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5권 14화 – 그래, 바로 이 맛이야!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실험체를 인간으로 바꾼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로므렌은 생각했다. 몬스터로 실험할 때는 실험체가 제때 공급이 되지 않는 통에 실험이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걸 10개나 되는 실험조들이 나눠 써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노예시장에만 가도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 그것도 원하는 성별과 연령별로……………. 일차적으로 로므렌이 공급해 주길 원한 건 10대~20대 정도의 인간 200명. 남녀의 숫자는 동수인 게 좋겠지만, 수급이 힘들다면 약간의 차이 정도는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원한대로 남녀 정확히 100명씩이 공급되어 왔다.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이게 중요했다. 정해진 시간! 이 연구소에서 키메라 연구를 시작한 이래, 그가 원한 시간에 원하는 수량의 실험 재료를 공급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실험조들은 아직까지도 몬스터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트롤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다섯 개 조는 트롤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2개 조는 오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남은 2개 조는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장갑도마뱀 같은 몬스터의 연구로 전환했다. 이 모든 게 트롤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였다.

다른 실험조들이 실험체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로므렌의 조는 실험체를 아끼지 않고 마음껏 소모하며 떠오른 모든 아이디어들을 실험해 볼 수가 있었다.

“실험체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존율이 너무 낮은 건 큰 문제로군. 200명씩이나 투입했는데도 약물을 견뎌낸 게 겨우 넷밖에 안 되다니.., 쯧쯧.”

“이제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적정 투입량을 찾아낸다면 점차 좋아지겠죠. 몬스터와 달리 의사소통이 된다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건 몬스터에게서는 겪어 보지 못한 최고의 강점이었다. 투약 후의 기분이라든지, 아니면 통증이 진행되는 상태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으니까. 이제 겨우 200명밖에 희생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적정 투약량을 파악해 낸 것만 봐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10명씩 투약하며 양을 조절했었는데, 19번째 조에서 1명, 마지막인 20번째 조에서 3명을 생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일 실험체가 도착할 수 있도록 협조는 구해놨겠지?”

“예, 조장님.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이번에는 숫자를 좀 줄여서 50명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곧바로 소모할 것도 아닌데,

200명이나 받아 봐야 관리하기만 귀찮죠.”

“내 생각도 그래.”

“아마 조만간 좀 더 정확한 투약량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그러길 바래야겠지. 참, 실험체는 될 수 있으면 살집이 좋은 놈들로만 골라서 보내달라고 요청했겠지?”

“물론입니다, 조장님. 만약 살찐 수컷이 없다면 암컷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최대한 살집이 두둑한 것들로 말입니다.” 생존에 성공한 것은 암컷 3, 수컷 1개체였다. 그중 수컷은 20회차 실험에 투입되었던 자들 중에서 가장 비대했던 녀석이다. 그것을 보고 로므렌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변신할 때 엄청난 영양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몸속에 훨씬 더 많은 지방질을 비축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어쨌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에 실험을 해 보면 확실한 걸 알 수 있겠지.”

로므렌은 철창에 갇혀있는 실험체 넷을 바라봤다. 키메라로 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불완전한 개체들이다. 지금은 순종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도 모두의 몸이 눈에 띄게 홀쭉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급속한 속도로 근육질이 발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자 쪽에 비해, 남자 쪽이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근력은 매일 측정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조장님. 하루하루 급속도로 근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컷 쪽의 근력 증대가 아주 놀랍습니다.”

몬스터들은 원래 뛰어난 근육질의 신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 변화를 가늠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특히, 이곳으로 공급되어 오는 노예들은 1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정도 연령에만 해당된다면 최대한 저렴한 것들을 가려 뽑은 것들이다. 특출난 재능 따위는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용모도 형편없다. 사내들의 경우 잘 발달된 근육질의 일꾼노예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애당초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내의 근육질이 발달하는 모습이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이리라.

부하는 열기 어린 어조로 보고했지만, 자료를 훑어보는 로므렌의 표정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몬스터의 경이적인 근력과 비교한다면 인간의 근력 따위 증대되었다고 해 봐야 별 게 아니었으니까.

“식사량 조절도 하고 있겠지?”

“예. 지시하신 대로 각자 분량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근육질이 얼마나 발달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수컷에겐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먹이를 주도록 하게.”

“예.”

“지능에 대한 테스트 결과는 어떤가?”

“인간이었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듯했습니다만…, 워낙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인 만큼 한계가 있습니다. 뭘 아는 게 있어야지 교육을 시키던지 말든지 할 게 아니겠습니까. 글자를 아는 놈도 하나도 없는 형편이라…….”

로므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키메라에게 요구하는 지능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아니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저것들을 가지고 마법사로

교육시키려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경비대에 말해 둘 테니, 저것들에게 무기술을 가르쳐 보도록 하게. 제대로 된 무기술을 익히게 할 수만 있다면 오크 따위보다는 수십 배 더 도움이 되는 키메라가 될지도 몰라. 안 그런가?”

“일단 가르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로므렌은 철창에 들어있는 실험체들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키메라화에 성공시킨 건 겨우 넷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테스트해 본 결과로는 오크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재료비가 저렴하다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었다.

“큭큭큭, 소장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거야. 내 말이 옳았다는 걸.”

로므렌은 자신이 있었다. 우선 시작이 좋았다. 겨우 200명 정도의 노예를 희생한 것만으로도 투약량의 적정수준을 찾아내는 데 거의 성공했다. 조만간에 소장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는 용병단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튼튼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면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브로마네스야 아무리 능력 발휘를 해 봐야 수많은 검사들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얘기가 달랐다. 마법사가 득실거리는 마도왕국 내에서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어려운 일을 아르티어스는 단번에 해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려잡기 힘들다는 고블린을 대지마법으로 간단히 토벌해 버리면서…………… 증인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용병단 지휘부 쪽에서도 그

소문이 밖으로 퍼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효율을 보이고 있는 고블린 사냥에 그를 쓰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단장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찾아온 수석마법사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랄프 디겔 때문에 그럽니다.”

랄프 디겔, 즉 아르티어스 때문에 그런다는 말에 단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디겔이 중죄인일 거라는 데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었다. 설마, 유명세 때문에 하이에나가 꼬여 든 것인가?

“누가 디겔을 찾던가?”

“디겔을 찾는 통신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요.”

아르티어스를 찾는 통신은 이미 몇 건이나 들어왔었다. 물론 현상금 사냥꾼이나 정부기관에서 온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스카웃 제의를 위해 온 것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용병단에 하나 있다고 하니까 빼내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던가?”

“묘한 통신이 하나 들어와서 말입니다.”

“묘한 통신이라? 설마, 정부기관에서 일부러 떠보는…………?”

“그게 아니라 디겔의 스승이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와 통신을 하고 싶다면서요.”

스승이라는 말에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스승? 확실히 그건 색다른 패턴이군. 그래, 뭐라고 답해줬나?”

수석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얘길 한 게 당신이 네 번째라고 했습니다.”

단장은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핫핫핫, 네 번째라고? 그거 걸작이군.”

“예. 그런 식으로 핑계 대면서 디겔과 접촉해 스카웃 제의를 하려고 하는 놈이 한둘이 아니라면서 끊어 버렸죠.”

“잘 처리했군.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건가?”

“전체적인 반응으로 봤을 때, 아무래도 그가 진짜 스승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만약 또다시 연락이 온다면 디겔과 연결을 해 주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먼저 디겔에게 스승에게서 연락이 왔었다고 통보를 해 주는 게 좋을까요?”

그들은 랄프 디겔이 위장된 신분이라고 확신해 왔었다. 하지만 그걸 본인 입으로 직접 들은 게 아닌 만큼, 그가 진짜 랄프 디겔일 가능성도 있긴 했다. 비록 그게 눈곱만큼 적은 확률이긴 했지만…..

“흠~, 까다로운 문제로구먼.”

단장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석마법사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만나게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나게 해 주자고? 그러다가 아니면 어떻게 할 건데?”

“그걸 지켜보는 겁니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그건 뻔한 거다. 아마 스승이라며 나타난 마법사를 해치워 버리겠지. 입을 막는 데는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 마법사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저놈이 가증스럽게도 내 제자를 해치우고 제자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며 소문이라도 퍼뜨린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게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그는 중죄인의 몸이 아닌가.

수석마법사의 의도를 눈치챈 단장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그때 우리가 나서서 녀석을 포섭하자는 거로군.”

“예. 확실한 약점을 잡힌 만큼, 놈도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세. 그런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또다시 연락을 해올까?”

“그가 진짜 스승이라면 다시 연락을 해 올 겁니다. 아니면 이리로 직접 찾아오던지요.”

그렇게 말하며 수석마법사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혼자 산다는 게 외로울 법도 하지만, 라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심상수련을 한다고 앉으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거 같았는데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니, 주변에 함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게 하루가 지난 후의 몇 시간인지조차 몰랐다.

배가 고프면 밥을 지어 먹고, 앉아 있는 게 지겨우면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쐴 겸 몬스터 사냥을 했다. 전문적인 사냥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흔적을 쫓아가 사냥하지는 못하고, 무작정 내달리다가 우연히 눈에 띈 녀석을 해치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지붕 위를 내달리는 것에 비해서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산속을 내달리는 게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라이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공을 운용하여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저 멀리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정면충돌할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이건 완전히 목숨 내놓고 달려야 하겠네.”

며칠 지나지 않아 라이는 나무를 피하면서 지그재그로 달리지 않고, 나뭇가지들을 밟고 그 탄력을 이용하여 건너뛰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쪽이 좀 더 쉬워 보였기에 그렇게 한 것인데, 요령을 터득하고 나니 확실히 그쪽이 더 빠르면서도 편했다.

“룰루루~~”

라이는 꽤 기분이 좋았다.

하루하루 자신이 강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기준점이라는 게 없다 보니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아궁이 안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가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서 익고 있는 건 오크의 굵직한 팔뚝이었다. 오크 고기를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때는 소금도 치지 못하고 맹숭맹숭한 걸 그냥 씹어 먹었었는데, 지금은 소금은 물론이고 몇몇 향신료까지 가지고 있다. 향신료를 뿌리니 더욱 근사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라이는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자신을 절망의 나락에 떨어뜨렸던 게 바로 오크였던가. 강인한 근육으로 뭉쳐진 야만적인 육체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놈들은 혼자 다니지 않고 떼로 몰려다녔기에 더욱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아침, 백여 마리에 달하는 세력을 지닌 중간규모 집단을 라이 혼자서 박살을 내 버렸다. 우연히도 오크 특유의 악취를 맡게 된 그는 오랜만에 오크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한때 정말 맛있게 먹었었던 고기였으니까. 물론 기아선상에서 먹었던 것이었기에 기억에 왜곡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한두 마리만 죽이고, 재빨리 고기를 잘라내어 다른 오크들이 달려들기 전에 탈출하자는 생각으로 그는 오크 굴을 습격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오크가 잠잘 시간인 대낮에 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크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드는 오크떼! 저렇게 쏟아져 나온다면 도망칠 수도 없다.

라이는 죽지 않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예전과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크를 처치하는 게 너무 쉬웠던 것이다. 잠깐 싸웠을 뿐인데 그의 발치에는 오크 사체 20여 구가 나자빠져 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물론, 방해를 받는 건 라이보다 오크 쪽이 더 심했다. 동료의 시체 때문에 나자빠지는 놈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걸 보고 라이는 탈출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다고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들어와 이 고생을 한 이상, 약간이라도 먹거리를 가져가야 했다. 다리는 너무 무거울 거 같았기에 그걸 든 채 오크들을 따돌릴 자신이 없어, 팔 하나만 썽둥 썰어서는 재빨리 뒤로 반전해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뒤쫓는 오크들이 동료의 시체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거나 나자빠지는 것이 보였다. 계획대로라며 웃으려는 찰나, 라이는 그런 시체 따위 없어도 자신이 탈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한 그의 속도를 오크가 감히 따라오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간의 거리가 급격히 벌어지더니 곧이어 오크의 울부짖는 소리조차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 쉬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마음속 깊은 곳에 공포를 새겨 놨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들이었는데…………. 저런 놈들에게 붙잡혀서 그 오랜 세월 개고생을 했다는 게 허망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그때 맞붙어서 싸웠다면, 그 고생은 안했을…….’

곧이어 라이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강해진 것은 요 근래 꿈속의 검법을 익히기 시작한 다음이지 않은가.

‘그래, 맞아 강해졌다고 하지만 과거를 왜곡하면 안 되지. 그때 나는 약했었어. 그때 저항했었다면 그 녀석처럼 나도 죽었을 거야. 항복한 건 백번 잘한 일이었어. 암, 그렇고말고.’

어쨌거나 이렇게 쉽게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팔 하나가 아니라 다리 한 짝을 잘라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에구, 아까워. 하지만 뭐 어쩌겠어. 다음에 생각나면 그때는 조심해서 한 마리씩 잡아다가 먹어야지.”

오크는 생긴 것도 돼지 같았지만, 육질도 그와 비슷했다. 탄탄한 근육질의 생김새와는 달리 고기는 부드럽고 지방질이 풍부했다. 물론, 그건 예전의 기억이다. 그때 먹었던 오크 고기는 그랬었다는 말이다.

라이는 거처에 돌아오자마자 불을 피우고 오크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생긴 걸 보면 꼭 사람 팔을 굽는 것 같아서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풍겼지만, 그 맛을 생각하면 입안 가득 군침이 고인다.

“키야~, 구수하면서도 뭔가 톡 쏘는 듯한 이 냄새! 내가 이래서 오크 고기를 못 잊는다니깐.”

일반인의 경우 몬스터 고기 특유의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겠지만, 오히려 후각을 자극하는 그 냄새가 라이의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눠 먹을 사람도 없다 보니 라이는 겉 부분이 대충 익자마자 굽고 있던 통째로 주워들고 덥석 베어 물었다. 입가로 새나온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속은 하나도 익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게 또 기가 막힌 풍미를 안겨 줬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이거라고!”

배고팠던 그 시절. 오크 다리 하나를 붙잡고 여러 명이 핥고 빨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찾아낸 맛이다. 한 번 머릿속에 각인된 이상, 그때의 그 맛이 뇌리에서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참 허겁지겁 삼키고 있을 때였다. 라이는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크인가? 안 그래도 잘됐네. 팔 하나밖에 들고 오지 못한 게 아쉬웠었는데……………

장검은 문 옆에 걸려있었지만, 그는 검을 가지러 일어서지도 않았다. 방금 전 오크 굴을 헤집으며 그는 자신이 비약적으로 강해졌음을 깨달았다. 오크 한 마리쯤,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으로도 충분했다. 장검을 가지러 간다고 일어서느니, 그동안에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는 게 남는 길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자국. 상대는 곧바로 토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후각이 발달한 오크답게 이쪽의 위치를 냄새로 파악했음에 틀림없다. 라이 딴에는 알리에게 배운 대로 입구의 위장을 잘 해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한 마리만 온 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어쩌면 정찰병인지도 모르지.’

기척이 동굴 앞에 다다르자 라이는 느긋하게 허리춤의 단검을 빼 들었다. 곧이어 동굴 밖으로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드리워져 있는 가죽휘장이 위로 들리며 반들반들한 가죽덩어리 같은 게 쑥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날릴 뻔했지만, 저건 오크의 머리통이 아니라 알리가 쓰고 있던 가죽헬멧이었다.

라이는 급히 동작을 멈췄다. 엎드린 자세에서 일어서니 낯익은 얼굴이 드러난다. 역시 들어온 사람은 알리였다.

그는 라이가 사람 팔 같이 생긴 걸 들고 뜯어먹고 있는 걸 보고서는 놀라서 입을 쩍 벌린 채 한참동안 굳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모양도 색깔도 사람 팔과는 조금 다르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은 후에야 알리는 그게 사람 팔이 아니라 오크 팔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놀라움이 반감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어, 어째서 그런 걸 먹고 있는 거지? 식량은 충분했을 텐데…………”

라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 원래 이런 걸 좋아해서 말이야. 예전에 굶어 죽을 뻔했을 때, 오크를 잡아먹어 보니 그 맛이 기가 막히더란 말이지. 한 번 먹어 볼래?”

“고맙긴 하지만 사양하겠어. 그건 그렇고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

“뭔데?”

“네가 두목께 부탁했던 릴리라는 여자애를 찾았어.”

“잘됐네. 어디서 찾았어?”

“상점에서 일하고 있더라고. 내가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안내해 줄 수도 있어.”

“지금 바로 가자.”

“미친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겠답니다.”

부하의 보고에 박스터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크흐흣, 결국 미친개도 어쩔 수가 없군.”

지금 델카 요새 샐러맨더 지부장은 미친개 덤프였다. 미친개는 여왕벌 칼릭스에 비해서 관록이 몇 등급이나 떨어지는 인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라이로 인해 수뇌부가 붕괴된 샐러맨더 파로서는 지금 델카 요새 지부장 인선 따위에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던 것이다.

누가 두목이 되느냐를 두고 치열한 내전이 시작된 상태다. 그 때문에 여왕벌의 둥지를 초토화시킨 범인을 색출하겠다며 달려왔던 지원부대도 이미 다란툼으로 되돌아간 지 오래다.

그 와중에 박스터가 부하를 보내 미친개와 접촉을 시작했던 것이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고 하면서…………

미친개 쪽으로서도 그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대는 샐러맨더 파보다도 월등한 무력을 지니고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지 않았나. 이 바닥이라는 게 힘이 모든 것인 만큼, 거절은 곧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될 거라는 걸 미친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지금껏 수많은 적대세력을 분쇄하며 성장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미친개가 만났으면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쪽으로 부를까요?”

박스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부르는 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그쪽으로 가시는 것도 위험합니다.”

“블랙울프 파의 영역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는 게 좋겠군. 놈들도 대놓고 무력행사를 하기는 껄끄러운 위치니까 말이야.” “즉각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목님.”

이렇게 해서 박스터는 희희낙락하며 샐러맨더 파 델카 요새 지부장 미친개를 만나러 갔다.

고급 식당인 만큼 홀 내에 앉아있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손님은 3테이블, 총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저쪽 구석에 찰싹 붙어 앉은 채 핑크빛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남녀는 아무리 봐도 미친개의 부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쪽에 앉아 있는 돈 많은 상인들처럼 보이는 사내 둘도 아닌 것 같았다. 그중 하나는 비대하기 짝이 없어, 전혀 주먹패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뭐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저놈만 몰래 부하들을 끌어들인 건 아니니까. 함께 들어온 건 4명이지만, 식당 밖에는 열 명 이상의 부하들이 쫙 깔려 있다. 더군다나 잭에게도 알리를 보내 요새도시로 오게 해 놓은 상태다.

잭이 말한 릴리라는 여자애를 찾은 건 며칠 전이었지만, 그를 오늘 데리고 오라고 한 건 오늘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를 이 식당으로 데리고 오라고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산골짜기 동굴 속에 있는 것에 비한다면 만일의 경우에 충분히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너희 둘은 여기서 문을 감시하고 있어.”

이미 쌍방 간에 동석할 수 있는 부하의 숫자는 넷으로 한정하기로 협의해 놓은 상태다. 그는 부하 둘에게 문 옆에 서서 퇴로 확보를 하게 한 후, 남은 둘을 거느리고 미친개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친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내. 꽤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늘씬한 놈이었다. 그리고 미친개 뒤쪽에 서 있는 둘의 체구도 꽤 당당해 보였다. 그런데 특이한 건 저 셋의 모습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얼굴들이다.

하지만 박스터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저들도 이쪽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건 박스터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늦어서 미안하군.”

의자에 앉는 순간 박스터는 미친개와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고, 그 순간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미친개의 얼굴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울긋불긋 떡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미친개의 옆에 앉아있던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샐러맨더를 박살 내 놓은 게 네놈이냐?”

미친개의 얼굴을 본 것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상대의 말은 박스터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제3자적 입장에서 ‘샐러맨더’를 논할 수가 있다니. 저자의 정체가 뭐기에?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박스터를 보며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마인 테귤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묵향> 3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