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11화 – 메르헨 영지로 모여드는 용병들
메르헨 영지로 모여드는 용병들
올란도 부대는 명령서를 받자마자 곧장 메르헨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최대한 빨리 달려가긴 했지만, 중간에 공간 이동 마법진을 거치지 않았다면 아마 제시간에 도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메르헨 영지가 시작되는 진입로로 들어서자, 곧이어 작은 검문소를 만날 수 있었다. 경비병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이 신품인 것을 보면, 이곳 영지가 꽤 부유하 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영지를 방문한 목적이 뭔가?”
“영주님께서 저희 용병단을 고용해 주셨기에 급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흠… 자네들이 소속된 용병단의 명칭이…….”
급히 용병패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경비병을 향해 올란도가 대답했다.
“붉은 전갈 용병단입니다.”
“아, 그렇군.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네. 자네들이 묵을 곳을 안내해 주지.”
올란도 중대장과 경비병과의 대화 내용을 근처에 서 있던 라이도 들을 수 있었다.
라이는 영주가 자신들을 위해 숙소라도 마련해 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경비병이 안내해 준 곳은 마을에서 꽤나 멀찌감치 떨어진 황량한 야영지였 다.
1차전 때, 고용한 용병들이 마을로 들어와 소란을 피워대는 것을 몸소 경험했던 메르헨의 행정관은,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이번에는 용병들의 마을 출입을 아예 금지시켜 놓은 상태였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천막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야영지의 정체였다. 천막들 사이사이로 연기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 취사를 하기 위 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자 중대원 모두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천막을 치고, 푹 쉬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물론 배불리 먹고…….
야영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라이는 지독한 악취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크윽! 이, 이게 무슨 냄새야?”
“무슨 냄새이기는… 야영지 냄새지. 한번 둘러봐라. 이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는데 냄새가 안 나겠냐?”
하리스의 말처럼 천막이 많기는 많았다. 얼마나 많은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용병은 무려 4천여 명. 그 많은 용병이 한자리에 모여 북 적거리고 있었지만, 오물 처리를 위한 시설은 단 한 곳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화장실조차도…….
용병들에게 묻고 물어 붉은 전갈 용병단이 야영을 하고 있다는 곳을 찾아갔다.
악취가 진동하는 천막들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용병들. 한눈에 봐도 술에 취해 있는 게 분명하다. 쭈그리고 앉아 토하고 있는 자들, 서로 싸우고 있는 자…….
야영지 안은 아주 난장판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사이로 짙게 화장을 한 창녀들까지 보였다.
물론 붉은 전갈 용병단 본부에도 창녀들은 득실거린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었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질서한 난장판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라이였기에, 내심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붉은 전갈 용병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은 야영장을 관통하는 시냇물의 상류 지역이었다. 모두들 전쟁터를 전전해 본 만큼, 이렇게 많은 병력이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력이 강한 용병단이 상류 쪽을 차지했고, 세력이 약한 떠돌이 용병들은 하류 지역으로 밀려나 버렸다.
붉은 전갈이 그려진 용병단 깃발의 모습이 보일 때쯤, 악취도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올란도는 자신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대대장에게 신고하기 위해 달려갔고, 남은 대원들은 쉴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다른 부대들처럼 천막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쉬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천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블린을 토벌한답시고 낑낑댔던 그 마을에 놔 두고 온 것이다.
가급적 짐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가지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이곳에서 얼마나 더 오래 야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 이다.
자세한 것은 올란도가 대대장을 만나고 와서 알려 주겠지만, 어쨌건 그 전에 오늘 밤을 지새울 수 있는 곳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다.
“소대장님, 저쪽에 괜찮은 데가 있습니다.”
몇 명인가 대원들이 그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론도 소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원 이쪽으로 집합!”
그쪽으로 가 보니 그런대로 하루 쉴 만한 작은 공터가 있었다. 아름드리나무가 폭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어 저녁 이슬을 막아 줄 듯 보였고, 저 옆쪽에 보이는 공터 에는 말들을 풀어 놓아 쉴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론도 소대장이 손뼉을 짝짝 치며 쾌활한 어조로 명령했다.
“자자, 모두들 야영 준비를 해. 라이, 너는 식사 준비부터 해라. 그리고 너희들은 라이가 식사 준비를 빨리 끝낼 수 있도록 옆에서 좀 도와주고 말이야.”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풀부터 없애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나무들도.
대원들은 우선적으로 라이가 식사 준비를 하기에 충분한 공간부터 만들어 줬다.
라이가 솥단지를 걸었을 때쯤, 하리스가 깨끗한 물을 한 통 가득 퍼 왔다.
말 등에서 평소 도마용으로 사용하던 납작한 나무판 하나를 가져와 이것저것 식재료를 썰고 있던 라이는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묘한 시선을 느꼈다. 획 고 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에서 한 무리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젠장. 남자가 요리하는 거 처음 보나? 뭐 볼 게 있다고 떼거리로…….’
확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에 뭐라 한 소리 하려고 하는 순간, 그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용병들의 발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는 것을.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멍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노예병들이니까.”
“이번 전투에는 노예병들도 동원되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야. 어쨌거나 괜히 시빗거리 만들지 말고, 하던 식사 준비나 열심히 해. 시비가 붙어 봐야 마음만 안 좋으니까.”
“왜 마음이 안 좋아요?”
하리스는 슬쩍 노예병들을 바라본 뒤 대답을 해 주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저 녀석들 중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 거 같냐? 죽으러 가는 녀석들과 싸워 봐야 무슨 좋은 기분이 들겠어. 나중에 찝찝하기만 하지.”
대답 대신 라이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병들을 살짝 훔쳐봤다. 하마터면 자신도 저들과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다 송연했다. 그때의 선 택이 제대로 된 것이었다고 자위하며 라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신체의 굵은 근육들은 나이를 잊은 듯했지만, 주름진 얼굴만은 세월을 속일 수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왜냐하면 이 중년 의 장한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숙미를 물씬 풍기는 그의 풍모를 직접 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지닌 직책만으로도 그 실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연대장이라는 직책은 아무에게나 맡 겨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대장은 자신의 대원들은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다른 용병대의 지휘관들에게까지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모두들 우리의 적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메르헨 영지의 병무관은 지금까지 취합해 놓은 도렌 영지군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용병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메르헨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 가 빠져 있다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도렌 영지의 상황은 참담했다. 메르헨 영주가 다방면으로 손을 써서 도렌을 압박해 놓은 결과였다. 군 수물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식량 한 톨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적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오.”
“새로운 정보라니… 그게 뭡니까?”
“뭐, 말이 필요 없을 거요. 직접 보고 판단해 보도록 하시오.”
연대장은 천막 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오라고 해라.”
곧이어 괴상망측한 몰골을 하고 있는 사내 셋이 천막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모두들 사내들이 사냥꾼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두질한 가죽 네 다섯 장을 겹쳐 꿰매어 만든 조잡한 갑옷. 철판을 대충 두들겨 만든 듯 보이는 밥사발처럼 생긴 투구.
무엇보다 그들이 하고 있는 무장이 가관이었다. 사내들은 굉장히 커다란 활을 들고 있었는데, 화살이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란 화살이었다. 일반 화살의 1.5배 정도 길이에다가, 굵기는 손가락보다도 더 굵었다. 더군다나 화살 끝에 달린 화살촉은 창촉을 가져다 붙인 듯 커다랬다. 그리고 각자 허리에는 도끼나 작은 곡괭이를 부무장으로 차고 있었다.
사냥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긴 한데, 사냥꾼은 아닌 모양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차림이 쪽팔린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들은 대체 뭡니까?”
연대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상대할 적병들의 무장이오.”
“정말이십니까?”
“병무관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확실할 거요. 이쪽을 보시오.”
연대장은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서 거무죽죽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을 입고 있는 병사를 죽인 후, 벗겨 온 거요. 병무관의 말로는, 몰래 외부에서 물자를 반입하고 있는 것을 포착하여 일망타진하는 과정에서 노획한 거라고 하 더군요.”
잠시 사내들을 바라보던 돌핀 용병대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넘겨줬었던 정보가 모두 사실이었던 모양이군요.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단련된 병사들이라고 하더니……. 저 활,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효과적이겠지만, 사람을 상대로 쓰기에는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과하다 뿐이겠습니까. 저 화살의 크기를 좀 보십쇼. 저런 크기와 무게라면 얼마 날아가지도 못할 겁니다.”
연대장이 모두의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저 활로 수십 차례 실험해 봤지만, 일반적인 화살 사거리의 절반도 채 날리지 못했소.”
“허, 참. 어떻게 저런 적한테 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1차전 때의 자료를 보니, 4천 명씩이나 동원한 모양이던데…….”
“그만큼 메르헨 영주군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소리겠지요.”
“영주군의 상태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이미 전투는 끝난 후일 테니 말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희색이 돌 수밖에 없었다. 도렌 영지 쪽에서 요새 지역에 배치해 놓은 병사의 숫자는 약 6백 명 정도라고 했다. 그에 비해 이쪽은 영주 쪽 병사를 빼 도 4천 명이 넘는다. 병력에 있어서 이토록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는 상황에서, 적의 무장까지 별 볼일이 없다고 하니 적을 깔보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연대장이 침중한 어조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도렌군의 무장이 이렇듯 형편없다고 깔보지는 말기를 바라오. 그들도 나름대로는 몬스터와의 전투로 다져진 정예들이니 말이오. 1차전에서 메르헨 군이 대패한 주원인이 바로 적을 경시한 탓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소.”
용병들의 주업은 인간보다는 몬스터들과의 전투였다. 그런 만큼 몬스터들을 상대로 영지를 지켜내고 있는 병사들이 결코 나약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약점이 뭔지 확연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연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핀 용병대장이 그 약점을 들고 나섰다.
“정면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적의 뒤를 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대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지금껏 단 한 번도 몬스터들에게 그런 식의 공격은 당해 본 적이 없을 테니…….”
그 뒤는 마치 알아서 상상하라는 듯 연대장은 말을 끊었다. 대신 그는 천막 안에 모여 있는 용병 지휘관들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누가 적의 뒤로 침투하시겠소? 자원하고 싶은 분은 말씀하시오.”
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요새 지대로 가는 길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전에 요새 지대가 메르헨의 소유로 있던 시절, 요새로의 보급을 위해 건설해 놓은 도로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샛길들은 약초 채집꾼들조차 꺼릴 정도로 험악했다. 그런 곳으로 사서 개고생 하겠다며 자원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으시오?”
“특별 수당은 얼마나 줍니까? 나름대로 꽤 큰 공을 세우는 셈인데…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고생을 하는 만큼 돈을 더 달라는 말이다. 하지만 연대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 부분에 대한 확답을 여기서 해 줄 수는 없소. 이건 아직 영주 쪽과 합의한 작전이 아니기 때문이오. 하지만 나중에 병무관과 만나게 되면 특별 수당을 건의해 보겠소.”
그때쯤 되면 전투는 거의 끝나는 단계에 있을 텐데, 영주 쪽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돈을 내놓을 턱이 없었다. 모두들 나름대로 용병단에서 굴러먹었던 인물들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저 연대장의 시선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외면할 뿐이었다.
잠시 기다리던 연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그건 우리 쪽에서 해결하도록 하겠소.”
다행히 붉은 전갈 용병단이 맡기로 결론이 나자, 모두들 찬사를 보냈다. 칭찬 한마디 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역시 붉은 전갈 용병단!”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솔선수범하시니 대용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어쩌고저쩌고 칭찬의 말들이 계속 이어졌지만, 하나같이 쓸 만한 말은 전혀 없었다.
연대장은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모두가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출발은 내일 아침 7시로 하겠소. 그때까지 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지금까지 전투라고는 몬스터들만을 상대해 온 도렌 영지군이기에 계책 따위는 쓸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편히 잠들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 어떤 부대는 이곳에서 16일씩이나 야영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도 지금껏 아무런 이상이 없다 보니, 모두들 긴장이 풀려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곤히 잠들었던 연대장은 새벽녘에 울려 퍼진 요란한 경보음에 잠이 깼다. 그는 미처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 검만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의 천막 주변에는 이미 50여 명의 병사들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적의 기습입니다.”
부관(副官)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 멀리 어두운 산 쪽에서 불화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불화살들이 떨어지고 있는 지점에 서는 화광이 충천했다.
“떠돌이 용병들의 구역입니다.”
체계적인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경계병을 세웠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적들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연대장은 산 쪽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과연 일반적인 활에 비해 사거리가 반도 되지 않았다. 저런 식의 야습이라면, 그리 큰 타격을 입히기도 힘들 것이다.
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불화살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화살은 보이지 않기에 정확한 숫자는 계산할 수가 없었지만, 그는 적의 숫자를 한눈 에 파악해 냈다. 지금까지 무수한 실전을 통해 쌓은 경험이 있었기에.
“많아 봐야 1백 명 정도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연대장의 시선은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떠돌이 용병 구역에 있지 않았다. 그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어둠에 잠겨 있는 주변 숲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귀관은 지금 즉시 달려가 노예병들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아무래도 그쪽이 걱정되는군.”
“옛.”
부관을 보낸 후, 연대장은 급히 전령을 불러 지시했다.
“각 대대장들에게 노예병 숙소의 경계 병력을 2배로 늘리라고 전해라. 그리고 숙소 주위로 적군이 침투해 있을지도 모르니, 정찰병들을 내보내 살펴보라고 일러 라.”
“옛”
전령들을 보낸 후에도 연대장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적군의 지휘관이었다면, 떠돌이 용병 구역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이쪽의 노예병 숙 소로 침투했을 것이다. 떠돌이 용병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살육전을 벌여 봐야 겉만 요란할 뿐 실속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노예병 숙소로 침투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투가 끝난 후 해방시켜 주겠다는 허울 좋은 약속 한마디만으로도 그들을 간단하게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도렌 영지군에는 엄청난 전력의 증가를, 그리고 이쪽에는 전력의 반 이상이 감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어쩌면 그 한 방으로 이번 영지전의 승패가 정해질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때, 제1대대장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자신이 보낸 전령의 지시를 이행하고 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내가 보낸 전령은 만났나?”
대대장은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주변을 다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연대장은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의미로 그렇게 물었는지 눈치 챈 대대장은 노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누굽니까. 적들의 기습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부하들을 이끌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저런 떠돌이 용병들 몇 명 죽인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겠습니까. 뭔가 딴 속셈이 있다는 거겠지요.”
“나도 그게 걱정이었네.”
“그런데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중요 길목마다 매복까지 시켜 놓고 오는 길입니다. 오늘 밤 야습당할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염려 푹 놓으십시오.”
“수고했네.”
대대장은 아직도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떠돌이 용병 구역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군요. 이렇게 후방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야습을 할 줄이야…….”
“그만큼 저쪽이 필사적이라는 뜻이겠지. 영지 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뺏기게 생겼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런 식으로 기습할 바에는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대대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여기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대대장의 장난스런 말투에 연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이쪽의 약점을 파악해서 기습한 것까지는 칭찬해 줄 만해. 하지만 저런 식으로 해 가지고는 실익을 챙기기가 힘들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일 전투가 기대됩니다. 하지만 아쉽군요. 일방적으로 학살을 하면 뭐하겠습니까. 값나갈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을 텐데…….” “크하핫! 그래, 자네 말이 옳은 듯하구먼. 하핫.”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연대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말일세. 오늘 밤 있었던 야습이 우리 쪽에는 비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지만, 영주 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로군.”
대대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간덩이가 작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2천의 병력을 밖으로 빼낸다고 해도, 그의 수중에는 아직 1천이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영지 내 모든 거점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고도 남을 텐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알 수가 없다. 괜히 불안감을 느껴 병력의 출동을 늦출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껏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별의별 인간들을 다 겪어 본 연대장이었기에 그런 사소한 걱정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괜한 변수는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다른 용병대 지휘관들에게 전령을 보내게. 오늘 밤 있었던 일이 영주 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