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2권 7화 –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
산속을 헤맬 때 냇물을 따라 이동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라이는 서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메르헨 영지가 있는 곳은 남쪽이었고, 도 렌 영지는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 가면 산맥에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가야 할 방향은 서쪽밖에는 없었다.
계속 걸어가다 보면 새로운 영지가 나타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살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냇가를 벗어난 후, 굶기 시작한 지가 며칠이나 흘렀는지 라이도 잊어버렸다. 도중에 토끼와 같은 작은 짐승들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그걸 잡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배고파…….”
이젠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다. 라이는 이대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너무너무 편할 거야…….’
유혹이 심하게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한 번 주저앉으면 도저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라이는 지팡이 삼아 들고 있던 나뭇가지에 힘을 줘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무기로 쓴답시고 나뭇가지를 주워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놨지만, 지금은 지팡 이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다.
“정신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해. 그나저나 이 근처에 냇물이 없나?”
물이라도 잔뜩 들이키면 잠시나마 배고픔이 사라질 텐데.. 그리고 돌 틈을 뒤지다가 운이 좋다면 가재나 다슬기 따위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이때, 갑자기 그의 코에 희미한 악취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 악취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젠장. 배가 고프다 보니 이제는 별 거지 같은 냄새까지 다 느껴지네.”
하지만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개고생을 했던 끔찍했던 기억이 아니라, 특유의 노린내만 참을 수 있다면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던 오크 고기의 맛이었다. 그러 자 군침이 저절로 입에 고였다. 그리고 배가 요동을 쳤다. 배가 고프다 못해 이젠 쥐어짜듯 아프기까지 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헛것이 보이거나 들리는 것처럼,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있지도 않은 냄새까지 느껴지는 거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오크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저 위쪽에 얼마나 굳건한 방어선이 쳐져 있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오크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 왔다. 그리고 뒷골이 섬뜩해지는 이상한 기분. 바람이 아주 약하게 뒤쪽에서 앞을 향해 불고 있다는 것에 생 각이 미치자마자, 라이는 급하게 앞으로 몸을 날리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부웅!’ 하는 등골이 오싹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라이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섰다. 오랜 세월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 게 나무창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는 오크 한 마리가 몽둥이를 들고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휘청거리며 다 죽어 가던 먹잇감을 향해 휘두른 몽둥이가 빗나간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곧바로 2차, 3차 공격을 해야 했음에도, 멍청하게 그냥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크를 보자 라이는 마치 불알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게 외쳤다.
“고기닷!”
자신이 오크의 뱃속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저 불룩 튀어나온 뱃살만 봐도, 입가로 군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토실토실한 뱃살 좀 봐! 이건 분명 대지의 여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사하신 양식임에 틀림없어. 감사히 먹겠습니다, 여신이시여. 흐흐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어차피 굶어 죽으나 오크에게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저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꿀꺼덕! 생각만으로도 입 안 가 득 솟구쳐 오르는 군침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런 라이를 바라보던 오크 녀석이 한 방에 끝내지 못한 게 무척 짜증난다는 듯 거칠게 콧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라이를 향해 커다란 몽 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상대는 며칠 굶은 듯한 행색을 하고 있는 비쩍 마른 호비트,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대를 깔보고 무식하게 공격을 크게 하면 반드시 빈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라이는 살짝 몸을 틀어 몽둥이를 피하며 오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취익?”
순간 오크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라이의 나무창이 오크의 몸 속 깊이 파고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크아악!!”
사람이라면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오크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크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몽둥이를 들어 올려 수평으로 강하게 휘둘 러 왔다. 이번에도 부웅 하는 파공성이 울려 퍼질 정도의 큰 공격이었다.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곧바로 반격을 할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한 것이다.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 이 말을 듣지 않았다.
퍼억!
몽둥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라이의 몸은 충격을 못 이기고 붕 떠올랐다가 땅바닥을 몇 바퀴 구른 뒤 나무에 부딪치며 그 움직임을 멈췄다.
“취익……!”
오크는 거칠게 콧소리를 내며 몸에 박힌 나무창을 뽑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무창이 뽑혀 나오며 피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다. 오크는 쓰 러트린 호비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모처럼 사냥한 호비트인 만큼 들고 가서 동료들과 나눠 먹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호비트가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취익?”
오크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 방이면 골로 보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좀 약했던 모양이다. 뭐, 고기야 패면 팰수록 부드러워지니 몽둥이를 한 번 더 휘두르는 수고 정도야 언제든 환영이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라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선 오크.
부웅!
이번에는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호비트의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아예 골통을 으깨 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오크의 두 눈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접시처럼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실거리던 놈이 자신이 있는 힘껏 휘두른 몽둥이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것이다. “취익?”
오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 순간, 라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오크에 비한다면 가냘퍼 보이기까지 한 인간의 주먹.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먹에 가슴이 움푹 함몰된 오크가 주저앉듯 쓰러졌다. 검으로 찔러도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는 강인한 오크가 인간의 주먹 한 방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방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소모했다는 듯 라이 역시 그 옆에 픽 쓰러져 버렸다.
“끄응…….”
오크의 몽둥이에 가격당할 때는 정말 죽는 줄만 알았다. 아니, 정말 죽어 버린 줄 알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정신줄까지 놔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가?”
눈을 감은 채 손가락 끝을 살그머니 움직여 봤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긴 했지만 눈을 떠 확인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뭐 해. 또다시 잡혀 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악몽과도 같았던 오크의 노예생활을 또다시 해야 하다니. 어쩌면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 기왕에 죽을 거 빨리 죽자. 그때 그 개고생을 하면서 확실히 배웠잖아. 밖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라이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오크를 도발해서 빨리 잡아먹힐 요량으로,
“야, 이 돼지 새끼들…. 어?! 오크 굴이 아니잖아.”
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는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불가사의한 일이라도 보는 듯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은 극심한 배고픔에 밀려 연기처럼 사라졌고, 라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기를! 라이는 정신없이 오크에게로 달려들었다.
불을 피울 도구도 없고, 오크의 사체에서 고깃덩이를 잘라 낼 만한 칼조차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크 고기를 먹을 수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라이는 오크 의 팔을 덥석 붙잡은 뒤 주저하지 않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오크의 피부는 강한 햇빛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렸기에 이빨로 물어뜯자마자 비릿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라이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고개를 돌려 피 하기는커녕 반갑다는 듯 쪽쪽 빨아 마셨다. 피 냄새가 너무나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피는 아직 따뜻했다. 따뜻한 피가 뱃속에 들어오 니 정말 살 것만 같았다.
부스럭.
그런데 이때 수풀 속에서 웬 사내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내의 갑작스런 출현에 라이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용병단에서 탈영한 자신을 잡으러 온 추격자 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허억!”
깜짝 놀란 건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크 팔을 붙잡고 뜯어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상대의 얼굴은 물론이고, 몸 여기저기가 온 통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저게 사람이야, 몬스터야?”
사내가 자신을 당혹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라이는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튼튼해 보이는 투구, 사슬갑옷으로 몸 전체를 두 른 것만으로도 모자라 조끼처럼 생긴 철판갑옷으로 몸통을 보호하고 있다. 엄청나게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앞서, 라이에게 떠오른 것은 절망감이었다. 도저히 몽 둥이 따위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라이가 깊은 절망감에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사내가 칼을 앞으로 쭉 내밀며 소리쳤다.
“대체 몬스터냐? 아니면 사람이냐?”
몬스터냐고 묻는 것을 보면 자신을 붙잡으러 온 추적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사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흔히 보아 왔던 용병의 그것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화려 함보다는 실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꺼렸다. 미세한 차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이유 때문에 용병들은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원피스 형태인 헐렁한 로브로 몸을 감싼다. 자신이 어떤 갑옷을 입고 있는지, 또 그 갑옷의 틈새는 어딘지를 철저 히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로브로 갑옷을 숨기기는커녕 망토만을 어깨에 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내가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이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때, 사내의 갑옷은 물론이고 칼에까지 아직 말라붙지도 않은 피가 흠뻑 묻어 있는 게 라이의 눈에 띄었다. 어쩌면 이 사내는 자신을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오크와 싸우다가 우연히 이쪽으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지자 라이는 급히 대답했다.
“저, 저는 사람입니다. 몬스터 따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구요.”
“정말이냐?”
순간 사내의 칼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놈이 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의아해 하던 라 이의 눈에 띈 것은 오크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라이는 급히 소매로 입부터 닦았다. 사내가 왜 자신을 보고 몬스터 운운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라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지금 제 꼴이 어떤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산속을 헤매면서 4일씩이나 굶어 보십쇼. 이런 거라도 안 뜯어먹고 배길 수 있는지.”
그 말에 사내의 칼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갔다.
“길을 잃었나? 하지만 여기는…….”
“저는…, 상인입니다. 이 지역 마을들을 돌며 물건을 팔면 꽤 짭짤하게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어왔다가 산적을 만나 깨끗하게 털렸죠. 기회를 봐서 탈출하긴 했습니다만, 산속에서 길을 잃어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변방을 돌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게 이익이 큰 것은 사실이었다. 위험도가 큰 만큼 경쟁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변명이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 라이가 하고 있는 꼴을 본다면 누군들 그 얘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내는 칼을 거두더니, 품속을 뒤 져 육포 몇 조각을 꺼내 던져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해서 미안하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그렇지, 오크를 뜯어먹고 있다니.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대충 이걸로 허기라도 때 우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허겁지겁 육포를 씹고 있는 라이를 보며 사내는 그제서야 라이를 완전히 믿은 모양이다.
“나는 젠슨이라고 하네. 젠슨 미티어.”
“저, 저는 라이라고 합니다.”
대답을 하다가 목이 메었는지 가슴을 퉁퉁 치고 있는 라이를 보자 젠슨은 급히 물통을 꺼내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물통을 건네주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천천히 먹게. 그러다 체하겠네.”
젠슨이 옆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지독한 악취가 느껴졌다.
‘흐윽!! 이, 이게 무슨…….’
젠슨이 가까워 옴과 동시에 냄새가 느껴진 것을 보면, 젠슨의 몸에서 나는 악취인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인상을 찡그리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구세 주와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는 몰랐다. 자신의 몸에서도 그와 유사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젠슨이 건네준 육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후에도 양이 차지 않았던 라이는 물통 속의 물까지 탈탈 털어 마신 후에야 만족스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이제야 좀 살 거 같네요.”
이때, 젠슨이 나왔던 수풀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젠슨의 동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리라. 오크가 말 타고 다닌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는 사내는 젠슨보다 기골이 더욱 장대했다. 그 역시도 로브가 아닌 망토를 걸쳐 화려 한 갑주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은 덩치가 왜소했을 뿐만 아니라, 망토가 아닌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왜소한 체구 로 보아 소년들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라이는 젠슨과 저 사내가 기사(Knight)일 거라고 추측했다.
기사들의 경우 시중을 들어줄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필수였다. 용병들과 달리 기사들은 젠슨처럼 엄청난 중장갑을 몸에 두른다. 때문에 개개인의 전투력이야
막강할지 몰라도, 종자의 도움 없이는 말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몸에 걸친 갑주의 무게가 40Kg을 상회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어 준다고 해서 종자들의 신분이 노예나 하인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미래의 기사를 꿈꾸는 꿈나무들이다. 종자를 노예처럼 부려먹다가 헌신짝처럼 소모해 버리는 쓰레기들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종자의 교육에 힘썼다. 싸울 때는 자신의 뒤를 지켜 주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내의 바로 뒤를 쫓고 있는 종자는 꽤나 수련을 많이 한 모양인지, 고삐를 쥐지도 않고 말을 몰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건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가장 뒤에서 말을 몰고 따라오는 왜소한 덩치의 종자의 손에는 주인 없는 말의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젠슨의 말인 듯싶었다.
사내가 타고 있는 말은 물론이고, 그의 갑옷 여기저기에까지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오크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오크 소굴 근처에서 오크를 때려잡아 뜯어먹고 있었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라이의 근처까지 다가온 사내는 말을 세우며 젠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투구 사이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아주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젠슨, 그 사람은 누군가?”
젠슨은 사내에게 라이에게 들은 그대로를 전했다. 장사를 하러 이곳으로 왔다가 산적을 만나 몽땅 다 털리고, 4일씩이나 굶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라이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린 뒤 투구를 벗어 말안장에 걸었다. 그러자 라이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내의 얼굴. 처 음에 예상했던 대로 강인하면서도 노련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쯤 되었으리라. 길게 기른 머리카락과 덥수룩하게 자라 있는 수염까지도 은색 이다.
“아주 운이 좋은 친구로군. 저런 조잡한 창으로 오크를 죽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얼핏 보면 오크의 복부에 나 있는 상처가 꽤 깊은 것처럼 보였다. 라이가 오크의 팔을 뜯어먹을 때 흘러나온 피가 그 주위를 온통 피범벅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 다. 하지만 사내가 상처를 제대로 살펴봤다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의 어설 픈 상처로는 오크를 절대로 죽일 수가 없었다.
사내는 라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랫사람을 많이 부려 본 듯한 관록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나는 노아 리치몬드라고 한다네.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라이는 오크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곳을 얼른 손바닥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여기가 좀..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주 아픕니다.”
“흠, 조잡한 창만으로 오크를 잡았는데, 그 정도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면 자비의 여신께서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고 봐야겠지.”
리치몬드는 곧이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피아 수녀님, 이 사람의 상처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장 뒤에서 젠슨의 것으로 보이는 말을 끌고 따라왔던 왜소한 덩치의 사내. 라이는 그가 이 파티에서 가장 나이 어린 종자라고 예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놀 랍게도 사내가 아닌 여사제였다. 겨우 4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파티에 사제가, 그것도 희귀한 여사제가 끼어 있을 줄이야.
라이는 멍한 눈빛으로 소피아 수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오지산골에서 사람을 만난 것만 해도 굉장한 행운인데, 거기에 여사제까 지 끼어 있다니.
소피아 수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깊숙이 눌러쓴 후드의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미모였다. 라이는 여사제의 얼굴을 감히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쑥맥 같은 라이의 반응에 소피아 수녀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녀의 나이가 꽤 많은 것도 있었지만, 순진한 라이의 표정에 꼭 어린 동생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참, 귀여운 아이네…….”
“아픈 데가 어디야? 말 놔도 괜찮지?”
“물론이죠, 수녀님. 이…, 이쪽입니다.” “여기?”
“예? 예, 수녀님.”
곧이어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성마법의 주문은 마법사들의 주문과 달리, 마치 노래와도 같아서 귀를 즐겁게 해 줬다. 더군다나 부드러운 손짓까지……. 마법의 사용을 위한 주문이 아니라 신께 대한 찬송과 경배를 보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재빨리 두 손을 라이의 상처 위에 올려놨다. 이런 광경은 몇 번 봤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통증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희뿌연 빛이 사라지며 치료가 끝나자, 라이는 소피아 수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제 다 나은 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녀님.”
“뭘, 이 정도 가지고 감사는. 내상(內傷)이라서 제대로 치료가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거든. 그러니 혹시라도 상처 부위가 계속 아프면 나한테 곧바로 말해. 다시 한 번 치료를 해 줄 테니까.”
“예,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일행은 이 근처 가까운 마을까지 그를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오크와 같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숲 속에 무기도 없이 맨손인 상 인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곧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라이에게, 일행의 리더인 리치몬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네, 젊은이. 평소 이렇게 선행을 베풀어 둬야, 자비의 여신께서 우리가 위험해 처했을 때도 도움을 주실 게 아니겠 Lt.”
일행은 말을 타고 이동하지는 않았다.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람이 계속 말을 타고 이동하 는 것은 말에 커다란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패뿐만 아니라, 투구와 조끼처럼 생긴 외장 갑옷도 벗어서 말에 실었다. 그런 다음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일행 중 리치몬드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뭔가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있어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라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닉’이라는 소년이 있 긴 했지만, 숫기가 없는지 라이와의 대화를 별로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젠슨 옆에 서서 걸어가며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젠슨을 통해 이 파티의 구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이 파티에 종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네 명으로 이뤄진 모험가 파티였다. 젠슨의 말에 의하면 모두들 쓸 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