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23화 – 구휘(區)의 무덤

구휘(區)의 무덤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들어오시오”

백운옥은 초류빈의 허락에 방문을 살며시 열고는 실내로 들어왔다. 묵향은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초류빈은 침상에서 일어나서 탁자 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백운옥이 자리에 앉자 초류빈이 궁금한 듯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내일 오후면 강수에 도착할 수 있을 테고……. 그다음 일정이 없으시다면 소녀를 조금 도와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그러자 백운옥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한번 쏘아본 다음 입을 열었다.

“신검(神劍) 대협에 관계된 일이에요.”

가만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묵향은 대화에 흥미가 없다는 듯 계속 술을 마셨고, 초류빈이 놀라운 듯이 반문했다.

“신검 대협이요?”

“예, 오래전 서문세가에서 우연히 지도 한 장을 입수했어요. 하지만 그걸 해독할 수 없었기에 예로부터 지식이 뛰어난 남궁세가에 의뢰를 했어요. 남궁세가는 몇 달에 걸쳐 그 지도를 해독했고, 그 결론은 놀라운 것이었죠. 신검 대협의 무덤이 있는 위치…….”

“신검 대협의 무덤이라구요? 정말입니까?”

“예, 그걸 알아낸 남궁세가에서는 서문세가 모르게 그들이 그 무덤을 찾으려고 했고, 뒤늦게 눈치 챈 서문세가와 암중에 충돌이 있었죠. 그러면서 시간을 끄는 동 안 그 사실이 조용히 무림에 퍼진 거예요. 지금은 꽤 많은 문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신검 대협이 남긴 것이라면 모든 무림인들의 유산이 아니겠어요? 그래 서 어떤 한 문파가 그걸 독점하지 못하게 막는 사이 그 소문은 더욱 퍼져 버려 지금은 쓸 만한 정보력이 있는 문파들은 다 알고 있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죠. 마교 쪽 에서도 마수를 뻗쳐 오는 것 같고……. 어쩌면 그걸 두고 무림 사상 최악의 혈투라도 벌어질 지경이라구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간질하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요?”

“아니에요. 진짜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요. 지금 거의 다 찾았는데, 지독한 진법을 겹겹이 쳐 놨어요. 그중에는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도 있어요. 원체 방비가 대단 하다 보니 한 문파가 조용히 삼키기는 어렵게 되어 버렸고, 그렇다고 딴 문파에게 그걸 양보하자니 아쉽고……. 그래서 지금은 일부 문파들끼리 뭉쳐서 서로 간에 암중 대결을 펼치는 중이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어느 정도 소문이 퍼져 가던 시점에서 무림맹이 나서서 소문을 차단했으니까요. 지금 무덤 주변은 무림맹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지키고 있어 요. 그리고 그 외곽은 사파 연맹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지키고 있죠. 아직은 진법 때문에 무덤에 진입하지 못한 관계로 서로 간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진법 이 파괴되기만 한다면 그다음은…….”

“엄청난 충돌이 벌어질 거요.”

“맞아요. 그래서 아직까지 진법을 파괴하지 않고 있죠. 진랑이에게 들으니 묵향 대협께서는 천마신교에 몸담고 계시다구요?”

그제서야 묵향은 술 마시기를 중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백운옥을 바라봤다. 보통 그냥 마교라고 부르지만 진짜 마교도 앞에서는 천마신교라고 부른다. 왜 그러냐 하면 일부 마교인들의 경우 마교도라고 불리는 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퉁명스런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운옥은 정중히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그럽니다. 왜 이번 일에 천마신교가 아직까지 참가하지 않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천마신교 내에 세력 쟁탈전이 벌어져서 외부에 신 경 쓰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들었지만, 현경에 이른 고수가 남긴 유산, 그 유산이 걸린 싸움인데 아직까지 거기 참가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좀 수상해서 그러죠. 그 정보를 모를 리가 없는데…….”

“크하하하하하…….”

그러자 묵향은 한바탕 광소(狂)를 토해 낸 뒤 뉘 집 개가 짖었느냐는 듯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백운옥과 초류빈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보며 상대의 생각을 잠시 읽었다. 왜 답을 안 하고 저렇게 웃는 걸까…….

시비의 말로는 마교의 인물이라고 했고 또 그것을 진영 공주에게 확인했다. 혈의를 입은 인물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속도, 그리고 최초의 혈의인을 죽일 때 사용한 무공, 아무리 봐도 어검술 같이 보였지만.. 그리고 낮에는 그 강기의 폭풍 속에서 살아나오는 것까지 봤으니 무공도 고강함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마교 내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마교란 원래가 거의 십중팔구는 무공의 고하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는 단체니까. 그 때문에 지금 백운옥이 상대가 삐딱하게 나오는데도 줄곧 존대를 해 오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그런 그가 질문을 받고 광소를 터트린다면 그 이유는? 웃음을 통해 자신의 표정과 속셈을 숨기고 그럴듯한 대답을 마련할 시간을 벌려고? 아니면 자신은 그따위 것 모른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면?

“웃지만 마시고 대답을 해 보시죠?”

놀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냉랭한 표정으로 백운옥이 말했다.

“크흐흐흐…….?”

묵향은 술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너는 본좌가 누군지 아느냐?”

“…..”

백운옥과 초류빈이 서로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며 무언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대답은 들어 보나 마나였다. 저 녀석들은 묵향이라는 이름만 달랑 알고 있을 뿐 이니까…….

“좋아, 그렇다면.. 그렇게 정보력이 좋다면 지금 마교의 내부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이번의 질문에는 자신이 있는 듯 백운옥이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는 지금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는 중이지요. 교주와 부교주 간에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어지는 비웃는 듯한 물음….

“교주와 부교주라면?”

“한중길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요. 그리고 얼마 전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들 간의 쟁탈전 때문에 외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 사이에 간도 크게 섬서분타의 타주가 반란까지 일으켰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그 덕분에 재미있는 사실이 밝혀졌죠. 겨우 타주급이 반란을 일으켜도 진압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내부 사정이 엉망이라는 걸 말이에요.”

“크하하하하하, 걸작이군. 완전히 소설을 쓰고 있어…….”

또다시 광소를 터트리면서 술을 따르는 걸 보며 얼굴이 시뻘게진 백운옥이 따지듯 물었다.

“모두들 다 알고 있는 걸 그런 식으로 얼버무린다고 누가 속을 줄 알아요?”

“크흐흐흐, 좋아. 뭐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게 진실이겠지. 나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군. 참, 한 가지만 노부가 알려 주지. 바로 그 반란을 일으킨 타주의 이름은 묵 향이란 녀석이야.”

“에엑…….?”

둘은 경악에 찬 눈으로 묵향을 바라보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 백운옥이 질문을 퍼부었다.

“그럼 묵향 대협이…….”

“대협 같은 소리 하지 마. 협(俠) 자만 들어도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이라구. 그냥 타주라고 불러.”

“하지만 묵향 타주님, 지금 반란 중이라면 아주 일이 많으실 텐데 여기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총타에서 진압하러 올지도 모르고.”

“그럴 걱정이 없으니까 이러고 있지. 그리고 구휘의 무덤 건은 여태 모르기도 했지만 노부는 남의 무덤 뒤지는 취미는 없어. 총타가 움직이지 않는 건 이유야 뻔하 지만 노부가 말해 줄 수는 없으니 총타에 가서 물어보라구. 클클클……..”

아직도 방금 묵향이 던진 충격에서 못 깨어난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운옥이 말했다.

“어쨌든 동행하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뭐, 지금은 할 일도 별로 없으니까 일단 공주를 인계하고 따라가 볼까?”

챙! 챙!

갑자기 웬 칼 부딪치는 소리? 그야 당연히 묵향이 공주를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령부에 인도했으니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또다시 복수를 하려는 공주 마마의 야심 찬 계획에 따라 완전무장한 어림군들이 묵향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한 소리였다.

처음 거의 1만의 어림군이 주둔 중인 이곳에 도착한 다음 공주는 돈 달라고 따라온 얄미운 묵향을 잡아서 주리를 틀 목적으로 사령관 임정 장군에게 명하여 수천 의 완전무장한 병졸들을 풀었다. 연병장에서 대규모 패싸움이 벌어졌고 연병장 앞 사열을 위해 높직이 쌓아 놓은 단 위에서 공주 마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묵향 이 포박당한 채 끌려오기를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공주의 바람과는 달리 흑의인의 무공은 정말이지 대단했고, 여기저기 쓰러져 신음하는 병졸들의 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묵향도 후환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직까지 검을 쓰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의 돌주먹이나 돌다리에 맞은 병졸들은 뼈다귀가 부러진 채로 뻗어서 일어서지 못했다. 묵향은 더 이상 여기서 푸 닥거리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저쪽에서 구경 중인 공주 마마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병영의 고위 장수들 10여 명이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 군관들마저 땅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버렸으니 이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공주가 도망가려는 찰나, 그녀의 멱줄은 묵향에게 잡히고 말았다. “끼약!”

“흐흐흐, 네년이 감히 노부를 능멸하려고 들어? 아직도 맛을 덜 봤다 이거지. 그래 오늘 내가 죽나 네년이 죽나 보여 주지.”

쿵! 퍽! 퍽!

손으로 패고, 발로 밟고, 차고.. 오뉴월의 개 패듯이 공주를 패고 있는 묵향을 감히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묵향이 무공의 고수였고, 그의 손에는 공 주 마마가 잡혀 있기 때문이다. 묵향이 공주를 죽여 버렸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아직 죽이지는 않았으니 공주는 사실상 묵향의 ‘인질’인 셈이었고, 그렇다 보니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주변에 널리고 널린 어림군들은 개 맞듯이 맞고 있는 공주를 보며 ‘제발 빨리 죽어 버려라’ 하고 기원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야 공주를 패고 있는 저놈에게 공격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제발… 살려 줘요……. 엉엉….”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입술이 터지고 양쪽 눈두덩이에 퍼런 멍이 들고.. 맞다가 맞다가, 공주는 도저히 이렇게 맞아 죽을 수 는 없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고는 태도를 바꿔서 ‘애걸’이라는 작전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비참한 몰골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는 공주를 몇 대 더 쥐어박아 준 다음 묵향은 더 이상 팰 값어치도 없다는 듯 노려보며 한마디 하는 걸로 오늘의 ‘구 타’를 끝마쳤다.

“또다시 약속을 잊어버리고 까불면 그땐 진짜 맞아 죽을 줄 알아. 아무리 황궁 구석에 숨어 있어 봐라. 노부가 찾아내지 못하나…….”

“예, 예……. 소녀가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엉엉….”

“좋아. 내력을 끌어 모아서 패지는 않았으니 골병까지는 안 들었을 거야. 노부도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봐.”

갑자기 묵향이 공주를 향해 손을 내밀자 눈물에 젖긴 했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가 물었다.

“예?”

“돈 내놔. 황금 1백 냥 준다고 했잖아.”

공주는 저쪽에서 사태를 관망 중인 임정 장군을 눈짓해서 불렀고, 그가 묵향에게 황금 1백 냥짜리 전표를 건네줬다. 묵향은 그것을 품속에 쓱 집어넣은 다음 쓰러 져서 아직도 울고 있는 공주를 일으켜 세운 다음 멍이든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흐흐흐, 즐거운 여행이었어. 그럼…….”

묵향 일행은 유유히 강수를 벗어날 수 있었다. 1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무장시켜 보냈었지만 그곳을 뚫고 들어와서 공주를 개 패듯 팼는데, 또다시 공주를 어딘가 피신시키지도 않고 보복을 감행할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음에는 공주를 황궁 구석에 ‘숨겨 놓은 다음 묵향을 때려잡을 계획을 짜고 있겠지…

묵향은 마차 안에서 초류빈, 백운옥 등 여러 인물들의 무언의 비난을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묵향을 향해 혐오와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예로부터 말이 있지 않은가? 여자에게 강한 남자는 변태밖에 없다구. 그런데 세상에, 백주대낮에 여자를, 그것도 대 송제국의 공주를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 패듯 두들겨 패다니……. 그들로서도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우두머리를 포획하 는 묵향의 그 엄청난 무공을 존경스런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묵향은 공주를 위협하든지 아니면 인질로 잡아 탈출하기를 포기하고 다짜고짜 두들겨 패 기 시작했으니……. 꼭 여자를 그렇게 쥐 잡듯 패야 했을까?

“정말 왜 그러는 거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묵향이 성질을 터트렸다. 모두들 ‘뭔가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보는 듯한 눈길로 계속 힐끔거리니 아무리 성질을 참고 있으려 해도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새까만 후배 놈들이 감히 자신이 누구라고 저따위 눈빛으로 보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왜 그러냐?”

“꼭 그렇게 무공도 모르는 여자를 때려야…….”

“뭐야?”

“때려야 되었느냐구요.”

“당연히 주제를 모르는 계집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두들겨야지.”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우리가 지금 황군들한테 잡혀 있냐?”

“아뇨.”

“그럼 된 거잖아. 왜 그리 잔말이 많아.”

“하지만 상대는 공주라구요. 후환이…….”

“후환 따위 두려워했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도 않았어. 더 이상 까불면, 험험..

묵향은 황급히 뒷말을 중지했다. 사실은 그 아비라도 죽여 버리면 조용해지겠지’하고 말하려 했는데 갑자기 그 아비’라는 존재가 ‘황제’와 동의어라는 사실이 떠 올랐던 것이다. 뭐 나중에 황제를 죽이더라도 지금 여기서 떠들다가 괜히 재수 없으면 ‘모반 음모죄’ 내지는 ‘황제 시해 모의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까불면?”

“갈, 네년이 노부의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배분이냐?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거야.”

급기야 약간 당황한 묵향의 입에서 상소리까지 나오자 백운옥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묵향의 강렬한 살기에 눌려서, 또 상대의 지위를 생각해서 입을 다문 것이 지 정상적인 이해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불만은 눈동자에 남아 있었다.

한바탕의 욕지거리까지 동반한 대화가 오갔기에 마차 안은 정말 쥐 죽은 듯 고요해졌지만, 그 조용함이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의한 것이었기에 모두의 마음은 찜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묵향이 옆으로 손을 뻗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운옥의 시비를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모양이구나. 노부의 성질이 원래 그러니까 안심하려무나.”

원래 묵향은 무림인들처럼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꽤 부드럽게 대하는―그래서 과거에 양녀까지 들였을 정도였으니까―것을 모르는 초류빈이나 백운옥의 눈 이 약간 커졌다. 이 마교 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를 개 패듯 패고, 또 어림군들 수십 명의 뼈다귀를 부숴 놓은 냉혈한이 이런 말을 갑자기 한다고 해서 안심할 멍청한 여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오히 려 더욱 몸을 떨며 묵향의 손길을 피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뒀다. 그런 다음 백운옥에게 물었다.

“피리(笛)나 거문고(琴)가 있느냐?”

“예.”

“잠시 빌려 다오.”

갑자기 또 웬 변덕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조금 주저하기는 했지만 백운옥은 마차의 뒤쪽 구석에 곱게 포장되어 있던 작은 거문고를 꺼내 묵향에게 내밀 었다.

“여기 있어요.”

묵향은 현(絃)을 군데군데 튕기며 잠시 조율을 하더니 금을 뜯기 시작했다.

묵향의 금 솜씨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거의 음악에 있어 백지라고 할 수 있는 초류빈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할 나위도 없었다. 거문고의 음은 낮고 부 드럽게 울리면서 마차 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었고, 모두의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줬다.

백운옥은 묵향이 금을 타기 시작하자 거의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표정은 곧이어 놀라움으로 바뀌었고, 또 조금 있다가는 그 표정도 없어졌다. 그만큼 상대의 금음은 너무나도 부드러웠고,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1각 여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렇게 뛰어난 연주를 하던 묵향의 손이 멈춘 것은 시비의 몸이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전과는 또 다른 어떤 존경과 감탄, 뭐 그런 것들을 담은 눈으로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묵향은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금을 백 운옥에게 건네주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따위 거문고를 들고 다니다니……. 험험, 백씨세가도 돈이 궁한 모양이군.”

묵향은 약간, 정말 약간 쑥스러운 김에 죄도 없는 거문고와 백씨세가를 욕한 다음 눈을 감고 명상하는 척했다. 자신도 자랑스런 마교도로서 방금 전 조금 외도(外 道)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