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4권 8화 –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
골목 사이사이를 한참 돌아 안쪽의 으슥한 곳에 위치해 있는 건물의 작은 철문을 가리키며 루산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가 조직에서 의뢰를 받는 곳이에요.”
철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선 루산나는 박자에 맞춰 철문을 통통 두들겼다. 문을 열어 달라는 조직원들 간의 신호인 듯했다.
똑똑…, 똑…, 똑똑…….
곧이어 철문 위쪽에 네모난 작은 구멍이 열리며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의심어린 말투의 사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왔어.”
잠시 후, 빗장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철문의 한쪽 귀퉁이가 끼기긱 거리는 소음과 함께 열렸다. 커다란 짐을 들일 때는 문 전체를 열겠지만, 평상시에는 귀퉁이의 작은 쪽문을 통해 드나드는 모양이다.
“따라와요.”
루산나가 앞장서서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워낙 작았기에 여자 치고는 제법 큰 키인 루산나조차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들어가야 했다. 그 뒤 를 따라 들어가려던 라이는 뭔가 섬뜩한 느낌에 몸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러고 보니 이것과 똑같은 느낌을 얼마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게 뇌리 에 떠올랐다. 눈앞의 저 여자가 송곳으로 자신을 몰래 찌르려고 했을 때, 그때 그 느낌이었다.
기분이 찝찝해진 라이는 잠시 망설였다.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도 괜히 따라 들어갔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해요? 빨리 들어와요.”
루산나의 채근하는 목소리가 어둑한 철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라이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마냥 시간만 끌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오 크 새끼를 얻으려면 오크 굴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어차피 위조 신분증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마음을 굳힌 라이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냥 들어간 것은 아니다. 손을 뻗으며 상체를 앞쪽으로 빙 돌려 한 바퀴 데구루루 구르며 뛰쳐 들 어갔던 것이다.
예감을 믿고 미리 대비한 라이의 행동이 옳았다.
퍼퍽!
“이런 쥐새끼 같은 놈.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뒤쪽에서 짧은 파공성과 함께 바닥을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경악에 찬 사나운 외침소리도, 작은 철문을 이런 식으로 빠르게 굴러 들어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철문 뒤쪽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휘두른 몽둥이는 애꿎은 바닥만을 두들긴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 라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밝은 곳 에서 어두운 곳으로 갑자기 들어오다 보니 일순간이기는 했지만, 눈이 미처 적응을 하지 못해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식은땀이 흐르 는 순간이었다.
“이런 젠장…….”
위기감을 느낀 라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어 자세부터 잡았다. 그 순간, 또다시 예의 그 서늘한 느낌이 느껴졌다. 왼쪽 상단!
라이가 재빨리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마자 파공성(破空聲)과 함께 약한 바람이 느껴졌다. 방금 전에 자신이 서있던 곳을 몽둥이가 세차게 훑고 지나 간 것이다. 그 순간, 라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지금껏 받아 온 훈련에 따라 저 정도로 바람이 일 정도로 강하게 몽둥이를 휘 둘렀다면, 필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어 나가려는 본능을 애써 참으며 라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더 큰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희미하게나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건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내 둘. 그리고 복도 안쪽에서 이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오 고 있는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최소한 세 명은 될 듯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여기서 자칫 한 번만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살아서 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봐, 나는 싸우러 온게 아니……”
하지만 사내들은 라이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인데,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 는가? 일단 몽둥이로 제압한 뒤 사지를 꽁꽁 묶어 놓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사내들은 라이가 기가 죽어 꼬리를 말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물론 손에 움켜쥔 몽둥이를 가끔 허공에 휘둘러 위력 시위를 하면서.
그제서야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복도 안쪽에서 달려 나온 세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두 명은 라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골목길에서 기절해 자빠져 있는 동료들을 놔두고 허둥지둥 도망쳤던 바로 그 덩치가 컸던 놈과 자신을 송곳으로 찌르려고 했던 여자.
순간, 라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완벽하게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덩치 큰 놈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을 때려잡기 위한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다고 봐야 했다.
꿀꺽!
너무 긴장한 나머지 하마터면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부터 뽑아들 뻔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단검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여기서 피를 보게 되면 저들과의 협상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된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단 대화는 시도해 봐야 할 게 아니겠는가.
라이는 자신을 이곳으로 유인해 온 여인을 째려보며 욕지거리 몇 마디를 내뱉은 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이봐, 할 말이 있다. 내가 이곳에 온건 싸우자고 온게 아냐.”
그때 라이의 말을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앞으로 튀어나온 건 도망쳤었던 덩치가 큰 놈이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섯 명이 한꺼번에 포위하고 공 격할 수 있는 아주 유리한 상황. 그때의 치욕을 만회하려는 것인지 덩치 큰 사내는 더욱 험악한 인상으로 소리쳤다.
“시끄러우니 주둥아리 닥쳐. 얘들아, 저 새끼 조져버렷!”
라이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벽 쪽으로 움직여 등을 벽에 붙였다. 일단 등 뒤에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비록 주위를 둘러 싼 놈들이 다섯이나 되었지만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눈이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을 해 앞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내들이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골목길에서의 싸움으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이의 자신감을 북돋아 준 것에는 사내들의 실력이 워낙 형편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사실 라이가 몰라서 그렇지, 5급 용병패까지 받은 실력이라면 이런 변방의 깡패 따위 서너 명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라이의 경우 어 렸을 때부터 기사인 아버지에게서 체계적으로 검술 교육을 받았고, 용병대에서 실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았기에 같은 5급 용병패를 가진 용병들과는 그 수준이 다른 것이다. 거기에다가 집을 떠난 후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을 몇 번이고 겪다 보니 그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 다.
라이는 침착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먼저 문 옆에 서 있던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둘 간의 거리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순간 적으로 가까워지자 당황한 사내는 황급히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라이는 슬쩍 몸을 옆으로 틀며 몽둥이를 피한 뒤 사내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 다.
퍽!
“크윽!”
단 한 방에 사내가 철푸덕 주저앉아 버렸다. 쓰러진 사내가 떨어뜨린 몽둥이를 집어든 라이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여유가 넘쳤다. 이제는 확실 히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갔던 것이다. 그러자 덩치 큰 사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골목길에서 부하들이 지금처럼 어, 어 하다 묵사발이 났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날 데리고 온 저 여자가 그러더군. 이곳에서 위조 신분증을 구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난 손님인 셈인데, 다짜고짜 몽둥이부터 휘두르면 안 되지.”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여유로운 라이의 모습에 사내들은 기가 죽었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포위되어 있음에도 저렇 게 여유를 보이는 게 아니겠는가. 사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눈짓을 통해 뭔가를 얘기하는 듯하더니, 복도 안쪽에서 튀어나온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손님으로 온 거라면 두목님께 안내해 주겠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이제라도 대화가 통해서 좋군.”
그 말에 덩치 큰 놈이 사내 옆으로 재빨리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저놈을 진짜 두목님께로 데리고 가려는 겁니까?”
그러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손님으로 왔다면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덩치 큰 놈보다 사내가 조직에서의 신분이 더 높은 모양이다. 사내의 말에 아무 소리 못 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선 것을 보면 말이다.
두목에게 안내하겠다며 사내가 라이를 데려간 곳은 복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느 방 앞이었다. 사내는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그 러자 방 안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접니다, 두목, 손님이 찾아와서요.”
“들어와.”
방 안에는 사내 두 명이 앉아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둘의 나이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그중 상석(上席)에 앉아있는 사내의 인상이 훨씬 좋아 보 였다. 눈매는 다른 사내들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지만, 덥수룩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그의 날카로운 인상을 어느 정도 덮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은 라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불쾌하다는 듯한 어조로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누구냐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은 건, 예정대로라면 몽둥이에 맞아 기절한 놈을 꽁꽁 묶어서 끌고 와야 했는데 왜 저렇게 멀쩡한 상 태냐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올 수 있는 입구의 쪽문. 아주 간단한 함정이었지만, 부하들의 몽둥이를 피한 놈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설마…, 함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지금껏 꺼림칙한 놈들을 잡을 때만 함정을 발동시켰고, 붙잡은 뒤로는 예외 없이 죽여 땅속 깊숙이 묻어 버렸다. 함정을 뚫고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얼굴을 들이민 건 저놈이 처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저놈은 어떻게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무리 봐도 어려 보이는 게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단 하나.
조직 내에서 누군가 내통한 자가 있다는 뜻이리라. 과연 어떤 놈이 배신한 것일까? 그럴 만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도무지 짐작이 잘 안 된다는 것 이 문제다.
아니면 조직원들 중 누군가가 술김에 주둥아리를 터는 걸 옆에서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정보가 새어 나간 건 마찬가지.
두목은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현 상황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어린놈이기에 설혹 실력이 있다고 해 봐야 옆에 앉 아 있는 부두목과 녀석을 데리고 온 부하 셋이라면 루산나를 뺀다고 해도 녀석 하나쯤은 충분히 박살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목이 그렇게 자신할 만했다. 부두목은 꽤나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는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처럼 뒷골목을 박박 기며 검술을 익힌 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인재였다. 물론 임기응변이나 기습은 자신이 훨씬 뛰어났지만, 칼을 가지고 정면 대결을 하 는 데 있어서는 부두목이 한 수 위라 할 만했다. 때문에 부두목을 앞에 세워 놓고 자신이 뒤에서 받쳐 준다면 지금껏 무서운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 다.
일단 믿는 게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지는 게 사람의 심리. 그렇기에 라이가 들어오자마자 냅다 단검부터 집어던지는 대신, 찬찬히 상대를 관찰했다. 잠시 라이를 노려보던 두목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탁자 아래쪽에 위치해 있던 왼손을 탁자 위로 올려 양손을 깍지 끼며 턱을 괴었다. 부하들에게 지 금은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소, 손님?”
“당신이 두목이요?”
사내가 맞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는 곧바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용건을 밝히기에 앞서,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두목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물어보겠다는 거요?”
“왜 여자를 보내서 나를 해치려고 한 거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신네 조직과 원한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질문에 두목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놈과 얽힐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때, 그의 눈에 라 이가 입고 있는 망토 사이로 화려한 가죽갑옷이 보였다. 그 갑옷은 그가 루산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 순간, 두목은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 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핫, 내가 자네를 해칠 이유는 전혀 없지. 하지만 우리 귀염둥이는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라서 말이야. 헤질렌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근처에서 저 아이를 홀랑 털어간 게 자네 아닌가? 그 정도면 충분히 원한 관계가 성립되었을 거라고 생각되네만.”
다리 근처에서 홀랑 털어갔다는 말에 아차 싶었던 라이.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맞다. 어쩐지 약간 낯이 익다 싶더니……………
자신을 표독스런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는 미녀.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날 다리 앞에서 싸가지 없이 구는 것에 울컥한 그가 성질난 김에 가볍게 맛 좀 보여준다고 했던 게, 그녀가 기절해 버리면서……………
‘이런 젠장! 호랑이 굴속에 제발로 걸어 들어왔군. 이 일을 어떻게 하지?’
하지만 실실 웃고 있는 두목의 표정을 보니 아직까지는 기회가 있어 보였기에 라이는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변명부터 했다.
“저 여자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옷을 뺏은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산적을 만나 몽땅 털려 버렸기에…………….”
“정말 어이가 없군. 나도 산적질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여자의 옷까지 홀랑 벗겨서 입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저렇게 귀여운 여인의 옷 을 말이지.”
두목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자네도 어지간히 루산나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 옷들을 아직까지도 입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라이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설프게 말을 하다 얕잡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았으니까. 게다 가 빼앗은 옷을 당장이라도 돌려달라고 하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두목은 라이가 세상 경험이 부족한 초짜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 챘다. 어쩌면 가출한 돈 많은 귀족의 자제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절대 자신의 조직을 노리고 쳐들어 온 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두목은 긴장을 풀며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뒤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루산나를 협박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나 좀 들어 보지.”
“신분증을 사고 싶습니다. 국경 통과가 가능한 것으로.”
농노의 신분증은 안되고, 최소한 평민 이상의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도 범죄 기록이 없는 아주 깨끗한 것으로, 라이의 조건을 듣던 두목 의 표정이 더욱 누그러졌다.
“신분증을 구해 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적절한 비용만 지불할 수 있다면 말이지.”
“얼마면 되겠습니까?”
“10골드. 현찰이 없다면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계산해도 무방해.”
10골드라면 상당한 금액이다. 라이가 용병대에 있을 때의 월급이 1골드였으니, 무려 10개월 치 월급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구할 만큼 큰돈도 아니다. 강도질 몇 번만 성공한다면……………
“물건은 언제까지 준비해 줄 수 있습니까?”
“그게 시간이 좀 필요해. 가급적이면 자네와 용모가 흡사한 놈을 골라 신분증을 훔쳐야 위조하기 편하니까. 이해하겠나?”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두목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금은 신분증을 받을 때 일시불로 지불해도 되겠죠?”
그러자 두목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뭔 소리야? 최소 절반은 선불로 줘야 일을 시작하지. 이런 거래 처음 해? 널 어떻게 믿고 외상 거래를 하냔 말이야!”
퉁명스럽게 말을 하긴 했지만 두목은 내심 라이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적당한 놈으로 골라서 신분증 하나 훔치는 데 선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는 상대를 보니 이젠 확신까지 할 수 있었다. 이놈은 정말로 위조 신분증이 필요한 초짜라는 것을. “일을 맡기려면 우선 5골드. 돈이 없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 우리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말이지.”
“선불로 일단 3골드 먼저 주면 안 되……………”
라이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할 때, 뒤에 서 있던 루산나가 그걸 확 낚아챘다. 라이가 자신의 돈주머니로 돈을 지불하려 하자 분노를 이기 지 못한 루산나는 다른 손으로 라이의 뺨을 힘껏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라이가 손목을 잡아채자 루산나는 재빨리 라이의 정강이뼈를 차 버렸다. 딱 딱한 가죽 신발 앞부분에 뭘 박아 놨는지 라이는 순간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큭! 이런 망할 년이!”
라이가 루산나를 향해 손을 쓰기도 전에 두목이 소리쳤다.
“그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손님께 폭력을 쓰면 안 되지.”
두목의 말에 루산나가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그녀를 잡으려던 라이는 엉거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라이를 보며 두목이 차갑게 가라앉 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장난치나? 빼앗긴 우리 조직원의 돈으로 지금 내게 신분증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야? 큭큭, 이거 우리 조직이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 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안에 있던 조직원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으며 재빠르게 라이가 도망칠 수 없도록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는 언제든 공격 을 할 수 있도록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그건 당시 상황이 워낙 다급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분증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그런 거지, 절대 당신네 조 직을 우습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이는 갑자기 흉흉하게 바뀐 분위기에 당황해 하며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두목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쪽 바닥의 생리가 그래. 조직원이 당하면 반드시 몇 배로 그 댓가를 받아 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부하들은 떠나가고 조직을 운영하기 힘들어 지지. 게다가 어떤 이유로든 한 번이라도 얕보이게 되면 이빨을 들이밀고 잡아먹으려는 놈들 투성인 곳이 바로 여기야.”
결국 자신에게 대가를 받아 내겠다는 두목의 말에 라이는 천천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손을 옮겼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박살 내고 도망치면 된다.
입술을 질끈 깨문 라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짙은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일이 워낙 많았던 탓에 싸움이 벌어 지려 하자 자연스럽게 거친 살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런 라이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살기에 두목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지다 순식간에 다시 부드럽게 바뀌었다. 어리숙한 돈 많은 귀족 자제쯤으로 생각 했는데, 살기를 보니 그런 게 아닌 모양이라 판단한 것이다. 닳고 닳은 두목인지라 재빨리 이해득실을 계산한 뒤 라이를 향해 은근한 어조로 제안했 다.
“하지만 세상살이 그렇게 빡빡하게 살 수만은 없지 않나. 척 보니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내 밑에서 일 하게.”
“조직으로…, 들어오라는 겁니까?”
“그래, 그럼 전에 있었던 일쯤이야 조직원이 되기 전의 진통쯤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되지. 뭐, 사내들이야 이런 식으로 치고받으며 정을 두텁게 쌓아 가는 게 아닌가.”
라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거절하려 했지만 두목의 은근한 목소리가 좀 더 빨랐다.
“게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내 밑에서 일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반년…, 그래 반년 정도가 좋겠군. 그 정도면 부하들에게 내 체면도 설 것이고, 그 댓 가로 그럴듯한 신분증도 제공해 주지. 물론 일을 잘한다면 여비까지 두둑하게 챙길 수도 있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말한 두목은 갑자기 탁자 밑에 숨겨 뒀던 단검을 꺼내 탁자에 퍽 꽂아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피를 볼 수밖에.”
라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동안을 고민해야 했다.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문제는 어찌어찌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해 봐야 국경을 넘어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다른 조직을 통해 위조 신분증을 구하려 해도 10골드라는 큰돈이 필요한데, 그 돈 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신분증도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았고, 그렇다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기는 싫었다. 물론 급하면 할지도 모르겠지만 장물을 처리하는 루트도 모르고, 그러다 재수 없게 경비대에 잡히면 목이 잘려 망루에 걸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반년 정도라면, 게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비도 반드시 필요했다. 허구한 날 냇물로 배를 채우며 갈 수는 없었으니까.
잠시 갈등하긴 했지만, 라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잭입니다.”
대충 둘러댄 이름임에도 누구 하나 의문을 품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바닥까지 흘러올 정도라면 다들 숨기고 싶은 사연쯤이야 하나 가득일 테니 말이다.
그러자 두목은 마치 라이를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양쪽으로 활짝 벌리며 크게 웃었다.
“핫핫. 잘 생각했어, 잭. 우리 조직에 들어온 걸 환영하지. 일단 지금 쓸 돈이 하나도 없지?”
두목은 서랍 속에서 낡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우선은 이걸로 용돈이나 해. 나중에 일하는 거 봐서 잘하면 더 주도록 하지. 아, 잭은 잠시 밖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 너를 숙소로 안내해 줄 사람을 보내줄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라이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두목의 오른편에 앉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두목이 입을 열었다.
“정체도 모르는 놈을 부하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 위험하잖습니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네도 아까 놈의 살기를 느꼈잖나? 어설프게 잡으려 했다간 오히려 우리가 똥을 밟을 확률이 높아. 그러니 이게 좋아.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내게 맡기게.”
두목은 사내를 바라보며 혀를 가볍게 찼다.
“저런 애송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허둥대는 놈들을 부하라고 데리고 있으니, 쯧쯧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루크, 그렇게 생 각하지 않나?”
루크라 불린 사내는 두목의 비아냥거림에 얼굴이 붉게 변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녀석이 데리고 들어왔으니, 저놈은 네놈이 책임지도록 해.”
“예, 두목.”
“저놈 데리고 가서 먼저 갈아입을 만한 옷부터 챙겨 줘.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건장한 사내놈이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기는 좀 그렇군.”
그때 루산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내 옷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서 챙겨와 두목님께서 선물해 주신 갑옷에 흠집이 하나라도 났다면 내가 그놈을 찢어 죽여버릴 거야.”
“어허, 루산나, 좀 참아라. 네 복수는 내가 알아서 반드시 해 줄 테니까.”
부드러운 어조로 루산나를 다독거린 후, 두목은 루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녀석이 우리 조직에 들어왔다는 걸 다른 애들은 모르도록 해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두목의 뜻밖의 말에 루크는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이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예? 아, 예………….”
“한스 녀석의 구역에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디 잘 알고 있는 데 있냐?”
“부하들이 모르도록 하라고 하셨으니, 좀 낡긴 했습니다만 ‘돈벼락’이라는 여관이 괜찮겠습니다. 워낙 구석진 곳에 위치한 탓에 아는 사람들이나 찾아가는 그런 곳이니까요.”
“그거 좋군. 그럼 숙소는 그곳으로 해.”
“알겠습니다, 두목.”
“그럼 나가서 녀석을 그곳에 던져놓고 돌아와. 참, 주의할 건 우리 조직에 대한 얘기는 녀석에게 단 하나도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야. 알겠냐?”
루크는 고개를 숙인 뒤 방 밖으로 나가려다 뭔가 떠올랐다는 듯 황급히 두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그런데 녀석을 감시할 수 있도록 부하 하나 정도는 붙여 놔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녀석이 튈 우려도 있는지라……………”
“그건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녀석이 우리 조직에 들어왔다는 걸 그 누구도 모르도록 해야 하는 거야.”
두목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지만 루크는 그저 명령에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