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1화 – 난공불락의 요새
난공불락의 요새
모라이어스가 숲 속에서 보여 준 신출귀몰한 움직임만으로도 라이가 탈출을 포기할 정도였는데, 붉은 전갈 용병단보다 훨씬 윗등급으로 평가받는 페가수스 용병 단 소속 레인저들의 실력은 어떻겠는가.
제7독립대대원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적에게 낱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도렌 영주가 용병단을 끌어들였다는 정보만 입수했어 도 이렇게까지 어이없이 뒤를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조심을 했을 테니까.
페가수스 용병단은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7독립대대원들은 페가수스 용병단의 참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 하 나만으로도 이미 전투의 승패는 갈려 버렸다고 봐야 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적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제7독립대대 대대장은 지금까지 해왔듯 적을 기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 는 진격로를 택해 이동하고 있었다.
적을 기습하는 데 있어서 최우선 조건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선택한 진격로는 험난하기 짝이 없는 산길이었다.
“이쪽 길로 가야 합니다요.”
갈림길에서 길잡이는 오른쪽을 가리키며 조언했다. 하지만 대대장은 그쪽 길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따른다면, 왼쪽 길이 요새를 공 격하기에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길잡이가 가야 한다고 말한 오른쪽 길은 요새지대와 도렌 영지의 중간 지점과 연결된다. 요새지대와 도렌 영지를 잇는 대로에 말이다. 따라서 오른쪽 길로 진격하 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대로를 따라 요새지대로 들어가야만 한다. 기습을 계획하는 대대장의 입장에서 그건 아주 문제가 많은 행로였다.
“오른쪽 길은 안 돼. 돌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적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농후하단 말일세.”
“그쪽 길은 너무 험합니다요.”
길잡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땅바닥에 주위 지형을 그려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에 겨울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하해 오던 몬스터 무리들 중 일부가 그쪽 길을 통해 내려왔던 적이 있었습죠. 여기에서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따라가면 영 주님이 계신 성까지 곧바로 연결되지 않습니까요? 그때, 하마터면 영주성이 몬스터들에게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할 뻔했습죠.”
당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메르헨 영주는 왼쪽 길로 다시는 몬스터들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개 소대(10명)만 있어도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막아 낼 수 있는 그런 난공불락의 요새를
“그렇다면 더욱 그쪽으로 가야겠구먼. 그쪽 주둔군 지휘관에게 적정에 대한 정보도 듣고…….”
대대장의 말에 길잡이는 지금껏 감추고 있던 사실을 실토해야만 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그쪽 길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으니까.
“그 요새는 이미 오래전에 도렌에 빼앗겼습니다요.”
““빼앗겼다고?”
“예.”
대대장은 어이가 없었다. 길잡이의 말이 앞뒤가 안맞았으니까.
“난공불락이라면서 어떻게 도렌에 뺏긴 건가? 도렌군이 그렇게 강했나?”
“두 번에 걸친 대회전에서 도렌에 패배한 후, 영주님께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을 철수시킨 탓입죠.”
지금까지 메르헨 영지군을 보며 대대장이 느낀 건 그야말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이미지뿐이다. 그런 허접한 놈들을 앞세워 요새화를 시켜 봐야 뭐가 그리 대단 하겠는가. 어쩌면 적에게 점령당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 병사들을 철수시켰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대대장은 생각했다.
“돈이 넘쳐난다는 메르헨의 영주가 겨우 열 명의 병사를 주둔시킬 돈이 없어서 병사들을 철수시켰다는 건가? 자네 말대로라면, 열 명만 있어도 방어가 가능하다면 서?”
“그, 그건…….”
대대장의 말에 길잡이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대장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그로서는 뭐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뭐, 그 얘기는 그만두세. 나는 그쪽으로 가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 요새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있던가? 자세하게 설명 좀 해 주게.” 요새의 빈틈을 미리 알고 있다면 공략하기가 쉬워지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길잡이의 대답은 대대장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 그게 직접 보지는 못했습죠. 그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길잡이의 대답에 대대장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직접 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길잡이의 말을 100% 믿을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진 셈이었으니까.
“자네가 모른다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구먼.”
진격로상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고, 또 그게 도렌군의 수중에 넘어가 있다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무리 형편없이 건설되어 있는 요새라 해도, 그게 건 설되어 있는 지형이 어떠하냐에 따라 방어력이 몇 배나 상승하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그곳 요새에 얼마나 많은 적병이 주둔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대장은 우선 각 중대장들에게 통보하여 대대 내의 모든 레인저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지도를 보여 주며 레인저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길잡이의 말로는 이 일대에 요새가 건설되어 있다고 한다. 자네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두 명씩 짝을 지어 이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적의 순찰대나 보초들 을 없애 버려라. 적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우리들이 자신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막아라. 알겠나?”
“옛”
“각 조들은 각자 유기적으로 이동하며 빠뜨린 곳이 없도록 샅샅이 훑고 나가도록. 본대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30분 후부터 이동을 재개하겠다.”
30분 후, 대대는 진격을 재개했다.
앞쪽에 적의 요새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대장이 진격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요새를 건설한 당사자가 메르헨 쪽이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하는 방어 거점이다. 튼튼하게 건설하면 건설할수록 좋겠지만, 문제는 비용이다. 특히 이런 깊은 산속에 건설하는 요새의 경우 평지에 건설하는 것에 비해 몇 배의 자금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적이 쳐들어올 방향을 위주로 방어선을 건설하게 된다.
남하하는 몬스터를 저지하기 위한 요새인 만큼 북쪽을 향한 방어는 아주 치밀하게 만들어 놨겠지만, 남쪽을 향해서도 과연 그렇게 해 놨을까? 뒤쪽에서 오는 건 아군뿐이니,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후방 쪽에서의 공격에 대한 대비까지 해 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도렌에서 그 요새를 점령했다고 하니,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대비를 해 놓긴 해 놨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북쪽을 향한 것처럼 그 렇게 막강한 방어선일 리는 없었다. 기습만 제대로 가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피해만으로도 점령이 가능할 거라는 게 대대장의 생각이었다.
왼쪽 길로 접어든 지 20여 분쯤 지났을 때였다. 산속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대로가 나타났다. 아마도 채석장에서 채취한 석재를 요새 건설현장으 로 운반하기 위해 만든 배후 도로일 것이다.
대대장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은 도로의 상태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는지 도로 위는 잡초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도렌 쪽에서 이쪽 도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대장은 생각했다.
“나 같으면 요새를 점령하는 즉시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영주성을 기습했을 텐데……. 참, 그럴 필요도 없었나? 두 번의 대회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는 데, 굳이 무리를 해가면서 기습작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던 거겠지.’
메르헨이나 도렌, 양쪽 다 이쪽 도로가 지니고 있는 전술적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건 요새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런 분위기라면, 요새에 병사들이 다수 주둔하고 있다고 해도 경비 태세가 소홀할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제발 그랬으면…….’
주변에 흩어져 있을 레인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대대는 천천히 진격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올란도가 거느리는 중대는 다른 대대들보다 100여 미터 앞서 나가 며 정찰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마침내 올란도의 부대는 저 멀리 수풀 위로 요새의 윗부분이 살짝 보이는 지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올란도는 즉시 대대장에게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이 되돌아와 대대장의 지시를 전해 줬다.
“대대장님께서 적진을 정찰하시랍니다. 아주 중요한 임무니 부하들만 보낼 생각 하지 말고, 중대장님께서도 함께 가시랍니다. 적들의 대비 상태를 살펴보고, 그 헛점을 파악하는 데는 사병들보다는 장교가 훨씬 더 나을 거라면서요.”
“이런 빌어먹을!! 정 가서 살펴보고 싶다면 자기가 직접 할 일이지…….”
올란도의 얼굴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대원들 앞에 서서 지시를 내릴 무렵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올란도는 대원들을 쭉 둘러보며 신 난다는 듯 말했다.
“제군들! 적진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대대장님의 명령이다.”
올란도의 말에 모두들 여기저기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날도 더운 데다가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 묵직한 갑옷까지 몸에 걸치고 있으니 모두들 죽을 맛이었던 것 이다.
“모두들 쉬고 있는데 안됐지만, 지금 호명하는 대원들은 앞쪽으로 가서 정찰 좀 하고 와야겠다.”
“우~~”
인상을 왈칵 찡그리며 중대원들이 야유를 퍼붓자, 올란도는 그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도 갈 테니까 말이야.”
중대장인 올란도 역시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는 말에 대원들의 야유는 뚝 그쳤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대원은 자신의 말을 다른 동료에게 맡기고 앞으로 나오도록. 우선 쟈코!”
이런 임무는 모라이어스처럼 레인저 교육을 받은 사람을 보내는 게 최고였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대대장이 차출해서 데려 가 버린 상태. 그렇기에 올란도는 쟈코 를 필두로 4명의 고참병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마지막으로 호명한 대원은 중대에서도 가장 막내인 라이였다.
정찰은 평상시에 행해지던 것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올란도를 선두로 대원들은 각자 그 뒤를 10미터 정도씩 거리를 두고 일렬로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대대장이 진로를 바꾼 이래, 산길치고는 꽤나 널찍한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마차 한 대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길이 굽어지는 지점이 나오자 올란도는 조용히 손을 들어 대원들을 멈춰 세웠다.
“우리들의 임무는 적들의 경계 태세가 어떤지 몰래 살펴만 보고 오는 거다.”
그때 궁금하다는 듯 라이가 질문을 던졌다.
“경계 태세라면 적병의 숫자나 배치, 뭐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흐흠, 이왕에 말 꺼낸 김에 네가 가서 살펴보고 와라.”
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급히 되물었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너무 가까이 접근할 필요는 없다. 보초의 숫자는 몇 명인지, 또 요새의 구조는 대략 어떤 형태인지, 뭐 그런 정도만 파악하면 돼. 알겠냐?” “그러다 발각돼서 적들이 화살이라도 날리면요?”
지시를 내리면 입 닥치고 따를 것이지, 라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자꾸 질문을 던져대자 올란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거 짜식.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그리고 설혹 적군이 활을 쏜다고 치자. 너한테 응사할 활이라도 있냐?” “아뇨.”
활은 믿을 수 있는 고참병들에게만 소지가 허가될 뿐, 라이와 같은 신병은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그럼 답은 뻔한 거 아냐. 들켰다 싶으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토껴야지.”
올란도의 질책에 라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또다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저…, 혼자…, 가는 겁니까?”
그러자 올란도는 악마처럼 음흉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래, 너 혼자서. 하지만 뒤에서 우리들이 지원을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갔다 와. 지금 당장!”
길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명령하는 올란도 라이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제야 놈의 속셈이 뭔지 확실히 안 것이다.
“이번에는 적병의 손을 빌려 나를 죽이려고 하는군. 이런 개자식!!’
그렇다고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평소 올란도가 자신을 삐딱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라이도 눈치채고 있었다. 거부한다면 그걸 핑계로 명 령불복종이라며 곧장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뎅강 날려 버릴 게 뻔했다.
“젠장, 갑니다. 가! 그러니까 경계병의 숫자만 알면 된다, 이거죠?”
투덜거리던 라이는 대원들 사이를 빠져나와 앞쪽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길 옆으로 붙은 뒤 납작 엎드려서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적의 요새가 있다는데 길 한복판으로 멍청하게 걸어가다 죽기는 싫었으니까. 그런 라이를 바라보며 올란도는 씨익 미소 지었다.
‘흠, 이젠 제법 용병티가 나긴 하는군.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놀라움을 나에게 선사할지 기대가 되네.”
라이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이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올란도가 아니다. 그는 알고 싶었다. 적에게 발각이 되어 화살이 날아올 때, 라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이를 맥없이 죽게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살고자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라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으니까.
올란도는 4명의 고참병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라이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적병이 있는지 주위를 잘 살펴보도록! 적병이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만약 라이가 단 한 발이라도 화살을 맞는 날에는 어떻게 될지 잘 알지? 앞으로 1년 동안 네놈들 입에서 곡소리가 나오도록 만들어 줄 테다.”
뒤에서 올란도가 나머지 대원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전혀 알 리 없는 라이는 앞으로 박박 기어가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몽땅 다 떠올리며 올 란도를 열심히 씹어대고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머릿속으로 말이다. 원래 나쁜 놈들은 귀가 밝은 법이니까.
“이런 나쁜 놈의 새끼! 나한테 뭔 원수를 졌다고 이렇게까지 못살게 굴어! 오크보다 더 악랄한 놈의 새끼. 오크들도 너보다는 나았어.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 네놈 등에다가 칼을 깊숙이 박아 줄 테니까.’
숨이 턱에 차도록 땅바닥을 박박 기면서 앞으로 전진하던 라이는 잠시 쉬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따라오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버려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젠장. 안 걸리면 좋겠지만, 적에게 발각되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심산인가?”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주위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다 보면 악독 한올란도가 언제 뒤통수에 화살을 날릴지도 모르니까.
라이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그래,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살려면 적병에게 발각되자마자 항복하는 수밖에. 노예로 팔려 와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끌려왔다고 하면 혹 살려 줄지 알아? 게다가 우리 용병단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알려 준다고 하면 그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
마음을 굳힌 라이의 움직임이 보다 빨라졌다.
한참을 기어가자 이윽고 수풀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방어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어벽 위에서라면 이 일대 전체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을 듯했다. 라이는 눈을 가 늘게 뜨고 뚫어져라 방어벽을 살펴봤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가 100여 미터쯤 더 앞쪽까지 기어가자 숲이 끝나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는 요새의 방어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라이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 신이 목표로 삼아 거리를 좁혀 온 방어벽의 실체를.
그것은 요새를 감싸고 있는 방어벽이 아닌, 길을 가로막고 있는 굳건한 방벽(防壁)이었던 것이다.
방벽은 반대편에서 전진해 오는 적들을 막을 수 있도록 건설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성벽들이 그러하듯 방벽 위에는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적병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에 용이하도록 요철(凹凸) 형태의 성가퀴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성가퀴가 설치된 방향은 저 반대편 쪽을 향하고 있었지, 이쪽은 그냥 뻥 뚫려 있었다.
시선을 돌려 아래쪽을 살펴보니 작은 건물 두 채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았음에 확실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온 라이는 허탈 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무도… 없잖아?”
어쩌면 올란도 그놈은 이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려고 먼저 보낸 것이리라. 이런 망할 놈! 오크한 테 붙잡혀서 죽을 때까지 노예 노릇이나 해라!
라이는 신경질적으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방벽 발견! 적병은 한 명도 없습니다.”
라이는 보고를 받은 올란도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곧바로 나직하지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야, 이 새끼야. 적이 뒤쪽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큰 소리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닥치고 다시 잘 살펴봐.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냐?”
“옛”
찔끔한 라이는 고개를 팍 숙인 채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지만, 적의 모습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라이는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보고했다.
“중대장님~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정말이라니까요.”
그러자 올란도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잠복하고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는 라이에게로 다가서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이러다 적병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네놈의 쓸모없는 눈깔을 둘 다 뽑아 버릴 줄 알아.”
“중대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뒤에서 고참병들이 말리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올란도는 라이의 곁을 지나쳐 공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공터로 나서자 방벽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 에 확 들어왔다. 방벽은 위로 솟아오른 왼쪽의 절벽과 오른쪽의 낭떠러지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가로막을 목적으로 건설되어져 있었다. 방벽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높이는 10미터는 족히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뭐, 이런 무식한 방벽이 다 있어. 이런 산골짜기에다가…….”
올란도는 돌계단을 이용해 방벽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방벽의 두께가 상상 이상으로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얇은 곳도 4미터는 족히 되었다. 이 정도라면 오우거라 하더라도 쉽사리 뚫지는 못하리라.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방벽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건설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올란도의 놀라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올란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벽 아래쪽으로 쭉 펼쳐져 있는 놀라운 광경! 수직에 가까운 산비탈을 깎아 4명은 족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도로를 뚫어놓은 것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요, 반대편은 낭떠러지다. 그 도로를 제외한다면 그 어디로도 움직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런 미친 짓을 해낸 영주가 있을 줄이야..
처음부터 산비탈이 저렇듯 수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무수한 인력을 동원하여 절벽의 형태가 될 때까지 깎아 낸 것이겠지. 저 엄청난 중노동의 흔적을 보며, 올란도는 인간의 능력에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저 멀리 길 끝부분에 이쪽을 향해 건설되어 있는 관문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올란도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성가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이쪽이야 방어 가 불가능하니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해도, 저쪽에는 적병이 주둔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올란도는 품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저쪽 방벽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반대편 관문은 이곳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듯 깔끔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아마도 저 방벽은 메르헨의 침입을 염려한 도렌 영주가 비교적 최근에 건설한 것인 모양이다.
“젠장, 저쪽에 1개 소대라도 배치되어 있다면, 기습이고 나발이고 끝장이군. 대대장은 무슨 생각으로 이쪽으로 온 거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올란도는 망원경으로 방벽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적병 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란도는 씨익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흐흐, 우리 대대장은 꽤나 운이 좋으시단 말씀이야. 이번에도 손쉽게 공적을 올릴 수 있을 테니.”
올란도는 고개를 아래로 내밀어 라이를 찾았다.
“라이! 라이! 이 녀석 어디 있어?”
햇빛을 피해 건물 안에서 쉬고 있던 라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중대장님.”
“너 빨리 가서 대대장님께 보고해라. 적병이 없다고 말이야.”
동료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대대장에게 달려가 보고하고 돌아오라니. 그것도 자기 혼자서. 불만에 가득 찬 라이의 입이 앞으로 쑤욱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올란도의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본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다. 도착하자마자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거느리고 방벽 위로 올라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대대장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어선을 만들어 놨을 줄이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적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한쪽 면이 낭떠러지인 저 도로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도로를 틀어막고 있는 이 튼튼한 방벽. 이 정도라면 정말로 길잡이의 말대로 1개 소대만 있어도 몬스터의 대부대를 막아 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반대편에도 이런 관문이 있다고?”
“예, 대대장님. 다행스럽게도 그쪽에도 적병은 없는 것 같습니다.”
품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반대편 관문을 직접 살펴보고 있는 대대장을 향해 올란도가 조언했다.
“흩어져 있는 레인저들을 불러 모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틈을 이용하여 정찰대를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 아래쪽을 보십시오.”
올란도는 관문 아래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경사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관문의 바로 앞부분의 길은 경사가 아주 가팔랐다. 적이 관문을 공격하 기 힘들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해 놓았으리라.
“경사가 워낙 급한 데다가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전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저쪽 관문에 적병이 매복해 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만큼 확실하 게 해 놓고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찬동했다.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 말 꺼낸 김에 자네가 한 번 더 수고해 주게.”
설마 두 번씩이나 일을 시킬 줄이야. 그가 그 말을 꺼낸 건 지금껏 고생하지 않고 띵가거리고 있던 다른 중대장 놈들이 고생하라고 한 거였지, 자신이 고생하겠다 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올란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2중대장 루니엘이 끼어들었다.
“계속 1중대에게만 임무를 맡기시는 건 불공평하죠. 이번에는 저희 중대가 정찰 임무를 맡고 싶습니다.”
대대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올란도를 쳐다봤다. 올란도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2중대가 수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루니엘이 정찰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 흩어져 있는 레인저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게.”
“옛.”
루니엘이 자기 중대에서 정찰 임무를 맡겠다고 선뜻 나선 것은, 올란도의 1중대만 계속 공적을 거저먹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반대편에선 적군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방벽 밑으로 내려온 루니엘 중대장은 부하 10여 명을 선발해 경사로를 내려갔다. 관문과 관문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는 U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리막길의 길이는 거의 500여 미터였고, 내리막이 끝난 다음에 50~60미터 정도 평평한 길이 이어지다 곧바로 400여 미터에 달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화살의 사거리 밖 인 만큼, 내려갈 때는 마음 편히 내려갈 수 있었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자마자 루니엘 중대장은 일렬로 길게 늘어선 대형(隊形)으로 진형을 바꿨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적의 화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패 로 몸의 전면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전진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루니엘 중대장과 대원들의 모습을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반대편에 적병이 주둔해 있다면 이번 기습 작전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저런 난공불락의 요새를 겨우 이 정도 병력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후퇴해서 다른 길로 이동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적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상부에 보고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면 철수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 이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고생이 완전히 헛것이 된다고 봐야 했다.
다행히도 정찰대가 방벽 근처에 접근할 때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벽에 설치된 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루니엘의 대원들이 힘을 주어 밀자 ‘끼이이익!’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냥 열려 버렸던 것이다.
루니엘과 대원들은 신속히 문 안으로 뛰쳐들어간 뒤 주위를 살펴봤다.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다. 루니엘 중대장의 손짓에 따라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니엘 중대장은 방벽 위로 올라가 맞은편 방벽을 향해 양손을 엑스자로 휘저으며 적이 없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본 대대장 은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힘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전원 이동! 악마의 골짜기만 건너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긋지긋한 산행도 끝이다. 모두들 힘내라!”
적병이 없는 게 확실했기에, 대대장은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된 레인저들에게 연기 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행방불명인 레인저는 2개 조, 4명이었다. 그들을 기다 리기 위해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연기 신호를 보면 본대를 뒤쫓아 올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