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3권 7화 – 이런 일조차 제대로 처리 못해!
이런 일조차 제대로 처리 못해!
용기사 도튼에게 붙잡혀 간 리치몬드와 젠슨은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마법진을 통해 동부지구장에게로 보내졌다. 기사단에서 사용하는 소규모 이동마법진 이 요새 내에 설치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잘못 잡아들였다는 게 밝혀졌다. 감찰부의 내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잔뜩 기대 에 부풀어 있던 동부지구장은 이런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놈들을 보내 온 스트론 분견대장에게 엄청 화가 났다.
동부지구장은 자신이 원한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랫사람을 시켜 통보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쾌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은 스트론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먹 혀들었다. 지구장도 아닌 그의 비서쯤 되는 새파란 마법사 녀석의 통보를 자신이 직접 받아야 했던 스트론은 동부지구장의 의도대로 극심한 모멸감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그 모멸감을 스트론이 혼자 삭힐 리가 없다. 그는 즉시 도튼을 소환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파트너인 마법사까지도 함께 소환해서 욕설을 실컷 퍼부어 주고 싶었 지만, 그 마법사 놈이 딴데다가 헛소리라도 나불거리는 날에는 일만 더욱 복잡해진다. 더군다나 이들이 잡아 와야 할 대상이 감찰부의 배신자들이라는 것을 밝힐 수 가 없다 보니 질책을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너 이 새끼, 일 처리 제대로 안할래? 내가 왜 실컷 일해 주고, 그 망할 마법사 새끼한테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하냐고. 엉?”
“설마, 그 깊은 산속에 3명으로 이뤄진 또 다른 파티가 있을 거라고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더 이상 변명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도튼은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속으로는 열불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 걸.
“죄송합니다, 대장님.”
스트론의 질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잡아야 할 놈이 어떤 놈인지 정확히 알려줬었다면 이런 일이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 는 것을.
“지금 당장 가서 다시 잡아 와. 이번에는 제대로 된 놈으로!”
“하,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이런 깜깜한 밤에 와이번을 타고 날아 봐야 뭐가 보이겠는가.
“야 이 새끼야, 지금 밤낮 따지고 있을 때인 줄 알아? 당장 가서 잡아 와. 알겠어?”
도튼은 지금은 상관에게 그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겠다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대답했다.
“옛!”
분견대장의 방에서 나온 도튼은 선임 마법사를 찾아갔다. 선임 마법사는 통신실에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튼은 선임 마법사를 통신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사정을 설명했다. 분견대장이 야간비행을 지시했다는 것을.
“데리고 나가기에는 델슨이 너무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델슨은 그의 파트너인 마법사의 이름이다. 도튼의 말에 선임 마법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마법사다. 피곤한 상태에서 마법을 쓰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마법사에게 야간비행은 주간에 비해 훨씬 더 큰 부담을 줬다. 주간에 행하던 탐색마법은 물론이고, 와이번의 시야를 확보해 주기 위한 라이트 마법까지 쉬지 않고 구동시켜야 했다. 일상적인 정찰비행이라면 몰라도 언제 비행이 끝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는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선임 마법사는 잠시 턱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엉뚱한 놈들을 잡아 온 덕분에 반나절 정도의 귀중한 시간을 날려 버렸다. 보안 유지도 중요하지만 이젠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렇다면 용기사 하나를 보내기보다 용기사 전체를 다 출동시키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군. 알겠네. 내가 대장님께 잘 말해 두지. 대신, 내일 새벽에 출동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선임 마법사님.”
“그럼 그렇게 해 주게.”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요새에 있는 일곱 마리의 와이번이 일제히 새벽공기를 가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감찰부에서 파견한 병력이 언제 이곳에 도착할지 모른 다. 그 전에 놈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견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휘하에 있는 용기사들을 몽땅 다 수색에 투입하기로.
동부지구장 같은 거물에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잘만 한다면 그 보상으로 이 빌어먹을 촌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겠다는 말까지 듣지 않았던가. 스트론은 인생에 큰 도움이 될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는 거꾸로 자신에게 치명적인 걸림돌 이 될 우려 또한 있었다.
아니, 동부지구장이 자신을 향해 해꼬지하는 것쯤이야 겁이 날 게 없었다. 그래 봐야 이곳 분견대에서 더 떨어질 곳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감찰부에서 자신이 개입 했다는 것을 눈치채거나, 혹은 동부지구장과 자신이 암중으로 진행시킨 것이 상부에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자칫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다. 초조함에 집무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스트론은 애초에 그 망할 마법사 녀석의 청탁을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까지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 기야 그런 거물의 청탁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
평상시에는 많아 봐야 하루 두세 마리 정도만이 산맥 위를 날아다녔었는데,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일곱 마리씩이나 되는 와이번이 산맥 곳곳을 저공비행하며 헤집 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세 명으로 이뤄진 도망자 집단이다. 분견대장은 혹시 정보가 밖으로 샐 것을 우려해서 그저 도망자 집단이라고만 말해뒀다.
산맥이라는 게 아주 넓고 광대한 것 같아도 지형적인 제약 탓에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그런 만큼 도망자 집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대 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면, 아무리 깊은 산맥 속이라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용기사가 일곱이나 투입되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산맥 위를 샅샅이 훑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를 보고 숨은 건 아닐까요?”
델슨의 말에 도튼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물론 봤겠지. 봤으니까 숨었겠지! 빌어먹을, 그렇지 않고서야 놈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 어떻게 하죠? 동굴 속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으면 탐색마법으로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으아악! 이런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이 근처에 작은 동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하나하나를 전부 다 뒤져 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새벽부터 끌려나와 짜증이 잔뜩 쌓여 있는 도튼을 상대하기 싫었던 델슨은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는 척했다.
그런 그의 눈에 뭔가가 잡혔다.
“어, 이게 뭐지? 저쪽에서 뭔가가 20여 마리 정도 달려가고 있긴 한데…, 이런 색깔의 마나는 처음 보는 것이라 뭐라 말을 하기가…….”
꼭두새벽부터 수색작업을 벌여 처음으로 뭔가 이상한 것이 발견된 것이었기에 도튼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뭔데 그래?”
“흠, 정상적인 생명체는 아닙니다. 색상은 언데드 같은데, 움직이는 걸 보면 키메라 같기도 하고…….”
도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쪽에서 언데드가 나타났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어. 어느 빌어먹을 마법사놈이 만든 엉성한 키메라겠지. 이건 나중에 대장에게 보고하기로 하고, 어서 놈들이나 찾아.”
“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20여 마리씩이나 되는 키메라가 이런 외진 산골짜기 속을 전력질주하고 있다는 게…….”
델슨의 말에 도튼은 전적으로 공감했다. 사실, 딱히 이것 외에 그의 눈길을 끈 다른 것도 없었으니…….
“좋아. 저것들을 한번 따라가 보자.”
도튼은 와이번의 고비를 살짝 당겨 천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때, 델슨이 지니고 있던 소형 수정구에서 빛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델슨이 다급히 수정구를 작동시키자 수정구 안에 선임 마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델슨은 급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도튼 팀입니다, 선임 마법사님.”
「뭐 좀 찾아낸 게 있나?」
“아직은 찾지 못했습니다만, 방금 전에 흥미로운 걸 찾아내긴 했습니다. 마나 색상은 언데드로 나오는데, 산맥 위를 달려가는 키메라 떼를 발견했거든요. 지금 추 적 중입니다.”
순간 선임 마법사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분명, 키메라라고 했나?」
“예. 20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형 키메라입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숲을 돌파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도튼 용기사님도 처음 보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키메라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있던가?」
“아뇨.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다 키메라들이었습니다.”
「쯧,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른 곳이나 찾아 봐!」
“예?”
분견대장은 비밀 유지를 위해 도튼에게는 그냥 도망자라고만 말했지만, 선임 마법사는 놈들의 신분이 감찰부에서 공을 들여 키워놓은 킬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 었다. 그런 뛰어난 놈들을 잡는 데 감찰부에서 멍청하기 짝이 없는 키메라들을 대량으로 투입했을 리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것들을 지휘하는 사람도 보내지 않고 말이다.
도튼이나 델슨 같은 말단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몰몬트 산맥 안에는 원로원이나 마법사 길드가 세워 놓은 비밀 연구소가 몇 군데 있다는 걸 선임 마법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키메라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런 곳에서 만든 키메라를 실험하고 있는 것일 거라고 즉각 판단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찾으라는 놈들은 찾지 않고 키메라나 쫓아다니고 있었다니……. 선임 마법사로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 키메라 따위에 정신 팔지 말고, 다른 데나 찾아보란 말일세.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선임 마법사님.”
선임 마법사와 델슨간에 오간 대화를 모두 엿들은 도튼은 다시금 와이번의 고삐를 당겨 비행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었다. 키메라에 대한 보고를 들은 선임 마법사 가 보인 반응으로 봤을 때,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챈 것이다.
“이쪽보다는 좀 더 앞쪽을 뒤져 보자. 우리 예상보다 놈들의 발걸음이 훨씬 더 빨랐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시죠.”
도튼이 고삐를 당겨 신호를 보내자 와이번이 커다랗게 날개를 몇 번 펄럭였다. 순식간에 가속하며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와이번.
“망할 놈의 새끼들. 내게 이 고생을 시키다니. 어디 잡히기만 해 봐라. 아예 반쯤 죽여 놓을 테다.”
“저…, 그런데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죠?”
“그냥 육포나 씹어 먹어! 그 새끼들 잡지 못하면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니까.”
도튼의 짜증 섞인 말에 풀이 죽은 델슨은 고개를 푹 숙였다. 통상 행하던 순찰 때처럼 점심시간 때는 돌아가서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비상식량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그 망할 새끼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배고픔을 참아 가며 수색작업을 해야 할 모양이다.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방 중심부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물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마치 개 줄에 묶여 있는 개처럼 얌전히 누워 있었기에 전체적인 크기 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초대형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오우거(Ogre)와 비슷한 크기가 아닐까 짐작되었다.
괴물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그 어떤 몬스터와도 상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체형에 비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입이 컸고 강철도 뚫어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송곳 니들이 잔뜩 튀어나와 있다. 더군다나 괴물의 몸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털이 잔뜩 덮인 가죽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게딱지 같은 두터운 갑옷판 같은 것이 괴물의 온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괴물을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서있는 후덕한 인상의 노인. 괴물의 기괴한 생김새와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이 묘한 불일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그 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노인은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불쾌하다는 듯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곧이어 맑으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소장님.”
연구소장은 곧이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여마법사, 마를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연구소장은 천천히 뒤로 돌 아섰다. 그의 눈빛은 괴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는 달리 아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내 휴식 시간을 방해한 건가?”
만약 하찮은 일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기에 마를린은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오늘 아침에 동굴 초입 부근에서 있었던 침입자의 흔적에 대해 보고했다. 침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휘하의 키메라 오크들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키메라의 엄청난 이동 속도로 봤을 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가 한참 지났던 것이다.
“흠, 3명의 침입자라……?”
겨우 셋이서 20여 마리가 넘는 키메라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여섯 마리를 처치한 것도 의외의 일이긴 했지만, 마지막에 출동시킨 20여 마리는 격 이 다르다. 그 숫자도 숫자거니와 키메라 오크 부대를 이끌고 있는 CE004는 CE003과는 격을 달리할 정도로 강한 놈이다.
3명의 침입자 중에 그래듀에이트급 실력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상, 키메라들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마를린은 키메라 부대로부터 연락이 없 자 곧장 연구소장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연구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연구소 안까지 침투해 들어온 건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동굴 입구 쪽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해 먹으려 한 것으로 보아, 비를 피하다 우연히 들어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때, 한 사내가 황급히 달려와 연구소장에게 보고했다.
“소장님, TG086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내의 보고에 연구소장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실험에 투입된 여러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패를 기록한 게 트롤이다. 그리고 키메라화에 성 공한 후 1개월 이상 정상 작동했을 때에만 부여받을 수 있는 게 ‘G’ 인식번호였다.
“젠장. 6개월이나 지났기에 성공한 줄 알았더니, 지금에야 폭주를 시작하다니…….”
G 인식번호를 부여받을 정도라면 안정화에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그 실험체의 제작법을 기준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게 상례다. 그런데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트롤 키메라들 중에서 G 인식번호를 부여받은 후에 문제가 터진 게 벌써 20여 마리에 달했다.
키메라 트롤의 엄청난 힘에 생각이 미친 연구소장은 다급히 물었다.
“피해는?”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다행히도 폭주 초기 단계에 눈치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이로군.”
“간신히 제압하긴 했습니다만, 진정제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폐기처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조장님께서…….”
연구소장은 사내의 말을 끊으며 짜증스런 어조로 버럭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폭주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남은 골드 넘버를 없애 버리자니. 대가리가 달렸으면 문제점을 찾아낼 생각을 해 야지. 뭐, 폐기처분하는 게 낫겠다고?”
연구소장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내에게 명령했다.
“로므렌에게 전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원상태로 만들어 놓으라고 말이야.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쓸모없는 대가리를 오크에게 붙여 버리겠다고. 알겠나?” “예, 소장님.”
사내를 내보낸 후에 연구소장은 답답한지 이리저리 서성이다 마를린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 참.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듯 했지만, 연구소장의 인상은 이미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를린은 내심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하 필이면 지금 그 빌어먹을 트롤이 폭주를 하다니…….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연구소장은 겉모습처럼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한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러니까 이런 비밀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마를린은 잔뜩 긴장해서 대답했다.
“침입자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아, 참 그랬었지.”
연구소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마를린에게 지시했다.
“마법사 길드에 통보하여 이쪽으로 들어온 모험가들 중에서 그래듀에이트급 정도의 실력자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게.”
3인의 침입자 중 그래듀에이트급이 한 명 정도는 끼어 있을 거라는 것은 그녀도 이미 짐작한 바였다.
“예. 그런데 만약 있다면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
“그건 차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지. 그 정도 실력의 모험가라면 우리 쪽에서 손을 쓰기 보다는, 길드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좋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사체 수거는 어떻게 했나?”
사체 수거라는 말에 마를린은 속으로 뜨끔했다. 규정대로라면 피 한 방울조차도 흙 속에 스며들지 못하게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사에게 들킬까 봐 그냥 놔두고 돌아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으로 파견한 24마리의 사체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죽었는지조차 확인이 안 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된 24마리의 키메라는 아직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전멸을 한 것인지, 혹 전멸을 했다면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기에……. 죄송 합니다. 제가 처리하고 싶지만 이제 제 휘하에는 키메라가 단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아서…….”
“쯧, 마커스에게 말해둘 테니 길드 쪽 일부터 처리한 다음, 키메라를 보충 받아 마무리 짓도록 하게. 알겠나?”
“예, 소장님.”
“난 바쁜 일이 생겨서 이만 가 봐야겠네. 다음에 보세.”
마를린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소장은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그의 신경은 온통 TG086 에게로 쏠려 있을 테니 말이다.
연구소장이 허둥지둥 자리를 뜬 후에야 마를린은 안도의 한숨을 휴우 내쉬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생각했을 때 매섭게 질책을 당할 줄 알았는데, 별 추궁도 당 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것이다.
“재수 없게 일이 겹쳐 왕창 깨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쉽게 넘어가 버렸네.’
하지만 지금 안도의 한숨이나 내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연구소장도 그래듀에이트급 실력자의 개입을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 얼거렸다.
“그래듀에이트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 곧 꼬리를 잡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단순한 모험가들이어야 할 텐데….”
마를린은 왠지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그 정도 실력자가 용병이나 모험가 따위로 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