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5화 – 이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이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월터가 대장 일행을 추월하여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즈음, 키메라들의 뒤를 쫓아 또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맹렬히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마를린이었다. 마를린은 대장 일행과 자신의 키메라 병력과의 전투를 보고 경악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라이 혼자서 벌이는 잔혹한 학살 장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살육. 그녀의 기대와 달리 살육을 당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키메라들 이었다.
그녀가 나머지 키메라 오크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여기저기에 잘게 찢겨 나뒹굴고 있는 수많은 사체 덩어리들. 피에 흠뻑 젖은 살 쪼가리와 너덜너덜한 가죽에 붙어있는 머리통으로 인해 그게 놀과 코볼트 키메라의 사체라는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과연 저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부리는 저 키메라들이 얼마나 강인한 몬스터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 키메라들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과 재생력은 이 세상에 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어쩌면 존재해서는 안 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광기에 차 붉게 물든 눈빛으로 키메라들을 공격하는 한 괴인의 손에 자신의 키메라들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에엑!”
괴인의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키메라의 머리통이 마치 두부처럼 박살이 났고, 사방으로 허연 뇌수와 핏물이 어지러이 흩뿌려졌다. 분명 어지 간한 검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힘든 질긴 가죽일 텐데 괴인의 손이 한 번 스쳐 지나가면 금세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변해 버렸다. 게다가 키메라들이 괴인의 손에 잡히기라도 하면 부드러운 빵을 뜯어내듯 쫘악, 쫙 찢겨 나갔다.
그렇다. 괴인은 무기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저 강인한 키메라들을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압도적인 위용!
만약 정상적인 생명체였다면 이런 허무하리만큼 잔혹한 죽임에 공포에 질려 곧바로 도망쳐 버렸겠지만 정신제어를 받는 키메라들은 그렇지가 않았 다.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피 냄새에 미쳐 적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죽기 위해 불 속으로 달려드는 부나방 처럼……
“뷰 마나 포스!”
혼란스런 정신을 간신히 수습해서 주문을 발동시키자 괴인의 몸과 그 주변을 흐르고 있는 마나의 흐름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선명한 마나의 궤적 들. 괴인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세찬 마나의 물결은 그의 몸을 휘돌아 양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쪽 대륙에서 넘어온 그래듀에이트인가?”
서쪽 대륙에서 맨손 공격술을 단련해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르는 무예가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 이다. 마나가 응축된 손은 마치 날카로운 병기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키메라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나의 보호를 받는 그의 전신은 두터운 강철 갑주보다도 더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그를 공격하고 있는 키 메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들 중 일부는 괴인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걸레쪽이 되어 너덜거리는 옷 틈 사이로 괴인의 속살이 드러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괴인의 피부에는 작게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과연, 이래서 그래듀에이트를 상대할 때는 단 한 치의 여유도 줘서는 안 된다고 했구나. 이래서는 어지간한 마법 따위 써 봐야 내 위치만 노출시킬 뿐이야.’
혼자서 저런 괴물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연구소장도 이런 상황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왜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 주리 라.
‘그런데 과연 소장님이 내 변명을 받아들여 줄까?”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연구소 안까지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위치가 발각되어 침입자가 발생했다. 연구소 입구의 방비와 경계를 맡고 있는 건 바로 그녀였고, 침입자들을 찾아 제대로 처리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처리는커녕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데리고 있던 키메라 오크들뿐만 아니라 놀과 코볼트 키메라들까지 몽땅 잃어버릴 판이다.
물론 괴인의 엄청난 괴력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거리는 있겠지만 과연 연구소장이 그걸 인정해 주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조직의 기강 확립을 위해 그 책임을 물어 목을 벨 게 뻔하다. 자신이 엄청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구소 내에서 손꼽히는 인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장이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어찌 되었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과오를 뒤덮을 수 있을 정도의 공적을 세워야만 했다. 그 공적의 열쇠를 저 무지막지한 괴인이 가지고 있음을 영리한 마를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일단 저 자의 정체를 캐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정보를 가지고 연구소장과 협상을 벌이는 것만이 살길이다.
결국, 괴인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 모든 키메라들을 찢어발겨 버리고야 말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괴인은 한동안 멍청히 제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지루해진 마를린이 하품을 할 때쯤 되어서야 괴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를린은 그런 그의 뒤를 몰래 뒤쫓았다.
괴인은 멍한 표정으로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하염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쫓는 마를린은 죽을 지경이었다. 마법사들은 체력 이 썩 좋지 못한데다가 그녀는 가녀린 여자의 몸이 아닌가. 그리고 괴인은 무슨 생각에선지 길도 없는 험한 숲 속으로 계속 발길을 옮겼다.
헐떡거리며 쫓아가던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체력과 근력을 높여 주는 보조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 이 괴인의 무의식 저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보호 기능을 건드렸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괴인은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보다 안전한 곳 을 찾아서.
“이런 망할! 왜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는 거야?”
마를린이 속도를 내어 뒤쫓자 괴인은 더욱더 빠르게 내달렸다. 체력과 근력을 높여 주는 보조마법까지 사용했음에도 더 이상 쫓아가기 힘들다는 것 을 깨달은 마를린은 비행마법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고차원적인 마법까지 사용하면 괴인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게 될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놓치게 될 게 뻔했으니까.
“에이비에이션!”
비행을 시작하면 괴인의 뒤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놀랍게도 괴인은 더욱더 속도를 내기 시 작했다. 나뭇가지들을 발판삼아 수십 미터 씩 도약을 해대는 데에는 마를린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 숨이 걸려 있었으니까.
얼마나 내달렸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일직선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던 괴인이 이리저리 방향을 비틀어댔고, 심지어는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거나 뛰 어오르는 놀라운 재주까지 부려댔다. 인간이 육체를 단련하면 저런 것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 다. 저 괴인이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게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런데 이때 그녀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멀리에서 괴인에 준할 정도의 강력한 마나 덩어리들이 움직이고 있는 걸 포착한 것이다. 숲 속에 서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괴인을 공중에서 추적해야 하다 보니 뷰 마나 포스를 계속 전개하고 있어야만 했던 덕분이다.
‘기사들?’
방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세브롱 요새에 주둔 중인 기사단 분견대일 것이다. 마를린은 저들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이어 마음을 바꿨다. 저자를 잡기 위해서 밝혀야 할 자신의 신분이나 그 이유를 뭐라 해야 할 것인가?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구명줄이 되어 줄 공로를 기사단 분견대가 꿀꺽해 버릴 우려가 있다. 이곳으로 좌천되어 온 분견대장이 중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뭔가 공로를 세울 거리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약간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지간하면 이런 식의 모험은 절대 하지 않을 마를린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므로, 마를린은 재빨리 자신은 물 론이고 괴인에게도 대 탐지마법을 걸었다. 다행히도 공격마법이 아니라서 그런지 괴인은 마를린의 마법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 덕분 에 그 둘은 월터를 찾아 맹렬한 속도로 북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던 기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동남쪽으로 파고들어 갈 수가 있었다.
기진맥진한 마를린이 더 이상은 못 쫒아가겠다고 생각하며 추격을 포기하려 할 무렵이었다. 괴인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풀썩 쓰러 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마를린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 괴인은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벌거벗은 괴인의 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 시뻘건 핏자국들은 전부 키메라들을 죽이면서 뒤집어쓴 것이었으니까.
이때, 마를린의 머릿속을 번쩍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마를린은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제법 잔머리를 굴리는군. 저런 얄팍한 수법에 넘어가서 내가 가까이 다가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이런 경우, 경험이 풍부한 전투마법사들은 충분하게 거리를 벌려 놓은 상태에서 장거리 공격마법으로 괴인을 제압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를린 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비행마법을 장기간 사용한 탓에 마나가 간당간당하기도 했고, 자신을 잡기 위해 잔꾀를 부리고 있다는 착각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을 내게 된 건 마를린이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연구형 마법사라는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방금 전에 키메라들을 상대로 그렇게 잔 혹한 학살을 자행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써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괴인을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마음을 먹은 것이 다.
괴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마를린은 일단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괴인이 갑자기 일어나 기습을 가하더라도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그리고는 자세히 괴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흐음, 가만히 보니까 겉모습이 생각보다 많이 어리게 생겼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게다가 그 잔혹한 손 속을 생각해 보면 절대 평범한 놈은 아닌데.’
사내의 몸 이곳저곳을 예리한 눈빛으로 살펴보던 마를린의 두 뺨이 어느 순간 발그레 물들었다. 걸치고 있던 옷이 키메라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벌거숭이가 된 사내의 하복부가 적나라하게 보인 것이다.
당황한 마를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지?”
사내가 산속을 이리저리 내달렸고, 자신은 무작정 그 뒤를 따라오기만 했기에 여기가 어딘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걱정하지 않 았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비행마법으로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고 연구소로 돌아가는 건 쉬웠으니까.
무엇보다 사내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서서히 긴장감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 거리라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온다 해도 자신 의 실력으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꼬르르륵~.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녀는 뭐 먹을 만한 게 없는지 품속을 뒤져 봤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급하게 침입자를 잡기 위해 뛰쳐나오다 보니 챙겨 온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배고파……”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하지만 이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저자가 언제 슬그머니 일어나서 종적을 감출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