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3화 – 간뎅이 작은 드래곤
간뎅이 작은 드래곤
도렌 쪽 방벽에 포진하고 있던 페가수스 용병단의 레인저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철수하라는 신호가 없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들이 후퇴한 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미 적들은 전멸됐거나 항복하여 굴비 엮듯이 줄줄이 묶여 있을 것이다. 설혹 몇 놈이 튀었다고 하더라도 이쪽으로 왔다면 자신들의 눈을 벗어날 수가 없다. 방벽과 방벽 사이의 길은 외줄기로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작전이 끝나 철수하라는 신호가 골백번쯤은 올라오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반대편 방벽에서는 지금껏 아무런 신호도 없는 것이다.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거지? 기다리기 엄청 지루하구먼.”
선임 레인저가 투덜거리자 옆에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구레나룻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보 사내가 대꾸했다.
“뭐, 일이 많다 보면 깜빡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 우리 병력보다 4배 이상이나 되는 포로를 붙잡았으니…….”
각 소대에서 차출되어 임시로 조를 짜게 되었지만, 소속 중대가 같은 만큼 서로를 모를 리가 없다.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지휘를 맡고 있긴 했지만, 평소 하던 대로 격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새꺄!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방벽과 방벽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반대편 방벽이 보이기는 했지만, 깨알처럼 작게 보이는 정도였다.
한참 전에 적병들이 방벽 안으로 우루루 몰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들은 적들이 항복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전은 이미 깔끔하게 끝난 셈인데, 왜 철수 신호를 보내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반대편 방벽을 쳐다보고 있을 때, 레인저들 중에서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상해. 내가 가 볼게.”
“그래, 수고해라. 나중에 한잔 사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레인저들은 반대편 방벽 위쪽에 모습을 드러낸 동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깨알처럼 작았지만, 상대가 보내는 수신호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선임 레인저는 얼굴을 굳히며 딱딱한 어조로 외쳤다.
“비상사태다!”
허겁지겁 반대편 방벽으로 달려온 레인저들은 먼저 와 있던 동료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빨리 와서 여기 좀 봐 봐.”
앞서 이곳에 와 있던 레인저는 동료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데리고 방벽 가장자리로 가서 땅바닥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붉은 얼룩이 땅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면 피비린내가 확실했다.
선임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작전대로라면 지금쯤 이곳에는 적의 포로들로 시끌벅적해야 한다. 그런데 포로가 되어 있어야 할 적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아군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전투가 벌어졌는지 방벽 여기저기에는 혈흔만이 가득했다.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방벽 주위를 샅샅이 수색해!”
“알았어.”
“그리고, 브라운! 자네는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 나가 봐. 어떤 다른 흔적이 있는지 말이야.”
“알았네.”
특수훈련을 받은 자들인 만큼, 방벽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봐! 모두들 이쪽으로 와 봐!”
레인저들은 수색을 중단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털보라 불리는 레인저가 절벽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 아래쪽에 시체가 몇 구 있어. 아군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내려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선임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오줌인지 맥주인지 꼭 찍어서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냐? 정황으로 미뤄 봤을 때 아군일 게 뻔하잖아.”
“그렇겠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들은 작금의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포위를 한 상태에서 오히려 적에게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철옹성 같은 방벽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중대장인 페델은 단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어쩌면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또 다른 부대가 있었을 수도 있어.’
그것 외에는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짐작은 짐작일 뿐,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선임 레인저는 마음을 굳혔는지 한 명을 손가락으 로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넌 본대로 돌아가서 대대장님께 현 상황을 그대로 보고해.”
“설마 이 인원으로 적들을 추격하려는 거야?”
선임 레인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1개 대대 병력이 어딘가로 사라졌어. 어쩌면 그 이상의 병력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확인해야지, 그리고 우리를 건든 것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받아 내야 지!”
적의 정확한 인원과 위치만 파악할 수 있다면 미하엘 대대장이 알아서 동료의 복수를 해 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부하들이 신뢰하고 따르는 인물이었다.
***
주위에서 쏟아지고 있는 부러워하는 듯한(어떤 의미에서는 탐욕 어린 시선에 브로마네스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맛에 유희를 즐기는 게 아니겠는가. 지금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은 이번 전투에서 노획한 것들이었다. 멋진 흉갑(胸甲)과 허벅지 보호판, 무릎 보호판 등등…….
특히 흉갑의 경우, 브로마네스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몇 번씩이나 튕겨내 버렸을 정도로 튼튼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뛰어난 명품이었다. 이 갑옷의 전 주인은 적의 공격이 흉갑 부위를 향하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적의 공격을 막는 대신 곧바로 공격을 감행했었다. 갑옷의 방어력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감히 실행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이 흉갑 때문에 브로마네스는 몇 번씩이나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야 했다. 만약 자신의 검에 적의 공격을 자동적으로 차단해 주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은 적장이 아니라 자신이었으리라.
전투가 끝난 직후, 브로마네스는 노획했던 모든 물품들을 압수당했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멋대로 공격을 감행했다는 죄 때문이다. 하지만 대대장 미 하엘의 관용 덕분에 노획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게 적장의 목을 벤 것에 대한 미하엘이 내린 상급(賞給)이었다.
미하엘의 막사로 찾아간 브로마네스는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그렉 크레스터, 대대장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남인 브로마네스가 화려한 갑옷까지 걸치고 있자 귀공자가 따로 없었다. 순간, 미하엘은 그때 명령불복종의 죄를 물어 크레스터의 목을 베어 버 릴 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녀석을 죽였다면 이 갑옷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 테니까…….
잠시이기는 했지만, 미하엘 같은 사람의 마음까지 탐욕으로 뒤흔들어 놨을 정도로 브로마네스가 노획한 갑옷은 엄청난 물건이었다.
미하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당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 갑옷을 보지 못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갑옷을 본 다음이었다면 부하들에게 손가락질 을 당하더라도 녀석의 목을 베어 갑옷을 차지하려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귀관에게 맡길 임무가 있어서 불렀다.”
“어떤 임무든 맡겨만 주십시오!”
자신감이 넘치는 브로마네스의 대답에 미하엘은 피식 웃다가, 곧 침중한 표정으로 제352중대와의 연락이 끊겼음을 말했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동했는 데 정기 연락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마법통신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작전을 수행할 때 용병들이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사람이 바로 마법사였다. 그런 마법사가 마법통신을 보내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면, 뭔가 심각한 일이 벌 어졌음이 틀림없으리라.
“원래 이런 일은 레인저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지금 그들은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기 위해 모두 동원되어 있는 상태라서 말이야.”
그건 레인저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대원 전체가 패퇴하는 적들을 추격해서 소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체적인 병력만 따진다면 아직까지도 메르헨 영지 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상태다. 갑작스런 지휘 체계 붕괴로 인해 적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만약 적에게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를 줬다가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패잔병 잔챙이들을 상대하느라 은근히 짜증났던 브로마네스였다. 그가 원한 건 적군들 사이에 필마단기로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이지, 반항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도망치기 바쁜 적병들을 학살하는 게 아니었다. 겁에 질린 호비트를 죽이는 거야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왔던 짓거리였으니까.
이런 쓸데없는 짓 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기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끼고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적장을 회상하면 서…….
그리고 땀 냄새 가득한 머리카락과 얼굴도 좀 깨끗하게 하고 싶었다. 호비트들이 볼 수 없는 옷의 안쪽은 마법을 이용하여 청결하게 유지할 수가 있었지만, 겉모습 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동료라는 놈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악취,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고 뛰어다니며 칼까지 휘둘러 대니 온몸이 땀에 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야지(野 地)를 돌아다니다 보니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상황, 정말이지 코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다.
거기에다가 오늘처럼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악취가 더욱 심해진다. 격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대소변이 마렵다고 해서 뒤로 도망칠 수는 없지 않겠는 가. 소변이건 대변이건 그냥 싸 버리며 싸우는 수밖에…
그렇기에 임무를 주겠다는 미하엘의 명령은 브로마네스에게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으리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하엘은 탁자 위에 미리 써 둔 명령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상황이 급박한 듯하니 지금 즉시 출발하도록 하게.”
명령장을 본 브로마네스의 얼굴에 일순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대 전체가 출동하는 것으로 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하들을 데리고 가면 그들의 이목 때 문에 자신의 행동이 제약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브로마네스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 뒤 짐짓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부하들이 이번 전투에서 몇 명 살아남지도 못한 데다, 다들 상처가 너무 심해서 말입니다. 차라리 저 혼자 임무를 수행하면 안 되겠습니까?”
“흠. 상황을 알아보러 가는 거니 혼자라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위험할 텐데..
산속에서 몬스터를 만날 위험도 있고, 무엇보다 사방으로 흩어진 패잔병들과 맞닥트려 전투가 벌어질 확률도 높았다.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쪽수에는 당할 도리 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하엘은 차마 브로마네스의 요청을 승낙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상처를 입은 부하들을 데리고 가는 게 더 위험합니다. 상처에서 풍기는 피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들 우려도 크지만, 돌발상황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보탬도 되지 않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군. 하지만 따로 지원해 줄 수 있는 병력은 없다네.”
“걱정 마십시오. 적장도 단칼에 벤 제가 아닙니까.”
“그래, 그럼 부탁함세.”
브로마네스의 호언장담에 미하엘은 미소를 지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무모하리만큼 호기를 부리는 간 큰 사내를 보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흠,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군. 하지만 저런 놈일수록 일찍 뒈지는 법이지. 제발 오래 살아남아야 할 텐데…….’
브로마네스는 미하엘의 막사에서 나오자마자 급히 자신의 말을 찾아 진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오랜만에 얻은 자유인데, 혹시 미하엘의 마음이 바뀌어 임무를 변경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럇!”
이번 임무를 끝마칠 때까지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브로마네스는 신이 났다.
한참 말을 달리던 브로마네스는 검집 윗부분에 달려 있는 동그란 수정판을 들어 올렸다.
수정(水晶)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검사들이 자신의 애검을 장식하는 데 즐겨 사용하는 재료였다. 하지만 브로마네스가 자신의 검집에 굳이 수정판을 붙 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통신용이었던 것이다.
“흐흐, 아르티어스 나와라.”
잠시 후,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수정판에 나타났다. 시큰둥한 얼굴만 봐도 현재 그의 심기가 어떠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바쁘냐?”
“젠장, 지금 이동 중이다. 일거리가 생겼거든.”
“일거리? 어떤 건데?”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듯한숨을 길게 내쉬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효~ 고블린 잡으러 간다.”
“고블린? 그걸 왜 네가 잡으러 가?”
“호비트 놈들이 고블린을 잡는 데 얼마나 등신 짓을 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1개 중대가 몇 달씩이나 매달려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게 짜증나서 내가 한 방에 처리 를 해 줬지. 그게 실수였어. 요즘은 고블린 의뢰만 들어왔다 하면 나보고 가란다, 젠장!”
수정판에 비친 아르티어스가 말을 하면서도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걸 보면 주위에 용병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핑계 대고 잠깐 빠져나와. 오랜만에 한잔하자.”
그때 브로마네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나저나 너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설마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브로마네스는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나, 친구. 이건 사고 친 흔적이 아니라, 나의 용맹을 세상에 널리 알린 명백한 증거라네.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날려 버렸거든. 이걸 보게.”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번쩍거리는 흉갑을 가리키며 짐짓 짜증 어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연대장씩이나 된다는 놈이 겨우 이런 허접한 갑옷이나 입고 있다니…….”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말과 달리 수정판에 비친 것은 아주 훌륭한 갑옷이었다. 그 순간 아르티어스는 깨달았다. 이놈이 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것인지를.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망할 녀석! 제발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쨔샤, 한눈에 척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갑옷을 너 같은 소대장이 입는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왜 혼자서 미친놈처럼 적진에 뛰어들어? 아주 네 정체가 드래곤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게냐? 그러다 재수없게 흰둥이 놈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쩌려 고 그래!”
브로마네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크크크, 너 지금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거지? 넌 겨우 고블린이나 잡으러 다니고 있는데, 난 연대장을 죽이고 그놈이 입던 갑옷을 노획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돌대가리도 이런 돌대가리가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곧바로 노성을 터뜨렸다.
“이 빌어먹을 놈! 그딴 갑옷 때문에 연대장을 잡은 거야? 그럼 아예 본체로 현신해서 브레스라도 몇 방 내뿜지 그랬냐? 도대체 네 대가리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 야? 그리고 우리가 뭣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봐.”
“…..”
“좋게 말할 때 허름한 갑옷으로 바꿔 입어. 지금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검도 평범한 철검으로 바꾸라고 하기 전에! 알겠어? 만약 네놈 때문에 흰둥이들에게 들키기만 해 봐! 그때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정판 위의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르티어스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린 것이다. 꽤나 신경질적인 반응에 브로마네스는 재 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킥킥킥. 짜식, 간뎅이가 저리 콩알만 해서 뭔 일을 같이 하누?”
용병단을 꿀꺽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공을 세워 지휘부로 진급해야 할 게 아닌가. 그걸 잘 알고 있을 아르티어스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브로마네스는 전장을 휘저 으며 활약하는데, 자신은 고블린이나 잡으러 다니고 있으니 배가 아파 그런 것이 분명했다.
브로마네스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쓱 훑었다. 그와 동시에 드러나는 뽀송뽀송한 피부. 그 위로 찰랑거리는 길고 아름 다운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아르티어스에게 자랑을 했으니 더 이상 더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청결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자, 일단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러 가야겠군.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지하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맥주가 최고지!”
브로마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에 있는 도시를 향해 공간이동했다. 고블린을 잡겠답시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개고생을 할 아르티어스를 생각하면 맥주는 한층 더 시원하고 맛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