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화 – 내가 해결할게!
내가 해결할게!
여왕벌의 둥지를 초토화시킨 라이가 그곳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를린은 겨우 지하로 들어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피를 좋아하는 변태적인 성향을 지녀서 범행 현장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려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쫓고 있는 사내에 대한 정보를 단 하나라도 더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지하로 숨어드는 건 그녀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쉬웠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에게 현혹마법을 걸어 아군으로 인식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으면서도 마를린은 혹시 지하실 안에 더 많은 경비병들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지하실 안에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쪽은 흡사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마냥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다.
“젠장, 이래서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녀는 먼저 탐색마법을 사용하여 지하에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마법으로 빛의 구슬을 꺼낼 수 있었다. 마법의 빛에 의지해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가는 마를린 계단 끝에는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문을 여는 순간 마를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그녀의 코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흡! 이…, 이게 뭐야?”
키메라 오크들을 사육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혈향 따위 그리 낯선 냄새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지독한 피 냄새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환기가 잘되지 않는 지하였기에 더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발치에 죽어 쓰러져 있는 사내 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허리가 두 토막이 나서 죽어 있었고, 그 주변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놀랍게도 사내들은 갑옷 채로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아니, 갑옷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검 역시 두 조각이 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법의 도움도 없이 검으로 이렇게 깨끗하게 잘라 버린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거야? 게다가 시체의 모양으로 봐서 한칼에 두 토막으로 낸 것 같은데.”
마법의 도움 없이 쇠로 쇠를 자를 수가 있다니. 그녀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그녀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신발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디뎌야 했기에 안으로 들어가는 속도는 아주 느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발견되는 시체의 형상은 더욱 처참했다. 입구 쪽에서 본 시체들이 깔끔하게 두세 조각 정도로 잘려 죽어있었다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수십 토막이 넘게 잘려져 있어 이게 과연 사람의 시체인지 아니면 정육점의 고기를 흩뿌려놓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면 시체가 아니라 잘 다져놓은 고깃덩어리라 봐도 무방했다.
질린 표정으로 시체 주위를 살펴보던 마를린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시체 주변의 벽이나 기둥까지도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건 라이가 꿈속에서 본 검술을 겉핥기로 대충 흉내만 내던 것에서 발전하여 점차 검술이 지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해 나간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마를린으로서는 라이가 만들어 놓은 검세(劍勢)의 흔적이 폭발적으로 커져가는 것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죽여야만 하는 걸까? 마법 한 방으로 수십 명쯤은 가볍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실력을 지닌 마를린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짓거리였다. 이건 사람이 아닌, 푸줏간의 고기를 그저 장난삼아 난도질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으읍…………….
너무 잔인한 장면에 속이 울렁거려 더 이상 자세히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를린은 코를 움켜쥐며 피 냄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입구 쪽의 시체들은 깔끔하게 두 토막으로 죽였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아예 곤죽을 내서 죽였어. 게다가 벽과 기둥에 남겨진 흔적으로 봤을 때 이건 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버렸어. 거의 근위기사급 정도의 실력· ·?’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에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 흔적이 사내가 점차 이성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판단했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그를 미쳐버리게 만든 원인이 어쩌면 피 냄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 전에 자신이 데리고 있던 키메라 오크들과 싸웠을 때도 그랬지 않았던가.
왠지 이지를 상실한 미친놈을 보는 듯한 그런 모습……………
“피 냄새만 맡으면 미친다고? 젠장, 가뜩이나 위험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이건 마치 오우거 입안에 내 대가리를 디밀고 있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하지만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마를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라이의 뒤를 미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대로 놈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장에게 보고를 해봐야 키메라들을 모두 잃은 것에 대한 질책과 무능하다는 낙인만 찍힐 게 뻔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소장이 놈에 대한 정체나 그 배후 세력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개고생을 하며 얻은 정보에 대한 공로를 소장이 독차지할 게 뻔하지 않겠는가.
샐러맨더 파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하겠다며 단신으로 달려나가려는 잭의 모습에 부두목인 박스터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렇게까지 단순할 줄이야……………
“원, 성질도 급하긴. 자네가 강한 건 알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뛰쳐나가서는 될 일도 안되는 법이라네. 잠시만 기다리게.”
부두목은 밖으로 나가 지나가던 조직원 하나를 불러 스팅과 알리를 불러달라고 지시를 내렸다. 건물의 크기가 작은 만큼, 둘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부두목.”
“그래. 화급을 요하는 일이다. 너희들은 두목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아무도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누군가 두목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두목께서는 일이 있어서 아무도 안에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해. 알겠나?”
뜬금없는 부두목의 지시에 스팅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두목께서 왜 그런 지시를 내리신 거죠?”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쩝, 알겠습니다. 부두목.”
심복 둘을 방 밖에 배치한 후에야 부두목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이긴 하지만 시간을 번 셈이니까. 그들에게 두목의 방문 앞을 지키게 한 후, 그는 잭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또 다른 조직원 하나를 불러 두목이 가장 신뢰하던 행동대장 넷에게 완전무장을 갖춘 뒤 자신에게 즉시 달려오라는 지시를 내려놨다.
자신의 방에 도착한 부두목은 탁자에 앉아 다란툼 지부장(支部長)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부터 썼다. 편지를 쓴 후 다시 꼼꼼히 훑어본 부두목은 그걸 잭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다란툼 지부장에게 전하면, 그가 알아서 자네를 안내해 줄 거야.”
“부두목은 내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두목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야.”
부두목이 다란툼에 가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잭에게 이것저것 얘기해 주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쩔그럭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를 안내해 줄 사람들이 도착한 모양이군.”
곧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부두목,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모두들 들어오게.”
문을 열고 곰 네 마리, 아니 곰처럼 덩치가 큰 사내 넷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우람한 덩치에 두터운 갑주로 완전무장까지 하고 있다 보니 얼핏 보면 곰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등빨이 좋은 사내들이었다.
“두목님의 명령이다. 너희 넷이 지금 긴히 해줄 일이 있어.”
완전무장을 하고 오라는 지시에 산적질 때문에 부른 거라고 짐작했었지만, 긴히 해줄 일이 있다는 부두목의 말에 네 사내의 안색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떤 일입니까?”
부두목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는 잭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잭과는 초면이지?”
“예.”
“잭을 코비 지부장에게 데려다 주는 게 자네들이 할 일이야. 그리고 상황이 괜찮아 잭의 임무를 도와줄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말이지.” 코비라면 다란툼 지부를 이끌고 있는 지부장의 이름이었다. 다란툼까지 가는 도중에 운이 나쁘면 떠돌이 몬스터들과 조우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왜 자신들에게 부두목이 무장을 갖추고 집합하라고 한 것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단순히 안내만 하는 일이라면 넷이나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사내 중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란툼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그건 자네들이 걱정할 거 없네. 모든 건 잭이 할 거고, 자네들은 그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조금만 도와주면 돼. 아마 넉넉잡고 일주일 내로 끝날 거야.”
“그렇다면 왜 우리들을 모두 부르신 겁니까? 하나나 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화급을 요하는 일이야. 잭을 얼마나 빨리 다란툼에 데리고 갈 수 있느냐에 따라 조직의 안위가 달려있을 정도로. 자네들의 실력을 믿기에 두목의 허락을 얻어 이렇게 소집한 걸세.”
실력을 믿는다는 말에 단순무식한 사내들의 안색이 환히 밝아진다.
“아, 그런 거라면 염려 놓으십쇼.”
“그런 일이라면 저희들이 적격입지요.”
“부탁하네. 이번 일이 잘 완수되면 내 술 한잔 거하게 사도록 함세.”
조장들이 잭을 데리고 희희낙락하며 밖으로 나가자 부두목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잭을 다란툼으로 보내는 것과 함께 조직 내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놈 넷을 없애버렸으니, 지금 당장 두목이 죽은 걸 누군가 알아차린다 해도 유혈사태가 벌어질 염려는
없으리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두목은 잭이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척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잭이 행동대장 넷과 함께 몽땅 다 샐러맨더 파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거창하게 유혈극을 벌인 끝에.
샐러맨더 파가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자신은 이곳에서 두목의 자리를 확고하게 안정시키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부두목은 황급히 두목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두목의 방 앞은 방금 전 그가 떠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스팅과 알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방문 앞에 꼿꼿이 서 있다가 부두목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얼른 인사를 했다.
부두목은 두목의 방 안으로 들어가며 스팅에게 지시했다.
“너는 가서 루크 녀석을 찾아 이리로 데려와. 두목께서 찾으신다고 하면 곧장 달려올 거야.”
루크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여왕벌의 둥지를 박살 낸 게 블루썬더에서 벌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놈이다. 만약 녀석이 두목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살기 위해 샐러맨더 파로 가서 밀고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기에 녀석이 알아채기 전에 재빨리 해치워 버릴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스팅이 루크를 데려오면 기습해 죽이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두목은 번개처럼 단검을 뽑아 쥐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들려온 건 루크가 아닌 스팅의 목소리였다.
“부두목, 접니다.”
“뭐야?”
루크 녀석을 데리고 왔다면 이렇게 말할 리 없다. 부두목의 말투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잔뜩 담겨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스팅은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두목이 탁자 위에 엎어져 있는 걸 보고는 찔끔했다. 그는 그제서야 부두목이 두목을 해치운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부두목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곧장 시선을 부두목에게로 옮기며 묻는다.
“녀석이 본부 밖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찾아서 데려올까요?”
스팅의 보고에 부두목은 성질이 뻗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놈들을 부하랍시고 믿고 일을 해야만 하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빨리 가서 데리고 와!”
“옛, 두목.”
스팅은 자신도 모르게 부두목에게 두목이라고 한 후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인상을 찌푸리던 부두목은 의자에 거칠게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권력 교체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반발 없이 끝내는 게 최고다.
폭력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에 권력 교체가 잦은데다, 이미 두목은 죽어 버린 상황. 그리고 두목의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으니 조직적인 반발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부두목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 둘이 있었다. 첫째가 루크고, 둘째가 두목의 애인이었던 루산나였다. 둘 다 없애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두목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순순히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며 샐러맨더 파 같은 거대조직에 투항해 밀고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었으니까.
“후환은 남기지 않는 게 좋겠지….
씨익 미소 짓는 부두목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달톤이라고 한다.”
주먹코 사내가 달톤, 가장 키 큰 사내가 랜, 짙은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털보가 해리슨, 뺨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는 피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두들 중간보스급 조장답게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는데다, 살인을 밥 먹듯 해온 자들 특유의 살기까지 은근히 풍기고 있다. 노련한 용병들에게서나 느껴지던 그런 기운. 그 때문에 라이는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히 자신들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인사를 하는 라이를 보며, 그들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린다.
“다란툼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냐?”
그들은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그런 곳에서 자란 애들은 한눈에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잭이라는 녀석은 아무리 봐도 뒷골목 출신 같지는 않아 보였고, 그렇다고 조직에 새로 입단한 애송이라고 단정 짓기도 이상했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 녀석을 부두목이 직접 자신들에게 명해 다란툼까지 데리고 가라고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제가 말하긴 그렇고…, 나중에 부두목께 직접 물어보시죠.”
라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두의 인상이 확 일그러진다.
“허어, 이것 봐라?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 맹랑한 놈일세……………..
어린놈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느꼈는지 달톤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상대를 향해 이죽거리며 시비를 거는 것도, 그러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미친놈처럼 날뛰는 것도 이들 중 제일 빠른 게 달톤이었다. 당장 라이의 멱살을 움켜쥐려는 달톤을 피터가 재빨리 말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인상으로 봤을 때, 넷 중에 피터가 제일 험악하고 성질 급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야! 애새끼 하나 잡는 건 뭐라 하지 않는데, 하고 싶으면 요새를 벗어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해. 이러다 자칫 이 사실이 부두목한테 알려지면 씨발, 그 잔소리를 우리까지 들어야 하잖아.”
피터의 말에 달톤은 더욱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선다.
“에잇 진짜 성질 같아서는 그냥 모가지를 뽑아 버리고 싶구만. 이봐, 애송이 내게 한 번만 더 버르장머리 없이 대꾸했다간 임무고 나발이고 묵사발을 낼 테니까 조심해! 알겠냐? 새꺄.”
라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물론 달톤의 위협에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여왕벌의 둥지라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이후, 라이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달톤과 싸우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다란툼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다. 현재 라이로서는 힘 조절을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