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권 3화 – 안내자

안내자

만리장성은 과거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찬란한 제국인 부여와 고구려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상대가 기마 민족이라 기동력이 뛰어나 방어에 곤란을 겪었는데, 성을 세우고 나니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자 거기에 재미를 붙여 점차 서쪽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북성(河北省)의 윗부분 동쪽 끝 바다에서 시작하여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의 북단(北端)을 지나 길쭉한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까지 이어져 거의 만 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이 건설된 것이다.

티베트에 근거를 둔 서융족(西戎族)이나 여타 남만족(南蠻族)들은 기마 민족이 아니었기에, 건설하는 데 있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는 장성을 더 이상 확장할 필 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만리장성은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 윗부분에서 끝난다. 대신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운남성(云南省)에는 만리장성에 비해서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는 방어선(防禦線)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정도로도 그들을 물리치는 데는 충분했다.

감숙성의 성도(省都)이자 최고의 군사 도시 난주(蘭州)로 뻗어 있는 잘 발달된 관도(官道)를 따라가다가 보면 난주로 가는 관문이라 불리는 무산(山)이 나온다. 이곳은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과는 달리 산(山)이 아니라 서부 장성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보급의 통로이자 상행위가 융성한, 거대한 상업 도시이다. 무산 방 향으로 흑풍단이 이동 중이라는 것은 그들이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의 산골에 틀어박힐 생각이든지 아니면 좀 더 나아가 북방의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만 리장성이 없는 청해성을 지나 티베트 쪽으로 이동할 생각임을 엿볼 수 있다.

티베트는 산이 많고 지형이 험준하기에 아마도 그들이 자그마한 요새를 건설하고 새로이 정착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몽고 같은 평야에 정착하면 목초를 하기에는 비교적 유리할지 모르지만 흑풍단이 원체 이번에 해 놓은 짓거리가 있어서 몽고인들이 잘 먹고 잘살라고 가만 놔둘 가능성이 없었다. 이 정도가 관도를 따라 말을 달려오며 묵향이 생각한 전부였다.

시간도 적당히 점심시간을 넘어가고 있었고, 때마침 작은 촌락이 나왔기에 묵향은 주저 않고 객점을 찾아들었다. 자그마한 마을치고는 꽤 많은 식당과 여관이 있 었기에 묵향은 그중 그런대로 큼지막한 곳으로 들어갔다. 묵향도 이제는 무림초출이 아닌 만큼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암암리에 모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록 챙이 깊은 죽립을 쓰고 있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당은 작지 않은 규모인데도 꽤 붐비고 있었고, 묵향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간소한 음식을 시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처음 들어설 때부터 이 식당 안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앉은 자리일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이 그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 았으니까……. 이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묵향의 정신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소녀의 음성이었는데 한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오빠는 왜 흑풍단이 있는 곳에 가려는 거죠?”

그러자 제법 위엄을 가장한 점잖은 듯한 목소리.

“그야 그들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지. 나는 연(蓮)아가 생각하는 대로 멍청하게 그들을 도와 싸우러 가는 게 아냐. 그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주려고 할 뿐이 “야.”

그러자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 더 차분했다.

“뭘요? 지금 그들의 진로를 보면 티베트로 갈 거 같던데요?”

“언니 말이 맞아요. 티베트는 산세가 험해서 숨어 들기도 좋잖아요. 그렇다고 남만 쪽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면 사천성이나 운남성 쪽으로 갔을 거 아니에요?” “바로 그거야. 그게 문제라는 거지.”

“뭐가요?”

“만약 그들이 산세가 험한 청해성이나 사천성에 그냥 숨어 있다면 모르겠는데 티베트로 도망가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되지.”

그러자 좀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요? 국외로 도망치는 게 더 안전하잖아요?”

“그게 아니야. 너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있어. 그들이 국내에 숨는다면 이건 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

“예.”

“지금 그들을 격파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있냐?”

“무슨 말이에요? 5대 원수부(元帥府)의 군사력은 최강이라구요.”

그러자 거만한 목소리의 남자가 뽐내듯이 말했다.

“쯧쯧…, 평상시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지금 어림군(禦臨軍)의 군사력은 거의 대부분 요와의 전쟁에 출동해 있지. 그러니 남은 군사력은 거의 없다고 봐 야 돼. 지금 어림군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곳은 정북원수부와 정서원수부뿐인데, 정서원수부는 들리는 소문으로 남만족과의 사이도 안 좋고, 또 산적 토벌 등으로 병력을 뺄 수 없어서 대요전쟁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정북원수부뿐인데, 그 20만 정예군을 빼 버린다면 만약 요와의 전쟁이 힘들어지면 그 뒷감 당을 누가 할 거야? 그렇다고 향방군(鄕防軍)을 동원하자니, 그들의 힘으로는 흑풍단을 막을 수 없지. 거기에 각 군영에 있는 장수들이 안 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이 요와의 전쟁에 보내진 마당에 몇 안 남은 수하들을 잃고 싶겠어? 그냥 쉬쉬하며 모른 척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티베트로 도망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구. 티베 트 쪽에 압력만 가하면 되는 거야. 만약 그들의 목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고. 그러면 티베트에서는 고수들을 모아서 그들을 토벌할 거고, 오히려 국내에 남은 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 말이야.”

오랜만에 잘난 척을 좀 해 봤지만, 여동생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애교 어린 야유였다.

“와! 오늘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와우!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다 하고…, 다시 봤어요.”

“이 녀석들이!”

아마도 남매들인 듯,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지만 대화에 흥미를 느낀 묵향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묵향은 이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 하 늘의 도움으로까지 느껴졌다. 우선 오빠라는 자의 말을 들어 보니 묵향보다는 비교적 정보에 밝은 것 같았고, 또 제법 생각이 깊은 인물인 듯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저 녀석만 따라가면 되겠군.”

묵향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조금 차분한 여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샛길로 샌 걸 알면 아버님이 오빨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 어쩔 거예요?”

“괜찮아. 그래 봐야 한 며칠 면벽수련(面壁修練)밖에 더 시키시겠냐?”

“문제는 저희들이라구요. 참, 오빠 이렇게 하면 어떨까?”

“뭐 좋은 수라도 있냐?”

“이왕에 벌 받는 거, 오빠가 다 덮어 쓰는 거야.”

“뭐시라? 이 녀석이…….”

그러자 일부러 애교스럽게 치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오빠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생을 해야지. 안 그래 언니? 오빠 좋다는 게 뭔데. 난 죽어도 벽만 보고는 못 살아. 그러니까 오빠, 응?”

“너한테는 못당하겠군. 좋아, 내가 다 책임지지.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에구… 이것들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고 황화루(黃華樓)에는 언제 갈 거예요?”

“얘는 누가 초출(初出) 아니랄까 봐…….’

“거긴 볼일 끝난 다음에 가자.”

그러자 짐짓 투정하는 말투….

“에이잉, 오빠. 난 빨리 가 보고 싶단 말야. 황화루의 절경이 얼마나 소문이 나 있는데……. 무림인이라면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구요.” “네 말은 꼭 거기 안 가면 무림인이 아니라는 투로 들린다.”

“안 그래? 언니하고 오빠도 다 가 봐 놓고는…….”

그러자 젊잖게 타이르는 목소리…….

“아냐, 거기는 경치야 좋지만 아주 비싼 곳이라 무림인보다는 고관이나 부호의 자제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지. 여기 경치도 이 부근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구. 그래 서 근처에 여관이나 식당들이 많잖아. 황하(黃河)의 절경이 많은 곳은 청해성이지만 감숙성도 그에 못지않은 명소들이 많지. 여기도 그중의 하나이고…….” “그래도 난 이번에 청해호(靑海湖)를 보고 싶다구요.”

“글쎄 나중에 보여 준다고 해도 그러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나가야지.”

“흥!”

남매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대금을 지불한 뒤 말을 타고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들 뒤에 검은 혹이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힐 끗 뒤를 쳐다본 엷은 홍의를 입은 여자가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빠…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

“알고 있었어요?”

“응… 처음엔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식당을 나선 다음부터 따라왔어.”

그러자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옅은 청의를 입은 여자가 뒤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오빠,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말이야?”

“응.”

홍의를 입은 여자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허리에 찬 도(刀)라든지 뭐 낡은 흑의를 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 같지는 않은데……. 우리들 말을 엿들은 관부의 밀정(密偵)이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아무래도 훈련을 받은 밀정이라면 따돌리기는 힘들 거야. 기회를 봐서 해치우는 게 좋겠지.”

그러자 청의를 입은 여자가 흥미가 있다는 듯 물었다.

“언제요?”

“내가 말했지, 기회를 봐서라고.”

“피… 저런 밀정을 없애는 데는 저 혼자 해도 충분하다구요.”

그러자 남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야, 또 다른 밀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살인을 백주 대낮에 할 수도 없잖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숲 속으로 유인해서 없애야 돼.”

그들은 뒤따라오는 밀정을 조심해서 힐끔거리며 도란도란 작전을 짠 다음 이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왼쪽으로 인적이 없는 오솔길이 나 있는 것을 본 그들은 태연 하게 그리로 말을 몰아 들어갔다. 오솔길로 들어서서 2각 정도 갔을까……. 남자는 말의 고삐를 청의를 입은 소녀에게 건네준 다음 몸을 날려 나뭇가지를 밟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4장(약 12미터) 정도 떨어진 큼지막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로 다시금 몸을 날렸다. 그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해치우는 것으로 보아 그 남 자는 대단히 오랜 시간 고련(苦練)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나무 위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청의를 입은 소녀는 앞으로 나가면서 홍의 여자에게 말했다.

“오빠의 신법은 정말 완벽해. 난 언제쯤 저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는 듯한 목소리…….

“꿈 깨거라, 얘야.”

“언니는……. 언젠가는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후훗, 토끼 머리에 뿔날 때?”

“흥! 하여튼 미워 죽겠다니까……?

“여기서 기다릴까?”

“응.”

두 여자는 각자 말에서 내린 다음 말들을 끌어다가 도망 못 가게 나뭇가지에 묶었다. 그런 다음 말안장에 끼워뒀던 검을 검집째로 꺼내어 손에 들고는 조심스레 수풀 사이에 숨어서 멀찍이서 살짝 따라오는 밀정을 기다렸다.

청의를 입은 소녀가 자신이 가진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즈막이 힘없이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녀의 손은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살인이라는 미지의 행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챈 홍의 소녀는 약간 놀리는 투로 속삭였다. “오빠가 힘쓰면 네 차례는 오지도 않아. 괜히 맘 졸이지 마. 괜히 흥분해서 함부로 날뛰다가 오빠한테 상처 입히지 말고.”

“언니는? 그러는 언니도 살인은 처음이잖아.”

두 여자가 이상하게도 나타나지 않는 밀정을 기다리다 지쳐 서로를 헐뜯고 있는 사이, 그녀들의 오빠도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밀정은 식당을 떠 난 다음 언제나 30장(약 90미터) 거리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자신은 나무에 남아 밀정의 퇴로를 차단한 후 자신이 직접 해치우든가, 최악 의 경우 합공까지 고려하여 두 동생이 매복을 한 건데, 이놈의 밀정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에게서 30장 거리에서 멈춰 서더니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군. 고수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추격술에 대단히 능한 놈인 모양이군. 잘못 걸렸는데……. 어떻게 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몸을 날려 3장쯤 아래쪽에 위치한 가지를 밟더니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날려 거의 10장을 날아가 재차 다른 가지를 밟고 튀어 오르는 수법으로 삽시간에 흑의인의 뒤쪽에 떨어졌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밀정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챙—.

경쾌한 쇳소리를 내며 검을 뽑은 남자는 즉시 밀정의 목줄기를 겨누었다. 하지만 아직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반항하지 않는 자를 도살할 수 없다는, 얄팍한 정파 인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칼을 뽑아랏!”

“왜 그러시오?”

“왜 그러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게 아니냐?”

그런데도 상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자 다시금 말했다.

“우리 뒤를 미행한 이유가 뭐냐?”

“흑풍단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바로 그거야. 가긴 가겠지만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지.”

“내가 따라가서 안 될 일이라도 있소?”

“그들은 쫓기는 몸, 밀정을 달고 가면…….

“나는 밀정이 아니오.”

“그러면 왜 미행하는 거냐?”

“난 흑풍단과 인연이 있기에 그들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니……. 그대들이 잘 아는 거 같아 따라가면 될 거 같아서 뒤따르던 길이 오. 사실 내가 밀정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미행하겠소?”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군.”

이때 두 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오빠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매복한 위치에서 뛰쳐나온 것 이다. 그런데 막상 싸우고 있을 거라 생각한 오빠가 검을 뽑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밀정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밀정인 듯한 인물에게 물었다.

“하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표라도 있나?”

“증표 같은 건 없소.”

“그렇다면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한참 생각하던 밀정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당신들이 나를 정 못 믿겠다면 점혈(占穴)을 하든지 해서 함께 가면 되지 않겠소?”

“흠…, 그게 좋겠군. 대신 도착해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목숨이 없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좋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몸을 날려 흑의인(黑衣人)의 혈도를 찍었다. 상대가 마음대로 하란 듯이 자세를 바로 하고 있었으므로 점혈은 손쉽게 이뤄졌다. 그래도 남자 는 못 믿겠는지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들어가서 말들을 끌고 와서 자신의 말안장에 있던 수갑을 꺼내서 채웠다. 그 남자는 정파의 후기지수답게 무림을 돌아다니다가 나쁜 짓을 행하는 놈들을 보면 잡아서 관가에 넘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수갑 몇 개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자신도 짐작하지 못 했던 일이다. 그는 수갑을 채우면서 말했다.

“이 수갑은 그냥 강철이 아니라 오철(烏鐵: 검은빛이 나는 합금의 일종으로 현철보다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고 백련정강보다는 튼튼함)로 된 것이니 행여 풀 생각 도 하지 마라.”

“나도 풀 생각은 없소.”

남자는 젊은 나이에 비해 강호 경험이 풍부한지 흑의인의 말안장이나 품속을 뒤져서 행여나 연락에 사용될 만한 도구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품속에 있 는 지갑에는 25냥의 은자와 동전 40 냥이 달랑 들어 있었고, 비수라고 부르기에는 좀 긴 수수한 단검 한 자루, 괴이한 문자가 쓰인 자그마한 천 한 장과 용(龍)이 살 아있는 듯 잘 조각된 작은 옥패(玉牌) 하나, 그리고 소금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웬만큼 무림에 자신 있는 자들도 이렇게 홀가분하게 하고 다니지는 않는데 하다못해 그 흔한 표창 하나 없다니……. 이상하군?!’ 남자는 상대의 옷소매까지 뒤적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가진 것이 모두 이것뿐이오?”

“그건 왜 묻소?”

“혹시 빨리 만나지 못한다면 꽤 멀리까지 가야 하는데 근처 여관에 짐을 맡겨 놓은 게 아닌가 해서 묻는 거요.”

“짐은 이게 다요. 그리고 혹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못마땅하다면 일단 그대가 보관하다가 도착해서 돌려줘도 무관하오.”

혹시나 해서 검집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는 중에 그런 말이 나왔으므로 그 남자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을 저질렀다. 더 이상 살펴 보지 않고 그냥 돌려준 것이다. 만약 그가 검집 속의 검이나 비수를 꺼내 봤다면 상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철(鐵)이란 물 건은 아주 귀하고 값지기에 웬만큼 좋은 검들도 날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조금씩 쓸 뿐, 아예 검 전체를 현철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만일을 대비 해서 비수는 흑의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안장에 찔러 넣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통성명을 했다.

“이렇게 번잡하게 해서 죄송하오. 하지만 이 일은 꽤나 기밀을 요하는 것이고, 또 그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초면에 실례를 한 거니 용서하시오.” ……. 상관없소이다.”

“별로.

“저는 무림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일진검(鎭劍) 초우(礎雨)라 하고 이 아이들은 초연(礎蓮), 초희(礎曦)라 하오.”

“나는 묵향(墨香)이라 하오. 별호 따위는 없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시오.”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지만 이상한 이름이군요.”

“하하하, 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성 따위는 없고, 그냥 묵향이외다. 얼마 전까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국광이란 웃기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참, 흑 풍단에서는 국광이란 이름만 알고 있으니 혹시나 그대가 먼저 만난다면 그렇게 말하면 알 거요.”

“이름이 두 개라……. 어쨌든 수상한 인물이군. 아무래도 좀 더 주의해야겠어.”

초희(礎曦)는 근래 들어 새로이 길동무가 된 인간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 마음이 편치 못하냐고? 그녀의 나이도 이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되어 버린 노처

녀에 가까운 데다 무림초출이라 은근히 이번 기회에 근사한 남자들을 많이 사귀고 싶었고, 또 그중에서 기회만 된다면 장래의 반려자감도 물색하고 싶었다.

원래가 둥지 안에서 고이고이 자라난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으니 타인들과 왕래나 교류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집안 자체가 이름난 무가(武家)였기에 그 잘난 남 자라고는 오빠 말고는 거의 접해 보지 못한 가련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길동무로 통칭 남자라고 불리는 꽤 재미있는 동물이 한 마리 생겼으 니…….

“그럼 대협께선 그렇게 고수(高手)란 말이에요?”

그러자 상대의 자랑스런 대답.

“그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지.”

‘말도 안 돼!’

“그렇게 대단한 대협께선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세요?”

“내 사문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구. 요즘 들어 그 녀석들 이름만 나와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해서 가급적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가 않아.”

상대가 어물쩍 넘어가려 들자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사문과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만 보면 죽이려고 드니까…….”

“파문(破門)…당하셨어요?”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파문은 안 당했군.”

“당신 사부님은 누구신데요?”

“유백이란 분이지. 지금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어.”

“유백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군. 그럼 확인해 볼 건 한 가지뿐이지…….?

“그렇다면 대협의 절기(絶技)는 뭐예요?”

“음, 절기랄 것도 없지만 나는 검을 즐겨 쓰고 무상검법(無上劍法)이 특기지.”

‘들어 본 적도 없는 허무맹랑한 검법 이름이군.’

“그 외에는 어떤 무공들을 익혔어요?”

“그 외에? 엄청나게 많이 익혔지.”

“얼마나요?”

“한… 만(萬) 종류 정도 되나? 기억도 안 나는군.”

‘점점 더…….”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강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몇 가지……..

“음…,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 소수마공(素手魔功), 혈수마공(血手魔功), 회풍무류검법(廻風舞柳劍法), 육합검법(六合劍法), 태청검법(太淸劍法),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

“어쭈, 이거 완전히 정파와 사파의 유명한 무공이라는 무공은 다 말해 대는군. 기가 막혀서…….”

상대가 계속 검법 이름들을 나열하자 더 이상 못 참고 막았다.

“그만… 됐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곤륜파(崑崙派)와는 아주 친분이 깊으셔서 우연한 기회에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을 조금 배웠는데. 잘 아신다니 한 번 구결(口訣)을 말해 보세요.”

“구결? 가만있자…, 구결이 뭐더라……. 허허, 잊어버렸어. 너무 많이 외우다 보니 잊을 수도 있지. 사실 중요한 건 구결이 아니니까.”

상대가 또다시 어물쩍 넘어가자 다시금 꼬치꼬치 물었다.

“그럼 자신 있게 구결을 외울 수 있는 무공이 있어요?”

“가만있자… 이건 아니고……. 응, 음…, 이것도 아니군……. 끄응, 글쎄…, 원체 오래전 일이라 하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휴우, 저러면서 나더러 믿으라고? 웃겨서…….’

“그럼 대협께선 글은 좀 읽으셨어요?”

“글? 천자문(千字文) 같은 거 말인가?”

“아뇨.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 같은 거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에 소학은 읽은 적이 있지. 그리고 몇 권 더 읽었는데, 원체 오래전이라 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군. 무인(武人)으로서 이 정도 읽었으면 많이 읽은 거 야.”

“아예 무식한 놈이라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여기서 초희가 소학이나 대학을 읽었냐고 물은 이유는 어릴 때 천자문이란 낱말 책을 뗀 아동들이 처음에 접하게 되는 문장으로 된 아동용 도서가 소학이기 때문 이다. 소학은 쉬운 문장들을 사용했지만 그 문체가 뛰어난 아주 잘 지어진 책으로서 문장을 익히는 입문 단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상대의 말이 그 정도나 겨우 읽었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이자가 하는 말이 원체 오래전, 오래전 하는 걸 보면 혹시나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고수? 설마……. 하지만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실례가 되지 않게 재 삼 확인을…….?

“대협.”

“왜?”

“이~ 한번 해 보세요.”

“이~”

묵향은 그녀가 뭘 확인하려 하는지 눈치 채고는 한껏 입술을 벌려 자신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누런 이빨들을 보여 줬다. 자신과 같은 영감탱이 반로 환동의 고수인 경우 딴 건 다 젊게 보이지만 이빨만은 어떻게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젊은 애송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런데 묵향도 실수한 부분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니까 기억이 없을 때 자신의 이빨이 몽땅 빠지고 새로 자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빨이 새하얗잖아. 이런 사기꾼 같으니. 그럼 그렇지, 무림인들은 원래가 자부심과 자존심, 아집으로 뭉쳐진 인간들. 그렇게 대단한 고수라면 우리를 닦달해서 끌고 가면 끌고 갔지 오빠가 혈도를 점하고 수갑을 채우도록 놔뒀을 리가 없지. 근사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근사한 남자는 모두 굶어 죽었는지 한 놈 도 보이지 않고 거기다 이런 놈팡이하고 같이 다녀야 하다니. 휴~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해…….’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 이제 산통 다 깨진 허풍꾼을 얌전히 대해 줄 필요가 없었다. 조금 무례하게 대해도 상대는 그런 예의에 있어 무관심한 듯이 행동했기에 같 이 지내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었다. 초희가 보기에 묵향이란 인간의 얼굴은 후하게 봐 주면 그런대로 매끈한 편이지만, 무지무지하게 허풍이 셌고 또 무공에 대해 안하무인인 것처럼 거드름을 피워 대는 놈팡이였다. 초희처럼 명가(名家)에서 자란 자제가 봤을 때는,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으로 허름한 싸구려 도(刀)를 하나 대장 간에서 구해서 허리에 차고는 무림을 돌아다니며 무식하고 가련한 무사들에게 사기나 치는 진짜 바닥 인생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초연이나 초우 같은 경우 상대의 허풍에 질려 버려 아예 말도 안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희의 성격도 성격인지라 자신이 상대해 주지 않으면 완전히 외톨이 신 세가 되는 상대가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말 상대를 해 주었다. 상대가 눈에 빤히 보이는 허풍을, 자기 딴에는 잔머리를 굴려서 곱빼기로 쳐 대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어 이것저것 물어 댔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초희의 관심에 흥이 난 묵향이 더욱 자화자찬을 해 대면, 초희는 그 얄팍한 거짓말에 배꼽이 빠지게 웃어 대 며 재미있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자칭 최고의 고수이자 금(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묵향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또 아무도 없는 곳에 몇 달씩 박혀 있어도 외로움을 탈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과 같이 갈 때 자기들만 얘기하 고 혼자 외톨이로 떼어 놓는 건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을 한 초희라는 묘령(妙齡)의 아가씨가 말상대를 해 주니 자기가 생각해도 꽤나 유쾌한 여행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나 아니면 전에 있었던 싸움 등을 얘기해 주면 이상하게 심각한 장면에서도 까르르 웃는 게 별로 기 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참아 준 것이다.

묵향은 초우란 청년을 처음에는 애송이라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놀랍게도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무림 경험이 있었고, 매 사에 철저함을 좋아했다. 점혈(占穴)을 할 때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점혈 수법은 그냥 힘으로 때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상대의 혈도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진기(臻氣)의 유통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진기가 진신내력(眞身內功)이 아닌 한 공력의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상대가 대단한 고수라면 스스로 진기를 움직여 혈도를 막고 있는 타인의 진기를 소멸시키는 수법도 있다.

그렇기에 초우란 녀석은 매일 아침이 되면 묵향의 혈도를 재차 점혈하는데, 이때 세심하게도 묵향의 혈도에 자신의 내력(內)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본 다음 내 력이 남아 있는 그 위치에 다시 내공을 보탰다. 이건 언뜻 듣기에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 상대가 진짜 고수라고 가정했을 때, 자력으로 막힌 혈도 를 뚫었을 수도 있고 또 아주 드물게 특이한 무공을 익혀 혈도를 이동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점혈을 했던 혈도와 해혈을 하는 혈도를 서로 뒤바꿔 놓으 면 다음 날 자신은 점혈을 한다고 때린 것인데 사실은 해혈을 하게 되는 이치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의에 주의를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시 당사자는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애송이로 평가 절하된 사건이 있었으니…….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지 4일째 되던 날 저녁,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객점에 들었다. 오는 도중에 수소문을 한 결과 무산 남쪽의 탕창(昌) 쪽으로 흑색 갑옷 을 입은 기병들이 이동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탕창 부근을 통과하여 백수강(江)을 건너 사천성으로 들어갈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런 대로 실마리는 잡았기에 푸근한 기분으로 마을로 들어가 여관을 잡고 몸을 대강 씻은 다음 식사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식당이었지만 몇 명이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었고, 그들은 빈 탁자에 널찍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묵향은 거의 잡식 성이라 할 만큼 음식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의 음식까지 몽땅 초희가 주문을 한 다음 객점 안을 둘러봤다. 혹시나 근사한 남자가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였다. 초희는 조금 자아도취 증세가 있는 평가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가문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미모와 말솜씨라면, 안 보여서 그렇지 일단 멋진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자신의 곁에 잡아 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식당 안에 초희가 꿈에도 그리던 멋진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창가에 위치한 자리에 고상한 무늬의 청의(衣)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 간소한 안주를 두고 죽엽청(竹葉淸)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옆 의자에 화려한 문양의 검집을 가진 검이 놓인 것을 보고 제법 형편이 좋은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 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 검은 콧수염을 짧게 다듬은 멋쟁이였다. 거기에 많은 수련을 쌓았는지 간혹 술병 을 잡기 위해 팔을 뻗을 때 드러나는 팔목은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초희가 묵향에게 살며시 말했다.

“대협, 저 사람 정말 멋있죠?”

“누구?”

“저 청의를 입은 사람 말이에요.”

“으음, 글쎄…

제 딴에는 있는 대로 멋을 낸 바람둥이군.”

그러자 초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나는 원체 사람을 못 믿어서 말이야…….”

“그건 병이라구요. 창피한 줄을…….”

그녀의 말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쪽을 힐끗 바라본 그 멋쟁이 청년이 살며시 일어나 자신들이 있는 탁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멋쟁이 청년은 탁자 옆에 다가와서 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절검문(?劍門)의 말학(末學) 진소추(振召秋)라 합니다. 보아하니 무림인이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서로 통성명이나 하시 는 게 어떠하는지요?”

상대가 이렇듯 정중히 나오니 잡배(雜輩)라 해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절검문이라면 섬서성 남쪽에 위치한, 작기는 하지만 검의 명문인 데다 거기에 혼기가 꽉 차 있는 여자가 두 명이나 있으니 어쩌면 이자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모두들 그를 환영했다. 초우도 그에게 마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 진소추 대협이시군요. 저는 초우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제 여동생들로 초연, 초희라 하고 저쪽에 계신 분은 묵향이란 분이오.”

진소추란 남자는 처음부터 묵향이 그들과는 달리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그 옷도 그렇게 고급이 아니었기에 그냥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음식을 먹기 위 해 손을 올렸을 때 묵색(墨色) 수갑이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본 다음에는 아마 묵향을 범죄자쯤으로 인식한 모양인지 아예 상대도 안 했다.

“하하, 대협은 아니올시다. 절검문의 말학 주제에 대협이란 말을 들으면 모두들 욕합니다. 하하…….”

“원, 겸손하시기도. 그래 진 형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예, 저는 이번에 수행도 좀 쌓을 겸, 눈요기도 할 겸해서 무산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산의 절경은 소문이 자자하니까요.”

“그럼 이번이 초출이십니까?”

“아닙니다만 사천 쪽으로는 초행입니다.”

진소추란 사람이 자신들과 거의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 데다 이쪽으로는 초행이라니 처음부터 흑풍단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러 가지 검학이나 세상 돌 아가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소추는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이 호방한 데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차분하고 진중한 말투이기는 했으나, 아주 말을 재미있게 했다. 그렇기에 묵향을 제외한 모두는 진소추의 매력에 빠져 들며 호탕하게 술판을 벌였다.

묵향도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그들의 옆에서 아예 죽엽청을 독째로 가져다 놓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은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일단 마시면 뿌리를 뽑는 성격인 데다 수소문하러 다니면서는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했으니 거의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목구멍에 들이 붓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묵향은 혼자서 한 독을 깨끗하게 비운 후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여태껏 여관을 잡으면 언제나 나란히 위치한 방을 두 개를 빌려 한쪽은 초연과 초희가 사용하고 또 하나는 묵향과 초우가 썼다. 이러는 것이 돈도 절약될뿐더러 만 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처하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초우가 술자리를 파하고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묵향은 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아직도 초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 중 의 하나가 묵향이란 인물은 침대에 누워 자는 꼴을 못 봤다는 것이다. 언제나 벽에 기대고 조금 졸듯이 자거나 밤늦게까지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는지 명상을 하 는지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다음 날 깨어나 보면 이미 일어나 있든지 아니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바뀐 게 하나도 없군.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편히 누워서 잠을 못 잘꼬…….?

초우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귀찮아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초우가 방에 들어온 지 반 시진 후 묵향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설마 하고 있었는데 창문 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더니 약한 들릴 듯 말 듯 한 슈우우우 하 는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독(毒)인가?”

하지만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침상에 누운 초우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독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혼분(迷混粉)이나 미혼향(迷混香)이겠군. 일단 약속을 해 놔서 임의로 해혈을 하기는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고.. 뭐 되는 대로 놔두자…….” 하지만 공력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관계로 1각쯤 지나자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다. 그래서 묵향은 기척 없이 슬며시 움직여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살짝 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요상한 점은 상대가 금품을 털 목적이라면 계집들이 묵고 있는 방보다는 이쪽을 뒤질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문 앞에서 느껴지던 기척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수상했다.

‘금품이 목적이 아니라면 뭐를. 그럼 혹시 인신매매하는 놈들인가? 하기야 초연이란 계집애는 잡혀 가서 곤욕을 치러도 상관없어. 선배 대접도 안 해 주는 못 된 계집은……. 아니지, 그놈이 초연이만 가져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할 수 없군……. 일단 몰래 살펴보고 초연이만 가져가면 놔두고 초희까지 손대면 이 몸이 나 설 수밖에.

여자들이 묵는 방은 바로 옆방이었기에 찾아가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슬며시 움직여 여자들이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다음 기척을 살피니 뭔가가 방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이런 빌어먹을.. 안에서 잠겼군. 창문으로 갈까? 아냐, 이 나이에 내가 창문을 넘어 돌아다니리? 천하제일이라 자부하는 이 몸이? 여관 문이야 별로 강하게 만든 게 아니니 한 대 차면 경첩이 뽑혀 나갈 거야. 차고 들어갈까? 그냥 놔둘까? 지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참! 그런데 계집들이 잡혀가면 초우란 놈도 계집들 구한답시고 헤맬 테니 흑풍단을 손쉽게 만나려면 하는 수 없이 구해 줘야겠군.’

쾅! 콰지직!

발길질 한 번에 문짝은 부서져 나갔고,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여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떤 행동을 하려는 찰나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자 놀라서 묵향 쪽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절검문의 진소추라는 놈이었다. 진소추는 침입자를 보자 하던 일을 중단한 후 손에 든 것을 침상 위에 놓고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침상 옆에 세워 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보며 묵향이 이죽거렸다.

“이봐, 자네 친구들은 어디 있어? 왜 혼자뿐이지?”

“웬 놈이냐? 다치기 싫으면 꺼져라.”

“인신매매면 그래도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놈이니 봐줄 테니까 해약이나 내놓고 꺼져라.”

“미친놈!”

그와 동시에 진소추는 수갑을 찬 채 검도 뽑지 않고 있는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식은 죽 먹기의 상대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검에 작 살을 내려는 듯 공력을 끌어 모아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내리찍었으나, 묵향은 수갑의 사슬을 이용해 간단히 검을 막으면서 즉시 왼발을 날려 낭심(囊心)을 가격했다. 놀랍도록 빠르지만 자로 잰 듯한 움직임이었다. 급소를 가격당한 격심한 통증에 진소추가 인상을 찌그리는 찰나 가격의 반동을 이용해 왼발을 뒤로 빼며 오른발이 사내의 낭심을 다시금 가격했다. 사내가 주춤거리며 내려앉기 직전 뒤로 돌아온 왼발로 땅을 박차고 오르며 이 사내의 턱 아랫부분을 오른발로 차고 뛰어 오른 왼발의 힘을 교묘히 조절하며 왼발로 오른쪽 두개골을 가격했다.

챙 하는 청아한 쇳소리와 거의 동시에 퍽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네 번 동시에 들리면서 누구의 목소린지 처절한 비명성이 울리며 두 사내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 다. 하지만 묵향은 곧 일어난 반면 진소추는 완전히 뻗어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묵향은 아직도 낭심을 감싸 쥐고 신음하는 진소추에게 다가가 힘껏 머리 통을 차 버렸다.

퍽!

“끄윽!”

그다음 진소추의 움직임은 정지했다. 하지만 묵향은 공력(功) 없이 순전히 근육만을 이용한 숙련된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했기에 내력(力)을 쌓은 상대가 그 렇게 심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내공을 끌어올리기가 힘들기에 평상시처럼 점혈을 해 둘 수도 없었다.

“이런 녀석을 밧줄을 구해 묶는다고 해도 힘 한 번 쓰면 끊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초우 녀석 말(馬)에 있는 수갑을 들고 오기도 그렇고, 열쇠도 없잖아. 또 그사이에 도망치면 무슨 개망신이냐……. 이따위 혈도 푸는 건 순식간이지만 생명의 위협이 오는 것도 아닌데 풀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에라 모르 겠다. 막힌 혈도를 우회해서 진기를 모아 보자. 정파 놈들이야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역혈(逆穴)의 내공을 쌓았으니 길이 있겠지.’

진소추가 정신을 대강 수습했을 때 그가 처음 본 것은 자신을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는 묵향이란 사내였다.

‘제기랄, 수갑을 차고 있어서 별로 주의를 안 했는데…….”

묵향은 진소추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소를 짓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호… 이제 깨어나신 모양이군. 자네를 위해 발바닥에 진기를 좀 모아뒀지. 그렇다고 이거 점혈할 정도는 안 되고 조금씩 모으자니 감질나서 못하겠더라구. 그 래도 자네를 잡아 둘 정도는 되니 걱정 말게나. 우선 그 귀한 뼈다귀가 부러지는데, 자네에게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기절한 상태에서 하기는 뭣 해서 말이야.” 퍽!

“크아악!”

설마하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른쪽 종아리뼈가 생으로 부러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진소추가 비명을 질렀지만 묵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한소리 했다.

“역시 무릎 밑에다 나뭇조각을 받쳐 뒀더니 잘 부러지는군. 흐흐, 좀 아픈가? 미안허이. 공력이 모자란 게 죄지. 흐흐, 평상시 같으면 그냥 서로 편하게 혈도를 점 한 후 분근착골(粉筋鑿骨)만 사용하면 술술 부는데 말이야……. 흐흐, 자 이제 말해 보실까? 네놈 패거리는 지금 어디 있어?”

사내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크아… 패거리는 없다.”

“뭐라구?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그러면서 묵향이 부러진 발을 툭툭 차자 뼛조각이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내는 지독한 통증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비명을 질러 대며 발악했다.

“크악! 날 죽여라, 악!”

“패거리는 어디 있어?”

“으악! 모두 말할 테니 제발, 크으아악!”

진소추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하자 묵향은 발길질을 멈췄다. 상대가 정신을 어느 정도 찾도록 시간 여유를 준 다음 재차 부드럽게 물었다.

“패거리는 어디 있어?”

“패거리는 없습니다. 소인 단독 범행입니다.”

“힘도 좋군. 여자를 둘이나 업고 어디로 갈 생각이었냐?”

“업고 가려는 게 아니라…….”

진소추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묵향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으응? 설마…….?

묵향은 약간의 진기를 손끝에 힘들게 끌어 모아 상대의 단전(丹田)을 탐색했다.

“역시, 이종(異種)의 진기(臻氣)가 들어 있군. 더러운 녀석! 사내 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채음보양(採陰補陽)이나 하다니…….”

그러자 진소추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사정하는 진소추를 향해 묵향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채음보양 따위 수법을 써서 남의 진신내력(眞身內力)을 갈취해 봤자 나중에 이종의 진기를 화합시키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야. 채화음적(敵)들이 엄청난 숫자의 계집들을 통해 내력을 흡수할 텐데도 왜 그중에 초고수(超高手)가 한 명도 나오지 못했겠냐? 다 이유가 있다구. 네놈의 기 를 보아하니 지금은 그런대로 상관없지만 더 이상 흡수하면 공력 증대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놔야 할 거다. 알겠냐?”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내놔.”

“예?”

“해약 내놓으라구.”

그자는 침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떨어져 있는 게 해약입니다.”

“저 아이들에게 사용하려는 음약(淫) 같은 게 아니고? 바른대로 말해, 안 그럼 이번엔 왼팔 뼈마저 부숴 주겠다. 난 아주 인자한 사람이라서 목발은 짚을 수 있게 해 주니 걱정 마.”

짐짓 인자한 척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하는 묵향을 보니 이상하게도 온몸에 소름이 쭉쭉 끼친 진소추가 말했다.

“예, 대협……

저건 미혼약의 해약 하고 음약을 섞어 놓은 것입죠. 그편이 일하기가 편해서요…….”

“그럼 음약이 들어가지 않은 해독제는 없냐?”

“없습니다. 그냥 놔두시면 내일 아침쯤 되면 상쾌하게 일어날 겁니다.”

“그래? 추호도 거짓이 없겠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흐음, 좋아. 사실이라고 믿어 주지. 자네 절검문 문하라고 했는데 사실이냐?”

“아닙니다요. 소인이 어찌 그런 명문에 있겠습니까.. 그냥 절검문의 이름만 팔고 있습죠.”

그러자 묵향은 웃음을 터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좋아. 진짜 절검문의 제자라면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사파(邪派)라니 살려 주지. 참,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자네 참 잘생겼군.”

“감사합니다, 헤헤…….”

“난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예?!”

그와 동시에 묵향의 발이 상대의 머리로 날아왔다.

퍽!

“크윽!”

묵향이 차고 난 다음에도 지근지근 문지르던 발을 떼자 코뼈가 내려앉은 뭉개진 코가 비참한 형상을 드러냈다. 묵향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부 드럽게 말했다.

“한결 보기에 좋군. 그래, 이왕에 시작했으니 좀 더 손을 봐 주지.”

팍!

“크아악!”

사내가 부러진 앞니 여섯 개 정도를 뱉어 내는 걸 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주 좋아. 이 정도면 내 취향에 딱 맞군. 앞으로 내 근처에 얼씬거리면 수족(手足)의 뼈다귀를 몽땅 다 부숴 놓고 남은 이빨도 몽땅 뽑아 버릴 테니까……. 빨리 꺼져.”

“예, 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사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는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헐레벌떡 사라지는 뒷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묵향이 나직이 말했다.

“꽤 재미있는 밤이군……. 저따위 놈에게 속아 술을 그렇게 퍼 마시고 일찍이 잠에 곯아떨어지는 걸 보면 아직도 애송이야…….”

그렇게 돼지 멱따는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그만큼 울렸으니 사람들이 나올 만도 하건만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묵향이 하는 수 없이 밑에 내려가 보니 점소이가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묵향은 점소이의 뒷통수를 퍽 하고 때린 다음 젊잖게 말했다.

“방문짝에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바닥에 피가 좀 묻어 있으니 빨리 올라가서 깨끗하게 원상태로 만들어 놔. 알겠냐?”

“예? 예…….?”

점소이가 부리나케 2층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묵향이 혀를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군……. 그렇게 소란을 떨었는데, 아무도 코빼기조차 안 비치니, 쯧쯧. 이만 올라가서 잠이나 조금 더 잘까, 아니면 명상이나 할까…….”

다음 날 아침 느지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남매들은 부스스 일어났다.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숙취 때문에 다들 늦잠을 잔 것으로 여기는 모 양이었다. 묵향도 멍청한 3류 잡배 하나 때려잡은 걸 가지고 자랑스레 말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일은 그렇게 넘어갔고 모두들 세면을 한 다음 1층에 위치한 식당으 로 갔다. 식당에 도착해 초희가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자 묵향이 물었다.

“왜 그러냐?”

“진 대협이 혹시 계신가 하고요…….”

“아, 그 친구라면 아침 일찍 떠났지. 너희들이 자고 있을 때 일이 생겨서 먼저 가니 나중에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군.”

묵향의 얼굴 가죽 두꺼운 설명을 들은 초희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식탁에 모두들 앉았는데도 점소이가 코빼기도 안 비치자 묵향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봐, 주문받아라.”

“예, 나으리.”

점소이가 묵향의 외침에 어디서 나왔는지 쏜살같이 달려와 섰는데, 그 서 있는 모양새가 뭔가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지라 초희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나으리.”

“그럼 숙취에 좋은 음식 좀 있으면 내오거라.”

“예.”

주문을 듣자마자 점소이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어제와는 달리 왜 저 아이의 태도가 이상한지 당사자가 말을 안 하니 모두들 제멋대로 상상할 뿐이었다.

늦은 식사를 한 다음 흑풍단이 있을 듯한 위치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포고문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길을 멈췄다.

「찬황흑풍단의 옥영진은 그 지휘관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막대한 재물을 횡령했고, 그것도 모자라 황권(皇權)을 넘보는 가증스러운 모반을 획책한 바, 그 물증을 확보한 금의위에 의해 자택에서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 잔당들의 일부가 숨어 있으니 흑색 갑주를 입은 무리를 보면 관(官)에 필히 연락하라. 그 정보가 사실임이 확인되면 후사하겠다.

금의위 대영반 이세번」

그 글을 읽고 세상모르는 촌민(村民)들이 한마디씩 했다.

“말세로군. 저렇게 높은 양반이 어쩌자고…, 쯧쯧.”

“저런 녀석까지 썩어 있으니 나라가 안 되는 거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가증스러운 녀석이로군.”

그걸 본 초우가 한심하다는 듯이 촌민들을 훑어본 다음 말했다.

“자, 빨리 출발하자. 내일 점심때까지는 백수강을 건너야 한다구.”

“예.”

애송이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쫓아가는 추격술이나 정보의 분석력에서 초우는 묵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 묶여 개처럼 끌 려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좀 더 빨리 흑풍단을 찾는 데는 이 방법이 좋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으니까…….

초우는 일행들을 몰아서 백수강을 건너 재빨리 이동한 결과 8일 후 흑풍단에 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초우는 마지막으로 촌민(村民)들 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 다음 일행들에게 돌아와서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그들은 저기 보이는 와우산(臥牛山)에 숨어 있는 게 틀림없소. 이미 일단의 관군들이 이 근처를 기점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다 와우산에서 천태산(天態山) 쪽으로 이동하면 청해성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정서원수부의 관할 지역 중에서 비교적 병력이 적은 청해성 쪽으로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오.”

“이 일대에 퍼진 관군은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여태껏 촌민들이 알려준 복색이나 인원을 분석해 보면 정서원수부 관할 병력이 2만 정도……. 그리고 정북원수부 소속이 3만 정도인 것 같소. 그런데 가까운 정 서원수부에서 보낸 병력이 더 작은 거 보면 아무래도 정서원수부에서는 흑풍단과 싸울 생각이 애당초 없는 거 같고, 정북원수부만 조심하면 될 거 같소.”

“그런데 그들이 와우산에 있는 게 확실한가?”

“그럴 가능성이 9할 이상이오. 그쪽으로 이동한 흔적은 미미하게 보이고, 또 저 촌민의 말이 어제 나무하러 가면서 못 본 말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는 것을 봤다 고 하니……..”

“하지만 말 발자국만 보고 그들이 흑풍단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걸?”

“그렇긴 하오만 그 말 발자국은 밤새 생긴 것이니……. 관군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야행을 하겠소? 잘못해서 무공까지 강한 흑풍단의 매복에라도 당하면 전멸을 면치 못할 텐데..”

“그도 그렇군. 하지만 와우산을 넘어 다른 곳에 박혔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요, 와우산은 산세가 거칠어 이동하기 힘든데 우회하지 않고 와우산 위로 올라간 것으로 미루어 험하긴 하지만 산길을 택해서 몰래 이동할 심산인 모양인 데……. 잘 갔다 하더라도 와우산 옆에 있는 우미산이나 장천산쯤까지밖에 못 갔을 거요.”

여기까지 물어본 묵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좋아좋아……. 이제부터는 산길 이동이니 자네들의 도움은 필요 없겠군. 본인도 그런대로 추적술은 자신이 있으니까……. 발자국만 따라가면 될 테 니……. 자 이제부터는 나는 나대로 행동할 테니, 이 수갑이나 풀어 주게나.”

“그건 안 되오. 그대가 첩자인지 그들에게 확인해 보고…….”

“할 수 없군.”

뚝!

묵향이 손을 벌리자 썩은 밧줄처럼 간단히 수갑의 사슬이 끊겨 버렸다.

“그, 그대는 혈도를…, 거기에 그건 오철인데…….”

“네 녀석이 잡은 혈도 따위 푸는 데 별로 시간도 안 걸려. 자, 내놔.”

묵향이 손바닥을 내밀자 아연한 표정으로 초우가 바라봤다.

“예?”

“내 비수 내놓으란 말이다.”

얼떨결에 초우가 내놓은 비수를 받은 후 묵향이 쓱 하고 비수를 꺼내는데, 싸구려 같은 검집과는 달리 안에서 나오는 비수는 놀랍게도 묵빛 광택이 나는 것이 보통 비수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묵향이 비수를 꺼내자 일순 모두 긴장하여 묵향과의 거리를 재며 발검(劍)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놀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묵빛 비수가 갑자기 청 색 화염이 올라오듯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억!”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전설의 어검술(御劍術)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들의 마음에서 투지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도저히 이길 상대가 아님을 그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묵향은 그 비수를 이용해서 썩은 무 자르듯 간단히 손목에 걸린 오철로 만든 수갑을 잘라 낸 다음 비수를 품속에 집 어넣으며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세 명을 휙 둘러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수갑을 채운 네 연놈들을 몽땅 죽여 없애고 싶지만 그래도 여태껏 정이 든 데다 빨리 흑풍단을 찾아준 성의를 생각해 살려 둔다. 만약 다음에 누구 한테 내 혈도를 잡고 손목에 수갑 채웠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혓바닥을 뽑은 다음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니 자나 깨나 명심하도록.”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말 위에 앉은 채로 튕겨 오르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와우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하나의 점이 되어 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초희가 말했다.

“저거 어검술 맞죠?”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구나.”

“무슨 경공술이 저렇게 빠르죠? 말 타고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것 같이 보이는데요?”

“글쎄, 태산을 몰라보고 있었구나……. 아마 여태껏 그가 떠들어 댄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무림은 넓구나. 아버님의 말씀이 무림에는 지금 드러나

있는 25제4천왕이 강하다고 하지만 산골짜기에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은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었지. 나는 그 말씀을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었구 나.

“하지만 오빠, 아무리 그래도 명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고 배웠고, 또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명문의 자제들이 가장 강하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초야(野)에 묻힌 사람이 더 강할 수가 있죠?”

“되지도 않는 무공을 숨어서 수십 년 익혀 봐야 될 게 아니지. 아버님 말씀으로는 천운을 만나 기연을 얻는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기연이라면 어떤?”

“말대로 기이한 인연이지. 어쩌면 우연히 은거기인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기인의 무공비급을 얻을 수도 있겠지. 또 영약을 얻을 수도 있고……. 그 렇지만 첫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고 나머지는 아냐. 보통 비급이라면 정상적으로 기록한 경우는 없고 대부분이 암호나 뭐 그런 비슷한 방식으로 말뜻을 축약하거나 빙빙 돌려놔서 그 오의(悟意)를 깨닫기가 무척 힘들거든. 그리고 설혹 비급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일정한 바탕이 되기 전에는 비급을 얻어도 그건 그냥 종잇조각에 불과한 거야. 또 보통 사람이 영약 따위 먹어 봐야 보신이나 될까, 무공과는 상관없으니까. 아마도 첫 번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겠지.”

“과연 은거기인의 눈에 띄어 그에게 무공을 전수받는 게 가장 현실성이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강한 사람이 은거를 할 리가 거의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니야. 여태껏 무림에는 수많은 명문거파들이 나타나고 또 사라졌지. 아마 사라진 문파들의 후손일지도 모르고.. 또 일부 명문에서 파문당한 고수들도 있 고, 심한 경우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몰려 숨은 자도 있잖냐? 아마 묵향이란 사람도 사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떤 명가에서 쫓겨난 반도 정도겠지. 아마도 사문 에서 쫓겨난 다음 어디 산골짜기에 숨어서 죽자고 무공을 익혔는지도 모르고..

“글쎄요, 그의 말로는 파문은 아니라던데……?”

산속에 세워진 자그마한 정사(靜舍). 얼핏 보면 근방의 유려한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대갓집에서 세운 듯 제법 운치를 가진 자그마한 집이다. 그 정사의 앞쪽으로 는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연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그 낭만과 운치를 간직한 정사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사의 30장(약 90미터) 밖에는 10인 정도의 인물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살벌한 안광(眼光)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기운만으로도 아무리 무 공에 문외한이라도 무시무시한 고수임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극강(極强)의 기운을 뿜어내는 인물들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를 밖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들이 암습 따위의 얄팍한 술수를 익힌 자들이 아닌 정면대결을 위해 그 무공을 익힘에 있어 정도(正道)를 걸 어온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자리는 아마도 비무대(比武) 위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누군 가의 호위를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정직한 무예(武藝)를 익힌 자들을 써먹을 곳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호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극강한 기운을 뿜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까…….

하지만 더욱 큰 의문점은 그들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는 숨이 막힐 정도의 마기(魔氣)를 내뿜는 반면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정파의 고수들도 지니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靜純)한 기운을 갈무리한 것을 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 왜 이렇게 물과 불처럼 어울릴 수 없는 자들이 한 자리에서, 그것도 한 채의 정사를 호위하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정사 내부를 보면 소유주의 품격을 나타내는 듯 대단히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장식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텅 빈 실내지만 몇 가지 준 비된 필수품, 예를 들어 탁자라든지 의자 따위 같은 것은 얼핏 보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하지만 자세히 감정을 해 보면 뛰어난 장인의 화려한 솜씨가 돋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그마한 탁자에는 찻잔이 놓여져 있었고 두 명의 젊은이가 차를 들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껄껄, 처음에 만날 때는 몰랐었는데, 5년 동안 한 번씩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떻게 보면 서로가 많은 부분에서 통하는 점이 있구려.”

그러자 그 청년의 앞쪽에 앉은 청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청년의 피부색은 기괴하게도 자색을 띠고 있었고 은은한 마기를 자연스럽게 흘리는 것이 아마도 촌민들이 봤다면 귀신이라도 만난 줄 알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소? 그 사건이 있은 후 사후 처리를 위해 만난 것이 발단이 되었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흐른 줄은 몰랐구려. 그리고 이번에 본교에서 처리 하기에는 껄끄러웠던 놈들을 공적으로 몰아 없애 줘서 고맙소이다.”

“뭘요, 그대도 껄끄러운 애송이들 처리에 도움을 줬으니 당연한 것이지요. 요즘 본맹(本盟)을 우습게 보는 것들을 귀교(貴敎)처럼 공개적으로 없앨 수도 없으니 난처한 노릇이었지요. 그렇다고 몰래 암살을 하자니 본맹이 의심을 받을 게 당연하고……. 난감했소이다. 참, 그런데 내 보고받은 바로는 묵향이 살아 있다던 데…….”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사실이오.”

“흐음, 그때 완전히 없애 버린 줄 알았건만.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게 말이오. 이거 완전히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꼴이 되었으니 딱한 노릇이외다.”

“악독한 놈의 손에 두 손녀가 죽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런 놈이 살아서 돌아다닌다니……. 하여튼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놈이오. 그놈을 이번에는 완전히 없애 버려서 후환을 제거해야 하오.”

“글쎄 말이오. 하지만 예전에는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쯧쯧.”

“왜 그러시오? 일단 없애기로 한다면 믿을 만한 수하를 시켜 살인, 강간 등을 시킨 다음 모두 그놈에게 뒤집어씌워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그 녀석을 주살하면 간 단할 텐데?”

“예전이라면 그게 통하겠지만 지금은 너무 커 버렸소.”

“왜요? 그는 언제나 혼자서 행동할 텐데. 예전에도 그랬잖소? 그 덕분에 전에도…….”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휴, 그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본좌가 멍청하게도 기억을 잃은 그 녀석을 끝장내겠다고 천랑대와 염왕대를 보냈는데, 그 녀석들이 묵향 편에 붙어 버렸소.” “그럴 수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외다. 그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몰라도 기억을 찾았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니 말이오. 그는 아직도 본교의 인물이고, 또 그의 직위도 살아 있소. 그러니 그 자신이 본교의 율법을 들고 나온다면 이것은 문파 간의 투쟁이나 반도 처리의 문제가 아니오. 다만 교내의 권력 다툼이 된다 이 말이외다. 그 러니 수하들은 모두들 각자 그 권력 암투의 도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고, 십중팔구 그들은 강자의 편에 붙을 수밖에 없소이다. 본교 내의 모 든 권력은 약육강식의 율법을 따르기 때문이오. 만약에 그가 예전의 장인걸처럼 새로운 문파라도 만든다면 오히려 간단한 일이지만 그가 본교의 부교주란 점을 계 속 내세운다면 본교에서 고수들을 투입할 수 없소. 고수들을 보내 봐야 그자가 나보다 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에……. 그가 그 점을 내세운다면 모두 들 그의 편에 설 것이오.”

“흐음, 극강을 자랑하는 마교도 여태껏 그 강함을 지탱해 준 율법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이 생기는군요. 그럼 본좌가 나서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단 말이오?”

“그래 주실 수 있겠소? 하지만 그놈이 거느린 세력은 웬만한 문파쯤은 한 시진도 안 되어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하오. 그 정도 힘을 겨우 맹내(內)의 힘만으로 처 리하긴 힘들 거외다.”

“흠, 그건 본좌도 알고 있소. 어떤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그 멍청이들을 설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참! 문제는 그놈 하나니 살수를 고용하면 안 되겠 소?”

“그 정도의 고수를 처리할 만한 살수가 있겠소?”

“요즘 맹위를 떨치는 살수 집단이 하나 있소이다. 그들에게 청부를 해 볼까 하오. 일단 공통의 적이니 그 비용은 서로 반씩 부담함이 어떻겠소?”

“좋소이다. 그런데 그 살수 집단이라면?”

“아마 그대의 짐작대로일 거요. 요즘은 살수 집단 중에서 흑월회(黑月會)의 솜씨가 제일 좋다고 들었소.”

“과연, 하지만 소문대로 그들의 실력이…….”

“클클,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살수들의 생명은 정보라고 봐야 하오. 개방(쾬幇)과 무영문(無影門)의 할망구한테 의뢰를 해 놨으니 그의 겨드랑이 털 수까지 알려 줄 거요. 그만한 정보를 가지고도 어쩔 수 없다면 비밀리에 처리하긴 힘들 거다.”

“흠, 그렇다면 본좌도 삼비대에 연락해서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그대에게 넘겨 주겠소. 하지만 그놈의 행태가 희한해서 아마도 외부에서 포착해서 암습하기는 힘 들 거외다.”

“행태라뇨?”

“보통 느지렁거리면서 다니다가 한 번씩 경공술을 써서 이동하는데, 그 속도가 정말이지 무식할 정도로 빨라서 완전히 몸을 드러내고 뒤쫓아도 못 따라가는데 어 찌 숨어서 미행을 하겠소?”

“쯧쯧, 그런 문제가 있구려.”

“거기다 예전에 그의 수하로 있었던 놈들의 말을 들어 보면 밖에 나가면 거의 잠도 안 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본거지에 있을 때는 한두 시진 정도는 자는 모양이 오. 그러니 그놈을 덮칠 곳은 본거지뿐이다, 이 말이오.”

“그렇다면 참고로 알아 둘 만한 그놈의 약점 같은 것은 없소?”

“글쎄요…, 그놈의 특기는 강기(剛氣) 종류지만 공력이 비교적 적게 드는 어검술 종류를 더욱 좋아하오. 그렇기에 떼거리로 덤벼드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 거요. 그리고 아마도 그놈은 본교가 자랑하는 흑미륵신공(黑彌勒身功)을 익혔을 테니 웬만한 공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은 줄 수 없소.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체가 금강불괴 (金剛不壞)처럼 외부에서 타격을 막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충격을 분산시켜 흩어 버리는 것이니, 아마도 장법이나 권법 같은 것보다는 무기를 이용한 공격이 타격 이 클 거요.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체가 혈관과 혈도, 뼈를 무쇠처럼 단단하게 해 주니, 그도 장담은 하기 어렵소이다. 아마도 선택된 살수는 무쇠도 손쉽게 자를 수 있는 신병이기(神兵異器)를 사용해야 할 거요.”

“그렇지……. 그때 한 번 보니 그놈의 무공은 상당히 특이했소. 보통 귀교의 무공은 강대한 공력을 바탕으로 하는 장력이나 강기류가 주 무기인데 반해 그자는 검 을 이용해서, 그것도 최소한의 공력만을 이용해서 적을 없애는 아주 실용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것 같더군.”

“그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거외다. 보통 강한 위력에만 의존하는 놈들인 경우 떼거리로 덤비면 나중에는 공력이 고갈되어 제풀에 뻗게 되어 있는데, 아마 그놈을 제 풀에 뻗게 만들려면 본교 세력의 절반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할 판이오.”

“그렇게까지나…….”

“아마 그게 맞을 거외다. 그놈은 아주 실리적인 놈이라. 거기다 우리와 정면으로 싸워야 할 만한 약점 따위도 없소. 그러니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을 계속한다 면 그놈의 경공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니, 어디 포위가 되겠소? 그냥 계속 쫓으면서 놈의 공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야 할 텐데?”

“흐음, 그렇군. 그럼 예전과 같은 방법을 한 번 더 써 보는 것은 어떻소?”

“예전과 같은 방법이라면?”

“혹시 그놈이 아끼는 사람은 없소?”

그제서야 상대의 음흉한 속셈을 감 잡은 교주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오… 맞소. 그러고 보니 그놈이 아끼는 양녀(養女)가 하나 있소. 그 아이를 인질로…”

“아니오. 인질만으로 해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 거요. 귀교에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술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흐흐흐, 거 참 모르시는 게 없구려.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이 있소이다. 그걸 아주 교묘히 이용하면 될지도 모르겠군.”

“껄껄껄, 초고수에게 사용할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린 계집아이만 사술(邪術)에 거는 거니 아마 손쉬울 거요. 그놈이 아이를 구한답시고 쳐들어왔을 때 치열한 접전 의 와중에 그 아이를 이용해서 암습을 하게 만든다면……. 하하하, 그땐 우리가 원하는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그놈이 들은 척도 안 한다면? 어쩌면 능히 그럴 수도 있는 놈이니 하는 말이오.”

“그러면 계획대로 살수를 보내는 것으로 합시다. 쓸데없이 먼저 살수를 보내어 경각심(警覺心)을 일깨울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좋소이다.”

“이상한 일이군.”

“뭐가요?”

“왜 말들을 다 버리고 갔지?”

초우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수많은 말들이 흩어져 있었고, 몇몇 관군들이 그 말들을 한곳에 모은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관군들이 지키고 있으니 저건 관군들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까지 이어지던 흑풍단의 말 발자국이 없어졌다. 이건 그들이 말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경공술을 쓴 거야. 그리고 저기에 쌓 여 있는 흑색 갑주들을 봐라. 일부러 갑주까지 다 벗어 버렸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정면 대결보다는 도망치는 것에 더욱 주력하겠다는 뜻이지. 왜 그렇게 작전을 바 꾼 거지?”

“혹시 그때 만났던 묵향이란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그 선배의 무공 수준으로 보아 잡배는 절대 아닐 거고 어떤 단체의 수장(首長) 정도라면 그의 단체에 포섭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목적지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도망치려고 들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조심해라. 관군들 외에도 제법 고수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으니까.”

“예.”

초우 일행은 마을에서 말을 다 팔아 버린 후 경공술을 이용했다. 산길을 달리는 데는 말보다 경공술을 사용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용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아직 무공이 떨어지는 여동생들 때문에 골치였다. 아마도 이걸 염려한 묵향이 혼자서 앞서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터졌지만, 그래도 여동생들이라 버 려 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누이동생들을 독촉하며 길을 재촉한 결과 묵향과 헤어진 그날 저녁때 흑풍단이 버리고 간 말들을 호위하고 있는 관군들을 만난 것이다. 관군들의 행동이 예상외로 빠름을 감지한 초우는 아무래도 추격의 전문가쯤 되는 무림인들이 관군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 기에 그 누이동생들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이들은 밤을 무릅쓰고 한 시진 반 정도 산길을 달리다가 어둠 때문에 더 이상 흔적을 좇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야숙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추격을 시작한 후 두 시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희한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여덟 마리의 개……. 아마도 관군에서 기르는 군견인 모양인데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아직 네 마리의 개가 살아 있기에 그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개들 또한 입에 거품을 물고, 광기(狂氣)에 가득 찬 눈으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도 미친개들한테 물렸는지 여러 명의 부상자들이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고, 일부는 미친개들을 공포 어린 눈으로 죽인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유독 그중에 세 명의 인물들이 초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관군들과는 달리 각기 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난리통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마 도 관군들에게 협조하는 무림인들인 모양이었다. 보통 돈이 궁한 무림인들 중의 일부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다행이라면 그런 인물들 중에는 아주 뛰어난 고수는 없다는 점인데…….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조심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 들개들은 뭐죠?”

“들개들이 아니다. 목에 끈이 묶여 있잖아. 관군들이 사용하는 군견이다. 아마도 흑풍단이 어떤 약물을 길에 뿌린 모양이야.”

“약물을 뿌린다고 개가 미쳐요?”

“그건 모르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가자. 흔적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 난리가 나는 걸 봐서 아마도 저들이 제일 앞서서 추격하는 놈들인 모양이니까.” “예.”

초희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초연은 그래도 약간의 무림 경험은 있는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우려할 만한 점을 말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저들 뒤로 따라가는 건 어때요? 함정이라도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조용히 그들을 따라간다.”

과연 그 세 명은 추격의 전문가들이었다. 개들이 죽어 버린 후에도 그들이 앞장서서 아주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3백여 명의 관군들을 인도했다. 그러면 관군 들은 뒤에 10장(약 30미터) 간격으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마도 그 뒤에는 관군의 주력 부대가 따라올지도 모른다. 초우 는 일부러 그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묶어 놓은 빨간 천을 풀어 다른 샛길 쪽으로 연결해 뒀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여섯 개 정도만 연결한 후 다시 돌아와 그 샛길 을 즈음해서 나 있는 관군의 발자국도 모두 지워 버리고 계속해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모든 표시들을 없애 버렸다.

이렇게 두 시진 정도 갔을까, 갑자기 앞에서 화살 10여 대가 동시에 날아와 추격하던 무림인들 세 명과 뒤따르던 군사들의 몸통에 맞았다. 그들은 그 즉시 고꾸라

졌고 모든 화살의 앞부분이 등 뒤까지 튀어나온 것이 그것을 쏜 사람의 공력(力)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자마자 모두들 나무나 바위 등의 뒤에 숨었 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해 조심조심 일어섰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화살을 맞은 모든 사람들은 즉사한 모양 이었다. 이때 숲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추격하면 모두 다 죽여 버릴 테니 알아서 해라. 모두 다 꺼져!”

희망을 가졌었던 무림인들도 다 죽어 버렸고, 상대는 얼마 전까지 관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찬황흑풍단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쪽을 알지만 이쪽은 상대가 어디에 숨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명이 뒤로 도망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모두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관군들이 사라지자 초우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 나가 시체들이 있는 곳에 당도한 다음 신형을 멈추고 말했다.

“저는 초씨세가의 초우란 사람입니다. 그대들이 죄도 없이 쫓기는 것을 알기에 도와 드리려고 먼 길을 달려왔으니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의외로 상대의 답은 손쉽게 떨어졌다.

“좋소. 그대의 동생들과 함께 오시오.”

‘동생들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초우는 동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갔고 그 앞에는 열 명의 전포(戰袍)를 입은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각기 활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들이 조금 전 활 을 쏜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그대가 초우인가? 나는 임충이라고 한다네. 대장한테서 자네 얘기 들었어. 젊은 나이에도 꽤나 유능하다던데……. 참, 관지 대장이 있는 곳으로 가세나.”

초우는 경공술을 이용해 따라가며 임충에게 물었다.

“지금 흑풍단을 이끄는 분이 관지 대장이란 분입니까?”

“그렇지. 나중에 자네도 만나 보면 알겠지만 대단한 분이야. 지금까지 우리들이 버텨 온 것도 그분의 덕이지.”

“묵향이란 선배는 여기 계십니까?”

“아니,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어. 제길,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예 저 먼 하늘이더군. 그때는 꼭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요?”

“그렇지. 내가 이상형으로 삼는 분이라고 할까……. 무공도 고강하지만 유식하고, 또 마음 씀씀이는 얼마나 인자하고 부드러운데. 예전에는 술도 자주 마셨었는 데…”

‘인자하고 부드러워? 유식하다고? 전혀 아니던데…….’

“저… 그분 책은 많이 보셨나요?”

“응, 관지 대장의 말로는 황궁무고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몽땅 다 읽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단장이 예전에 그에게 뛰어난 선생들 몇 명을 붙여줬는데, 글공부도 아주 폭넓게 한 모양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떨떠름한 얼굴로 초우가 되물었다.

“그래요?”

“자네도 만나봤었다니 알 거 아냐? 무식한 무림인들하고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지 않던가?”

“글쎄요. 저는 안목이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대장이 바빠서 그런지 나도 얼마 얘기를 못 나눴거든.”

한 시진 반 정도 달려가자 흑풍단의 본대가 있었다. 모두들 나무 기둥에 의지해 쉬든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무리들도 있었다. 임충은 그들을 데리고 한 인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 인물은 청색 전포를 입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젊은 무사였는데, 오랜 시간 쫓긴 탓인지 다듬지도 못한 수염이 숭숭 돋아 있었다. 그리고 다부진 턱선과 피로한 듯한 안색, 시원하게 솟은 콧날,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담은 강렬한 안광을 내 뿜는 두 눈……. 한마디로 패기가 넘치는 뛰어난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예상외로 상대가 아주 뛰어난 인물임을 자각하고 초우는 포권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면서도 누이동생들이 이 근사한 상대를 앞에 두고 정신을 못 차 리는 것을 눈치 채고는 옆구리를 찔렀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난 후…….

“초씨세가의 초우라 합니다. 직접 보니 더욱 뛰어난 분이시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을……. 그대의 이야기는 묵향 부교주에게 들었소.”

“예? 부교주라니요?”

“그는 얼마 전까지 본단(本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대단히 뛰어난 무인이오. 하지만 그때 그를 알게 되었을 때도 화경(化境)에 준하는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 겨우 백인대장 노릇이나 하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었소.”

놀란 초우가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방금 화경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화경이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소. 그러니 자신이 익혔던 모든 무공 또한 잊었지요. 그래서 단장님이 그를 황궁 무고에 들여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이었는데, 그의 무공을 몽고 전투 때 직접 봤지만 정말 대단했소. 그런데 이번에 어떤 계기로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본

래 위치는 무림의 마교란 단체의 부교주라고 했소. 자기가 몇 가지 일을 벌이는데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하더군. 사실 우리들도 갈 곳이 없던 처지고 해서, 그의 일에 동참하기로 했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저… 마교란 단체를 들어 보셨습니까?”

“난 잘 모르오. 난 관부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무공을 익혔고, 또 들리는 소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정도로 속 좁은 인간도 아니오. 사실 내가 직접 본 묵향이란 인 물은 정파라 자처하던 인물들에 비해 뒤질 게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는 지금 마교하고 좀 껄끄러운 관계인 모양이고,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 으니 다음에 만나면 괜히 먼저 마교에 관계된 말을 꺼내지 마시오. 어쩌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까…….”

“예?”

“이번에 만나 보니, 기억을 되찾은 다음 사람이 조금 변했더군요. 하지만 솔직 담백한 것은 여전하기에 그를 믿기로 했소. 그의 무공은 지금 현경(玄境)의 수준이 라 했소. 그러니 그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 게 없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초우는 경악했다. 내심 묵향이 마음껏 어검술을 쓸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놀라움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경이란 수준이 그냥 무공을 쌓는다고 올라가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어려운 수준이기에 기나긴 무림 역사에도 단 한 명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묵향 선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갑니까?”

“중경(中京 : 지금의 시안시) 서남쪽에 태백산(太白山)이란 곳 근처에 세워진 흑룡문이란 문파가 있다고 했소. 그리로 오라고 했으니, 조심해서 가 봐야지요.” 중경은 섬서성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도시로, 과거에는 장안(長安)으로도 불리던, 많은 국가들이 수도로 채택했던 도시다.

“참, 오다가 미친개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한 겁니까?”

“그건 묵향 부교주가 주고 간 광견분(狂犬粉)이란 독을 사용한 것인데 그걸 땅에다 뿌려 놓으면 개가 냄새를 맡는다고 킁킁거리다가 콧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콧속 의 습기에 녹으면서 발작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지요. 아마도 사람한테도 효과는 있겠지만 사람이 어디 땅바닥에 대고 킁킁거릴 일이 있겠소? 다만 물에 잘 녹기 때 문에 비만 오면 끝난다는 단점이 있다고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