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0권 1화 – 깨어난 아르티어스
깨어난 아르티어스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은 최근 행복에 겨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였다. 그랜딜 공작이 얼스웨이 후작과 함께 골드 드래곤의 레어로 끌려 왔을 때, 그는 레어를 지키는 멍멍이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들의 주인이 된 골드 드래곤이 레어를 비운 채 외유를 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감히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곳은 드래곤의 둥지. 마법에 능한 드래곤이 무슨 짓을 해놨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드래곤이 자신들 몰래 몸속 어딘가에다가 표식을 새겨놨다면 어 떻게 되겠는가. 그들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고 해도, 드래곤은 쉽사리 그들을 찾아낼 게 뻔했다.
사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아르티어스가 그런 짓을 해놨을 리 없지만, 엘프의 전설에 그런 내용들이 심심찮게 등장했기에 그랜딜은 자신의 주인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런 그랜딜이 간 크게도 감히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계기는, 100여 명의 부하들이 생기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갑작 스러운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이었다.
해마다 한 번씩 말토리오 산맥의 드워프들이 공물을 바치기 위해 아르티어스의 레어를 방문했다. 그랜딜은 그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이 먹을 식량 조달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꼬이다 보니 식량은 다 떨어져 버렸는데, 이미 도착했어야 할 다음 마을의 드워프들이 도착하지 않는, 그런 개 같은 경우가 발생하 게 된 것이다.
이틀을 내리쫄쫄 굶은 후, 그랜딜은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굶어죽느니, 사냥이라도 해야겠다고 말이다. 만약 자신들의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레 어 밖으로 무단이탈한 죄를 물을 가능성도 컸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랜딜은 일단 20명의 엘프들을 식량을 구해오라며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다음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주인이 자고 있는 공동(空洞)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기 했다. 주인이 깨어난다면 즉시 백배사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드래곤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랜딜은 드래곤은 한번 잠을 자기 시작 하면 최소 몇 십 년은 기본이라는, 엘프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서의 내용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주인의 감시가 그리 치밀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날 이후, 그랜딜의 활동 반경은 조금씩 그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줄곧 사냥만 하며 레어 안으로 돌아오지 않은 엘프가 밖에서 거주한 기간이 1년을 넘어섰 을 때, 그랜딜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의심했던 대로 드래곤이 엘프들의 몸에 특별한 제재를 가해 놓지 않은 게 확실하다고 말이다.
문제는 일반 엘프가 아닌 대마법사인 자신에게 있었다. 게다가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를 주인으로 모시고 산 세월이 다르지 않은가.
더군다나 아르티어스는 레어 안 깊은 곳에서 잠이 들어있는 상태. 밖에 출타 중이라면 언제 돌아올지 몰라 감히 못된 생각을 품을 여지도 없었겠지만, 10년 동안 눈에 뻔히 보이는 장소에서 푹 자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동안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랜딜은 무조건 부딪혀 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드래곤을 떠보기 위한 것인 만큼, 공간이동 마법까지 썼다. 그가 간 곳은 드워프 마을 이었다. 만약 자신의 몸에 제재가 가해져 있어 드래곤이 깨어난다면, 일 때문에 외출을 했다고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랜딜이 드워프 마을에 공간이동 마법으로 도착하자, 일을 하던 드워프 하나가 그를 보고 꽁지가 빠지게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마 자신들의 촌장을 부르 러 간 것이리라.
드워프 촌장을 기다리며, 그랜딜 공작은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분노한 골드 드래 곤이 공간이동을 해 와 자신을 추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꿀꺽! 젠장, 미치겠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때, 드워프 촌장이 동굴 안에서 달려 나왔다. 드워프와 엘프는 천성적으로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 평소 드워프 마을에 엘프 가 찾아온다면 당장 내쫓아 버렸겠지만, 그랜딜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랜딜이 아르티어스가 부리는 노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드워프 촌장은 딱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용건만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뭘 원하신다고 하십니까?”
“레어에 수리를 요하는 부분이 좀 있는데, 시급히 와서 손봐줬으면 좋겠군.”
레어를 수리하라는 말에 드워프 촌장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수리…, 라구요? 예, 알겠습니다. 일꾼들을 당장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네.”
별로 급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공간이동 마법까지 사용하며 움직인 것은, 드래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드워프 마을을 방문하고 돌아 온 그랜딜 공작은 레어에 돌아오자마자 드래곤이 자고 있는 공동으로 달려갔다.
공동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엘프 2명이 그랜딜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랜딜 공작 전하, 오셨습니까.”
인사를 받으며 그랜딜은 급히 물었다.
“아무 이상은 없었느냐?”
“예. 그 어떤 변동 사항도 없었습니다!”
부하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기에, 그랜딜은 기겁을 해서는 소리를 낮춰 질책했다.
“쉿! 조용조용히 말하거라. 주인님께서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두렵구나.”
그랜딜의 질책에 엘프들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 옛! 조, 조심하겠습니다.”
공동 안을 향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드래곤은 입구 반대편에다가 머리를 두고 자고 있는지, 동굴 입구를 자신의 몸통으로 틀어 막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이게 드래곤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황금으로 된 문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줄로 착각할 정도다.
그때 그랜딜의 뇌리를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렇다. 전설에 따르면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날 때쯤,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미세한 진동을 일으 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드래곤이 언제쯤 깨어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경계를 서면서 뭔가 미세한 진동 같은 게 느껴지면, 나한테 즉시 보고하도록 해라.”
“예, 공작 전하.”
공동 입구를 벗어나는 그랜딜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드래곤은 깊은 잠에 빠진 게 확실했다. 그토록 마나에 민감하다는 드래곤이, 레어 안에서 공간이동 마법까지 썼는데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하기야,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들 마법공부를 한답시고 대규모 마법까지 레어 안에서 구사하기도 했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지금껏 드래곤은 세상모르고 뻗어 자고 있는 것이다.
“이건 확실해.”
드래곤이 깊은 잠을 자는 게 확실한 이상 더 이상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 일가친지들을 만나본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중에 드워프들이 오면 레어의 수리를 시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나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마.”
잠시라고는 했지만,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그리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그랜딜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품속에서 책자 한 권을 꺼냈다. 혹여, 드래곤에게 압수당할까 두려워하며 소중히 간직해온 책자. 그것은 바로 공간이동 좌표가 기록된 책자였다. 크루마 제국 황제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곧바로 초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위험해. 커다란 마나의 파동이 그놈의 잠을 깨울 가능성이 있으니까. 처음 몇 번은 짧은 거리로, 레어에서 적당히 거리가 멀어 진 다음에 초장거리 이동을 하기로 하자.’
생각을 정한 그랜딜 공작은 먼저 드워프 마을로 공간이동 했다. 마을에서 철물을 옮기며 돌아다니던 드워프 하나가 공작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찰나, 그는 또다시 주문을 외워 2차 공간이동을 실시했다.
레어에서 꽤 멀리 떨어진 후에야 그랜딜 공작은 초장거리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 대마법사인 그라도 초장거리 이동을 주문만으로 실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살아생전에 고국 땅을 다시 밟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랜딜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눈물을 닦은 후, 공간이동 마법진의 중간으로 걸어갔다. 번쩍!
환한 빛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는 더 이상 그랜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주, 주인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공동 안을 감시하고 있던 한 엘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작은 수정구슬에 대고 외쳤다.
속마음 같아서는 주인님이 아닌 ‘미친 드래곤’이라든지, ‘도마뱀’ 따위와 같은 원색적인 단어로 호칭해도 전혀 모자랄 것 없는 성질 더러운 존재였지만, 엘프는 애 써 참으며 주인님이란 단어로 아르티어스를 호칭했다.
왜냐하면 그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귀가 엄청나게 밝아, 혹여 자신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그랜딜 공작은 갑작스러운 부하의 보고에 기절초풍할 만큼 깜짝 놀랐다. 드래곤은 한번 잠이 들면 100년, 200년은 우습게 곯아떨어지는 종족이라고 들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것으로 확신했기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움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랜딜 공작은 자신이 마시던 찻잔을 엎질러 입고 있는 로브 밑 부분을 더럽혔음에도 전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필사적으로 감추며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 지금 당장 그리로 가겠다.”
공간이동 마법을 쓰면 한순간에 그쪽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그는 지금 공간이동 마법 주문을 외울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그랜딜 공작. 달리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된다.
마음이 안정이 되자, 곧바로 무책임한 조상들에 대한 분노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엘프족 전설에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이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 이다. 한번 잠을 자면 몇 백 년은 쥐죽은 듯 곯아떨어진다는 그 전설이.
‘이런, 빌어먹을! 잘 알지도 못하면 아예 적지를 말아야지. 왜 그런 엉터리 정보를 적어놔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그나저나 어찌된 게 이놈의 드래곤은 시 도 때도 없이 벌떡벌떡 일어나? 이놈은 잠도 없나?”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그랜딜 공작은, 경비를 서고 있던 엘프에게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는 한 호비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호비트가 바로 드래곤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편안하게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호비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의 짐작대로 호비트는 아르티어스가 변신한 모습이었다.
“그래.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느냐?”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주인님.”
드래곤을 일반적인 동물들과 평행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통의 동물들이 밤과 낮에 영향을 받는데 비해, 드래곤은 전혀 그런 것에 구애를 받지 않 았다. 평소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한 번씩 취미 삼아 낮잠이라는 것을 자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행위는 불필요했다.
수백 년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만큼, 잠을 잘 때는 한 번에 몰아서 자야 하는 게 그들이 지닌 숙명이다. 따라서 한번 자면 최소한 수 십 년은 기본이다.
드래곤이 잠을 자는 이유는 졸리거나 피곤해서가 아니다. 몸에 필요한 각종 원소들은 물론이고, 마나를 대지로부터 흡수하여 몸을 튼튼하게 재구성하기 위한 과정 이 잠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타 차원으로 넘어갔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고수와 생사를 건 대결을 펼치는 과정에서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아르티어스.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그 피해를 복 구하기 위해 최소 수백 년 이상 잠에 빠져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겨우 15년이라는 짧은 잠만 자고 깨어났다.
물론 그 시간에 몸을 완벽하게 회복해서가 아니라, 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깨어난 것이다. 새로운 생을 다시금 시작하게 된 아들. 예전에 지닌 능력을 잃어버려 너무나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아들을 나 몰라라 하고, 어떻게 편안히 잠에 취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랜딜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오던 아르티어스는 곧 자신의 레어 안이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을씨년스럽던 텅 빈 공간에 그림이나 조각상과 같 은 예술품들이 놓여있는 등,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썰렁한 모습이었던 레어 안이 지금은 화사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품들 사이사이마다 예쁜 꽃들이 심어져 있는 화분들이 놓여 있어 상큼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구조물만이 바뀐 게 아니었다. 레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엘프들. 다른 드래곤들의 둥지에 갔을 때, 아르티어스가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아주 잘 통제되고 있는 노예들의 모습 말이다.
“호오, 그동안 제법 애를 썼구나.”
“감사합니다, 주인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흠, 숫자가 많이 늘었는데, 식량은 모자라지 않았더냐?”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그랜딜은 얼른 고개를 처박으며 대답을 했다.
“예, 저희들이 먹을 것은 몇 명을 밖으로 내보내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일어나시면 바로 식사준비를 할 수 있도 록, 매일 사슴 1마리씩을 사냥해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만약 주인님께서 일어나시지 않으시면, 다음날 저희들이 먹으면 되니까요.”
그랜딜의 꼼꼼한 일처리에 마음이 흡족해진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잘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하거라. 오랜만에 사슴 요리가 먹고 싶구나.”
“옛, 주인님.”
“참, 식사 준비는 드워프식으로 하라고 이르거라. 나는 엘프식보다는 드워프식의 기름진 요리가 좋으니까.”
묵향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개고생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식성까지 닮아버린 아르티어스였다.
“예,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랜딜은 품 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 식당에 근무하는 엘프들에게 명령했다. 주인님께서 드실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이다.
식사가 준비될 동안 뭘 하며 기다리나 고민하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랜딜에게 물었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레어에서 가져왔던 물품들에 대한 정리는 끝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인님. 기존의 창고에 넣기에는 물품들의 양이 너무 많아 창고를 새로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기 전에 그쪽을 한번 둘러보시 겠습니까?”
“잘했군. 그럼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
“예, 주인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랜딜의 안내를 받으며 아르티어스는 마법물품 창고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각종 마법재료들. 과연 그랜딜이 자신있게 말했을 정도로 수 많은 종류의 마법재료들이 용도별로 분류되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랜딜은 흐뭇한 표정으로 창고 안을 둘러보는 아르티어스에게 현재 마법재료들의 수량과 지금까지 엘프들이 마법공부를 하느라 소비한 마법재료의 숫자를 조심 스럽게 보고했다. 혹시 드래곤이 뭐라고 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아르티어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마법재료들을 소비하긴 했지만, 대신 엘프들의 마법실력이 좋아지지 않았는가. 엘프들 의 마법 실력이 뛰어날수록 부려먹기는 더 좋다. 알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데, 그걸 왜 말리겠는가.
마법물품 창고를 둘러본 후, 아르티어스가 향한 곳은 재물들을 쌓아놓은 창고였다. 창고 앞에 도착하자 그랜딜은 얼른 품 안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그동안 드워프들이 주인님께 바친 물품을 적은 목록입니다.”
묵향을 만난 후, 아르티어스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한 이래 그 지배하에 있는 드워프들은 매년 한 가지씩 공물을 만들어 바치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처럼 영토 내 의 드워프들을 달달 볶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창고는 빠른 속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자신의 영토라고 우기고 있는 말토리오 산맥은 엄청나게 광활했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드워프들의 숫자 역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목록을 슬쩍 훑어본 아르티어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창고 안에 쌓여있는 물품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랜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런데…, 산맥의 가장 동쪽에 있는 5개 드워프 마을에서 9년 전부터 공물이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그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에 피식 조소가 어렸다. 감히 드래곤에게 바칠 공물을 빼먹을 간 큰 드워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뻔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한 마리가 산맥으로 기어 들어온 모양이다.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들이라고?”
그랜딜은 9년 전의 목록과 10년 전의 목록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대답했다.
“예, 바로 여기에 있는 5개 마을들 입니다.”
“그놈들이 왜 공물을 안 보냈는지 가서 살펴봤느냐?”
심드렁한 어조로 묻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그랜딜은 당혹감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려야 했다.
“예리한 놈. 자는 동안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것을 눈치 챘다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떠보는 건가??
아르티어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그랜딜은 최대한 책잡히지 않도록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감히 주인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 임의대로 그렇게 먼 곳까지 갈 수가 없어서…….”
그랜딜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영토는 과할 정도로 너무 넓었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나한테 즉시 보고하도록 해라. 물론 자고 있을 때는 빼고.”
“예, 주인님. 그럼 지금 바로 정찰대를 파견할까요?”
그랜딜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뻔한 거 아니겠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놈이 하나 기어들어온 거겠지. 그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흠,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식사 준비가 끝났겠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급히 수정구를 통해 식당에 연락을 취해 본 그랜딜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방금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주인님. 그럼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드래곤들은 드워프 외에도 여러 종족들을 노예로 부렸다. 경비를 세우는 데는 힘이 좋은 오크나 트롤, 오우거 따위를 썼고, 시중을 들게 하는 데는 아름다운 외모 를 지닌 수인족(獸人族)이나 엘프 따위를 썼다. 오크나 드워프처럼 땅딸막하고 투박하게 생긴 놈에게 시중을 받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더 눈이 즐거운 게 사실이 었으니까.
하지만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던 아르티어스는 레어에 노예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랜딜이나 얼스웨이를 시작으로, 엘프 들을 노예로 부리고 보니 꽤나 편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엘프들이 요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탁까지 꽃으로 예쁘게 장식해 놨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그런 의미 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던전을 탐색할 때, 얼스웨이 후작을 실험용으로 던져버린 것은 그의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하찮은 용도로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과분 한 엘프였으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일에 대해 후회는 전혀 하지 않았다. 정 필요하면 나가서 몇 마리 더 잡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엘프 한 마리 죽은 정도로 후회 할 리가 있겠는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금단의 비술을 썼으니, 아들놈은 오래전에 태어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별 탈 없이 성장했다면, 지금쯤 15살이 되었으리라. ‘별 탈 없이’라는 단서가 붙어있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버렸다면, 그로서는 도저히 돌이킬 방법이 없었으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향긋한 육즙이 흘러내리는 맛있던 사슴고기가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까칠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툭 내던지며 욕지거리 를 내뱉었다.
“끄응, 제기랄!”
그러자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그랜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주인님.”
“그건 아니니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식사는 됐고, 포도주나 한 병 가지고 와!”
“옛 주인님.”
잠시 후, 식탁 위의 음식들이 치워지고 포도주 한 병과 과자가 놓였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 마개를 신경질적으로 딴 뒤 잔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놈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 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그래! 브로마네스에게 물어보자. 그놈이라면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지도 모르니 말이야.’
아르티어스가 포도주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주변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서있던 엘프들은 겁에 질려 바닥에 납쭉 엎드렸다. 상대는 포악 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이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식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식사를 준비한 자신들을 쓸모가 없다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모두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는 그랜딜을 향해 말했다.
“수정구를 내놔 봐.”
아르티어스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그랜딜. 하지만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품안에서 수정구를 꺼내 건네는 그의 두 손이 두려움으로 인 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랜딜이 내민 수정구를 받지 않았다. 그저 그랜딜이 들고 있는 수정구에 손바닥을 살포시 올린 뒤 뭔가 주문을 외웠을 뿐이다. 스팟!
곧이어 수정구가 밝은 색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본래대로 돌아갔다.
“나에게 바로 연락되도록 마법을 걸어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그제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랜딜 공작.
“예, 주인님.”
“참, 그리고 어지간한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말이야. 알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희뿌연 빛 무리에 감싸지는 아르티어스의 몸체.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졌을 때, 그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휴우~”
아르티어스가 어딘가로 공간 이동해 버렸다는 것을 눈치 챈 그랜딜 공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랜딜 공작은 바닥에 납쭉 엎드 리고 있는 엘프들을 향해 명령했다.
“주인님께서는 어딘가로 출타하셨다. 식탁을 정리하고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아르티어스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조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 안이다. 마법의 원조라고 불리는 드 래곤이니 만큼, 아르티어스가 레어에 뭔 수작을 부려놨는지 모르지 않는가. 따라서 그저 조심,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랜딜의 지시에 따라 식탁 위를 치우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엘프들.
“이번에는 또 뭔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거지?”
그랜딜은 텅 빈 레어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사라진 아르티어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절 대 강자였고,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이 없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인 골드 드래곤은 그런 상식에 위배되는 행동을 지금껏 숫하게 저지르고 있었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양자(養子)로 삼는 파격을 저지르는 것 으로도 모자라, 국가 간의 일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지금껏 드래곤이 인간의 도시를 파괴한 적은 많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호비트를 위해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짓을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조국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엘프 또한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크루 마 제국의 모든 엘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티란 엘 그린레이크 공작을 말이다.
“이번에도 뭔가를 저지르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바깥세상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드래곤. 그가 집착하는 게 뭘까? 그게 뭔지만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 엘프족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드래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드래곤의 도움을 조금만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세상의 역사가 뒤바뀔 것이다.
브래스 한방 날리는 게 드래곤으로서는 별 일도 아니겠지만, 그 한방으로 크루마 같은 강대국이 휘청거린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흐흐, 어쨌든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허락받았으니 살맛이 나는구나.”
이제 아르티어스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치권을 위임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그랜딜 공작. 그는 드래곤이 깨어났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최악
의 상황을 각오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커다란 기회였다.
‘드래곤이 나를 이 정도로 믿어줄 줄이야……. 이렇게 되면 놈의 이목을 속이고 일을 꾸미는 게 더욱 쉬워진다고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