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4화 – 이놈들이 아니잖아!
이놈들이 아니잖아!
하늘을 천천히 날고 있는 와이번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 그 중 앞에 앉아 있는 건장한 사내는 분견대장 스트론에게 사내 3명으로 이뤄진 파티를 체포해 오라는 명 령을 받고 출동한 도튼이었다.
도튼은 주위를 대충 둘러보는 정도였지만, 뒤에 앉아 있는 그의 파트너는 열심히 아래쪽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숲이 우거져 있는 곳에서는 마법을 쓰지 않 는 한, 나무 밑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마법사인 그만이 아래쪽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튼은 서쪽 하늘을 향해 저물고 있는 해를 바라봤다. 해가 지려면 3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와이번은 밤눈이 어두웠기에 밤에 비행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요새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수색을 감행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한 게 아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도튼은 조바심이 났다.
“젠장, 짜증나는군.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새끼들이 어디로 튀어 버린 거야? 분명, 이 근처 어디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튼이 짜증을 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마법사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아래쪽을 살필 뿐이었다.
“이봐.”
“예?”
“제대로 잘 보고 있는 거야?”
“걱정 마십쇼. 눈알이 빠지게 보고 있으니까요.”
공손한 말투로 대답하긴 했지만, 마법사의 목소리 저 깊은 곳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왔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용기사의 짜증을 받아 주고 있었으니 그건 당연 한 결과이리라.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용기사 쪽이 자신보다 계급이 훨씬 높았으니까.
물론 마법사들 중에는 용기사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용기사와 짝을 지어 ‘통신기’로 이용되는 마법사들의 경우, 딱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인물들 이 배속되는 것이다.
“젠장, 도중에 샛길로 빠져 버린 거 아냐?”
분견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아주 쉽게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일대라면 워낙 오랜 세월 순찰을 돌아왔기에 작은 샛길 하나하나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우리 예상보다 좀 더 빨리 이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대장님한테 들은 그 도망자들의 위치가 3일 전의 것이라면서요.”
“흠, 그럴지도 모르겠네. 좀 더 앞쪽으로 가 보자.”
마법사의 예측이 맞은 모양이다. 그들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목표물을 찾아냈다. 마법사가 저 밑, 짙은 수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급히 외쳤다. “아! 저쪽에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빽빽한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튼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말대로 저 아래쪽 어딘가에 놈들이 걸어가고 있 을 거라는 것을. 도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 귀찮은 임무를 끝마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흐흐흣! 제깟 놈들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빌어먹을 놈들, 대체 뭔 죄를 지었기에 방울소리 나게 튀고 있는 거야?”
음흉하게 웃던 도튼이 와이번의 목을 툭툭 두들기며 신호를 주는 것을 본 마법사가 급히 말했다.
“나이 먹은 두 놈은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데려가기 귀찮다고 괜히 목을 날리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시죠?”
이런 잔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도튼은 짜증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젠장, 그 말 내가 너한테 해 준 거잖아! 마누라처럼 쫑알거리지만 말고 너나 잘해, 새꺄.”
도튼은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아래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상 수십 미터 높이에서 저렇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다니. 마법사는 무시무시 한 속도로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도튼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몇 번이고 저런 모습을 봐 왔지만,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처럼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물론 맨땅에 처박혀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도튼은 저 아래쪽에 있는 나뭇가지를 목표로 뛰어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법사는 기가 질렸다. 그는 자칫 부러질지도 모를 저런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목표로 허공에서 뛰어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도튼이 뛰어내린 후, 와이번은 그 자리를 빙글빙글 선회하기 시작했다. 용기사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는 비행 주문을 발동시킨 후에야 와이번에서 뛰어내렸다. 쏜살같이 지상을 향해 처박히던 도튼과는 달리 그의 몸은 지상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상에 도착한 마법사는 방금 전 마법을 통해 목표물들을 찾아낸 곳으로 달려갔다. 좀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보조마법까지 사용했음에도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은 종료되고 난 후였다.
“벌써 끝내셨습니까?”
마법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도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리 좀 와 봐. 뭔가 좀 이상해……?”
이때, 도튼에 의해 제압당해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들이 악을 쓰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법무부 조사관들이냐?”
“천하에 악독한 개자식들! 주군께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것이냐? 브란덴 공작새끼에게 아부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모함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을 알거라.”
도튼은 찜찜한 표정으로 마법사에게 속삭였다.
“우리를 보고 법무부 조사관이냐고 하잖아. 저것들, 정체가 도대체 뭘까?”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알게 뭡니까. 법무부 조사관 찾는 거 보니, 그리 떳떳한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대장님이 저놈들의 신분이 뭔지 전혀 얘기해 주지 않으셨다면서요?”
“그래. 단지 한 놈이 전직 레인저라고만 했어.”
레인저, 그리고 법무부 조사관. 이런 단어들로 유추해 봤을 때, 분견대장은 법무부 쪽의 의뢰를 받아 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라 보는 게 맞으리라. 그 리고 악을 쓰는 저놈들의 얘기대로라면 저들이 모시던 주군은 권력투쟁에 밀려 반역죄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마법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우리 대장, 생각보다 발이 넓으신데요? 브란덴 공작이라면 요즘 들어 실세로 떠오르는 귀족이 아닙니까?”
“젠장, 술 마실 때마다 자신의 인맥이 대단하다고 주절거렸던 게 허풍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잘하면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에서 벗어나겠군, 대장은.”
“그나저나 셋이나 싣고 우리 귀염둥이가 날 수 있을까요?”
“다 실을 필요 없어.”
도튼은 한쪽에 엎어져 있는 사람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어린놈은 데려갈 필요가 없거든. 대장이 늙은 놈 둘만 잡아 오래.”
마법사가 다가가 엎어져 있는 사람을 바로 눕혔다. 과연 두 사람에 비해 확연히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도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죽이지는 않고 기절만 시켰어. 그런데 이놈들 굉장히 시끄럽네. 어차피 귀염둥이에 실으려면 조용히 시키는 게 낫겠지.”
마법사가 뭐라고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 뒤쪽에서 퍽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가 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독기 가득한 욕설 을 퍼붓고 있던 둘을 기절시켜 놓고 나니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도튼은 휘파람을 불며 그들의 갑주부터 벗겼다. 정원 외에 둘씩이나 더 태우는 것인 만큼, 귀염둥이가 힘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품속을 샅샅이 뒤져 묵직한 돈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에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도튼은 돈이 될 만한 것을 모조리 챙긴 뒤 그 중 몇 개를 마법사에게 던져 주며 빙그레 웃었다.
“이건 자네 몫이야.”
샘의 말대로 길을 바꾼 후에는 산행이 더욱 힘들어졌다. 어떤 때는 울창한 삼림을 뚫고 지나가야 했고, 어떤 때는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거나 혹은 내려가야만 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샘의 뒤를 따라 헐떡거리며 무작정 걸음을 옮기 고 있을 뿐이다. 대장은 샘의 말을 듣고 길을 바꾼 걸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길을 벗어난 지 3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피로도는 전날 하루 종일 걸은 것과 맞먹을 정도였다. 길도 없는 산속을 뚫고 이동하다 보니 평소보다 힘이 두 세 배는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철 체력을 자랑했던 라이라고는 하지만, 밤이 되었을 때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이렇게 체력소모가 크면 먹는 것이라도 잘 먹어야 하겠지만,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맥을 뚫고 나가다 보니 처 음에 가지고 왔던 식량은 모두 다 먹어버렸고, 이제부터는 마지막 마을에서 구입한 식량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곡물 같은 거야 끓여서 먹는다고 치더라도, 육포가 문제였다.
샘은 돌덩이처럼 딱딱한 육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무슨 고긴지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끓이면 안 되겠습니다.”
“왜?”
“냄새가 영 구리구리해서 말입니다. 설마하니 썩은 고기를 말렸을 리는 없을 테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 고기를 말린 것 같습니다.”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우선은 참고 먹는 수밖에. 내일부터는 뭔가 사냥해서 먹을 만한 짐승이 있는지도 살펴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귀족들은 이런 경우에 향신료를 뿌려 고기의 누린내를 잡는다고 하지만, 이들은 향신료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소금을 좀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대장 과 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데 비해 라이는 아주 맛있다는 듯 그릇을 쪽쪽 핥으며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대장이 어이가 없다 는 듯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식성 좋구나.”
“뭘요. 오크 굴에서 1년만 살아 보세요. 안 맛있는 음식이 있는지.”
라이는 대장에게 사제(師弟)의 인연을 청한 후, 지금까지 숨겨왔었던 자신의 지난 과거를 하나 둘 말해 주었다. 눈치 빠른 라이는 대장이 자신을 향해 뭔가 미심쩍 어하는 것 같은 눈길을 보낸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대장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숨기는 게 없어 야 할 것은 자명한 이치.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모닥불에 흙을 덮어 불을 끄고, 모두들 잠을 청했다. 낮에 봤던 와이번은 대장 말대로 정기적인 순찰을 도는 것이었는지 그 뒤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장은 샘의 말만 듣고 옆길로 빠진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은 동서남북 방향이나 간신히 알 수 있을 뿐, 자신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일단은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하죠. 한 2~3일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동쪽으로 꺾어서 산맥을 빠져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저 수풀을 뚫고? 젠장.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냐?”
“믿으십쇼. 딴 건 몰라도 방향만큼은 확실하게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젠장! 말이나 못하면…….?”
배를 채운 그들은 저마다 불 옆에 몸을 눕혔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그들은 곧이어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잠에 취해있는 라이. 자는 모습이야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지만, 그의 몸속에서 흘러가는 기의 움직임은 완전히 달랐다. 단전을 중심으로 몸 전체를 도도하게 휘돌아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도 일반인들과는 정반대로. 보통 내공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낮에 열심히 수련했던 것이 밤이 되면 원상태로 기의 흐름이 되돌아가며 퇴보를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라이의 경우 그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 아닌 단점도 있었다. 내공수련을 할 때는 감각이 굉장히 예민해져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눈에 보이듯 느껴지는 현상이 잠결에 벌어지게 되 는 것이다. 즉,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쳐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흑의 기운이 스멀스멀 자신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라이는 그것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를 않으니 미칠 지경이다. 아무리 죽어라 발을 옮기려 해도 천근쯤 되는 바위가 발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뒤따라오던 암흑의 기운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흐으윽!!”
눈을 번쩍 뜬 라이.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라이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온통 시커먼 암흑뿐이다. 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 뭇잎들 사이로 점점이 별이 보인다는 것 정도…….
“휴~, 꿈이었구나.”
그 순간 그의 다리에서 뭔가 따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응? 모기가 물었나?”
처음에는 모기와 같은 벌레에게 물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따끔하는 정도에서 시작한 통증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곧 전신으로 퍼져가는 지독한 고통에 라이는 자신이 독사에 물린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 대장! 대장! 일어나 봐요!”
그러자 암흑 저편에서 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독사예요, 독사! 물렸다구요!”
그 말에 대장은 벌떡 일어섰다. 만약 진짜로 독사에 물렸다면 큰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신관도 없고, 제대로 된 해독약도 없다. 아쉬운 대로 상처에서 독액을 빨아 내는 수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어느 쪽 다리냐?”
“이, 이쪽이요.”
대장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라이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동여맸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샘은 옆에 서서 연신 부싯돌을 쳐댔다. 그들이 잠자는 사 이에 모닥불은 꺼져 버린지 오래였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횃불을 켜들 수도 없었기에, 아쉬운 대로 부싯돌의 불똥이라도 밝혀 대장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부싯돌이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라이의 다리를 살펴보던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디를 물렸다고?”
“여, 여기요. 아파 죽겠어요.”
“여기라고?”
대장은 라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과연 상처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뱀에게 물린 자국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살이 뚫고 들어간 것처럼 작은 구멍이 하나 뻥 뚫려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피부가 검붉은 색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옆에서 연신 부싯돌을 키던 샘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뭔가 기다란 덩굴 같은 것이 라이의 다리 부근에까지 뻗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덩굴 같은 그것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라이의 다리를 꽉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흐억!”
깜짝 놀란 라이가 버둥거리며 발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덩굴이 감고 있는 힘은 의외로 강했다. 그리고 덩굴에 휘감긴 부분에서 따끔따끔하는 느낌이 있더니 곧이 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휘감기지 않은 다른 발로 덩굴을 맹렬하게 차댔지만, 덩굴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강한 힘으로 라이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통증에 도 불구하고 라이는 사력을 다해 덩굴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온 몸에 힘이라고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사, 살려…….”
그때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대충 감을 잡은 대장이 단칼에 덩굴을 잘라버렸다.
서걱!
“흐음, 음유시인들이 흥미위주로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줄 알았는데, 이런 게 정말 존재할 줄이야.”
그들은 덩굴의 공격이 멈춘 틈을 이용해 불부터 지폈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며 주위가 훤하게 밝아진다. 불빛을 이용해 주위를 치밀하게 살펴봤지만 식인식물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방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퉁퉁 부어올라있는 라이의 발.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덩굴줄기 몇 가닥. 대장이 그 걸 자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덩굴줄기는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