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1화 –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이런 날강도 같은 놈!

나이는 대략 마흔 정도 되었을까? 단정하게 콧수염을 다듬은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매부리코와 얄팍한 입술 탓에 왠지 야비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으니, 왠지 자신을 깔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박스터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미친개가 누구던가? 샐러맨더 파의 돌격대장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적진을 향해 앞장서 달려가는 단순 무식한 놈이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또 다른 싸움 상대를 찾아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그 모습에, 오죽했으면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들조차 미친개라며 그를 경원시했겠는가.

그런 그가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 찌그러져 앉아있다니. 게다가 미친개의 얼굴은 얼마나 처맞았는지 온통

울긋불긋했다.

미친개를 저렇게 만든 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 그런 위험한 사내의 인상이 좀 더럽고 야비하다는 느낌 하나만으로 성질을 부릴 만큼 박스터가 음지에서 구른 시간이 적지는 않았다. 그저 양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팍 숙였을 뿐이다. 박스터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문득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예상치도 못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자네… 혹시 마인 테귤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약간 찢어지는 음색의 상당히 껄끄러운 목소리였기에 귀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박스터는 그런 사소한 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사내가 물은 마인 테귤러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마인 테귤러? 이 바닥에 그런 놈이 있었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설마 자신들의 패거리에게 산적질 당했던 마인 테귤러라는 놈이 저 사내에게 복수라도 의뢰한 것일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자신들이 지금껏 털어먹은 밀수업자들은 그야말로 잔챙이들뿐이었으니까. 즉, 뒤탈이 없을 만한 놈들만 골라서 털어먹었다는 소리다.

긴장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박스터를 보는 사내의 얼굴에 점점 비릿한 조소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뒤끝 더럽기로 소문난 그 개자식의 성질을 건드려놓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말이지?”

사내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박스터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그러자 사내는 안쓰럽다는 듯 혀까지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하긴 이해는 해. 이런 촌구석에까지 마인 테귤러라는 악명이 알려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노예상인 놈이 제아무리 유명해져 봤자, 그쪽 계열 놈들만 인정하고 알아주겠지. 쓰레기 같은 놈을 내가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군.”

테귤러란 사람을 가차 없이 쓰레기라고 비하하는 사내. 그 말이 박스터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생판 들어본 적도 없는 쓰레기를 왜 자신에게 묻는단 말인가?

“아, 찾는 분이 노예상인이었습니까? 하지만 저는 테귤러라는 분을 알지도, 본 적도 없는데……….”

박스터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렸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또다시 사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놈이 하는 짓이 거의 다 쓰레기 짓이긴 한데, 유일하게 쓸 만한 재주를 하나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게 뭐냐 하면, 나이 어린 여자 노예들에게 뭘 가르치는 건 정말 잘해. 그중에서도 잠자리 훈련은 정말 끝내줘. 거시기 달린 사내라면 모두 이거

좋아하잖아?”

사내는 성행위를 뜻하는 손동작을 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사내가 발산하고 있는 공포 분위기에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은 박스터로서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몸에 좋다는 건 잔뜩 처먹은 놈들이 그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년에게 걸리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헤어 나올 수가 없지. 문제는 그놈이 그렇게 자신이 교육시킨 노예들을 이용해 각계각층의 높으신 분들을 포섭해 놨다는 사실이야. 한번 생각해 봐. 그놈의 사주를 받은 노예가 잠자리에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자신의 주인에게 테귤러의 부탁을 좀 들어주라고 애교를 떨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사내의 말을 들을수록 박스터는 테귤러라는 놈이 가진 재능이 무척 부러웠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허접한 놈들이나 털어먹으며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게 아닌, 음지의 지배자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을 테니까.

공손한 태도로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박스터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의 말을 듣다 보니 테귤러라는 놈이 어떤 잡놈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잡놈의 얘기를 왜 자신에게 한단 말인가?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테귤러라는 분을 알지도, 본 적도 없다니까요.”

그제야 사내는 박스터의 말에 비릿하게 웃으며 반응했다.

“알아. 하지만 연관이 있어. 그러니 내가 널 이렇게 친히 찾아온 거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인 테귤러라는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노예 상인이라고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요.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건 아니신지…….?”

다급하게 박스터가 그런 사람은 정말 모른다며 고개를 내젓자 사내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다 갑자기 딱딱한 어조로 바꿔 이죽거렸다. “너야 그놈을 만나본 적도, 알지도 못하겠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계집장사를 하고 있던 칼릭스라는 잡놈이 테귤러와 오랫동안 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야. 이제 이해가 가냐? 내가 왜 너 같은 잡놈을 손봐주려고 이 망할 시골구석까지 왕림하게 된 건지?” 이 눈앞의 무시무시한 사내가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박스터는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젠 죽었구나 싶어 삶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박스터에게 사내가 마치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나?”

비릿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내의 눈빛에 박스터는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광기도, 살기도 아닌 그저 벌레를 보는 듯한 무심한 그의 눈빛에 오히려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산적질을 하기 위해 산맥 안을 뛰어다니다 보면 뜻하지 않게 몬스터와 맞부딪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조심해서 움직인다고는 하나

아차 하면 몬스터와 조우할 만큼 산맥 안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렸다.

그중에는 흉폭하기로 유명한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사내만큼의 공포심을 그에게 안겨주지는 못했었다.

도대체 저 사내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삶을 체념하려던 박스터는 뭔가 본능을 간질거리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정도 되는 실력자가 설마 자신의 방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헛소리를 주절거린다? 이건 당연히 말이 안된다. 그냥 손 한 번

휘두르면 자신의 목이 뎅겅 날아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박스터는 사력을 다해 사내에게 물었다.

“호…, 혹시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흐흐, 역시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놈답게 눈치 하나는 무척 빠르군. 사실 나로서는 네놈 머리를 잘라 테귤러에게 던져주는 쪽이 훨씬 편하긴 하지만, 테귤러가 원하는 건 네놈의 쓸모없는 머리통이 아니라 이거거든.”

말을 하던 사내는 손가락을 오므려 동그랗게 만든 뒤 박스터를 향해 잘 보라는 듯 흔들기 시작했다. 돈을 원한다는 손짓이었다. 그 순간 박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어, 얼마를 드리면 절 살려주시겠습니까?”

“삼천 골드.”

심드렁하게 내뱉는 사내의 대답에 박스터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사, 삼천 골드요!?”

“허~ 겨우 삼천 골드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나? 설마 자네의 목숨이 그 정도 가치도 없는 싸구려라는 말은 아니겠지? 만약 그 돈조차 지불하지 못할 싸구려 목숨이라면 난 절대 참지 못할 걸세. 내가 사는 세상에 쓰레기들이 득시글거리는 걸 두고 볼 만큼 내 성격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라서 말이야.”

히죽거리며 말하던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미친개의 어깨를 몇 차례 다독여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형제에게 들으니 자네가 그동안 꿍쳐놓은 재산이 꽤나 두둑하다고 하던데…………”

사실, 테귤러가 배상받기를 원했던 금액은 1천 골드였다.

1골드 금화가 3.5g의 순금으로 제작되는 만큼, 1천 골드라면 순금으로만 따져도 거의 3.5kg이나 되는 양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사내가 이곳에 와서 보니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짙게 돈 냄새가 풍겼던 건 확실히 의외였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 금덩어리를 발견한 듯한 기분. 그렇기에 사내는 번거로웠지만, 이 시골 촌놈들에게 자신의 수고비용을 청구하려는 것이다.

명분은 당연히 네놈들 때문에 내가 이런 촌구석까지 와야 했으니, 그 출장비를 목 위의 물건 대신 현금으로 지불해도 괜찮다는 거였고.

사내는 벌써 미친개로부터 5천 골드 상당을 뜯어낸 상태였다.

지역 유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놈들이라 그런지 자금이 생각보다 풍부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수금을 위해 미친개를 족쳤던 사내는 아주 솔깃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허우대만 멀쩡한 깡패놈이 그동안 꼬불쳐 놓은 재산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말이다.

박스터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내가 원하는 걸 다 주고라도 살고 싶었다. 그러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튈 생각이었으니까. 그만큼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이 정도의 실력자를 난생처음 만나봤기도 했지만,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는 지금껏 만났던 깡패들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처…, 천 골드 정도라면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수 있습니다만, 삼천 골드는 정말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저희 파의 본거지와 상점이 강탈당했거든요. 보관하고 있던 현물이고 돈이고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마침, 저희 본거지와 상점을 탈탈 털어

간 당사자가 여기 앉아있으니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지금 당장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내는 피식 웃은 뒤 미친개를 바라보며 머리를 툭툭 치다 박스터에게 이죽거리듯 말했다.

“호오, 설마하니 날 어리숙한 멍청이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가는 그 착각의 댓가는 아주 비싸게 치러야 할 거야. 여기 이 형제가 내게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성의 표시를 할 때 그러더군. 네놈의 상점과 본거지에 쳐들어갔을 때, 고가의 물품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고 말이야. 물론, 처리하기 짜증 날 정도로 싸구려 물품들은 많았지만 말이지. 자, 이번에는 잘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할 거야. 내 인내심은 그리 깊지 않거든. 빼돌린 물건들은 어디에 꿍쳐뒀지?”

사내의 말에 박스터는 입술을 질끈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가의 물품들은 습격이 있기 전 당연히 은밀한 곳으로 빼돌려 놓았다. 아니, 아예 상점에는 진열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비싼 물품들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제값 받고 팔기가 아주 힘들다. 특히나 이런 시골구석에서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이곳이 밀수업자들이 득실거리는 주 통로였기에 고가의 물품들을 팔겠다고 내놓는 건 자신들이 산적질 한 거라는 걸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그때 털린 진짜 주인이 「이건 내 거야」 하면서 나타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만약 사내가 이런 사정을 몰랐다면 당연히 시치미를 뗐을 것이다. 그건 박스터가 가진 마지막 보루였으니까.

하지만 미친개가 이미 모든 걸 불었는데 없다고 우겨봐야 자칫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음을 짐작한 박스터는 허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순순히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아직 팔아치우지 않고 보관 중인 게 몇 개 있습니다만,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좋은 물건을 내놔봐야 사겠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게 문제죠. 그렇기에 큰 영지에서 팔리는 가격의 절반만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잘 받는 건데, 제가 보관 중인 물건들을 다 팔아봐야 말씀하신 그 돈은 도저히 지불하기 힘듭니다.”

사내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 그럼 이렇게 하세. 자네는 보관 중인 물건들을 가져오기만 해. 그럼 내가 큰 영지에서 팔리는 가격으로 셈을 해서 받아주지. 이렇게까지 내가 자네를 배려해 주는데 날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즉, 현금만이 아니라 현물도 받아준다는 얘기다.

‘이,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적당한 수준이라면 목숨값이라고 자위하며 내놓겠지만 이건 아예 조직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먹겠다는 소리였기에 박스터는 하마터면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물론 얼굴에 온통 검붉은 멍투성이가 되어 쭈그리고 앉아있는 미친개를 보고 힘겹게 참아야 했지만,

박스터는 내심 이를 갈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잭이었다. 회견장으로 오기 전에 잭에게 이곳으로 뒤따라오라 시킨 게 떠오른 것이다.

물론 저 무시무시한 사내를 상대로 잭이 승리를 거둔다는 헛된 희망을 꿈꾸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튈 수 있는 시간 정도만 벌 수 있도록 사내의 발목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튀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박스터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후, 억지로 미소를 지은 뒤 입을 열었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가격이 어느 정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관하고 있던 물품들 모두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씨익 웃었다.

박스터는 그런 사내의 표정을 보자 하마터면 발작할 뻔했다. 자신을 마치 하찮은 벌레로 보는 듯한 사내의 표정이 너무나도

얄미웠으니까.

“흐흐, 상황 판단이 무척 빠른 형제군. 아주 마음에 들어.”

사내의 칭찬에 박스터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설마 웃는 낯에 침 뱉을까 싶어서였다.

만년 2인자에서 이제야 겨우 보스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해보고 싶은 건 아직 하나도 해보지도 못하고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 협상장에 보스인 자신이 직접 찾아온 게 가장 큰 실수였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부하를 보냈을 텐데

후회로 범벅이 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박스터는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박스터는 사내에게 양해를 구한 후,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힐끔 사내의 눈치를 살핀 후, 부하의 귀에 대고 낮고 빠른 어조로 속삭였다.

“지금쯤 알리가 잭을 데리고 이 근처까지 왔을 거다. 잭에게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도움을 청해라. 상대가 무시무시한 실력자니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와야 할 거라고 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다 구해주고, 뒤에서 우리 대화 내용을 다 들었을 것 아니야?” 부하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박스터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창고에서 저 치가 원하는 거 몽땅 다 가져와.”

“그럼 창고 안의 물품들 거의 다 가져와야 할 텐데요?”

“어쩔 수 없잖아.”

잭이 패한다면 그때는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잭과 사내가 싸울 때 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자칫 일이 어그러져 붙잡히게 되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게 될 확률이 컸다. 일단 살아있어야 조직을 재건하든 노후를 설계하든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아까워도 사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엉뚱한 생각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어서, 서둘러!”

“옛.”

부하들이 밖으로 뛰쳐나가자 박스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샐러맨더 파의 습격에 대비해 물건들을 분산해서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만큼, 전부 가져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사내는 느긋한 표정으로 양손을 활짝 벌리며 이죽거렸다.

“흐흐, 내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만약 헛짓거리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렇게 해도 돼. 오랜만에 싱싱한 사냥감을 쫓는 것도 무척 기대되니까 말이야. 어차피 테귤러에게는 네놈의 머리통만 던져줘도 좋아할 테니까.”

자신을 사냥하겠노라 태연히 말하는 사내에게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아 일순 진저리를 친 박스터는 곧바로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였다.

“기다리기 지루하실 텐데 그동안 술이나 한잔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마침 이곳에 상당히 좋은 술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박스터의 제안에 사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금방 반응했다. 좋은 술이라는 말에 솔깃한 모양이다.

“그럴까?”

박스터의 짐작대로 사내는 자신을 아예 적으로 취급하지도 않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간 부하들이 조직원들을 모두 규합해

기습하러 온다 할지라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것이리라.

박스터는 내심 잭을 불러들이는 게 잘못된 결정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잭이 눈앞의 이 무시무시한 사내를 처치해 줄 거라고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도망치거나, 혹시라도 사내가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쪽수로 밀어붙여 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뒷골목에서 쪽수에 장사가 없다는 건 거의 진리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얼마든지 헛짓거리를 해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사내의 모습을 보니 미친개를 개박살 낼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미친개가 쥐 죽은 듯 꼬리를 말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조직의 살림살이를 다 거덜 내더라도 목숨만은 지키자 결심한 박스터는 애써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점원 아가씨를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이봐, 여기 지배인 불러. 그리고 이 집에서 가장 비싸고 좋다는 술은 싸그리 다 가져와 거, 귀족들이나 마신다는 술 있잖나? 참, 안주도 최고급으로 신경 쓰고 이곳 에이스 아가씨들까지 모두 다 불러!”

어차피 뺏길 돈, 박스터가 살아남기 위해 배짱 좋게 크게 지르자, 사내는 그런 박스터의 아부성 호기가 제법 마음에 든 듯 크게 흡족해했다.

“호오, 자네 제법 눈치가 있군. 여기 이 형제는 대가리에 근육만 들어차 있어서 눈치 없이 내게 까불다 이렇게 됐지. 그나마 죽이려고 마음먹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이러고 있는 거지만 말이야.”

사내는 그러면서 미친개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미친개는 사내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얻어맞았는지 진저리를 치며 사내의 손을 피해 몸을 한껏 움츠렸다.

미친개의 그런 모습에서 자신 역시 저럴 수 있다는 공포에 박스터는 얼른 두 손을 열심히 비비며 입을 놀려댔다.

“흐흐,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비록 이곳이 촌구석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밀수업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통로들 중 하나이기에 제법 풍요로운 편입지요. 그리고 그런 밀수업자들이 위에 상납하기 위해 접대하는 장소로 쓰이는 가게다 보니 그럭저럭 어르신의 입맛을 더럽히지는 않을 겁니다.”

“흠, 제법 혓바닥이 잘 굴러가는 친구로군. 아주 마음에 들어. 자네, 이런 촌동네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친구인 거 같은데, 내 밑으로 와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박스터는 아부성 짙은 미소를 한껏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같으신 훌륭한 분 밑에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저로서도 영광이죠. 하지만 저도 작지만 나름 조직의 보스인데 형님이 어디의 누구신지 정도는 알아야 부하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닦아 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 옮기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닌 만큼, 아무리 부하들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어느새 사내에 대한 호칭이 어르신에서 「형님」으로 슬그머니 바뀌어 있었다. 그건 박스터가 까다롭기 짝이 없던 제리코 두목 밑에서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삶의 지혜이자 재능이었을 것이다.

“허긴, 아무리 허접한 놈들이라도 조직을 이루려면 그런 놈들이 필요하긴 하지. 내 이름은 아론 워커라고 하네.”

미녀들에 둘러싸여 고급술을 마시는 것에 대단히 만족했는지 아론 워커는 흔쾌히 박스터의 말에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 주었다.

박스터는 그 후로도 계속 술을 권하며 사내의 본명뿐만이 아니라, 그의 뒷배경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