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1권 2화 – 정령과의 교감

정령과의 교감

엘프들이 밖으로 나간 뒤,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아직 노예들의 시중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지?”

“그런 건 아닌데 주변에 서 있으면 내가 하는 얘기를 엿듣는 것 같아서…….”

브로마네스는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들어 봤자지정 신경 쓰인다면 나처럼 세뇌를 조금 해 두든지.”

“세뇌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누군가가 얼쩡거리는 게 신경 쓰이는 거야.”

“그런 거라면 세월이 해결해 줄 거야. 나도 예전에는 조금 껄끄러웠었는데, 요즘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게 되더라고.”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브로마네스는 브랜디를 마셨다. 이렇게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게 꽤나 오랜만이다 보니, 할 말은 무진장 많았다. 그 주제의 대부분은 과거 둘이 함께했었던 모험들에 대한 추억담이었다.

한참 예전 얘기를 떠들어대던 브로마네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우리 사이가 많이 소원했었다는 것을 느꼈다네. 허~ 참,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유희를 즐기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그러게 말이야.”

“말 나온 김에 오랜만에 함께 유희나 해 볼까?”

브로마네스의 은근한 제안에 아르티어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꾸했다.

“유희? 남사스럽게 유희는 무슨 얼어죽을 유희. 이 나이에 유희를 즐긴답시고 돌아다니면 남들이 흉봐. 노망들었다고 말이야.”

그러자 브로마네스가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네가 언제 남들 이목 생각하면서 살았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비트 따위를 아들로 삼고는 온 세상을 들쑤셔 놓은 주제에 말이야. 대체 그런 걸 유희라고 하지 않으면 뭐가 유희지?”

정곡을 찔렸기에 아르티어스는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다시 잔 가득 따르며 물었다.

“유희라면… 어디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냐?”

입질이 오자 브로마네스는 음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복수전 할 생각은 없어?”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복수전? 그건 또 뭔 소리야? 누가 들으면 내가 어디 가서 제대로 쥐어 터지고 돌아온 줄 알겠다.”

브로마네스는 팔꿈치로 아르티어스의 옆구리를 살짝 치며 이죽거렸다.

“허, 시치미를 떼기는. 실버 두 마리 앞에서 꼬리를 돌돌 말면서까지 열심히 아부 떤 걸 벌써 잊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순간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런 추태를 친구에게 고스란히 보인 것은 정말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 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아, 아부는 무슨. 그리고 내가 언제 꼬리까지 돌돌 말았냐?”

“흥, 얼마나 급했으면 자기 것도 아닌 남의 조각상까지 가져다가 바쳤을꼬? 누가 봐도 레드 드래곤인데, 그걸 가지고 아르티엔 어르신의 동상이라고?”

브로마네스는 아예 본격적으로 그 당시의 아르티어스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이죽거렸다.

“제가 선친의 모습이 그리워질 때마다 보기 위해 드워프들에게 만들라고 지시한 조각상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을 뵈니, 어르신께서는 제 선친을 참으로 깊게 생각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그래서 이걸 어르신께 선물하고 싶습니다. 제발 받아 주십시오. 제~발~~!! 안 그러면 저는 죽습니다.”

그러면서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열심히 비벼대는 브로마네스. 사정을 하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빌지는 않았었다. 그걸 보며 아르티어스의 눈에서는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헛소리하지 마, 인마! 너도 나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면서…….”

아르티어스는 엘프들을 모두 내보낸 게 정말 제대로 된 결정이었다며 내심 자화자찬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노예처럼 부리는 엘프들이라고 해도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흥, 간뎅이 작은 골드나 그러지, 나처럼 뼈대 굵은 레드는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 아무리 목숨이 아까워도 그렇지 실 버 발바닥을 핥다니, 참 내…….”

계속되는 브로마네스의 이죽거림에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실버 놈들 발바닥까지 핥았다고 이 난리야. 난 그저 작은 선물을 하나 줬을 뿐이라구! 선물!”

브로마네스는 비웃었다.

“서언~물? 이봐, 친구. 당시 쟈크레아가 자네를 째려보던 눈빛이 심상찮긴 했지만, 그런 거 가지고 이렇게까지 쫄면 곤란하지.”

“쪼, 쫄기는 누가 쫄았다는 거야, 새꺄!”

브로마네스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무시였다.

“쯧쯧, 내가 알던 친구는 이렇게까지 나약한 드래곤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우겨 봐야 자신만 더욱 비참해진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어깨를 토닥 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게, 친구. 그 영감탱이가 아무리 자네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네. 왜냐하면 그 영감은 로드(Lord)잖나.”

브로마네스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아르티어스와 같은 개망나니라면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겠지만, 쟈크레아는 일족의 지도자인 로드였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는 만큼, 명확한 물증이 없는 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르티어스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브로마네스의 의견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자신을 쏘아보던 쟈크레아의 그 무시무시한 눈빛. 쟈크레 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아버지라도 살아 있다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드래곤이었다.

그때 브로마네스의 동상을 뇌물로 받은 제스미네어가 눈치껏 방패막이를 해 줬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아마 다음에 또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두 번 다시 실버 일족과 얽히는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저 망할 친구라는 놈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눈에 빤히 보이는 격장지계 (激將之計)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대가리가 여물지도 않은 헤즐링도 아닌데, 그런 얄팍한 수법에 걸려들 것 같아?”

생각이야 그랬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지금껏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한 성깔 부리며 살아왔던 아르티어스다. 애써 자존심까지 접고 넘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라는 놈이 끊임없이 충동질까지 해대다 보니 더욱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국, 도저히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진 아르티어스는 자신 앞에 놓여 있던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자 이번에는 브로마네스의 앞에 놓여 있던 브랜디 병을 집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부드러운 붉은색 포도주가 담겨 있던 잔에 이번에는 짙은 호박색 액체가 가득 채워졌다. 그것조차도 단숨에 들이키는 아르티어스. 독한 브랜디가 아 르티어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화끈한 감각이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뱃속까지 찌르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브랜디를 연거푸 석 잔씩이나 들이킨 아르티어스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형언할 수 없는 뭔가가 깔려 있었다. “크으, 그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두세. 실버 놈들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야.”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짜식, 그러고 보니 진짜로 겁먹었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우리가 개입했다는 걸 실버 놈들이 모르게 하면 되잖아?” 브로마네스의 속 편한 말에 아르티어스는 울컥해서 외쳤다.

“동족을 상대로 우리의 존재감을 무슨 재주로 숨기냐!”

드래곤이 지닌 능력으로 존재감을 최대한 억누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마법의 정점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르티엔조차도 자신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하고, 그저 최소화 시키는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다른 드래곤이 봤을 때, 노룡인 그를 어린 드래곤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수준 정도로 말이다.

그러자 브로마네스가 아주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은색의 작은 목걸이였다. 브로마네스는 그 목걸이를 아 르티어스의 눈앞에서 살살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친구, 이게 뭔 줄 알겠나?”

“뭐긴, 허접한 목걸이지.”

퉁명스런 대꾸에 브로마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부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크크, 이건 단순한 목걸이 따위가 아냐. 자네의 염원을 이뤄 줄 수 있는 물건이지. 다시 말해 우리들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감춰 줄 수 있는 아티펙트(artifact)란 말 일세.”

순간 아르티어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뭣? 그, 그런 게 있…….”

하지만 곧 아르티어스는 짜증스런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 아티펙트가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 새끼는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 내가 그런 유치한 거짓말에 홀라당 넘 어갈 정도로 멍청해 보이냐? 응?”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이런 격한 반응에 혀까지 차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쯧쯧, 이 친구가 속고만 살았나. 잘 기억해 보게. 내가 자네에게 허튼소리 한 적이 있었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많았지.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얄팍한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는 게 네놈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나조차도 깜빡 속을 뻔했 어. 짜식, 그러고 보니 한동안 안 본 사이에 거짓말이 꽤 많이 늘었는데?”

대견하다는 듯 브로마네스의 등까지 토닥여 주는 아르티어스.

자신의 말을 아예 믿어 주지 않자 브로마네스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자, 내 존재감을 한번 느껴 보게.”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계속한다고 생각하던 아르티어스였기에 이런 유치한 말장난에 화를 내는 것도 바보처럼 느껴져 고개를 반대편으로 획 돌려 버렸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래도 한번 느껴 보라니까.”

이런 유치한 말장난은 그만하자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감각이 뭔가 허전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서 느껴지던 브로마네스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고 해도 손에 잡힐 듯 확연히 느껴지던 레드 드래곤의 그 불같은 존재감이 말이다. ‘설마, 내 말에 삐쳐서 그새 돌아가 버렸나??

획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같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브로마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헉!”

깜짝 놀란 아르티어스. 이번에는 눈을 꼭 감고는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집중해서 브로마네스의 존재감을 느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혀 느껴지지가 않 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놀라 두 눈을 번쩍 떠 보니, 브로마네스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이럴 수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브로마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어떤가? 내 작품이 기가 막히지 않나?”

“네, 네가 그 목걸이를 만들었다고?”

다급히 되묻는 아르티어스의 목소리에는 묘한 허탈감마저 어려 있었다. 저런 닭대가리도 이런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냈는데, 자신은 아예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 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물론이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했다.

“실버 드래곤들이 사막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였어. 아주 기분이 나쁘더라고. 물 도마뱀이면 물에서나 놀 것이지, 어디 감히 남의 영역 을 넘봐. 나는 놈들을 물 먹일 궁리를 시작했지. 하지만 곧이어 깨달았어. 아무런 뒤탈 없이 그걸 행하려면, 내가 그 짓을 했다는 것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을 말이야. 아무리 내가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실버들을 상대하는 건 조금 껄끄럽거든.”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목숨을 날릴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내 존재감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는 거야.”

여기까지는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하는가 싶더니, 브로마네스는 갑자기 탁자를 세차게 탕! 하고 쳤다. 그런 다음 의기양양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레드 일족이 아니겠나.”

평소에는 게으르다가도 이런 나쁜 장난질에만 근성을 발휘하다니……. 브로마네스가 저런 목걸이를 만들어 냈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이었다.

“확실히 자넨 못된 쪽으로는 아주 기발하게 머리가 돌아가지.”

“그거 칭찬인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묻는 브로마네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아르티어스는 활달하게 말했다.

“칭찬이야, 칭찬. 자, 그래서 어떻게 됐어? 쓸데없이 질질 끌지 말고 요점만 말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오랜 시간 고민했었는데 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더란 말이야. 의외로 가까운 데 힌트가 있더군.”

“그게 뭔데?”

“너 예전에 네 아들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생각나?”

스치듯 지나간 일조차도 머릿속에 평생 각인되는 드래곤의 엄청난 기억력인데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르티어스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

이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망할 나이아드 녀석이 내 아들을 정령계로 끌고 갔을 때를 말하는 거야?”

그러자 브로마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때 말고 크루마 녀석들에게 납치되었을 때를 말하는 거야. 예전에 자네가 나한테 말해 줬었잖아. 미친 듯이 대륙 전역을 찾아다녔었는데, 결국에는 흔적 조차 찾지 못했다고 말이야.”

“그랬었지.”

“그때 자네가 말해 줬던 것들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연구를 했지. 사실 자네 아들은 호비트인 주제에 특이하게도 드래곤에 좀 더 근접한 존재잖나. 호비트가 가지 고 있을 거라고는 가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막강한 마나도 그렇고, 정령왕과의 관계 역시…….”

순간,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호, 혹시?”

“흐흐, 이제야 눈치 챘군. 이 목걸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말이야. 사실 알고 보면 별거 아니었어. 자네나 나나 용언(龍言)의 힘은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단계에 와있지 않나. 그리고 마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우리 드래곤들이 그것 외에 완벽하게 끊어 버리지 못하는 게 대체 뭘까?”

아르티어스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정령과의 교감!”

브로마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로 그걸세, 친구.”

목걸이를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두 눈에 미칠 듯한 희열이 어렸다. 저것만 있다면 복수가 가능했다. 그 망할 실버 두 마리에게 직접적인 복수는 불가능하겠지만, 실버 패밀리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는 충분히 훼방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또 하나의 목걸이를 꺼냈다. 자신의 목에 건 목걸이에 노란색 보석이 박혀 있다면, 이번 것은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마 도 그 목걸이는 아르티어스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어때? 가지고 싶은가?”

아르티어스는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브로마네스가 음흉스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나하고 함께 유희를…….?

아르티어스는 목걸이를 획 낚아채며 호탕하게 외쳤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 새끼들! 두고 봐라. 내가 뒤끝이 얼마나 강한지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마.”

희희낙락하며 목걸이를 목에 걸려고 하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브로마네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잠깐! 그런데 그 목걸이에는 쬐금, 아주 쬐금 문제가 있거든.”

“문제?”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아르티어스.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드래곤이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좋은데, 나 또한 다른 드래곤의 존재감을 읽을 수가 없다. 뭐 그런 거냐?”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브로마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목걸이를 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순간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허, 마음의 준비라고? 그러면 그렇지! 너 같은 돌대가리가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었을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다. 그래, 뭐야? 뭐가 문제인지 감추지 말고 다 털어 놔봐.”

뭔가 말을 꺼내려던 브로마네스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툭 내뱉었다.

“아, 진짜! 만들기는 제대로 만들었는데, 그 효과에 문제가 좀 있어서 말이야. 그게… 말로 설명을 하기가 좀 난해해서 말이지. 에이, 직접 목에 걸어 봐. 그럼 뭐가 문제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테니까.”

목걸이를 차고 있음에도 브로마네스가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생명과 직결된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과감하게 목걸이를 자 신의 목에 걸었다. 녀석의 말대로 차 봐야 안다면 차 보면 될 게 아니겠는가.

착용하는 순간 전기충격 같은 게 오는 건 아닐까 하여 마음을 굳게 먹었건만,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로마네스의 너스레에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 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려고 하는 순간, 왠지 어색한 느낌이 감지됐다. 마치 사방이 꽉 막힌 벽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적막감과도 같은.

그건 지금껏 아르티어스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괴이한 느낌이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앞에서 너 역시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브로마네스의 모습도 그렇고, 화사하게 꾸며진 식당도 그렇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 이 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꼭 밀실(密室) 속에 갇힌 것만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브로마네스는 재미있다는 듯 크득크득 웃었다. 사실 자신이 목걸이를 처음 목에 걸었을 때, 천성적으로 답답함을 싫어

하는 레드 일족의 특성상 기겁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는 걸 망각하고 말이다.

“꽤 재미있는 느낌이지? 나 역시 목걸이를 걸어 보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네. 우리들 드래곤에게 있어서 정령과의 교감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 고 있었는지를 말이야.”

그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브로마네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눈을 한번 감아 보게. 아주 완벽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지. 내가 지금껏 봐 왔던 것은 눈을 통해서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을.”

그 말대로 눈을 감고 나서야 아르티어스는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그 어색한 감각 이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령체인 드래곤은 알게 모르게 주변의 정령들을 이용하며 살아간다. 설혹 눈앞에 있는 사물을 볼 때에도 시각 외에 정령들을 통해서 흡수되는 데이터가 복합적으 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 드래곤은 눈을 감고 있다고 하더라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 감각기관은 시각만이 아니다. 청각과 후각까지. 자신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과정이 벌어지고 있다 보니, 모두들 그 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데이터의 이동이 갑자기 틀어 막히니 마치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고독감이 엄습해 온 것이다.

잠시 후, 눈을 뜬 아르티어스는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군.”

브로마네스는 그것 보라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함께 유희를 떠난다니 준비를 좀 해야겠지. 준비가 끝나는 대로 내 레어로 와.”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준비?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나. 나는 이대로 가도 돼. 우리가 첫 유희를 떠나는 어린 드래곤들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오랜만에 유희를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는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내 레어로 가자. 나는 준비를 좀 해야겠거든. 이때를 위해서 챙겨 둔 것들이 많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