발칙한 놈 같으니……. 어서 꺼져라.”

하지만 상대는 뒤를 한번 힐끗 보더니 공주에게 능청스레 말했다.

“마마를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를 주실 건지…….”

“뭐라구?”

“수고료로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무엄한 놈. 본녀와 흥정을 하자는 말이냐?”

“돈을 주시지 않겠다면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비옵니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그는 일부러 옆으로 천천히 이탈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공주는 상대를 불렀다.

“잠깐, 네놈은 얼마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자는 재빨리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황금 1백 냥!”

“좋다. 본녀를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호위해 준다면 지급해 주겠노라.”

“알겠사옵니다.”

그러더니 상대는 호조를 어깨에서 끌러 양손에 부착했다. 호조란 것은 쇠스랑처럼 굽은 반 척에서 2척 사이의 칼날 네 개에서 일곱 개 정도를 강철로 된 장갑처럼 생긴 것에 붙여 놓은 무기로, 장검을 그 칼날의 사이에 끼워 부러뜨릴 수 있다. 여러 개의 날을 가지고 있으므로 거기에 찢기면 상처를 꿰매기도 힘들며 출혈이 심해 적에게 대단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거기에 양손에 하나씩 착용함으로 인해 검을 가진 상대를 압박해 나가는 데 있어 최상의 병기로 손꼽힌다.

묘조(猫爪)라는 외문병기도 있지만 이것은 호조와는 달리 한치에서 다섯 치 사이 길이의 자그마한 칼날이나 송곳이 붙은 골무처럼 생긴 것으로 끝에 독을 발라 각 손가락에 끼워 사용하지만, 암습을 하는 데나 이용되지 정면 대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 남자가 뒤로 돌아서서 적들에게 달려가자 묵향도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다. 여기서 자신이 뺑소니친다면 아마도 공주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공주를 땅에 내려줬다. 공주는 비실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도와주겠답시고 적들에게 달려간 젊은이를 간절한 소 망을 간직한 채 바라봤다.

다행히 그 젊은이의 실력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당한 실력으로 흑의인들을 죽여 나갔던 것이다. 왜 이런 골짜기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아리송했지만 어쨌건 위급할 때 자신을 도와준다는 데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젊은이가 먼저 덮쳐 온 흑의인들을 모두 다 죽여 버리자 우두머리인 듯한 회의인(人)이 그의 옆에 서 있던 네 명에게 손짓을 했다. 그 네 명은 순식간에 검 을 뽑아 들면서 수비를 무시한 채 강렬한 합격(合格)을 전개했다.

먼저 두 명이 달려가다가 젊은이의 양쪽 어깨 위로 검을 쳐 내렸다. 그러자 젊은이는 순간적으로 호조로 그 양쪽의 검을 막았다. 이때 그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위 험 신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적이 일격을 날리고 곧바로 후퇴할 줄 알았는데, 그대로 힘을 주어 위에서 아래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상대의 검을 막기 위해 호조를 낀 양손에 힘을 주어 버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남은 두 명은 1진의 뒤쪽으로 나타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며 젊은이의 복부 쪽으로 그어 올렸다.

그들의 공격은 대단히 오랫동안 연습을 거친 듯,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공격해 적이 순간적으로 1진의 공격을 막으면 동시에 2진이 공격하는 방법을 취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뒤로 물러서려 한다면 먼저 막았던 두 개의 검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들어올 것이고, 또 2진의 공격이 바로 연결될 것이다. 어디 한 군데 베일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난국을 해소할 길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고약한 일격이었다.

1진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밀어붙이는 덕분에 위로 뛸 수도 없었다. 있다면 한 가지뿐. 젊은이는 1진의 쳐 내리는 검을 호조로 힘껏 뿌리치며 그 둘 사이를 빠 져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위와 뒤는 물론 양옆으로도 움직일 수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가 더욱 기다리던 일이었다. 네 명의 부 하들을 돌진시킨 후 뒤에서 기다리던 회의인이 그 순간을 노려 달려들며 순식간에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그어 왔다. 젊은이의 양손은 1진의 검들을 뿌리치기 위 해 양 옆으로 벌어진 상태……. 회의인의 일격을 온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순간 한 마디 짧은 기합성이 울리면서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얍!”

그와 동시에 그 젊은이의 주위로 순간적으로 강기의 회오리가 퍼져 나가며 사방에서 육박해 들어가던 검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다섯 명의 무사들은 온몸이 걸레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저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 한낱 떠돌이 무사가 아니야. 엄청난 수련을 거친……. 그런데 저런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젊은이는 아찔했었던 듯 창백한 안색에 한숨을 쉬면서 공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만큼 방금 전 연수합격은 대단했었다. 아마도 젊은이의 무공이 대단히 뛰 어나지만 않았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주는 그 대결이 젊은이의 일방적인 도살로 막을 내린 것을 대단히 놀라워했다. 돈밖에 모르는 뻔뻔한 놈이었지만 그 실력 하나는 그자가 청구하는 금액만큼이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 1백 냥이면 은화로 2천 냥이다. 한 가족이 아쉬운 대로 4백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막대한 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공주는 그 금액이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드디어 며칠 동안이나 자신을 쫓아다니던 공포스러운 적들이 모두 시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 미련한 아가씨는 아쉬운 것을 몰라 황금 1백 냥이 어느 정도의 거금인지 잘 알지도 못했기에 처음부터 아깝다는 생각조차 없었지만…….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를 보고 흑의 위사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젊은이는 맥 풀린 표정이었지만 간단히 포권했다.

“과찬의 말씀을…”

““정말 대단한 연수합격이었어. 저 녀석들의 실력이 지금보다 두 단계 정도만 높았으면 충분히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상대의 시큰둥한 마지막 말에 젊은이는 똥 씹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죽고 살아왔느냐 묻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다음부터는 젊은이가 안내하고 흑의 위사와 공주가 그의 뒤를 따르며 길을 가게 되었다. 자신을 사령귀조(死令鬼鳥) 임방(任放)이라 소개한 그자는 야인(野人) 임에도 궁중에서 쓰이는 존대어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욱 수상한 점은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는 예리한 안목, 또 그에 따른 신속한 대응, 허를 찌르는 예리한 수법으로 적을 따돌리는 놀라운 재치라든지, 뛰어난 무공, 모든 면에서 노련한 강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시골구석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상당히 뛰 어난, 그래서 더욱 수상한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공주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외딴 시골 식당이라 그 아무리 좋은 요리라도 황궁의 산해진미에 비할 바 못 되었지만 공주는 정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다는 듯이 아귀아귀 먹어댔다. 곧 공주의 뱃속으로 한 그릇의 오리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양에 안 차는지 그녀는 두 번째의 오리탕을 주문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오리탕을 시켰을 때 임방이 그녀를 제지했다.

“공주 마마, 더 이상은 아니되옵니다.”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방은 말을 이었다.

“며칠 굶으신 듯하온데, 저자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으신 이상 갑자기 음식을 많이 드시면 몸에 해롭사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시면서 내일을 위해 원기를 보충하시옵소서.”

“알겠노라.”

묵향은 또다시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것을 깨달았다. 돼지처럼 꾸역꾸역 처먹고 난 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먹은 것을 다 토하면서 난리를 치기를 기대했었는 데…….

‘하긴, 뭐… 복수도 이 정도 했으면 되었지. 저 좋던 살집이 몇 근은 빠졌을 테니까……. 이제 슬슬 돌려보내고 나도 본타로 돌아갈 궁리나 해야겠군.’

임방은 원래가 공주 마마의 행방불명 때문에 관부에 고용된 현상금 사냥꾼이다. 그는 3류 수준의 무예를 갖춘 악당들을 주로 사냥하기에 무공이 그다지 강하지 않 은 모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추적술은 놀라워서 일단 그가 잡고자 마음먹은 상대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관부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 공주가 있을 것 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황군과 어림군을 파견하기에 앞서 임방 외에도 추격에 능한 다섯 명의 무림인들을 급히 고용하여 파견한 것이다.

임방은 원래 이렇게 큰일에는 끼어들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공주의 납치 사건이라 국가에 대한 얄팍한 충성심으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공주를 무사히 모셨을 경우 거금 황금 50냥을 준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 동행들을 추월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공주만 만 나면 모든 일이 손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공주와 만난 다음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흑의 위사!

공주를 모시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도망 다니는 경공 실력이나 그 침착함, 그리고 며칠씩 굶었다는데도 멀쩡한 태도, 모든 것을 종합해 봐도 꽤나 무공을 수련한 자처럼 보이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무공을 익혔다면 그 자는 상당한 무예를 익힌 것이 분명했다. 그건 여태까지 임방이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런 시러베아들 같은 놈들에게 쫓겨서 며칠씩 산 속을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것을 기회로 자신이 돈을 챙기면서 상대를 도륙내는 데 성공은 했지만 아무래도 저놈의 눈치가 도와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어…….?

임방은 공주가 식사를 마치자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임방은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옆에 빌려 둔 방으로 들어갔다. 임방은 어깨에 걸어 둔 호조를 풀어서 침상 머리맡에다 올려 둔 다음 벽에 기대어 한숨 돌렸다. 그로서도 오늘은 아주 힘든 하루였기 때문이다.

‘무공도 할 줄 모르는 계집을 호위하는 건 정말 싫어. 그리고 그 망할 놈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다니…….?

내심 투덜거리고 있는데 조금 지나자 흑의 위사가 술병을 하나 들고 들어오더니 검대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런 다음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임방에게는 예

의상이라도 마시겠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임방이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흑의 위사가 입을 열었다.

“흐흐흐, 자네는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있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하지만 임방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소리 안 하자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 갔다.

“크… 역시 술은 좋은 거야. 하지만 자네가 의심스런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나도 자네가 의심스럽다네…….”

“…..”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했지만, 사실 자네 정도 실력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도 많지 않을 거야. 현상금 사냥꾼치고는 실력이 너무 좋아. 그리고 강호 경험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나는 어느 정도는 자네의 신분에 대해 감을 잡고 있는데…….”

임방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탁자 위에 올려둔 검집에서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검이 쓱 뽑혀 나오더니 무시 무시한 속도로 임방 쪽으로 날아왔다.

“어기동검(御氣動劍)…….’

임방은 대경하여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젖히며 한 손으로는 호조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그것을 쳐 내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쏘아져 들어오는 검 의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유연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이미 임방의 목을 꿰뚫기 직전의 위치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방심했군. 내가 이렇게 죽다니…….’

임방이 체념한 찰나 상대의 검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임방의 목에서 반 치도 안 되는 거리……. 임방은 상대의 검을 쳐 내지 않고 의아하다는 눈빛 을 던졌다.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보아 상대에게 살심(殺心)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흑의 위사는 아직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편안히 앉은 채 또다시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신 후 임방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자, 사실대로 털어놔 보시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오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무엇을 털어놓으라는 거요?”

“네 녀석은 누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나?”

“그건…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러자 흑의 위사는 마지막으로 한 모금을 더 마신 다음 술병을 탁자 위에 놓고 일어서서 다가갔다.

“꼭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누가 눈물을 흘릴지는…….”

그와 동시에 임방은 비쾌하게 자신의 목 앞에 정지해 있는 상대의 검을 오른손으로 쳐 내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옆에 놓여 있는 호조를 잡았다. 아니 한쪽의 호조가 능공섭물(能空攝物)로 끌려 들어와 왼손에 저절로 끼워졌다. 그러면서 오른발을 들어 족장(足掌 : 발바닥)에서 그 빌어먹을 녀석을 향해 장풍을 쏘았다. 하지만 임 방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새 벌써 혈도를…….?

임방이 쏜 강맹한 장풍을 흑의 위사는 피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으로 맞았고, 펑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 와 중에 언제 격공점혈의 고명한 수법으로 임방의 혈도를 짚었는지, 점혈당한 당사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흑의 위사는 장풍 따위 맞은 적도 없다는 듯 서서히 다가오며 임방의 오른발을 들어 발바닥을 힐끗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쯧쯧쯧, 쓸데없는 수고로 신발에만 구멍을 뚫어 놨군. 꼭 눈물을 흘리고 싶다면 뭐 그것도 좋겠지. 나도 고문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는 않거든. 하지만 이건 장담 할 수 있는데 나한테 고문받고 살아서 나간 녀석은 딱 한 녀석뿐이라는 것만은 명심하게나.”

임방은 정말 재수 더럽게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 따위는 허공을空] 격하고 능히 물건을物) 당길 수攝〕 있을 정도 의 내공 조예만 지니면 가능한 기술이다. 능공섭물의 기법만 죽어라고 연습하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어기동검술을 펼쳤을 때, 속도가 빠른 것이 마 음에 좀 걸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검에 기가 응축되어 발생하는 어기충검(御氣充劍)의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호조만 가진다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의 한 수는 그의 마지막 기대감마저 무참히 부숴 버린 것이다. 임방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물었다.

“그 한 명은 누구요?”

“내 사부가 아끼던 녀석이었지. 꽤 장래가 촉망되던 놈이었는데, 그 사실을 일찍이 알았으니까 살았지 안 그러면 염라대왕도 그놈이 누군지 못 알아봤을 거야. 누 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는지는 아주 중요해. 내가 아는 사람의 제자일지도 모르거든.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임방은 거의 포기한 듯 털어놨다. 재수 없어서 사문과 원수지간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현재 가주(家)의 인품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었기에 그는 진실을 말했 다.

“초씨세가에서 배웠소.”

“초씨세가라……. 그렇다면 초우란 놈을 알겠군.”

순간 임방은 속으로 찔끔 했지만 자신이 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주님의 인품은 믿지만 설마 초우 그놈이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허기야 저자의 실력을 보니 못된 짓을 했다면 먼저 초우가 작살이 났겠지……. 이렇게 애 꿎은 나를 잡고 닦달을 하려구…….?

“알고 있소.”

“그 녀석은 누구지?”

“가주의 아들이지 누구겠소?”

“자네는 그 녀석과 어떤 관계지?”

“어떤 관계는요? 그냥 초씨세가에서 무공 좀 익히다가 가주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처지인데…….”

“흐흐흐, 자네의 무공은 겉핥기로 배운 게 아니야. 거의 수십 년을 처박혀서 가전(家傳)의 비급(秘級)을 깊이 있게 배운 적전제자(適傳弟子)라구. 안 그래? 아까 낮 에 써먹은 일초식으로 보아하니 초우란 녀석보다도 몇 등급 위더군. 적전이 아니라면 그 가주의 아들보다 자네의 무공이 강할 수는 없지.”

“먼저 초우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 주면 나도 말을 하겠소.”

“훗!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야. 전에 한 번 내 일을 도와준 적이 있지. 다음에 자네가 그 녀석을 만나거든 그때 일을 발설하면 혓바닥을 뽑아 버리겠다고 한 말을 잊 지 말라고 전하게나.”

“무슨 일인데 도와준 사람을 그렇게 핍박한다는 거요?”

“그건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보자구.”

“내 원래 이름은 초류빈(楚柳濱)이오. 나는 초씨세가에서 자랐고 거기에서 가전의 비급을 배운 것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한 가지 일에서 가주하고 의견이 맞지 않 아 싸우고 뛰쳐나왔소. 지금은 보시다시피 현상금 사냥꾼 노릇이나 하고 있죠.”

“어떤 의견이 차이가 났는데 사문을 버릴 정도인가?”

“그건 말하고 싶지 않소.”

“흐흐흐, 아마 말하는 게 자네 건강에 좋을 거야.”

음흉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상대의 눈빛은 단호했다. 단 한 점의 타협이나 양보조차 불가능함을 느낀 임방은 체념한 듯 실토했다.

“뭐, 좋소. 꼭 숨겨야 할 정도로 구린내 나는 과거도 아니니까. 그때 의견 차이는 사파에 대한 가주의 행동이었소. 나는 사파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찢어 죽여 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소. 그놈들의 사악한 행위를 가주는 그냥 참고 있는 거요. 그래서…..

“웃기는 노릇이군. 사파가 자네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모두 찢어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건 말하기 싫소. 내 신상에 관한 일이고, 또 당신은 알 권리가 없소.”

“흐흐흐, 나는 알 권리가 있지. 나도 사파거든.”

임방은 흠칫하는 표정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흑의 위사를 바라봤다. 사파의 인물이 공주를 호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또 사파의 인물들 중에서 저 정도 뛰어난 고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임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굳은 안색으로 물었다.

“당신은 천마신교의 인물이오?”

“호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말 돌리지 마시오. 사파의 쓰레기들 중에 당신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오. 있다면 천마신교뿐.”

“그래, 본좌는 천마신교의 인물이지. 뭐 천마신교의 인물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으니 그다음을 계속하게나.”

“지옥혈귀(地獄血鬼) 천진악(天進惡)은 잘 지내고 있소?”

“그 녀석이야 잘 지내고 있겠지. 왜 그러나?”

임방은 흑의 위사가 ‘그 녀석’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안색이 바뀌었다. 마교에는 외부에 별로 잘 알려진 인물이 없었다. 잘 알려진 수뇌부로 는 막강한 무공을 지닌 4천왕이 있었고, 그다음 고수로 알려진 인물은 고루혈마(枯?血魔) 외총관과 음희(淫嬉), 지옥혈귀(地獄血鬼) 정도였다. 그 나머지 인물들은 무림에서 거의 활동을 안 하기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4천왕 같은 경우에도 정파에서 3황5제라고 칭하며 여덟 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 삼 아 떠들어 대자, 심사가 뒤틀린 마교에서 이쪽은 극마(極魔)의 고수가 네 명 있다고 발표했고, 그 말은 세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여러 문파에 한 명씩 있는 것과 한 문파에 네 명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옥혈귀라면 마교에서도 대단히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그 녀석’이라 칭할 정도라면 이자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당, 당신은 누구요?”

“자네가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 주면 나도 말해 줄지 모르지.”

“내 얼굴에 난 흉터를 그놈이 만들었소. 그것도 내가 무림초출 때… 내 얼굴이 잘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면서 만들어 놓은 상처요. 나는 그놈을 죽이기 위해 죽자 고 수련했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을 때 그놈에게 도전을 해 보려고 했었는데 가주가 나를 막았고, 서로 다투다가 사문을 뛰쳐나왔소. 그리고는 지옥혈귀를 찾 아갔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비무에 응해 줬소. 그에게 패한 다음 사문에 돌아갈 면목도 없어 그냥 현상금 사냥꾼이나 하고 있소.”

“꽤나 재미있는 얘기군. 지금 자네의 실력이라면 조금 더 노력한다면 지옥혈귀를 진짜 귀신으로 만들 수 있지. 어때? 내 밑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그러면 내가 무 공을 가르쳐 주지.”

“당신은 마교인데……. 고마운 제의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교에 들어갈 생각도 없고, 들어가지도 않겠소.”

“자네보고 마교도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야. 지금 나는 마교 놈들에게 쫓기는 처지라고 볼 수 있지. 지금 마교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이야. 그래도 안 되겠 나?”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뭐, 못 믿어도 하는 수 없지. 나는 묵향이라는 사람일세.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력을 갖춘 집단에게 의뢰를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지금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 나에 대해 알아보고 믿음이 가면 찾아오게나.”

“알겠소. 한번 생각해 보겠소.”

묵향은 상대의 혈도를 풀어 준 다음 다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마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